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24일)
1
우리는 마음을 단련하지 않고 세상만 바꾸려 한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마음의 근력도 몸의 근력만큼 중요하다.
아무리 건강하고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에는 한계가 있음을 안다. 그래서 처음부터 무거운 역기를 들지 않는다. 가벼운 무게로 시작해 조금씩 늘려간다. 몸의 세계에서 우리는 비교적 겸손하다. 그런데 마음의 세계로 들어오면 태도가 달라진다. 자신은 흔들려서도, 불안해서도, 상처 받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워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 뜻과 다르게 행동하면 쉽게 화가 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는 살피지 않는다. 포항채움의원과 마음치유아카데미 원장인 사공정규는 이런 태도를 ‘마음의 오만’이라고 부른다. 불안하고 상처 받고 흔들리는 것 자체는 마음의 오만이 아니다. 마음의 오만은 자신의 마음에도 한계와 훈련이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세상과 타인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기를 요구하는 태도다.
마음에도 오만이 있다는 거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제 3자의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지 않거나 응시할 수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 쌓이는 적폐가 있다. 그게 바로 오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편견이 여러 의견 중에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해답이라고 여기는 착각이다. 위대한 개인은 그런 자신을 깨우치는 공부를 통해서만 오만이라는 미로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런 착각을 피하는 길이 자신의 제3자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 나 자신도 오만한지 나를 되돌아 본다.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겐 한 가지 치명적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이것 때문에 비극적 파국을 맞이한다. 비극 공연을 관람하는 모든 관객들은 아는데, 정작 주인공인 자신만 모른다. 그것이 오만이다.
우리는 몸의 한계 앞에서는 겸손하면서도, 마음의 한계 앞에서는 오만할 때가 많다. 이제는 그 마음의 오만에서 내려올 필요가 있다. 마음을 단련하지 않은 채 세상의 무게부터 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하기보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나를 지켜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 지금 삶이 버겁다는 것은 마음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강한 사람은 처음부터 삶의 무게를 거뜬히 견딜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루하루 마음을 단련해 온 사람이다.
2
마음 근력 운동은 마음은 길들일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로 보자는 거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의 단순한 덩어리가 아니다. 예컨대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함께 살고 있다. 그래서 마음 공부는 모든 생각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여러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은 키우고, 어떤 마음은 줄이는 일이다. 예컨대, 미움, 시기 그리고 분노는 줄여야 할 마음이고, 감사, 자비 그리고 공감과 연민은 키워야 할 마음이다.
마음도 습관이 된다. 미움을 자주 품으면 미움의 길이 넓어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자주 불러내면 감사가 쉬워진다. 마음은 그대로 두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지만, 살피고 돌보면 방향을 바꿀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이나 뇌 과학에서 같은 이야기를 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의식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흐름'으로 본다. 나는 이 '흐름'이란 말을 좋아하다. 사는 것도, 강물처럼 흐르는 거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제를 추억하고, 오늘을 후회하고, 내일을 희망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습관처럼,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그렇게 산다. 산다는 것은 내가 어느 곳으로 걸어 가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보면, 내가 사는 삶은, 물처럼, 흘러간다. 그냥 간다. 삶이 너무나 힘들어도 세월은 위로해주지 않는다. 버거운 짐을 내리지도 못하고 끝없이 지고 가야 하는데 어깨가 무너져 내린다. 한없이 삶에 속아 희망에 속아도 희망을 바라며 내일의 태양을 기다린다. 낭떠러지인가 싶으면 오를 곳을 찾아 헤 매이고 암흑인가 싶으면 빛을 찾아 한없이 걸어야 한다. 죽음의 끝이 다가와도 애절하게 삶에 부질없는 연민을 갖는다. 산처럼 쌓아 둔 재물도 호사스런 명예도 모두 벗어 놓은 채, 언젠가 우리는 그렇게 떠나 다시 걸어야 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때 마다 소환하는 법정 스님의 글이다.
