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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안내 지도인 심우도(尋牛圖) 4

375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20일)

1
자신의 삶을 그리는 바탕은 인법지(人法地)라 한다. 인간은 땅을 따라야 한다. 땅이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지법천(地法天)이다. 땅은 하늘을 따라야 한다. 땅에 하늘이 없으면 못산다. 그 다음은 천법도(天法道)이다. 하늘은 '도'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도'는 자연을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따르는 것이 '도'이다. 사회 속에서 이렇게 살기 쉽지 않지만, 나 스스로의 생각과 원칙을 따라 사는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여기서 자연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연 현상이라 기보다는 억지로 지어낸 행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것", 즉 무위성(無爲性)을 자연이라 한 것이다. 자연은 늘 균형을 찾는다. 

오늘 사진처럼, 자연이 매일 내리는 비로 젖어 있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비 오는 날의 이야기이다. 


비오는 날은 그대가 그립다/허은주
 
허전한 마음 속으로
빗물이 걸어 들어와
술잔처럼 채워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별빛과 만나는
사소한 일조차
아득하게 멀어지고

그리움의 색깔도
조금씩 바래지는 삶의 긴 행로
유리창을 적시는
빗소리에는 쉽게 젖어 드는데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은
사랑의 흉터 하나 남는다 해도
오늘처럼
비오는 날은
마음 속의 그대가 그립다

2
우리가 ‘나만  옳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아무도 옳지 않다. 그러면 누가 그른가? 아무도 그르지 않다. 각기 각자의 방식으로 옳은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각자의 옳음에서 비롯하여 각기(各其, 저마다의 사람)의 근거로 시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인식의 기초인 ‘우리의 앎'은 과연 신뢰할만한 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과 지성은 부분성과 편파성으로 인해 사물의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거나 들을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볼 때에 그 사람의 이마와 뒤통수를 동시에 볼 수 없고,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없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태생적으로 편파적이고 부분적이다. 한계가 있다. 서 있는 건물을 보면서 동시에 무너지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양면을 모두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서로 의지해 있고, 이웃해 있다. 밤과 낮은 연속되어 있으나 동시에 볼 수 없다. 이처럼 제한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시비가 발생하는데, 장자는 이를 원숭이들의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비유한다. 때문에 모든 시비와 갈등의 고조는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장자는 시비를 중단하라 거나 소멸시키라고 하지 않고, 화(和)하라고 한다. 단(斷)도 멸(滅)도 아니고, 시비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화(和)를 주장한다. '화하라'는 것은 시비를 잠재워버리거나 잘라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앎'에 기초한 시비의 근거가 서로 허구적인 것임을 깨달어서 스스로 풀어지도록(해소되도록)하라는 것이다. 그 말을 줄여서 ‘화시비’(和是非')라 한다. 시비하지만 시비가 없는 것이고, 시비가 없으면서도 각자의 시비가 모두 인정되는 것, 즉 양행(兩行)이다. 

이런 '화시비'를 위해서는 자아의 판단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조화에 맡겨 분별지를 쉬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자연의 균형에 맡기는 것, 즉 ‘휴천균(休天鈞)'이다. '천균'은 자연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감각을 지닌 조화로운 마음이다. '천균에 머문다'는 것은 옳다 그르다는 지식의 작용을 그치고,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경지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비는 사라지고 마음은 지극히 조화를 얻게 된다.  비슷한 말이 '양행'이다. 대립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바라보고 두 입장을 모두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양쪽을 모두 수용하는 전체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둘 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이성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사람은 비로소 개인적으로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간이 된다. 사랑이 없는 이성은 비정한 것이 되고, 이성이 없는 사랑은 몽매와 탐닉이 된다. 이성이 먼저냐 가슴이 먼저냐? 그러나 이성은 땅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 그 흙 가슴을 떠날 수 없다. 마치 컴퓨터의 체(體, hard-ware)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그 용(用, soft-ware)이 실릴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떠나는 것은 ‘질(質) 버리고 양(量)’을 취하는 것이며 사용 가치를 버리고 교환 가치를 취하는 것이다.

3
오늘은, 어제부터 공유하고 있는, 심우도의 7단계인 망우존인과 8단계인 인우구망을 읽는다.

