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27일)
1
매년 겪는 여름이지만 이전보다 더 뜨겁고 후텁지근하게 느끼고, 몇 십 년 만에 최고 더위라는 말이 으레 들려온다. ‘찌는 무더위’ 는 가마솥 안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푹푹 쪄내는 것 같다는 뜻이다. 이 때 에어컨이나 제습기만 사용하다 보면 오히려 몸의 리듬이 깨진다. 무더위를 이기는 비결의 하나는 ‘희망’ 이다. "보름만 지나면"하며 희망을 갖고 견디는 것이다. 사실 말복만 지나면 새벽엔 이불이 필요하다.
하늘과 땅이 신열을 앓는 듯 펄펄 끓는다.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문명의 힘에 의지해 피하는 것이 나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공의 찬바람도 온종일 맞고 있다간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더위를 이기려면 더위와 하나가 되라는 말이 있다. 무엇을 집중하다 보면 더위도 쉽게 잊을 수 있다. 땀을 흘리더라도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더위는 벗이라고 여기며 여름을 나는 것도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길이기도 하다. 더위를 탓하며 투덜대는 것은 세상을 반만 보는 일이다. 가을까지 햇볕을 제 안에 차곡차곡 저장하며 익어가는 벼와 사과와 배도 모두 더위가 키워내는 것들이다. 이렇게 연결된 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더위가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사진은 언제보다 더 선 굵은 구름이 아침 산책에 눈에 띄었다. 그래서 찍은 거다.
중요한 것은/엘렌 바스
삶을 사랑하는 것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을 때에도,
소중히 지고 있던 모든 것이
불탄 종이처럼 손에서 바스러지고
그 타고 남은 재로 목이 멜지라도
삶을 사랑하는 것
슬픔이 당신과 함께 앉아서
그 열대의 더위로 숨 막히게 하고
공기를 물처럼 무겁게 해
폐보다는 아가미로 숨 쉬는 것이
더 나을 때에도
삶을 사랑하는 것
슬픔이 마치 당신 몸의 일부인 양
당신을 무겁게 할 때에도,
아니, 그 이상으로 슬픔의 비대한 몸집이
당신을 내리누를 때
내 한 몸으로 이것을 어떻게 견뎌내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당신은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듯
삶을 부여잡고
매력적인 미소도, 매혹적인 눈빛도 없는
그저 평범한 그 얼굴에게 말한다.
그래, 너를 받아들일 거야.
너를 다시 사랑할 거야.
2
음양오행은 동아시아 사상에서 천지인(天地人)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키워드이다. 사주 명리학은 이것을 운명에 적용해서 어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오행의 리듬을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오장육부의 배치와 정서적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오행은 언제나 태과불급(太過不及)의 상태로 배치된다. 모든 사람은 다 어떤 식으로 든 기울어져 있다. 그래 우리는 많은 것은 덜어 내고, 부족한 것은 채우면서, 균형추를 찾는 것이 사는 일이다.
'태과불급'이라는 말은 흔히 "태과불급 개위질(太過不及 皆爲疾)"로 쓰인다. 넘쳐도 부족해도 병이 된다는 뜻으로 과유불급(過猶不及)과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나 이 말은 조화를 강조하며 지나침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냥 태과불급을 말할 때 '태과'는 지나침을 말하고, '불급'은 모자람을 말한다. 무엇이든 적당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것이다. 그러니 지나치면 덜어내야 하고, 모자라면 보태 주어야 한다. 남는 것을 덜어내고, 모자란 것을 보충하여 주는 것을 사주 명리학에서는 '억부(抑抔)'라고 한다. 또는 '억부용신(抑扶用神)'이라도 한다. 사주팔자에서 '나'를 뜻하는 일간(일간)의 힘이 강한 지 역한지를 따져, 강한 기운은 억누르고(억) 약한 기운은 도와주며(부) 균형과 조화를 맞추는 핵심 원리이다.
