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23일)
1
욕심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는 노자 <<도덕경>> 제 44장을 읽는다. 아침 산책 길에서 만난 원추리 꽃이다. 내 할 일만 하면 된다고 말해준다.
名與身孰親(명여신숙친) : 명성과 몸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身與貨孰多(신여화숙다) : 몸과 재산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
得與亡孰病(득여망숙병) :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큰 병인가?
是故甚愛必大費(시고심애필대비) : 지나치게 좋아하면 크게 낭비하고
多藏必厚亡(다장필후망) : 너무 많이 쌓아 두면 크게 잃는다.
知足不辱(지족불욕) :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知止不殆(지지불태) :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으니
可以長久(가이장구) : 오래오래 삶을 누리게 된다.
내 방식으로 다시 해석한다.
제목: 뭣이 중헌디?
명예 아니 이름과 자신 몸뚱어리 중 뭐가 더 중요한가?
메 몸뚱어리와 돈, 아니 재산 중 뭐가 더 소중한가?
소유와 나눔 중에 무엇이 더 괴로운가?
그런 까닭에
애착은 클수록 반드시 더 큰 대가를 치고
많이 가지려 할수록 반드시 더 많이 잃게 된다 네
그래서
만족할 줄 알면 치욕 당함이 없을 거고
그칠 줄 알면 위기가 없을 것이니
영원히 장수할 할 수 있을 거라 네.
2
"신(身, 몸)"은 나의 존재의 근원이고, 실(實)이고 체(體)이다. 반면 명(名, 이름)은 나의 존재 밖에 있는, 나를 부르는 약속이다. 이름은 나를 대표하는 것으로 약속된 것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몸이다. 몸과 이름(또는 명성이나 명예),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나에게 가까운가(친한가)? 그 다음 "화(貨)"는 '재화(財貨)'를 가리키며 문명 속에서 상품화된 물건들을 가리킨다. 물론 돈도 "화"에 속한다. 그리고 한문에서 "다(多)'는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다. 나의 존재 그 자체인 "몸(身)"만 있으면 항상 얻을 수 있는 "화(貨)",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이냐 묻는 거다.
왕필의 주석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재화무염 기신필소(財貨無厭 其身必少)"라 했다. '재화를 싫증 냄이 없도록 탐하면 몸을 가벼이 여기게 된다'는 거다. 다음은 도올 김용옥의 강의에서 들은 말이다. "손가락이 잘려도 화투장을 계속 들고 있는 놈이나 확장에만 미쳐 있는 대기업의 장(長)들이나 별 차이가 있을 손가?"
"得與亡孰病(득여망숙병)"는 말 그대로 하면,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병이냐'는 말이다. 물론 잃음도 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잃음 보다는 많이 얻음이 더 화근이 된다.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문맥상 "득(得)"은 '재화나 명예의 얻음'을 의미한다. "망(亡)"은 '망신(亡身), 즉 몸의 망가짐'을 의미한다.
'망신'이란 말은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사용한다.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여 자기의 지위, 명예, 체면 따위를 손상함'이라 사전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망신살(亡身煞, 몸을 망치거나 망신을 당할 운수)'이란 말도 자주 한다. 예를 들어, "망신살이 끼다", "망신살이 뻗치다"가 사용된다. 흔히 망신은 자신(身)이 곧 잡아 먹히리라는 사실도 모르고(忘) 눈앞의 승리에 취해 있다는 것이다.
장자가 밤나무 숲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산목(山木)> 편을 읽어 본다. "장자가 울창한 숲으로 여행을 갔다. 어디선 가 날개가 넓고 눈이 큰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밤나무에 앉았다. 장자는 돌을 들어 새를 잡으려 했다. 장자가 까치를 향해 돌을 던지려는 순간 까치는 자기가 위험에 빠진 것도 모르고 나무에 있는 사마귀 한 마리를 잡아먹으려고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사마귀는 까치가 자기를 잡아먹으려 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매미를 향해 두 팔을 쳐들어 잡으려 하고 있었다. 매미는 그것도 모르고 그늘에서 자신이 승리자인 양 모든 위험을 잊고 노래하고 있었다. 장자는 순간 세상 그 누구도 진정한 승자가 없음을 깨닫고 던지려던 돌을 내려놨다. 그때 밤나무 숲을 지키는 산지기가 쫓아와 장자가 밤을 훔치는 줄 알고 그에게 욕을 퍼부으며 막대기를 흔들어 댔다. 장자 역시 최후 승자는 아니었다."
장자가 밤나무 숲에서 깨달은 것은 망신(忘身)이다. 우리는 서로 먹히고 물려 있으면서 자신이 영원한 승리자인 듯 착각하며 산다. 지금 나의 승리 뒤에서 또 다른 승자가 내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망신의 축배를 든다. 내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을 누르고 이겨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 또한 누군가의 제물이 될 것이란 사실은 모르고 살고 있다. 장자 우화에 나오는 매미든, 사마귀든, 까치든, 장자든 각자 처지에서 자신이 승리의 주역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승리를 확신하고 승리에 도취해 있는 순간 뒤에서 그 승리를 뺏으려고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그칠 줄 알아야 한다.
