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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안내 지도인 심우도(尋牛圖) 5

375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25일)

1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이정표를 만난다. 성공의 길, 행복의 길, 때로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 위에서 정작 ‘나’라는 본질은 자주 길을 잃는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는 잃어버린 본래의 나, 즉 ‘참 나’를 찾아 떠나는 열 단계의 여정을 담은 안내 지도이고, 우리 삶을 향한 지성의 성찰이다. 오늘은, 지난 7월 20일에 이어, 십우도의 9단계인 반본환원과 10단계인 입전수수를 읽는다. 마지막이다. 오늘 사진은 계수나무이다. 계수나무 잎은 완벽한 하트(심장) 모양을 닮았으며, 가을에 단풍이 들 때 솜사탕처럼 달콤한 캬라멜 향기를 풍기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계수나무는 계수나무과의 나무로 일본 이름으로 가쓰라(桂-계)라고 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계수나무로 잘못 번역한 것이 굳어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 심겨진 계수나무는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다. 달나라의 계수나무라는 뜻의 월계수는 지중해 원산으로 녹나무과의 상록교목으로 향신료로도 사용되었다. 그리스 로마의 월계수 계관(桂冠)이 고귀와 승리의 상징이었고 중국의 계수나무가 명예와 숭고함을 의미하는 것은 나뭇잎의 모양이나 좋은 향기가 나는 것 때문인 듯하다.

십우도의 9단계인 반본환원(返本還源)은 '근본으로 돌아와 눈을 뜨다' 이다. 욕심과 번뇌로 물든 마음을 씻어내고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청정하고 순수한 본성을 회복하는 단계로, 다시 말하면 근본으로 돌아가 본래의 참된 모습을 되찾는다는 거다. 페친 민웅기는 이렇게 풀이한다. 모든 것을 비워내고 텅 빈 원의 경지에 머물렀다면, 이제 다시 눈을 뜰 시간이다. 십우도의 아홉 번째 단계인 '반본환원(返本還源)'은 공(空)의 자리에서 다시 현실의 만상(萬象)을 마주하는 단계다.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세상과 단절된 고고한 은둔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진정한 비움은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보기 위함이다. 텅 빈 마음으로 다시 바라본 세상은 이전과 똑같겠지만, 이제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산은 여전히 산이고, 물은 여전히 물이지만, 그 산의 푸름과 물의 흐름 속에서 당신은 우주의 신비로운 호흡을 읽어낸다. 그러니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높은 경지이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아이를 찾아야 한다. 서울 광화문 교보 빌딩에 소개된 적 있던 시구가 소환된다.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시집에서 발췌한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아직 내 속에 있을까/아니면 사라졌을까?" 말이다. 오늘 아침 그 시의 전문을 공유한다. <<질문의 책>> 제44번에 실린 거다.

질문의 책/파블로 네루다(정현종 역)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 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쫓는 거지?

심리학에서 말하는 '통합적 지각(Integrative Perception)'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세상을 조각조각 분석하던 과거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물과 현상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고차원적인 지능이다. 좀 더 풀어 보면, 시각, 청각, 촉각 등 여러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개별적인 자극을 두뇌에서 하나로 조작화하고 해석하는 신경학적 과정이다. 단순한 감각 수용을 넘어, 개인이 처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적절히 반응하도록 돕는 인지의 핵심이 요소이다. 예를 들어, TV 화면의 수많은 점을 따로 보지 않고 하나의 온전한 영상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파편화된 정보를 전체적인 의미로 연결하는 핵심 능력이다. 

비워진 마음에는 더 이상 편견이나 집착이라는 필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세상은 그 자체의 빛깔과 무늬를 오롯이 드러낸다. 페친 민웅기는 이것을 바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넘어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했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은 텅 빈 본질이 곧 현상으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깨달음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삶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젠가 내 <인문 일지>에 썼던 글이다. 홀로 앉아 선정(禪定)을 버리지 말고, 모든 일에는 늘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 가는데 있어 우환(憂患 )을 똑똑이 알아, 무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화가 났을 때 화냄을 알아차리고, 생각하는 생각을 알아차리면, 이미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지혜로 더 나아가 깨달어야 한다. 무엇을? 세상은 공(空)이다. 내 호중의 하나가 '지공(指空)'이다.  그 뜻은 '늘 이 세상은 공이라는 것을 소환하고 생각 하자'는 거다. '공'은 '순아타'를 번역한 것으로,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본래 없다가 단지 지금 있는 것("本無今有-본무금유=空卽是色-공즉시색)이고, 지금 있음이 지나면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旣有還無-기유환무=色卽是空-색즉시공)을 뜻한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상을 가리키는 불교 교리이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이법(理法)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불교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공'은 부처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진리에 기원한다. 일체의 만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는 내용이다.

