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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는 바라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375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22일)

1
어제는 잠깐 비가 그친 사이에 주말농장에 다녀왔다.  그 길에서 오늘 사진처럼 밝게 핀 무궁화 꽃을 만났다. 고 신영복 교수님의 책, <<담론>>에 남긴 글이 소환되었다. "꽃에 대해서도 노촌 선생은 둘만 방에 남았을 때 이야기했습니다. 무궁화는 덕이 있는 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벌레와 진드기까지 함께 살아가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생각하면 꽃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꽃은 사람들의 찬탄을 받기 위해서 피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피는 것도 아닙니다. 빛과 향기를 발하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 입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한 것입니다. 시들어서 더 이상 꽃이 아니라 하지만 그 자리에 남아서 자라는 열매를 조금이라도 더 보호하려는 모정입니다. 꽃으로 서의 소명을 완수하고 있는 무궁화는 아름답습니다." 무궁화가 이렇게 예쁜 꽃인지 올여름 처음 알았다. 흰 꽃, 분홍 꽃만 있는 게 아니라 자주, 빨강, 색깔도 다양하다. 무궁무진 피어난다고 무궁화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 한 송이마다 벌이 한 마리씩 들어가 있다. 꿀벌이 귀한 시절이 되고 보니 열렬한 꿀벌을 품은 무궁화가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조길성

참 이상해
마당이 무언가 수상한 기운으로 가득해
숨바꼭질하다가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야
자고 나면 오이순이 호박 줄기가 고춧대가
상추 대가 한 뼘씩 자라는데
온종일 들여다봐도 꼼짝 않다가
자고 나면 또 한 뼘이니
마당엔 분명 뭔가 있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두 얼음땡이야
저것들이 모두 짜고 저러는지
귀신이 있던지
마당에 뭔가 있긴 있어

2
'너무 바라지 마라. 너무 기대를 하지 마라.' 실제로 나는 원하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바라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불안하지 않다. 나의 자유는 여기서 시작한다. 오늘 <인문 일지>는 폐친 민응기의 담벼락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다.

나는 지금까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이렇게 해석했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안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페북에서 새로운 해석을 만났다. 금방 마음에 와 닿는다.  순서를 바꾸어야 한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이다." 자유를 가로막는 것이 탐욕이다. 사람은 누구나 걸림 없이 자유로운 인생을 원한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것저것에 걸려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허덕이며 살아간다.  그 허덕거림의 근본 원인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은 한 번 얽히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어렵다.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차지 않는다. 더 가지면 만족할 것 같지만 욕망은 늘 다음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탐욕(貪)이라 한다.

탐욕은 잠시 즐거움을 주는 듯 보이나 결국 마음을 묶고, 삶을 무겁게 만들며, 끝내는 파멸로 이끈다. 진정한 자유는 원하는 것을 다 갖는 데서 오지 않는다. 원함을 조절할 줄 아는 힘,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지혜에서 온다. 부처님께서는 “족함을 아는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고 말씀하셨다. 욕망을 줄이는 순간   마음은 가벼워지고, 삶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간다. 자유는 멀리 있지 않다. 욕망을 내려놓는 바로 그 자리에 이미 와 있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아무 것도 너무 원하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어 절제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라'는 것을 읽는다. 노자 식으로 표현하면, "見素抱樸(견소포박) 少私寡欲(소사과욕)" 이다.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며,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라'는 이 문장을 나는 나의 만트라 삼았다. 이게 '도'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노자의 생활 철학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인위적 의식 세계에서 떠받드는 인위적인 모든 것을 청산하고 우리 본래의 마음 바탕,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만'은 '마음'을 의미하고, '트라'는 '도구'이다. 만트라를 말 그대로 하면, '마음 도구'이다. 특정한 음절이나 단어, 문장을 반복하면 강력한 파동이 생겨 마음이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트라는 나를 정신차리게 만드는 경종이다. 부패와 발효는 똑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어떤 미생물이 작용하는가에 따라 해로운 변화와 이로운 변화로 나뉘듯이, 어떤 문장이나 단어는 무의식 속에서 정신을 부패 시키고, 어떤 단어와 문장은 기도처럼 마음에 희망과 의지를 발효시킨다. 이게 '만트라'이다. "소사과욕"으로 해석하고 싶다.