이 망신 이야기는 박재희 교수의 글에서 보고 갈무리한 것이다. 세상에는 지금 승리가 영원하다고 착각하여 승자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내 앞의 승리만을 볼 줄 알았지, 내 뒤에 다가오는 불운의 그림자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평생 망신하지 않고 살아 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잠깐 방심(放心)하면 어느덧 망신의 길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3
노자는 우리들에게 성공과 부에 대한 욕망이 결국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리는 경고를 한 것이다. 명예(名), 돈(貨), 소유(得)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몸을 망치고 정신을 피폐하게 한다. 노자의 생각은 긴 역사 속에서 우리들에게 소중한 등불처럼 마음을 밝혀준다. 예를 들면 여럿이다.
▪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는 나이 서른 살에 죽음을 만난다.
▪ 천하를 차지하고 평생 전쟁터에서 보낸 초나라 항우도 스물아홉 살에 전쟁터에서 죽는다.
▪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통일의 기쁨을 다 누리지도 못하고 객사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라가 성공과 부를 누린 사람들의 마지막 외침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명성과 재물 그 자체가 생의 목적인 것처럼 살다가 몸을 망가뜨리는 경우들이 많다. 그보다도 밤낮으로 자기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자기의 체면을 세워 주는가 손상을 끼치는가 혹은 자기의 인간 관계 하나하나가 자기의 경제적 목적에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만 따지다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삶을 살아 가느라 고달프기가 그지없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위 문장은 우리 몸이 명성이나 재산보다 더욱 귀하고 중하니 몸을 해치면서까지 명성이나 재산을 위해 애태우고 감투와 돈을 찾아 신기루 쫓듯 하며 달려가는 그런 부질 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노자가 권고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 문장에서 "병(病)"은 '힘들고 골치 아프다'는 뜻이다. 소유와 나눔 중에 무엇이 더 힘들고 어려울까? 얻으려면 남의 소유를 빼앗아야 한다. 내 정신과 육체를 바쳐야 비로소 탐욕을 채울 수 있다. 반면, 나눔은 행복한 일이다. 돈을 벌 때 느끼지 못했던 나눔의 행복을 나중에 아는 사람이 많다. 통장에 돈을 쌓아 놓고 지키는 일이 더 골치 아픈 일이다. 성공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베풀 때 비로소 성공의 마지막 퍼즐이 맞추어 진다.
4
그 다음 문장 "是故甚愛必大費(시고심애필대비), 多藏必厚亡(다장필후망)"은 '그런 까닭에 애착이 클수록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많이 가지려 할수록 반드시 많이 잃게 된다는 거다. 여기서 "대비(大費)"는 "신(身)"의 재앙이고, "후망(厚亡)"은 "재화"의 재앙이다. 그래 도올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내 몸을 심히 아끼다 간 반드시 생명을 잃게 되고, 재화를 많이 간직하다 가는 반드시 후하게 망해 먹으리라."
마지막 문장, 마지막 문장,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可以長久(가이장구)은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 만족(足)을 알고 그치는(知) 것이 내 몸을 살리고, 내 정신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해답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노자의 철학이 소극적이고 허무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주체는 성공한 귀족이거나 권력자이다. 이미 성공이라는 문턱에 다다른 사람에게 하는 경고이다.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큰 탐욕을 보일 때 벌어지는 참사에 대한 경고이다. 소유는 나눔을 통해 빈자리가 비로소 채워진다. 지속(長久) 성공과 생존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족함을 알아야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를 "살아서 창고에 많이 간직하고, 죽어서 무덤에 많이 간직하면, 살아서는 도둑이 쳐들어올까 염려하고, 죽어서는 도굴될까 근심한다"고 푸는 사람도 있다. 명예와 몸, 몸과 재물, 잃음과 얻음, 그 어느 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더 이롭고 더 아름답지 않다.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렁이는 욕심이다. 그 욕심을 그칠 줄 아는 지혜와 균형이 필요하다. 적당히 만족하고 삼갈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재물을 크게 쌓지 않으면 많이 잃는 법도 없다.
욕심을 줄이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멈출 줄 아는 게 중요한 것은 곧 오래가기 위함이다. "가이장구(可以長久)"는 생존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고, 편안함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명예보다 몸-생명이 더 중요하다. 몸-생명을 잃은 뒤 재물이나 명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니 몸-생명을 성히 보존하려면 욕심을 그치고 자족하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가이장구"에서 제7장의 "천장지구(天長地久)" "以其不自生(이기부자생)"이라는 말이 소환된다. 노자는 천지의 모습에서 성인의 행동 준거를 찾고, 당연히 우리 보통 사람은 성인의 행동에서 우리의 행동 준거를 찾는다. '도(道)' 대신 천지(天地)를 말한 것은 천지는 '도'보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천지의 문제를 '영원'으로 말하지 않고, '장구(長久)'로 말하였다. 보통 장구는 시간의 지속을 말하지만, "장(長)"에는 공간적 성격도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천장지구"는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로 해석된다.