오늘 아침의 화두는 "균형 찾기"이다. 우리는 아픔과 기쁨으로 뜨개질한 의복을 걸치고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한다. 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기와 지혜는 결합의 방법이다. 선량하나 나약하지 않고, 냉철하나 비정하지 않고, 치열하나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결합의 지혜, 결합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3
우리가 ‘나만 옳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아무도 옳지 않다. 그러면 누가 그른 가? 아무도 그르지 않다. 각기 각자의 방식으로 옳은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각자의 옳음에서 비롯하여 각기(各其, 저마다의 사람)의 근거로 시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인식의 기초인 ‘우리의 앎'은 과연 신뢰할 만한 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과 지성은 부분성과 편파성으로 인해 사물의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거나 들을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볼 때에 그 사람의 이마와 뒤통수를 동시에 볼 수 없고,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없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태생적으로 편파적이고 부분적이다. 한계가 있다. 서 있는 건물을 보면서 동시에 무너지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양면을 모두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서로 의지해 있고, 이웃해 있다. 밤과 낮은 연속되어 있으나 동시에 볼 수 없다. 이처럼 제한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시비가 발생하는데, 장자는 이를 원숭이들의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비유한다. 때문에 모든 시비와 갈등의 고조는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장자는 시비를 중단하라 거나 소멸시키라고 하지 않고, '화(和)하라'고 한다. 단(斷)도 멸(滅)도 아니고, 시비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화(和)를 주장한다. '화하라'는 것은 시비를 잠재워버리거나 잘라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앎'에 기초한 시비의 근거가 서로 허구적인 것임을 깨달어서 스스로 풀어지도록(해소되도록)하라는 것이다. 그 말을 줄여서 ‘화시비’(和是非')라 한다. 시비하지만 시비가 없는 것이고, 시비가 없으면서도 각자의 시비가 모두 인정되는 것, 즉 양행(兩行)이다. 양행이란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개념으로, '시비를 어느 한쪽으로 고집하지 않고, 대립하는 양쪽 모두를 그대로 용인하며 자연스럽게 흘러감'을 뜻한다.
장자가 말한 "양행"이, 노자가 말하는 "'도'를 품고 사는 삶"이 아닐까? 페친 민웅기가 잘 말하고 있다. 잘 배웠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 자신을 모른 체하거나, 혹은 세상과 단절하여 도피한다. 하지만 노자가 말한 도의 실천은 택일이 아니라 ‘동시적 수행’이다. 장자의 말로 바꾸면 양행(兩行)이다. 팽창하는 사회적 요구를 수행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항상 부교감신경의 고요를 유지하는 것. 사회적 그릇으로 쓰이면서도, 결코 그 그릇에 정체되지 않는 유연함. 이것이 바로 도를 품고 사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4
나는 최근에 잘 사는 방법은 긴장의 양과 이완의 양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삶은 그러니까 '균형 맞추기'이다. 비슷한 양과 질로 말이다. 이완이란 긴장을 푸는 일이다. 이는 진짜 '쉬는' 것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외부 자극 없는 시간 보내기'이다. 산책이 좋다. 아니면 명상도 괜찮다. 쉰다는 것은 삶을 건사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다. 불안과 우울, 압박감 같은 감정들을 다른 자극으로 눙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직시하고 다독이는 방법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지 못한다. 늘 비우려기 보다는 성취를 고민한다. 쉴 틈이 생기면 쉬는 게 아니다. 삶을 지탱하느라 들쑤셔진 마음을 다독거릴 재주가 없어 또 다른 자극을 주입한다.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대신, 정신이 쏙 빠지게 단 콜라 따위를 물려준다. 질리고 움츠러든 마음은 달콤한 흥분으로 덧씌워졌지만 그게 진정한 이완은 아니다. 이런 식이다. 각성상태가 나를 피로하게 하지만 제대로 이완하는 법을 모르기에 마취를 택한다. 예를 들어, 삶을 지탱하느라 이어지는 흥분과 불안에 지친 상태에서, 말 잔치만 이어지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두거나 아예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 먹방 따위를 본다. 혹은 SNS에 접속해서 무한대로 펼쳐지는 타인들의 삶을 지문이 닳도록 문지른다. 그리고 알고리즘의 신에게 혼을 빼앗겨 무더기 같은 영혼으로 헤매다 동틀 무렵 어느 벌판에 쓰러져 잠들곤 한다.
