
376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30일)
1
오늘 아침에 읽는 시는 튀르키예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것이다. 산다는 것은 진정한 여행을 위해 희망을 품고 그 순간을 준하는 거다. 아직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그까지 이뤄진 것, 여태까지 겪은 것들은 예고편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삶이 더 경건해지고, 앞 날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 솟아오른다. 조국에서 추방되어 평생을 이면의 불꽃으로 살아간 혁명적인 시인이 스스로를 충전 시킨 에너지의 발전소가 아니었을까? ‘찌는 무더위’ 는 가마솥 안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푹푹 쪄내는 것 같다는 뜻이다. 이 때 에어컨만 사용하다 보면 오히려 몸의 리듬이 깨진다. 무더위를 이기는 비결의 하나는 ‘희망’ 이다. "보름만 지나면"하며 희망을 갖고 견디는 것이다. 사실 말복만 지나면 새벽엔 이불이 필요하다. '찌는 무더위'이지만, 힘을 주는 좋은 시를 읽으며 오늘도 충만하게 보낸다.
진정한 여행/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 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 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2
<<주역>> 은 주인공인 군자가 인생의 64가지 여행길을 답파해 가는 구조를 취한다. 여기서 군자는 자신에게 하늘이 부여한 명(命)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군자는 길흉의 질곡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헤쳐 나간다. 반면 소인은 자신에 명(命)이 있음을 알지 못하기에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안위에만 집착하는 사람이다.
군자는 "방행이불류, 낙천지명고 불우(芳行而不流, 樂天知命故 不憂)"라 했다. 해석하면, '곁에서 나란히 행하되 휩쓸리지 않는데, 하늘을 즐기고 명을 아는 고로 우려하지 않는다'가 된다. 군자가 삶의 여행길에서 취할 기본적인 태도가 "다른 사람들 곁에서 나란히 행하여도 휩쓸리지 않는다' 했다. 우선 공동체 안에서 주변 사람들과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면이 있어도 우선은 그들과 보조를 맞추어 '곁에 나란히 행'하면서도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자신을 지키라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안위에만 집착하는 소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합(영합, 자신의 소신이나 원칙 없이, 사사로운 이익을 얻으려고 남의 비위나 세상의 풍조에 억지로 맞추는 태도)해서 마냥 편안한 반면, 도리어 군자는 편안치 못하다. 그러나 군자는 명(命)을 알기에, 낙천(樂天), 하늘의 명을 즐긴다 그러므로 우려하지 않는다. 하늘이 나를 이 땅에 내실 때 나에게 바라는 일이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고, 성스러운 의무이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 낼 수 있다"(니체). 그래 군자는 흉한 일이 벌어질까 우려하지 않는다. 혹시 실제로 흉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군자는 성스러운 명(命)이 있기에 피하지 않는 것이다.
요약하면, 군자는 주변 흐름을 쉽사리 거스름으로써 흉운(흉운)을 자초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명을(命) 이루기 위해 써야 할 자신의 힘을 공연히 낭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군자가 취하는 태도가 '낙천', 즉 하늘을 즐기는 것이다. 낙천은 말 그대로 하면 '하늘을 낙으로 삼는다'는 거다.
3
<<주역>>을 읽다 보면, 군자는 '가고자 하는 바가 있다("有攸往, 유유왕"). 군자가 자신의 천명(천명)을 인식하고 그 명(命)에 부응하는 삶을 산다면 자신의 삶에서 마주치는 구체적 상황에서 무언가 실현하고자 하는 바가 생긴다. 천명이 구체적 상황에서 발현되는 것이 군자의 '가고자 하는 바'이다. 예를 들어 군자가 가슴에 품은 뜻, 꿈에 그리는 이상, 삶의 목적 등이다. <<주역>>은 이처럼 사람에게 가고자 하는 바가 있어야 여러 이로운 일이 생긴다고 말한다.