그리고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부자생(不自生)"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自)를 목적어 보면, 이해가 쉽다. 그러니까 "부자생"은 '자아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자기의식 없이 생성한다', '자신의 의지나 욕망에 따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려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조작하지 않는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삶을 연장키 위해 발버둥치지 않는다. 만물의 생성이 모두 자기로 인하여 이루어진다고 자만하지 않는다는 거다. "생이불유(生而不有, 낳되 소유하지 않음)" 계열의 해석이 가능하다.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것은, 천지는 만물의 생명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을 뿐 자기 자신의 사적인 생명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지는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능히 장구히 살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노자 이야기는 자생(自生)하지 않기 때문에 장생(長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오늘은 연중 제16주간 목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3,10-17>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이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다만 오롯이 그러시길>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느끼세요
느끼려 하면
느낄 수 있으니
보세요
보려 하면
볼 수 있으니
들으세요
들으려 하면
들을 수 있으니
아세요
알려 하면
알 수 있으니
믿으세요
믿으려 하면
믿을 수 있으니
바라세요
바라려 하면
바랄 수 있으니
사랑하세요
사랑하려 하면
사랑할 수 있으니
품으세요
품으려 하면
품을 수 있으니
스미세요
스미려 하면
스밀 수 있으니
되세요
되려 하면
될 수 있으니
하세요
하려 하면
할 수 있으니
이루세요
이루려 하면
이룰 수 있으니
6
나는 오늘 어떤 마음의 렌즈를 끼고 세상과 이웃을 보고 듣고 있습니까?
2026/7/23/연중 제16주간 목요일/대서
마태오 복음 13장 10-17절: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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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지각을 넘어 열리는 은총의 눈
우리는 늘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고, 듣는다고 다 마음으로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 상태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무의식적으로 걸러내는 현상을 ‘선택적 지각’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속에 상처나 불안, 굳어진 편견이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면, 아무리 따뜻한 사랑과 위로가 주어져도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온전히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준비된 마음만이 말씀을 알아듣는다고 일러주십니다. 이는 지적으로 똑똑해야만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방어적인 굳은 마음을 내려놓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투명하게 열어두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만나는 이들을 내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일상에 숨겨진 작은 은총들을 발견하려 할 때, 우리 영혼의 눈과 귀도 조금씩 밝아질 것입니다. 신앙은 새로운 것을 더 많이 아는 데 있기보다, 이미 곁에 주어진 은총을 새롭게 알아보는 영적인 시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정답을 강제로 밀어 넣는 말씀이 아니라, 굳은 마음을 천천히 깨우는 다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진동길 마리오 신부(마산교구)/
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영혼이 겪는 깊은 갈증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짚어주고, 그 갈증을 채워줄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듣는 눈과 귀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부터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시절에 지녔던 순수한 사랑을 애틋하게 추억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진 거룩한 첫 열매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풍요를 누리게 되자, 그들은 하느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도자들과 사제들마저 하느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좇는 기가 막힌 배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비극적인 모습을 두 가지 악으로 요약하십니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이신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동굴을 팠다”(예레 2,13).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생수’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천연 샘물을 뜻하지만, ‘저수 동굴’은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인공적으로 판 바위 구덩이입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며, 바위에 금이라도 가 있으면 물은 모두 새어 나가 버립니다. 하느님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곁에 두고도,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라는 ‘썩고 새어 나갈 인공 구덩이’를 파기 위해 인생의 온 힘을 낭비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마음이 완고해져서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하십니다. 그들은 주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의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반면, 부족하지만 주님 곁에 머물며 그분의 말씀을 새기려 애쓰는 제자들을 향해서는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 신앙의 신비는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깨닫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 앞에 머무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매일 미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는 우리 역시 이 제자들과 똑같은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소음에 눈과 귀를 빼앗기면 영혼은 말라갑니다. 갈라진 저수 동굴에는 결코 참된 평화와 안식이 담길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내 힘으로 채우려 버둥 거리던 세상의 구덩이를 과감히 버립시다. 그리고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영혼의 귀를 기울입시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여러분의 마음 위로, 영원한 생수의 강물이 가득히 흘러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당신을 두고, 세상의 헛된 욕심이라는 갈라진 저수동굴을 파헤치며 스스로 목말라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소서. 저희의 둔해진 눈과 귀를 성령의 은총으로 열어주시고, 매일의 삶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저희가 누리는 신앙의 특권을 기뻐하며, 들은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행복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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