우리는 매일같이 무언가를 바라며 산다. 몸은 건강하기를 바라고, 일은 탄탄대로이기를 바라며, 타인은 내 마음 같기를 바란다. 고통을 멀리하고 쾌락을 추구함은(離苦得樂, 이고득락)은 어쩌면 인류가 오래 다져온 마음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간절한 ‘바람(Wanting)’이 실은 우리 삶을 갉아먹는 가장 큰 결핍의 뿌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이는 드물다.

페친 민웅기는 <<보왕삼매론>>의 다음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우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 하시되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 아름다운 문장이 표명하는 건 그저 그러한 금욕주의가 아니다. 삶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고난은 ‘제거해야 할 불순물’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필수 촉매’라는 인식의 대전환이라는 것이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은 명나라 묘협(妙叶) 스님의 <<보왕삼매염불직지>> 중 ‘십대애행(十大碍行)’을 일컫는 말로, 삶의 역경을 수행의 기회로 삼는 10가지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피하고 싶은 10가지 상황을 역설적인 지혜로 다음과 같이 풀어내고 있다. 그러니까 보왕삼매론는 삶의 고난과 역경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깨달음과 성장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즉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이라 말할 수 있다. 법륜 스님의 보왕삼매론 강의 내용을 공유한다.
▪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우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기 쉬우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기 쉬우니,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어라.
▪ 수행하는 데 마귀(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귀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 지지 못하기 쉬우니, 모든 마군(마귀)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기 쉬우니, 여러 겹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기 쉬우니,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 남이 내 뜻에 순종 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 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기 쉬우니, 내 뜻에 맞지 않은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무리를) 삼으라.
▪ 공덕을(덕을) 베풀려면 과보를(지나친 보답을)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명예를 추구하는) 뜻을 가지게 되기 쉬우니, 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쉬우니, 적은 이익으로 부자가 되라.
▪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기 쉬우니,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3
그리고 현대 뇌과학은 이를 ‘인지적 유연성(Cognitive Flexibility)’이라는 말로 설명한다고 했다. 또한 우리가 고난을 마주할 때 뇌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은 오히려 훨씬 더 활발하게 작동한다는 거다. 안락한 환경에서는 뇌가 관성에 젖어 퇴화하지만, 예기치 못한 장애물과 마주할 때 비로소 새로운 신경 회로가 연결되며 이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더욱 확장하기 시작한다는 말이 좋다. 나는 확장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신경가소성이란 경험과 학습을 통해 뇌의 신경 회로가 재구성되는 성질을 말한다. 고난은 뇌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이다.

아무도 걸은 적이 없는 길을 계속 건너 가자는 것이 내 철학이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으며,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만난 누구든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는 맛은 관계이고, 거기서 일어나는 활동의 폭이 확장될 때 일어난다. 게다가 관계와 활동 속에서 일어나는 수렴하고 발산하는 순환 가운데 내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다. 이걸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소유 욕망에 사로잡혀 집착하기보다 존재로 건너가기를 하며, 자유를 확장해 나갈 때 발산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관계와 활동이 작동된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와 똑같은 말만 하는 사람은 필요 없다. 그래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지적 유연성이라는 말은 변화하는 환경이나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기존이 익숙한 생각과 습관을 극복하고 사고의 틀을 전환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의 정답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을 다각도로 바라보며, 지식을 상황에 맞게 즉흥적으로 재구성하는 창의성의 핵심 요소이다. 이를 기르는 학습 방법은 단편적 암기보다 상황에 맞는 지식의 응용을 강조하며, 다양한 관점과 사례 중심의 학습을 통해 달성 된다는 거다.