노자는 사물의 근원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이렇게 일러준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이것을 생명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歸根曰靜, 是謂復命,귀근왈정, 시위복명)." <<도덕경>> 제16장에 나오는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夫物芸芸(부물예예) 各復歸其根(각복귀기근), 歸根曰靜(귀근왈정) 是謂復命(시위복명)" 이다. 번역하면, '사물들이 무성하게 피어나지만 결국은 모두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고요함을 얻으니 이를 일러 제명으로 복귀한다"는 거다. 여기서 "복명"의 '명'은 <<중용>>에서 말하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하늘이 우리에게 본성을 주었는데, 다시 말하면 인간의 격을 말해 주었는 데,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이 '길(道)'라 했다. 그 길은 우리가 인간으로 품격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는 날들이 그  '길(道)'라고 본다. 그리고 그 '도'를 잘 '다듬고 기르는' 것이(修道가)  교(敎, 工夫공부)라는 말이다.' 이'명'과 같이 보면 된다. 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천명을 받은 것이고, 천명을 받는다는 것은 '항상 그러한 도", 즉 '상도(常道)"의 세계에 충실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명(命)에서 상(常)이 오는 것이다. 

본질(根)로 돌아가(歸) 내면의 고요(靜)를 회복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력(命)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텅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상태. 인위적인 해석을 걷어냈기에 세상의 본래 모습(如如)이 그대로 다가오는 상태가 바로 반본환원이라는 거다. 페친 민웅기의 글을 직접 공유한다. "우리는 그동안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했다. 하지만 세상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그 '나의 뜻'을 내려놓자, 세상은 비로소 세상 답게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가장 깊은 긍정이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이 자리, 그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본질의 자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해본다. "자신이 지금 걷는 길가에 피어난 꽃은 어제와 어떻게 다른가? 지신이 지금 마시는 공기는 이제 어떤 맛으로 느껴지는가?" 반본환원은 특별한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비워진 눈으로 지금 곁에 있는 것들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바로 당신이 고향으로 돌아온 참 이유라는 거다.

2
마지막 10단계인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저자거리(시장)에 들어가 손을 내미는 거다. 다시 시장 통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드디어 마지막 단계, '입전수수(入廛垂手)'에 다다랐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은 후 산속에 머물지 않고, 중생들이 사는 속세로 나아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구제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이타행(利他行, 남을 이롭게 하는 모든 행위)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한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다시 그 안에서 평온을 찾았다. 그렇다면 이제 신선처럼 홀로 깊은 산중에 은둔해야 할까? 아니다.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은 깨달은 이가 지팡이를 짚고 시장통으로, 세상사람들의 삶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입전수수(入廛垂手)란 '점빵을 차리고 손을 내민다'는 뜻이다. 내가 비운 자리에 이웃의 아픔을 채우고, 내가 찾은 소의 평화를 세상과 나누기 위해 기꺼이 흙탕물을 뒤집어쓸 수 있는 곳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의미 요법(Logotherapy)'을 통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는 행복이 아니라 '의미를 찾는 것'이라 말했다. 깨달음의 여정은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그 치유의 완성은 타인을 이롭게 하는 삶에서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이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즉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경지와 한 가지다. 나라는 좁은 껍데기를 깨고 나와 타인과 연결될 때, 인간은 비로소 지극한 사랑의 존재가 된다. 자리이타 (自利利他)는 대승 불교의 핵심 실천 덕목으로, '나의 이익(自利)이 곧 남을 이롭게 하는 것(利他)임'을 의미한다. 즉 자리이타는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의미 요법은 인간의 삶에서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고 추구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도록 돕는 이론이다. 거창한 목적이 아닌 매일의 소소한 목표와 책임 의식에 초점을 맞추며, 우울과 실존적 공허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 있다는 것은 의미요법(치료)의 기본  신조 중의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빅터 프랑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니체도 비슷한 말을 한다. "살아야 할 이유(의미)를 가진 사람은 어떤 상태의 '어떻게'도 견뎌낼 수 있다." 

노자는 도를 실천하는 이의 낮은 자세를 이렇게 설파했다. "성인의 길은, 오직 베풀 뿐 다투지 않는다(聖人之道, 爲而不爭)." <<도덕경>> 제81장의 마지막 문장에 나온다."하늘의 도는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성인은 이를 따라서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와 겨루지 않는다(天之道(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이다. 싸우지 마라는 말보다 겨루지 마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노자는 <<도덕경>> 전편을 통해 '부쟁(不爭)'을 강조하였다. '부쟁'에는 노자 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과 평화, 공정이 응축되어 있다. 자연은 무위하고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겨울을 이기려고 다투지 않고 겨울도 봄을 이기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때가 되면 묵묵히 자신을 비우고 겨울에게 때를 넘겨주고 겨울 또한 때가 되면 따뜻한 봄을 위해 자신을 버린다. 다투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가을이 있고, 또 다른 겨울이 있게 된다. 각자의 분수와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 다투지 않기에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면 분쟁(分爭)이 발생하지만 욕심을 비우면 '부쟁(不爭)'하게 되고 세상은 공정해 진다.