휴식, 진짜로 쉴 줄 아는 것은 능력이다. 잘 놀고, 잘 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거기에도 삶의 내공이 필요하다. 그 내공을 위해 노자 <<도덕경>> 제28장을 소환한다.
知其雄(지기웅) 守其雌(수기자) 爲天下谿(위천하계): 남성 다움을 알면서 여성 다움을 유지하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爲天下谿(위천하계) 常德不離(상덕불리) 復歸於嬰兒(복귀어영아): 천하의 계곡이 되면, 영원한 덕에서 떠나지 않고 갓난아기로 돌아간다.
知其白(지기백) 守其黑(수기흑) 爲天下式(위천하식): 흰 것을 알면서 검은 것을 유지하면 천하의 본보기가 된다.
爲天下式(위천하식) 常德不忒(상덕불특) 復歸於無極(복귀어무극): 천하의 본보기, 사표가 되면 영원한 덕에서 어긋나지 않고 무극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知其榮(지기영) 守其辱(수기욕) 爲天下谷(위천하곡): 영광을 알면서 오욕을 유지하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爲天下谷(위천하곡) 常德乃足(상덕내족) 復歸於樸(복귀어박):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영원한 덕이 풍족하게 되고 순박한 통나무로 돌아가게 된다.
樸散則爲器(박산즉위기) 聖人用之(성인용지) 則爲官長(즉위관장) 故大制不割(고대제불할): 통나무를 쪼개면 온갖 그릇이 생겨난다. 성인은 통나무의 질박한 가능성을 잘 활용하여 세상의 진정한 리더가 된다. 그러므로 훌륭한 리더의 다스림은 자질구레하게 자르지 않는다.
여기서 인상적인 문장이 다음의 세 개이다. 지웅수자(知雄守雌), 지백수흑(知白守黑), 지영수욕(知榮守辱).
▪ "지웅수자(知雄守雌)"는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킨다고 자구대로 해석이 된다. 이 말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잘 조화롭게 알고 지킨다는 것으로 확장할 수 있다. 여기서 알고 지킨다는 것은 운용할 줄 안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음양의 성질을 잘 운용한다 라고도 볼 수 있다. 노자는 다시 말해 음양의 이치를 알고(知), 그 이치에 따른다면(守) 천하 만물을 기르고 거두어 들이는 골짜기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거다. 또는 천하 만물이 모두 산골짜기로 삼는다고 보기도 한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외향성, 원심력)을 알아차리고, 안으로 향하는 마음(내향성, 구심력)을 지키고 있으면 세상의 낮은 곳에서 자유로이 흐르는 시냇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계곡이다. 계곡의 물은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흐른다. 우리도 자신을 낮추고 낮은 곳에 있으면 훨씬 더 자유롭다.
▪ "지백수흑(知白守黑)"은 백을 알고 흑을 지킨다. 백과 흑은 인간의 시비 이해와 만물의 변화하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것을 천하의 기준(방식)으로 삼고 따른다는 거다. 서예 하는 사람들의 원칙이기도 하다. 글자 사이의 여백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 밝음을 알면서도 그 어둠을 지키면 하늘 아래 모범이 된다.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바로 말그대로 수행(修行)이다. 알고 만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이치를 알고 그 이치를 따르는 것(지키는 것)은 수행을 함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은 삶을 말한다.
▪ "지영수욕(知榮守辱)"은 속세의 영화가 어떤 것인 가를 알고 욕된 생활을 참고 견뎌 내는 거다. 더 나아가, 영화로움이 덧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욕되고 비천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세상의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골짜기가 된다.
결론적으로 남성 다움과 여성 다움, 백과 흑, 영광과 오욕 같은 반대 개념을 대할 때 어느 한 쪽을 택하는 '이것이냐 저것이 냐'의 태도가 아니고, 양쪽을 모두 껴안는 '이것도 저것도'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리더가 이런 태도와 안목을 지닐 때만 진실로 "세상의 본보기"가 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물이 모여들듯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모여드는 "세상의 계곡"이 된다는 거다. 이런 사람은 "갓난 아기", "무극",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거다. 이런 것들은 '도'의 상징이다. 이 세 가지 상징 모두 양극으로 분화되거나 분리되기 전 '무경계'의 상태인 도인 것이다.