7단계인 망우존인(忘牛存人)은 소는 사라지고, 나만 남는다는 거다.

고향의 마당에 안착했다. 이제 '소(참된 나)'는 필요 없다.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을 탔다면 강을 건넌 뒤에는 뗏목을 버려야 하듯, 본향에 이른 목동에게 '소'는 더 이상 목적지가 아닌 지나온 과정일 뿐이다. 일곱 번째 단계인 망우존인(忘牛存人)은 깨달음이라는 도구조차도 놓아버리는 역설의 경지다.

심리학에는 '목표 지향적 행동의 소멸'이라는 개념이 있다. 목표 지향적 행동(Goal-Oriented Behavior)은 개인이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기를 부여하고, 행동을 계획하며, 실행에 옮기는 일련의 인지적 및 심리학적 과정을 말한다. 이 개념의 핵심은 인간이 단순한 본능이나 외부 자극에 의해서 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 결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바탕으로 주도적인 선택을 한다는 점이다. 목표 지향적 행동의 소멸은 보상의 부재, 인지적 피로, 동기 부여의 상실로 인해 특정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동이 점진적으로 약화되거나 중단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인 가를 이루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지만, 막상 그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 목표에 매달렸던 긴장감은 일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만약 목표를 이룬 뒤에도 여전히 그 도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새로운 구속이 된다.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ㄴ'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수단 자체가 목표로 변질되어 원래의 목적이 사라질 수 있다.

'소'를 길들이기 위해 매달렸던 명상, 수행, 철학적 사유들조차도 이제는 ‘참 나’라는 온전한 자아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다. 노자가 도달한 비움의 지혜는 "비움의 지극함에 다다라, 고요함을 도탑게 지키라(致虛極, 守靜篤, 치허극 수정독)." 나 자신도 매우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호가 '허정(허정)'이다. "올바른 경청은 마치 술에 취한 듯 허정하게 듣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나는 이 말에 눈이 꽂혔다. '허정하게'라는 말을 쓰는구나!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노자)에서 따온 말이 '허정'인데. "허함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히 한다." 아니면 "비움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도답케 하라!" 이렇게 해석한다. 비움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면 고요함이 도타워지며, 고요함 지키기를 도탑게 하면 비움이 지극해진다는 상보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술에 취했을 때가 '허정'이 된다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걱정이 없어지고, 간이 부어 용감해 진다. 그래서 술에 취한다는 것은 비우는 것일 수 있다. 그냥 쉽게 비워지지 않으니까, 술을 마시고 비우는 것이다.

비움은 집중이다. 생각을 비우면 현재에 더욱더 집중하게 된다.
비움은 자유이다. 생각을 비우면 어떤 사람의 말, 표현, 사상에도 걸림 없는 자유로운 삶이 가능해진다.
비움은 평화이다. 생각을 비우면 다툼과 괴로움이 없어져 고요함 즉 평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비움은 자비이다. 나의 생각을 비우니 나와 너가 사라진 전체 즉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니 만물을 아끼고 사랑한다.

걱정하지 말고, 비우자.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고,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 충만하게 오늘도 즐겁게 보내자고 마음 먹곤 한다. 노자의 행복론이기도 하다. 욕심을 비우면 존재가 채워지고, 고요함을 지키면 삶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소유하려는 마음을 비우면, 그 양만큼 존재가 자리한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문제는 근데, 그걸 얻었다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만족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목표를 찾아 나서는 첫 마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거나 모르기 때문이다. 소유는 우리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다. 목표를 끝내 달성하는 것도 즐겁지만, 무엇보다도 날마다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갖고 즐겨야 하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마저 잊는 것, 그것이 가장 깊은 고요이다. 내가 '소(참된 나)'를 찾았다는 자부심, 내가 이만큼 수행했다는 관념, 내가 남들보다 더 맑아졌다는 우월감조차 '소'에 불과하다. 이 모든 ‘깨달음의 상(相)’을 버릴 때 비로소 ‘사람(人)’만 남는다. '소'라는 '방편'에 가려져 있던 본래의 ‘나’가 아무런 꾸밈 없이 그 자리에 드러나는 것이다. 방편(Upaya)은 진리에 이르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나 방법이고, 목적지에 도달한 후에는 마땅히 버려야 할 도구이다. 본래 불교 용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진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임시적인 가름을 의미한다. 일상에서는 '임시방편'과 같은 형태로 쓰인다.