군자는 흉운이 생겨도 두려워 전전긍긍하지 않으며 끌려 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운에 고삐를 쓰워 끌고 다닌다. 운에 끌려 다니지 않으면 운명을 끌고 다닐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운이 도리어 군자에게 굴복한다. 가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야 하늘도 돕는다. 제44괘인 <천풍 구> 괘의 '구오' <소상전>에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있음은 군자의 뜻이 명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원문은 "有隕自天(유운자천)은 志不舍命也(지불사명야)일새라" 이다. '하늘로부터 떨어짐이 있음은 뜻이 명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다. 운이 좋아지는 비결로 천명을 따르면 운이 좋아진다. 명(命)을 이루라고 주어진 힘이 운이며, 하늘이 나를 낳은 목적이 명(命)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역>>은 군자가 힘든 상황에서도 명(命)을 버리지 않으면 하늘이 음으로 양으로 돕는데, 심지어 하늘에서 뭐가 뚝 떨어지기라도 해서 군자를 돕는다고 말한다.
군자가 가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세우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 유능한 인재가 충성을 보인다.
▪ 많은 이와 폭넓은 연대가 가능하다.
▪ 백성들의 존경이 따라 군자를 왕으로 추대하기도 한다.
운에 개의치 않고 천명을 따르고자 하는 군자의 진정성이 운을 굴복 시키는 것이다. 유유왕(有攸往), 가고자 하는 바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 가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길흉의 질곡을 뚫고서 자신의 삶을 운전해 갈 수 있다. 그래야 삶이 표류하지 않을 수 있다. 하늘의 도움으로 여러 이로움도 따른다. 사람이 자신의 명을 알지 못하면 자기 삶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없다. <<주역>에 의하면, 간절한 염원(有攸往, 유유왕, 가고자 하는 바)이 있기에 이를 실현하고자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람이 군자이다. 그 노력이 이 세상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역경>>은 군자를 위한 조언을 담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 조언은 간절한 염원이 잘못 흘러갈 경우 도리어 반작용을 부를 수 있다고 말하니 유의할 일이다.
<<주역>>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가득 차는 것'이다. 얼마나 싫어하는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싫어하며, 귀신까지도 해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온 우주가 나서서 가득 찬 것을 이지러뜨리고 만다'는 것이다. <<주역>>의 제15괘인 <지산 겸> 괘의 <단전>을 공유한다. 천천히 읽으면 흥미롭다. 왜 우리는 가득 채우려 하기보다 비우는 것이 중요한 지 통찰을 준다.
"天道(천도)는 虧盈而益謙(휴영이익겸)하고
地道(지도)는 變盈而流謙(변영이유겸)하고,
鬼神(귀신)은 害盈而福謙(해영이복겸)하고
人道(인도)는 惡盈而好謙(오영이호겸)하나니,
謙(겸)은 尊而光(존이광)하고
卑而不可踰(비이불가유)니
君子之終也(군자지종야)라" 이다.
번역하면,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뜨리고 겸허한 것을 이롭게 하고,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고 겸허한 쪽으로 흐르며,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하고 겸허한 것에 복을 주며,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하며 겸허한 것을 좋아하며,
겸(謙)은 높고 빛나고 낮아도 가히 넘지 못하니
군자의 마침이다."
역(易) 전문가인 강기진은 자신의 책 <<오십에 읽는 주역>>에서 정약용의 <혼자 웃다(獨笑, 독소)>를 통해 위의 내용이 우리 삶에서 직접 관찰될 수 있도록 소개하였다.
獨笑(독소, 혼자 웃다)/다산 정약용
有粟無人食(유속무인식): 양식 있는 집은 먹을 식구가 없고,
多男必患飢(다남필환기): 자식 많은 집은 굶주림이 걱정이네
達官必憃愚(달관필창우): 높은 벼슬 아치는 영락없이 바보가 되기 마련이고
才者無所施(재자무소시): 재능 있는 사람은 발휘할 자리가 없네
家室少完福(가실소완복): 모든 복을 두루 갖춘 집은 드물고
至道常陵遲(지도상능지): 지극한 도리는 언제나 능멸당한다.