자연은 하나로 존재한다. 분할하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낮과 밤은 인간이 구분한 것이지 자연이 구분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 흑과 백, 영광과 오욕 등은 인간의 대립적 사고에 의해 분리된 것이다. 노자는 이것들을 통합적으로 인식할 때 도를 깨우치게 된다고 말한다. 천하의 계곡, 어린아이, 천하의 본보기, 무극, 통나무와 같은 표현은 통합적 사고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진리의 원천, 본질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것들이다. 노자는 순수하고 명증한 진리, 즉 도를 깨우친 상태를 통나무에 자주 비유한다. 이것은 가공하기 전 원형 그대로의 통나무가 가지는 자연스러움과 질박함, 원만함 등이 단순하고 소박한 도의 속성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통나무 박(樸) 이야기를 좀 더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박(樸)자의 약자가 박(朴)으로 쓰인다. 나도 통나무 박씨이다. 그래 자랑스럽다. 통나무란 가공되지 않은 원목을 가리킨다. 그것은 가공하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가능성, 즉 잠재력, 다시 말해서 허(虛)의 극대치를 상징한다. 통나무가 물리적 조건 그대로 지니는 가능성의 범위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체계로서 노자는 통나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거다. 목수의 손을 거친 다듬어진 나무들에 비해 이것이 껍데기도 있고, 흙도 묻은 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맥락에서 '질박, 투박, 소박'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박산위기(樸散爲器)"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통나무는 어떠한 그릇, 기물이라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거다. 통나무는 그 가능성이 전방위라는 말이다. 왕필은 "성인용지(聖人用之)"에서 "지(之)"를 "기(器)"로 보았다. 그러면 성인은 통나무가 아니라, 다양한 그릇들을 활용하여 그들을 관장(官長)으로 세워서 "대제불할(大制不割)"의 정치를 행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거다.
통나무를 쪼개서 그릇을 만든다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분할하지 않는다’는 문장과 상반되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나무를 쪼갠다고 할 때의 분할과 흑과 백, 영광과 오욕을 구분한다고 할 때의 분할은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이다. 흑과 백, 영광과 오욕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통나무를 쪼갠다고 통과 나무가 되는 일은 없다. 통나무는 쪼개도 통나무와 통나무다. 도를 쪼갠다고 '도'와 '비도'로 분할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통나무를 쪼개서 만든 그릇으로 국가 경영에 사용한다는 말은 질박 하고 순수한 도를 리더십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5
연중 제17주간 월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3,31-35>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시나브로 기꺼이 나는>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마태 13,33)
하늘나라가
내게
스미어
하늘나라로
나를
물들이니
시나브로
기꺼이
나는
하늘나라입니다
믿음이
내게
스미어
믿음으로
나를
물들이니
시나브로
기꺼이
나는
믿음입니다
희망이
내게
스미어
희망으로
나를
물들이니
시나브로
기꺼이
나는
희망입니다
사랑이
내게
스미어
사랑으로
나를
물들이니
시나브로
기꺼이
나는
사랑입니다
기쁨이
내게
스미어
기쁨으로
나를
물들이니
시나브로
기꺼이
나는
기쁨입니다
섬김이
내게
스미어
섬김으로
나를
물들이니
시나브로
기꺼이
나는
섬김입니다
살림이
내게
스미어
살림으로
나를
물들이니
시나브로
기꺼이
나는
살림입니다
▪ 시나브로: 모르는 상이에 조금씩 조금씩 이란 뜻으로 순 우리말이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사이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날 때 쓰인다. 어느새
▪ 온새미로: 아주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라는 뜻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아름답게 진행될 때 사용된다. 특히 조화롭고 부드러운 상황을 묘사할 때 적합하다.
▪ 안다미로: 넘칠 정도로 가득라는 뜻으로 어떤 상태나 감정이 풍부하게 채워질 때 사용된다. 주로 긍정적이나 상황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데 적합하다.