그냥 걷기만 하세요/법정
한 걸음,
한걸음 삶을 내딛습니다
발걸음을 떼어 놓고 또 걷고 걷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짊어지고 온 발자국은 없습니다
그냥 가버리면 그 만인 것이
우리 삶이고 세월입니다
한 발자국 걷고 걸어온 그 발자국
짊어지고 가지 않듯
우리 삶도 내딛고 나면 뒷 발자국
가져오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냥 그냥 살아갈 뿐
짊어지고 가지는 말았으면 하고 말입니다
다 짊어지고 그 복잡한 짐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냥 놓고 가는 것이 백 번 천 번 편한 일입니다
밀물이 들어오고 다시 밀려 나가고 나면
자취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애써 잡으려 하지 마세요
없어져도 지금 가고 있는 순간의 발자국은
여전히 그대로일 겁니다
앞으로 새겨질 발자국 삶의 자취도
마음 쓰지 말고 가세요
발길 닿는 대로 그냥 가는 겁니다
우린 지금 이 순간 그냥 걷기만 하면 됩니다
현기영의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에서 읽은 내용이다. "인생이란 앞 강물, 뒤 강물 하면서 흘러가다가 하구에 이르면 바다로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난 바다로 안 갈래' 하면서 버티면, 그게 웅덩이가 돼서 고이고 썩는 것이다. 그러면 노년이 추하다. 자연스럽게 강물 따라 흘러가 버리면 된다. 그래서 나이 들면 자연과 잘 어울려야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그렇게 너나 없이 흙으로 돌아간다. 그때까지 주어진 길을 꿋꿋이 헤쳐 나아갈 뿐, 누구라도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진 못한다."
마음 이야기로 돌아온다. 우리의 마음은 한 가지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 떠오르고 사라지는 생각과 감정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무조건 믿을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살피고 선택해야 한다. 사람들의 성향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운명은 아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도 화를 알아차리는 훈련을 할 수 있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연습할 수 있다. 마음의 수행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뇌가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론이 있다.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은 학습, 경험과 훈련에 의해 뇌의 신경 연결 망이 변화하고 재 구성되는 능력을 말한다. 뇌는 고정된 기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운 신경망을 만들고 연결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유연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신경 가소성을 촉진하는 방법으로는 새로운 도전, 꾸준한 반복 그리고 충분한 수면과 운동이 필요하다.
▪ 새로운 도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취미, 운동, 학습 등을 통해 뇌에 지속적인 자극을 준다.
▪ 꾸준한 반복: 신경 회로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매일 조금씩 꾸준히 연습한다.
▪ 충분한 수면과 운동: 수면은 낮 동안 학습한 내용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고 신경 회로를 정리하는 데 필수적이며,, 규칙적인 운동은 뇌 혈류를 개선해 준다.
이 글의 영감과 통찰을 준 것은 우리 동네 전 시장이셨던 <염홍철의 아침 단상>이다. 늘 잘 정리된 글을 페북에 올리신다. 그에 의하면, "리처드 데이비드슨은 명상과 정서 훈련이 감정 조절 능력과 뇌 회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았고, "존 가밧진은 마음 챙김을 통해 생각과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훈련을 장조했다"는 거다. 마음 챙김, 알아차림 이런 단어들을 나는 좋아한다.
중요한 것은 분노가 전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일어날 때 "지금 내 안에 분노가 생겼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일이라는 거다. 그 순간 분노와 나 사이에 작은 거리가 생기는데, 그 거리가 바로 마음 공부의 시작 지점이라는 거다. 동의한다. 그러니까 마음 공부는 추상적인 도덕론이 아니라, 매일의 실제적인 훈련이라는 거다. 오늘 어떤 마음을 지울 것인가, 아니면 어떤 마음을 키울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라는 거다. 미움은 줄이고 사랑을 키우는 일, 시기와 질투는 내려놓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가르는 일, 분노는 알아차리고 인내를 연습하는 일이다.
사람은 단번에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해서 선택하고, 연습하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마음이 달라지면,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그러면 삶의 방향이 달라지며 운명도 바뀔 수 있다. 뇌가소성 이론에 따라 뇌가 변할 수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 공부는 늦은 때란 없다. 오늘 줄여야 할 마음 하나를 줄이고, 오늘 키워야 할 마음 하나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3
마음의 힘,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체력보다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할 때 먼저 몸을 단련한다. 그러나 마음의 무게 앞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삶이 요구하는 무게는 무거운데, 이를 감당할 마음의 힘은 충분히 길러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마음 근력은 타고난 기질과 어린 시절의 경험, 관계, 성장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이후의 경험과 훈련을 통해 달라질 수 있다. 다음을 받아 들여야 한다.
- 실패를 견디고 기다리는 힘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거절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기회가 부족했을 수 있다.