翁嗇子每蕩(옹색자매탕): 아비가 아끼면 자식 놈이 매번 탕진하고
婦慧郎必癡(부혜낭필치): 아내가 슬기로우면 남편은 어리석네
月滿頻値雲(월만빈치운): 달이 차면 번번이 구름에 가리우고
花開風誤之(화개풍오지): 꽃이 피면 바람이 불어 망쳐 버리네
物物盡如此(물물진여차): 세상 만물이 끝내는 이와 같으니
獨笑無人知(독소무인지): 혼자 웃음에 까닭을 아는 이 없네.
정약용의 이 시를 읽으면, 천지 만물, 세상 만사가 끝내는 가득 참에 이르지 못하는 현상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이치를 모두 무의식 중에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싸울 때 모두 자신이 약자라고 자처한다. 가득 찬 쪽은 우주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러한 대목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신비인 것이다. 이러한 신비의 작용이 없다면, 이 세상은 계산 잘하는 사람, 피도 눈물도 없는 강철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영원한 승자가 되며, 그는 오만함을 보일 것이다. 결국 오만한 승자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작용은 끝내 오만한 자의 무릎을 꺾어 놓는다. 이렇게 하늘은 늘 강한 자를 무릎 꿇게 만들고 약한 자를 보살피고 있다. 약자를 해치려 드는 하늘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세상은 늘 돌고 돈다. "시초의 덕은 원을 이루어 신묘하다(시지덕 원이신, 蓍之德 圓而神, <<계사전 제11장)"라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하늘의 뜻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신비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간절한 염원이 있는 사람은 그 염원이 잘못 흘러 가득 찬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나? 낙천(樂天)하는 거다. 무언가 하늘의 뜻이 있을 거라고 그걸 즐기는 것이다. 그게 군자의 자세이다. 끊임없이 나를 비우면 온 우주가 그것을 채워주려 할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겸허한 것(비어 있는 것)을 좋아해서 유익을 주며, 귀신까지도 복을 준다고 <<주역>>의 <지산 겸> 괘에서 말했다.
4
다음 그림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의 괘(나에게 새겨진 결, 기질)에서 출발하여 이 세상 여행을 나서게 된다.

인생 여행 길을 가는 동안 사람은 다른 괘라는 연(緣)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다른 괘는 사람이자 그를 연(緣)으로 해서 펼쳐지는 사건이다. 사람이 인생 여행을 가는 동안 다른 괘를 만난다는 신비한 수수께끼와 마주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을 펼치려면 계속해서 부딪혀야 한다. 모든 좋은 일이 길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길'이라는 뜻의 '도'라 말하는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군자가 인생 여행을 하는 동안 마주치는 괘 하나하나가 '도'이고 길인 것이다. 그 길을 걸어서 답파(답파), 산, 길, 험한 지형 등을 발로 밟아 굳세게 다 통과하거나, 힘든 과정과 시련을 끝까지 이겨내어 목적을 이룬다)할 때마다 하나씩 새로운 '도'를 터득할 수 있다. 그게 64가지 이다.