6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겨자씨처럼 심을 수 있는 아주 작고 사소한 사랑의 실천은 무엇입니까?
2026/7/27/연중 제17주간 월요일
마태오 복음 13장 31-35절: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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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와 아주 작은 시작의 힘
우리는 삶에서 눈에 띄는 큰 변화를 바라지만, 현실은 기대만큼 단번에 달라지지 않아 쉽게 무기력해지곤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럴 때 거창한 목표 대신, 아주 작고 사소한 행동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합니다. 이를 ‘스몰 스텝’ 전략이라고 합니다. 너무 작아서 실패하기조차 힘든 사소한 실천들이 차곡차곡 모일 때, 결국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기 효능감’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비유하신 ‘겨자씨’와 ‘누룩’이 바로 이 영적인 ‘스몰 스텝’입니다. 짧은 화살기도 한 번, 서운함을 삼키는 작은 인내, 이웃에게 건네는 따뜻한 눈웃음 한 번이 곧 겨자씨 같은 믿음입니다. 어르신들은 때때로 은퇴와 노화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초라하게 느껴진다며 낙심하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시작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지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크기나 속도가 아니라 생명력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의 작은 겨자씨를 온갖 새들이 깃드는 거대한 은총의 나무로 키워내고 계십니다./진동길 마리오 신부(마산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27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가 얼마나 밀착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비록 지금 우리의 모습이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하느님의 손에 들려질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매우 독특하고 시각적인 ‘몸짓 언어’로 예언하게 하십니다. 아마포 띠를 사서 허리에 두르고, 그것을 유프라테스 강가 바위 틈새에 숨겨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꺼내 본 베 띠는 물기와 흙 때문에 완전히 썩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상한 아마포 띠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붙어 있듯이 내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나에게 붙어 있게 한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이 되어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예레 13,11).
허리띠는 사람의 몸에 가장 가깝고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을 때만 제 구실을 합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곁에 바짝 붙어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거룩한 존재 이유와 영광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하느님의 품을 벗어나 세상 유혹의 상징인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버렸습니다. 주님의 허리에서 풀려나 세상의 습기 속에 방치된 영혼은 바위 틈새의 아마포 띠처럼 스스로 썩어갈 뿐입니다. 주님의 허리에 단단히 묶여 그분으로부터 생명의 진액을 받는 영혼들은 오늘 복음이 말하는 ‘겨자씨’와 ‘누룩’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고 미미한 씨앗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 자라나면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아침 바친 짧은 화살기도 한 줄, 가족에게 건넨 다정한 말 한마디가 바로 내 영혼에 심기는 겨자씨입니다. 당장 눈에는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하느님의 은총이 더해질 때 그 작은 씨앗은 거대한 사랑의 나무가 되어 이웃들에게 따뜻한 쉼터를 내어주게 됩니다.
또한 하늘나라는 밀가루 속에 숨겨진 작은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반죽 속에 온전히 녹아들어 자기 형체를 잃어버리지만, 반죽 전체를 부풀려 맛있는 빵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힘을 지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성당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거친 반죽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내가 머무는 직장과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풍기며 세상의 가치관을 하늘나라의 가치관으로 맛있게 변화시키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신앙은 큰일을 해내는 영웅주의가 아니라,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 겸손함이며 내 삶의 자리에서 작은 누룩이 되는 성실함입니다. 오늘 하루, 내 고집으로 주님의 허리에서 풀려나려 했던 교만을 내려놓읍시다. 썩어 없어질 베 띠가 아니라,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천국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생명의 주님, 저희가 당신의 품을 벗어나 세상의 안락함과 교만 속에 머무르며 스스로 썩어가는 아마포 띠처럼 살았던 나약함을 용서하소서. 저희를 당신의 허리에 사랑으로 다시 단단히 동여매어 주소서. 비록 저희의 힘과 믿음이 작은 겨자씨처럼 보잘것없을지라도, 당신의 은총 속에서 자라나 상처 입은 이웃을 품어주는 큰 나무가 되게 하시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전하는 거룩한 누룩이 되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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