▪ 현실은 때로 가혹하며, 개인의 힘 만으로는 바꾸기 어려운 관계와 환경도 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세상과 타인에게만 돌리고, 주변은 자기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을수록 마음은 더 깊은 좌절에 빠진다.
▪ 다른 사람의 마음과 지나간 과거,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삶의 불확실성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문제는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데 있지 않다. 세상이 반드시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데 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은 다르다. 사건 자체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느 정도까지 통제하려 하는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어떤 태도로 받아 들이는지 가 고통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현실은 내 뜻대로 바꿀 수 없을 때가 많지만, 현실을 대하는 마음의 힘은 훈련할 수 있다. 고통이 저절로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마주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사람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마음 근력은 이런 것이다.
▪ 마음 근력은 세상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힘이 아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더라도 나를 잃지 않는 힘이다.
▪ 마음 근력은 불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안을 안고도 해야 할 일을 하는 힘이다.
▪ 마음 근력은 상처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 받은 뒤에도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 마음 근력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자신에 대한 최종 판결로 받아들이지 않는 힘이다.
▪ 마음 근력은 무조건 참는 힘도 아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를 알고,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며, 지나친 요구에는 경계를 세우는 힘이다.
▪ 마음 근력이 강하다는 것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도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힘이다.
▪ 몸의 근육이 반복적인 훈련으로 길러지듯, 마음 근력도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훈련이 필요하다.
▪ 불편한 감정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며, 결과를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곧바로 비난하기보다, 상대의 입장에 서 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 때로는 실패와 거절을 받아들이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쌓여 마음의 근육을 만든다.
운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무거운 역기를 들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정확히 알고, 감당할 수 있는 무게부터 차근차근 들어 올리는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불안과 버거움을 인정하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마음을 돌보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마음의 성장은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한가”라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은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한 번 더 생각한 뒤 말하는 것,
▪ 불편한 감정 앞에서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
▪ 어려운 순간에도 해야 할 일을 조금씩 이어가는 것. 그것이 마음 근력 운동이다.
4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고, 상대적 박탈 감과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줄이려면 사회 구성원들이 기술의 이익과 비용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빨리빨리’ 한국인으로선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수사(修辭) 정도로 생각했다. 수 개월이 지나 ‘AI 초과 이익 재분배’ 논의가 활발해진 지금 그 말의 무게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AI 호황으로 발생한 초과 이익에 대한 고민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AI 산업의 성장과 부의 집중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부의 효과가 집중되는 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집값과 생활비가 치솟고 있다. 무소속 버니 샌더스(버몬트) 상원의원은 AI 기업의 성과를 국민에게 환원하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다. 그는 지난달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을 통해 ‘미국 AI 국부펀드법’을 제안하며 AI 기업에 일회성으로 50%의 세율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AI 성과 공유’ 논의가 나오는 것은 AI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 그만큼 커지고 있어서 이다.
▪ 대규모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농지와 용수, 전력을 소비하고,
▪ AI는 많은 노동자의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 AI 산업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도 전기 요금 상승과 주거 비 부담, 고용 불안 등 여러 형태로 그 비용을 나눠 부담하고 있다.
▪ AI가 창출한 부는 일부 기업과 투자자, 창업자에게 집중되고 있다.