4
그리고 심리학의 ‘수용 전념 치료(ACT,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역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고 했다. 이 치료는 고통스러운 생각이나 감정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수용),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삶의 방향으로 행동하는(전념) 심리 치료 기법이다. 그러니까 고통을 회피하려 발버둥 칠수록 그 고통은 내 삶의 중심부를 잠식하지만, 그 실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순간 고통은 주관적인 사건에서 객관적인 관찰 대상으로 전환된다는 거다. 그러니까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서 ‘병고를 양약으로 삼으라’는 통찰은 600년 전의 문법으로 쓰인 고도의 심리 치유 술인 셈이다. 많은 이들이 ‘공부’를 장애를 제거해 나가는 과정으로 잘못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진짜 공부는 나에게서 마(魔)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군(魔軍)이 마저 자신의 수행을 돕는 벗으로 삼는 경지이다. 내 뜻대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오만을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세상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민웅기의 말을 직접 공유한다.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패배주의는 아니다. 결과를 향한 맹목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의 과정에 온전히 자신을 던지겠다는 가장 적극적인 선언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원망하는 대신, 그 현실이 던지는 물음에 응답할 때 삶의 질감은 전혀 다른 빛을 띠게 될 것이다. 오늘 하루,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들 앞에서 조급해지는 기미가 들거든 기억하자. 지금 내 앞에 놓인 그 억울함과 장애물이야말로, 우리의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빚어낼 정교한 조각도라는 사실을. 바라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모든 것을 얻는 것이 21세기의 소란스러운 풍랑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고전이 건네는 최고의 입세간적 처세술이자 자유라 믿으며."

다음은 언젠가 <인문 일지> 쓴 적이 있는 거다. "고통을 사랑하라!" <<스포츠를 위한 강인한 정신 훈련>>인 책을 낸 짐 로허의 말이다. 이 말을 소개한 팀 페리스는 이런 말도  소개했다. 고통을 사랑하면, 어지간한 고통에 우리는 의연(毅然)할 수 있다. '의연'이란 '의지가 굳세어 당당함'을 말한다. 고통 앞에 당당하고, 초조해 하지 많으면, 다른 기회를 엿볼 수 있다. 의연함은 장자가 말하는 "양생주(養生主)"이기도 하다. 즉 중도를 따를 기회를 찾는다. 장자는 "착하다는 일 하더라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나쁘다는 일 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착하다고 하는 일을 하더라도 이름을 염두에 두고 하지 말고, 세상에서 나쁘다고 하는 일-자신에게는 전혀 나쁜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을 하다가 벌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말라는 말이다. 장자에게 근본적인 것은 착한 일을 한다, 나쁜 일을 피한다, 하는 등 의식적 가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표피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연하고 묵직하게 '중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이 아니라, 이길 수 없는 적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게 이길 수 없는 적을 다루는 삶의 지혜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 인생의 실세는 아무 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이다.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에 담긴 이야기를 어떻게 경청할 것인 지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 이 말이 멋지다. 내가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수준이 곧 나의 현재 모습이다.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을 사랑하라는 말이 자신에게 가하는 째칙질이 아니다. 모든 성장에는 불편이 따른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메시지일 뿐이다. 그러니 고통을 이길 수 없다면, 고통을 사랑하는 편이 낫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에서 출발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들어 보자. "고통은 필연적이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당신은 달리면서 '너무 아파. 더 이상 못 달리겠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아픈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더 견딜지는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다."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은 다르다. 고통은 어떤 경험이다. 주로 다양한 감각으로 구성된다. 괴로움은 어떤 경험, 특히 고통에 의해 촉발되는 정신적 반작용이다. 괴로움의 본질은 실체의 거부이다. 다시 말하면 실체의 부정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이다, 예컨대, 고통을 경험 할 때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쾌락을 경험할 때는 그 쾌락이 강해지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렇게 되진 않는다는 데서 괴로움이 시작된다. 괴로워 하지 않으려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훈련해야 한다.

팀 페리스는 자신의 책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에서 100명이 넘는 인생 현자들이 제사한 성공 비결을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라
▪ 좋은 날을 하나씩 쌓아 좋은 인생을 만들어라
▪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충분하다.
▪ 어떤 게임이든 승리의 비결은 너무 애쓰지 않는 데 있다.
▪ 괴상해 보여도 자신을 받아들여라.
▪ 세상에 정답은 없다. 더 나은 질문만 있을 뿐이다.