그리고 페친 민웅기에 의하면, 깨달은 자는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저 곤경에 처한 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굶주린 이에게 음식을 나누며, 슬픈 이의 곁에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다. '내가 너를 가르친다'는 오만함도, '너는 미욱하다'는 판단도 없다. 오직 그곳에 있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연민(Compassion)만이 앞설 뿐이다. 뇌 과학적으로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 극대 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경계가 무너졌기에, 타인의 아픔은 곧 나의 신호가 된다. 시장통은 소란하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 곳이야말로 깨달음이 꽃 피울 수 있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다. 당신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당신이 찾았던 그 '참 나'의 온기가 퍼져 나간다는 거다. 거울 뉴런(Mirror Neuron)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할 때, 마치 자신이 직접 행동하거나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뇌에서 동일하게 반응하는 신경세포이다.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감하는 능력의 기초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민웅기는 말한다. "이제 다 왔다. 소를 찾는 긴 여행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어느 고고한 신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의 이웃이다." 그러니 이런 질문 한다. '오늘 자신은 누구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자신이 찾은 소의 평화를 누구와 나누고 싶은가?' 그러니까 "사실 우리의 진짜 여행은 지금부터 이다. 자신의 진짜 삶은 이제 시장 한복판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곳에서 당신은 기꺼이, 당신만의 방식대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고 말한다.

3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보편화는 인간의 사고력과 학습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다양한 정보를 제시하지만, 그 정보의 질과 방향은 인간이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 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력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이 문제를 정의하고 질문을 구성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따라서 미래 교육의 핵심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력을 바탕으로 ‘질문할 줄 아는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다.

현재 우리 교육은 이러한 변화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초, 중등 교육과정에서는 여전히 교사가 제시한 정답을 외우고, 시험에서 그 정답을 정확히 재현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학생을 평가한다. 이는 일정 수준의 학습 성취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일 수 있으나, 스스로 탐구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경험을 제한한다. 그 결과 학생들은 ‘정답을 맞히는 능력’은 높지만, ‘질문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부족한 상태로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은 이 한계를 극복해야 할 최후의 교육 단계다. 급변하는 지식 환경 속에서 대학의 존재 이유는 더 이상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지식의 재구성과 창출에 있다. AI 시대의 대학은 정보를 단순히 주입하기보다, 학생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도록 사고의 틀을 넓혀주어야 한다. 교수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질문하도록 유도하는 촉매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4
질문 능력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깊이 있는 질문은 넓은 지식 기반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결합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질문 능력은 단순한 언어적 능력이 아니라, 학문적 성찰의 총합적 표현이다. AI가 제시하는 정보의 맥락과 한계를 구별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재조직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이러한 질문적 사고로부터 비롯된다.

AI의 작동 방식 또한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한다. AI는 스스로 지식을 창조하지 않는다. 인간이 축적하고 생산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이를 분석해 결과를 산출할 뿐이다. 따라서 AI가 고품질의 지식을 제공하려면, 인간 사회에서 생산되는 지식의 깊이와 정확성이 먼저 확보되어야 한다. 더 나은 AI를 만들기 위한 조건은 결국 더 나은 인간의 학문 활동이다. 인간이 지식의 창조자이자 AI의 ‘교사’로 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일부에서 AI의 발전이 인간 학습을 대체한다고 오해하는 데 있다. “AI가 다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지식의 본질을 기술로 환원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AI가 학습하는 모든 자료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인간의 학문적 활동이 멈추면 AI 또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인간이 학문적 성찰과 질문을 멈추는 순간, AI는 과거의 데이터에 갇혀 진보를 멈추게 된다.

따라서 AI 시대의 대학교육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 첫째, 교육 과정의 중심을 ‘정답 중심식 학습’에서 ‘문제 중심 탐구’로 전환해야 한다. 학생들이 스스로 주제를 설정하고 논리적으로 문제를 분석하며, 타인의 관점과 비판 속에서 새로운 해석을 도출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 둘째, 교양교육과 전공교육을 막론하고 비판적 사고와 표현 중심의 학습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것이 AI 시대 교육 혁신의 실질적 출발점이다.