기술의 혜택은 사유 화 되고 비용은 사회 화 된다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AI 관련 기업들이 막대한 법인세를 내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반론도 있다. 상당한 연구 개발 비용과 실패 위험을 감수한 기업에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어느 주장이 옳은 지에 앞서 따질 것은 이러한 논쟁이 왜 발생했느냐 이다. AI가 사회에 미칠 영향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에 대한 충분한 국민적 논의 없었기 때문이다. 1810년대 산업혁명 당시에도 영국 노동자들의 분노는 방직기 등 기계 파괴로 번져 ‘러다이트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당시에도 기술 변화의 충격을 흡수할 제도와 사회적 합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5
연중 제16주간 금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3,18-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오롯한 하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23)
믿음께서 뿌리신
믿음을 품어
믿음이다
희망께서 뿌리신
희망을 품어
희망이다
사랑께서 뿌리신
사랑을 품어
사랑이다
기쁨께서 뿌리신
기쁨을 품어
기쁨이다
참됨께서 뿌리신
참됨을 품어
참됨이다
선함께서 뿌리신
선함을 품어
선함이다
고움께서 뿌리신
고움을 품어
고움이다
굳셈께서 뿌리신
굳셈을 품어
굳셈이다
빚음께서 뿌리신
빚음을 품어
빚음이다
섬김께서 뿌리신
섬김을 품어
섬김이다
살림께서 뿌리신
살림을 품어
살림이다
이룸께서 뿌리신
이룸을 품어
이룸이다
6
내 마음은 주님의 말씀이 유연하게 머물고 자랄 수 있는 열린 밭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2026/7/24/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마태오 복음 13장 18-23절: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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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머무는 마음의 밭, 수용과 개방
사람의 마음은 밭과도 같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누군 가는 깊이 새기지만, 누군 가는 불안에 휩쓸려 금세 흘려보냅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온전히 기능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으로 ‘경험에 대한 개방성’을 꼽았습니다. 길가나 돌밭처럼 방어기제로 단단히 굳어버린 마음, 혹은 가시덤불처럼 삶의 염려와 통제 욕구로 꽉 막힌 마음은 새로운 은총이 뿌리내릴 틈을 주지 않습니다. 반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땅’이란, 자신의 연약함과 현실의 어려움까지도 방어하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말합니다. 사목을 위해 거창으로 향하는 길, 그곳에서 마주하게 될 이들의 굳은 표정을 떠올리고 있는 제 안의 조급함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열매부터 빨리 거두기를 바라지만, 주님께서는 먼저 마음의 흙을 부드럽게 일구라고 다독이십니다. 열매는 억지로 짜내어 맺히는 것이 아니라, 밭이 부드러워질 때 자연스레 맺히기 때문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로 마음이 척박해질 때, 잠시 멈추어 기도의 침묵 속에 머물러 보십시오. 말씀 한 구절에 마음을 내어드리는 것만으로도 굳은 마음의 빗장은 조금씩 풀립니다. 비록 지금 내 마음이 완벽한 옥토가 아닐지라도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밭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생명의 열매를 준비하실 것입니다. 진동길 마리오 신부(마산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며칠 전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친절하고 명확하게 해설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왜 어떤 이에게는 100배의 기적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지, 그 영적인 비밀을 아주 구체적으로 짚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씨앗이 떨어진 네 가지 밭을 우리 영혼의 상태에 비유하십니다.
▪ 첫째는 길바닥 같은 마음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오래 하다 보니 마음이 단단한 아스팔트처럼 굳어버린 상태입니다. 말씀이 마음 표면에만 머물러 있으니, 악마가 와서 그 기억과 감동을 쉽게 낚아채 갑니다.
▪ 둘째는 돌밭 같은 마음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받았다"며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깊이가 없어, 신앙 때문에 조금만 손해를 보거나 집안에 시련(환난과 박해)이 닥치면 이내 서운해하고 실망하여 쓰러지고 맙니다. 뿌리가 얕기 때문입니다.
▪ 셋째는 가시덤불 같은 마음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영적 질병입니다. 성당에 앉아있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마태 13,22)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근심이 더 크다 보니, 말씀의 기운이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
▪ 넷째는 좋은 땅입니다. 말씀을 귀담아듣고 깊이 깨달아, 삶 속에서 묵묵히 실천하는 영혼입니다. 이들의 삶에서는 반드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맺힙니다.
때로는 내 마음이 가시덤불이나 돌밭 같아 보여 낙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방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배반했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 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예레 3,15).
참된 목자는 굳어버린 양들의 마음 밭을 말씀의 쟁기로 갈아엎고, 영혼의 돌멩이를 골라내 주는 이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의 대리자인 사제들이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 안에서 매 순간 마음을 부드럽게 일구어 주시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거칠다고 해서 결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의 씨앗은 이미 매일의 미사와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에 풍성하게 뿌려지고 있습니다. 씨앗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관리입니다. 오늘 하루,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상 걱정의 가시덤불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던집시다. 잠시 침묵 중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의 돌멩이들을 골라냅시다. 주님의 자비가 굳어진 여러분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 저희가 매일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세상의 근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은총의 싹을 잘라버렸던 나약함을 용서하소서. 저희 안의 완고한 돌멩이를 골라내 주시고, 영혼을 숨 막히게 하는 가시덤불을 성령의 불로 태워주소서.
오늘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의 전구를 청하오니, 저희가 침묵 중에 당신을 만나 마음의 밭을 옥토로 일구고,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기쁨을 맺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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