사람의 팔자는 자신에 부여된 '괘'와 인생 길에서 마주치는 '연', 아 둘을 합친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거처럼, 사람마다 출발점으로 부여된 괘가 다르고, 길을 가는 동안 서로 다른 연을 만나기 때문에 사람마다 각기 다른 팔자가 펼쳐지는 거다. 그리고 인생 여행 길에서 연(緣)으로 마주치는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른 결을 지녔기 때문에 삶이 신비로운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그 역시 하늘의 대리자이므로 마냥 내 뜻에 따라 움직여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다 각자 하늘의 대리자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돕기 위해 온 것이라 믿어야 한다. 사람이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본다고 자기를 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와 다른 남과 부딪히면서 남과 다른 나의 특성을 이해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를 알게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연(緣)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자로 자기 기(己)는 굽어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이는 자기(己)가 펼쳐 일으켜져야 하는 존재임을 뜻한다. 최초의 자기는 출발점으로 주어진 것일 뿐, 우리 모두는 향후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제대로 펼쳐 나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굽어 있는 잠재력을 제대로 펼쳐 나가는 것이 '자기 실현'이다. 그런데 사람이 나와 다른 타인으로부터 자극을 받지 못하면, 기존의 자기 한계에 갇히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가능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람이 이러한 자기 한계를 넘어 성장함으로써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제대로 펼칠 수 있도록 끌어 주는 것이 타인과의 연(緣)이다. 그러니 산다는 것에 중요한 것이 관계와 활동이다. 다른 사람과 접속하여 관계를 시작하고, 그 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주역>>은 이런 인생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이치를 궁구해서 성(性)을 다함으로써 명(命)에 이르는 것이다." 원문은 "궁리진성이지어명(窮理盡性以至於命)"이다. <<설괘전>> 제1장에 나온다. 여기서 "성을 다한다"는 말은 하늘이 내게 부여한 성(性)에서 비롯한다. 나의 성질(性質, 기질), 특성(特性), 가능성(可能性) 등을 다 펼치는 것을 말한다. <<주역>>은 이처럼 각자에게 부여된 성질, 특성, 가능성을 다 펼침으로써 명(命)에 이르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에게 부여된 특성과 가능성을 다 펼치기 위해서는 이치를 궁리(窮理)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궁리를 해야 자신에게 부여된 가능성을 다 펼칠 수 있다.
궁리(窮理)의 대상은 인생 여행 과정에서 마주치는 연(緣)을 통해 나에게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이다. 달리 말하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우리의 삶을 휘둘러 대는 변덕스러운 우연들, 즉 흉운이다. 결국 역경(逆境, 힘든 환경)은 우리가 삶을 통해 마주치는 흉운(凶運)을 달리 볼 것을 촉구한다. 흉운을 떠나, 인생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 사건들은 매우 다채롭다. 게다가 그 사건들이 마냥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궁리하여, 하늘이 우리에게 신비의 수수께끼를 풀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갈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도를 하나씩 깨우치게 된다. 이를 통해 이 세상의 신비를 하나씩 알아 가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을 알아 가는 것이다. 위의 그림처럼, 둘레 길을 일주 하여 64가지 모두 터득하면 이 세상과 자기의 신비를 다 알게 된다.
이때 우리는 천명(天命)을 알게 된다. 천명이란 자기의 특성과 가능성이 지닌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다. 굽어 있는 자기(己) 잠재력을 제대로 펼쳐 나가는 것이 자기 실현이며, 그렇게 굽어 있는 자기를 펼쳐 일으켜 멋진 작품을 완성해 보라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천명이다. 그 과정에서 연(緣)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우연적인 사건들은 우리에게 궁리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의 여행에서 마주치는 모든 연(緣)은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험 실습 하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나의 성장을 위한 공부와 수련의 장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는 이 세상과 우주의 중심이다. 우리의 우주는 중심인 우리와 우리가 관계를 맺은 연(緣, 사람, 사건, 사물)으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緣)을 맺은 다른 사람, 사건, 그리고 사물은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우주를 이루어 준 소중한 존재이다. 그런 차원에서 천명은 우리의 우주를 이루어 준 우리의 연(緣)들을 통해 하늘이 우리에게 비친 뜻이다. 그래 우리는 매일 연(緣)들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천명도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니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에 합당한 새로운 천명이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내가 맺은 연(緣)들은 각기 하늘의 대리자이므로, 우리 뜻대로 좌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낙천 해야 하고, 또 낙천 할 수 있다. 그 낙천 기술은 성실하게 궁리하되 그것이 집착하지 않는 거다. 하늘을 믿고, 하늘의 길을 잘 궁리하는 것이다. 그 길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거다. 그러니까 늘 아직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은 것이다.
5
오늘은 연중 제17주간 목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3,47-53> "그물의 비유, 비유를 끝 맺는 말씀"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당신의 품>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7-48)
지금여기
당신의 품에
영원히
깃들 수 있기를
내치지 않고
내쳐지지 않고
6
나는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내 마음부터 주님의 빛 앞에 내어 놓고 있나요?