AI가 정보를 제공하는 시대일수록, 그 정보를 분별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지성이 더욱 중요하다. 대학이 이러한 철학을 중심에 두고 교육 체계를 재구성할 때, 학생들은 AI에 휘둘리지 않고 AI를 활용할 수 있는 주체적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다. 결국 AI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 그리고 ‘질문하는 인간’에게 있다.

5
성 야고보 사도 축일로 말씀은 <마태오 20,20-28> "출세와 섬김" 이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당신을 섬깁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ㄴ-27)

당신이
있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당신이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살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믿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바라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사랑하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참되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착하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아름답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부드럽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이루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섬기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살리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당신이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당신이
있도록
당신을 섬깁니다

5
나는 남에게 인정받는 자리를 좇고 있습니까, 아니면 묵묵히 곁을 내어주는 섬김의 자리를 선택하고 있습니까?
2026/7/25/성 야고보 사도 축일/중복
마태오 복음 20장 20-28절: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정 욕구를 넘어선 낮아짐의 사랑
사람은 누구나 애쓴 만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인 ‘인정 욕구’를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곁의 높은 자리를 탐했던 제자, 곧 오늘 축일을 맞은 야고보 사도 역시 처음에는 남보다 높은 곳에 올라야 그 마음이 채워질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남 위에 군림하는 대신,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섬김’의 길을 일러주십니다. 참된 섬김은 힘없는 자의 어쩔 수 없는 굴복이 아니라, 내면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꽉 찬 사람만이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위대한 용기입니다. 신앙은 남보다 높아지는 기술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내 몫의 수고를 감당하며 곁에 있는 이의 약함을 안아주는 낮아짐을 배우는 길입니다. 훗날 야고보 사도는 주님의 이 가르침을 깊이 깨닫고,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순교의 잔을 마시며 온 삶으로 섬김을 완성했습니다. 경쟁하며 쌓아 올린 자리는 언젠가 무너지지만, 사랑으로 내어준 섬김의 자리는 영원히 빛납니다. 내가 스스로 낮아져 마음의 빈자리를 낼 때, 비로소 그곳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 머물게 됩니다. 채워지지 않던 우리의 헛헛한 마음도 세상의 환호가 아니라, 이웃을 향한 조용한 헌신 속에서 참된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친히 내려오신 주님처럼, 누군가를 살리는 넉넉한 섬김의 자리에 머물러 보십시오. 진동길 마리오 신부(마산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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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은 열두 사도 중 한 분이자 요한 사도의 형제이며,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순교의 영광을 입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야고보 사도의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위대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잔을 마시는 일인지를 생생하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복음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절을 하며 한 가지 청을 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강력한 왕이 되실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어머니와 두 형제는 세상 권력을 미리 선점하기 위해 일종의 ‘인사 청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이를 지켜본 다른 열 제자들 역시 두 형제에게 크게 불쾌해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게 주님을 따르는 듯 보였지만, 제자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똑같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세상적인 야심과 시기심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철없는 야심을 꾸짖는 대신, 다정하면서도 준엄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두 형제는 그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큰소리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상상한 잔은 승리의 축배이자 영광의 잔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 ‘고난과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지배자들처럼 남을 억누르고 군림하는 자리가 결코 하늘나라의 자리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6.28). 야고보 사도는 훗날 성령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이 말씀하신 ‘잔’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높은 자리를 탐내는 야심가가 아니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듯, 자신은 보잘것없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담고 있기에 어떤 환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당당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기원후 44년경, 헤로데 아그리파 1세 왕에 의해 칼을 맞아 열두 사도 중 최초로 순교의 잔을 마시게 됩니다. 복음에서 주님께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던 그 철없던 맹세가,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언하는 위대한 순교의 고백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깨지기 쉬운 약한 질그릇들입니다. 내 지위나 재산으로 그릇 겉면을 화려하게 꾸미려 애쓰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주님의 사랑과 복음이라는 보물이 담겨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던 야심의 잔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지친 가족과 이웃을 위해 작은 손길을 내어주는 ‘섬김의 잔’을 기쁘게 마십시다. 우리가 낮아지고 섬길 때, 야고보 사도를 하늘나라의 영광으로 이끄신 주님께서 우리 또한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존귀한 하늘나라의 자녀로 높여주실 것입니다.
영광과 섬김의 주님, 저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탐하며 남들 위에 군림하려 했던 교만을 용서하소서. 성 야고보 사도가 마침내 당신의 고난의 잔을 받아 마셔 첫 순교자가 되었듯, 저희 또한 눈앞의 영광만을 좇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섬김과 희생의 잔을 기쁘게 마시게 하소서. 질그릇처럼 약한 저희 삶 속에 오직 당신이라는 보물만을 가득 채워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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