5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로 말씀은 <요한 20,1-2.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이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님 찾는 사람을 님께서>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요한 20,1)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어둠을 헤치고
길을 나선
빛 찾는 사람을
빛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불신을 거슬러
길을 나선
믿음 찾는 사람을
믿음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절망을 뚫고
길을 나선
희망 찾는 사람을
희망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미움을 가르고
길을 나선
사랑 찾는 사람을
사랑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죽임을 뿌리치고
길을 나선
살림 찾는 사람을
살림께서
끝내
오롯이
품으시다

6
슬픔의 지하실에 웅크려 있을 때, 내 이름을 다정히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까?
2026/7/22/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요한 복음 20장 1-2.11-18절: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내 이름을 불러 주시는 분
살다 보면 애써 붙들고 있던 것을 잃어버려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날이 있습니다. 오늘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러했습니다. 극심한 슬픔과 상실감 속에 시야가 좁아져, 바로 곁에 서 계신 주님조차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큰 충격 앞에서 이성이 마비될 때, 우리는 마치 상처 입고 두려워하는 ‘내면 아이’가 캄캄한 지하실에 웅크린 채 울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 어둡고 깊은 슬픔의 지하실에 갇혀 있는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의 신비를 장황하게 설명하며 위로하지 않으시고, 그저 조용히 “마리아야!” 하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누군가 나의 고유한 이름을 부르며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수용해 주는 것은, 웅크린 내면 아이를 빛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치유의 시작입니다. 그 한 마디에 굳게 닫혀 있던 마리아의 마음이 열리고, 눈물 속에 가려져 있던 시야가 환해집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텅 빈 무덤 앞을 서성이며 메마름을 느낄 때조차, 주님께서는 우리 안의 가장 ‘연약하고 상처 입은 자아’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계십니다. 신앙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를 부르시는 그 따뜻한 음성을 알아듣고,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고 다시 일어서는 일입니다. 진동길 마리오 신부(마산교구)/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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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오늘은 교회가 참으로 아름답고 뜻깊게 기념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로 높이시며, 이 날을 의무 축일로 격상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절망의 한가운데서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 하나로 어둠을 뚫고 나아간 한 여인의 위대한 신앙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주간 첫날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두려움에 싸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지만, 마리아를 움직이게 한 것은 그 두려움을 뛰어넘는 ‘사랑’이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려 비참한 삶을 살던 자신을 구원하시고 인간다운 존엄성을 찾아주셨던 예수님, 그분이 사라졌다는 슬픔에 마리아는 무덤가에서 통곡합니다. 
천사들이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그녀는 대답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3). 마리아의 관심은 오직 ‘내 사랑하는 주님’이 어디 계시는가뿐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고백처럼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아가 3,1) 하는 그 간절함이 마리아의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뒤에 서 계셨지만, 그녀는 눈물에 가려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라는 무모하고도 절절한 사랑의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을 향한 웅장한 외침이 아니라, 고통받던 그녀를 처음 만나 구원해 주셨던 바로 그 다정하고 친밀한 목소리였습니다. 주님이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를 짓누르던 절망의 어둠이 단번에 걷히고 통곡은 기쁨의 찬미로 바뀝니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외치며 주님 발치에 엎어집니다. 주님은 이론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심으로써, 당신이 여전히 그녀를 알고 계시며 사랑하고 계심을 부활의 생명으로 증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당신의 부활과 승천 소식을 전하라는 위대한 임무를 맡기십니다. 낙담하여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부활 증인이 되어 외칩니다. “내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그녀의 선포는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이름을 부르셨고, 내가 그분의 사랑을 직접 만났습니다!”라는 뜨거운 삶의 증언이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무덤가에서 울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건강이나 경제적 위기, 깨진 인간관계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절망의 눈물에 눈이 멀어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무개야, 왜 우느냐?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너를 잘 안다.”
오늘 하루, 내 슬픔에만 갇혀 있던 눈을 들어 나를 부르시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기쁘게 세상 속으로 달려가, 내 삶의 자리에서 “내가 오늘 주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하고 당당히 고백하는 복된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 오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뜨거운 사랑과 눈물을 저희에게 주소서. 저희가 삶의 어둠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간절히 찾게 하소서. 슬픔에 가려 곁에 계신 당신을 몰라볼 때에도, 다정하게 저희 이름을 불러주시는 당신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 또한 세상에 기쁘게 달려가 ‘내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충실한 부활의 전령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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