2026/7/30/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마태오 복음 13장 47-53절: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 들인 그물과 같다.”
⠀
가려내시는 손길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붙들고 버려야 할지 단번에 가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생각처럼 단순 명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진심 속에도, 내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은 이기적인 욕심이 뒤섞여 있음을 자주 느끼지요.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내 안에 상반된 감정이나 태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양가감정’이라고 부릅니다. 이 모순되고 흐린 마음들을 억지로 베어내려 하면 오히려 상처가 덧나기 쉽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그물’은 이 모든 것을 우선 넉넉히 품어 안습니다. 그물은 온갖 고기를 다 모아들인 다음에야 비로소 좋은 것을 가려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도 이와 같다고 일러주십니다. 당장 내 안의 감정들이 흑백으로 정리되지 않는다고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있는 그대로 기다려 주시고, 때가 되면 가장 바르게 가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남을 섣불리 판단하는 데 있지 않고, 얽히고 설킨 내 마음의 그물을 주님 앞에 고요히 내어놓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가려내시는 손길은 우리를 몰아붙이는 매서운 심판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더 맑고 가볍게 씻어주시는 따뜻한 사랑의 손길입니다. 진동길 마리오 신부(마산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비유를 통해 설명해 줍니다. 제1독서의 ‘옹기장이와 진흙’, 그리고 복음의 ‘그물과 물고기’ 비유는 내 뜻대로 인생을 쥐고 흔들려는 우리의 완고함을 내려놓고, 주님의 거룩한 손길과 섭리에 온전히 응답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옹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예레미야가 보니 옹기장이는 물레를 돌리며 정성껏 그릇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진흙 그릇이 손에서 망가지자, 옹기장이는 낙심하거나 흙을 버리는 대신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으로 다시 빚어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를 향한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예레 18,6). 참으로 위로가 되면서도 엄숙한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진흙 스스로가 "나는 이런 모양의 그릇이 될 거야" 하고 고집을 부릴 수 없듯이, 피조물인 우리 역시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할 때 하느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 깨뜨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아름답고 단단한 하늘나라의 명품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모나고 이기적인 부분을 은총의 손길로 다시 주무르고 계시는 과정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길에 나를 온전히 맡긴 영혼들은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늘나라의 ‘좋은 물고기’가 되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비유의 마지막으로 ‘그물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습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은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주님의 교회와 이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에는 선인과 악인,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섞여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물이라는 은총의 울타리 안에서 모두가 함께 성숙하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세상 종말이라는 ‘수확의 때’가 오면,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질 것이라고 주님은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지금 주님의 그릇에 담길 ‘좋은 물고기’로 성장하고 있느냐, 아니면 버려질 ‘나쁜 물고기’의 상태로 머물러 있느냐?”. 좋은 물고기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의 창고에 소중히 간직하고, 그것을 삶의 자리에 구체적인 사랑으로 풀어나가는 영혼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손에서 도망치려 할 때 우리 인생은 그저 망가진 진흙더미가 될 뿐입니다. 오늘 하루, 미래에 대한 걱정을 옹기장이 주님의 손에 온전히 맡겨드립시다. “주님, 저를 당신의 뜻대로 빚어주소서. 아프고 깎여나가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당신의 선하심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합시다. 주님의 다정한 손길이 오늘 여러분의 상처를 어루만지시어, 마침내 하늘나라의 기쁨을 가득 담는 가장 존귀하고 복된 그릇으로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옹기장이이신 주 하느님, 저희가 제 삶의 주인인 양 고집을 부리고, 당신의 지혜로운 손길을 거부하며 제 뜻대로만 살려 했던 완고함을 용서하소서. 저희 삶이 비록 깨어지고 일그러졌을지라도,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저희를 다시 아름답게 빚어주실 것을 믿나이다. 오늘 저희가 주님의 그물 안에서 날마다 말씀으로 새로워지게 하시고, 마지막 날에 기쁘게 당신 나라의 그릇에 담기는 좋은 자녀가 되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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