뇌과학적으로는 이를 '전두엽의 이완'이라 부를 수 있다. 목표를 추구할 때 활발히 작동하던 전두엽의 실행 기능이 한결 여유로워지고, 그 빈자리에는 순수한 존재의 감각이 차오른다. 무언가 되려고 애쓰는 상태에서, 그저 존재하는 상태로의 전환이다. '소'를 잊었다는 것은 소를 잃어버렸다는 뜻이 아니다. '소'와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소'를 의식할 필요조차 없어진 상태다.

자신이 쥐고 있는 고삐를 보라. 아직도 ‘나는 수행 중이다’, ‘나는 무엇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매어 있지는 않은가? "자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인가, 아니면 깨달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람인가?" '소'를 잊은 목동은 이제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고요히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4
8 단계인 인우구망(人牛俱忘)은 텅 빈 원 안에 서다는 거다. 사람도 소도 다 잊었다는 것은 더 이상 '구하는 자'도 없고, '구하는 대상'도 없다는 의미이다.

'소(牛, 참된 자나)'도 잊고, '소'를 찾던 나(人)조차도 잊었다. 십우도의 여덟 번째 단계인 인우구망(人牛俱忘)은 텅 빈 원 하나로 상징 된다. 거의 다 왔다. 주관과 객관, 나와 세상, 깨달음과 무지라는 모든 이분법적 사고가 사라진 '완전한 공(空)'의 상태에 도달했다.

페친 민웅기는 이런 질문을 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를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이런 경지에 닿을까? 우리는 평생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온갖 명사와 형용사를 수집한다. 직업, 성격, 성취, 소유물로 나를 정의하려 든다. 그건 헛된 일라 했다. 인우구망의 단계에서는 그 모든 정의를 털어낸다. 나라고 믿었던 생각, 나라고 집착했던 존재감조차도 찰나의 현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텅 빈 원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가 아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자리, 그것이다.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는 특정한 생각, 감정 상태를 '나' 자체와 동일시하지 ㅇ낳고,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저긍로 관찰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를 통해 강렬한 감정이나 부정적인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특정 생각, 감정,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관찰자적 시점에서 바라보는 심리적 태도이다. 마음 챙김 훈련의 핵심으로, 생각이나 감정에 압도당하지 않고 통제력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준다.

노자는 '도'의 근원을 이렇게 노래한다. "만물이 함께 일어나지만, 나는 그 돌아감을 본다(萬物並作, 吾以復觀)." 세상의 모든 소란함과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이 결국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가 돌아가는 흐름임을 관조 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건은 '나'다. '나'라는 아집(我執)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나는 우주의 모든 만물과 연결된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전체가 시작되는 역설이다.

<<도덕경>> 제16장에 나오는 말이다.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내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말이고, 마음 챙김을 할 때마다 소환하는 문장이다. 번역하면,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가 된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도올의 주장처럼,  노자의 허(虛, 비움)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빔' 이며, 그의 "정(靜)"은 '동(動)'을 함유한 '정' 이기 때문이다. '정지정(靜祉靜)'이 아니라, '동지정(動之靜)'이라는 말이다. 노자의 정은 동의 가능태로 서의 정일 뿐이다. 정하지 않고 서는 동할 길이 없다는 거다. "유무상생(有無相生)"에서 처럼, '허(빔)와 만(참)', '동(움직임)과 정(고요)'과 같은 모든 개념이 상호 부정의 대자가 아니라, 서로 기다리고 서로를 긍정하는 대자의 관계에 놓여 있다. 기다림, 느낌, 수용과 배제 속에서 생성은 이루어진다. 생성은 곧 창조이며 창조는 새로움의 요소이다. 그래 나는 이 문장을 비워야 채워지고, 고요해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비쁜 날들이 계속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 해지려고 한다. 이젠 문장 구조를 알겠다. '치허'를 지극하게 하고, '수정'을 돈독하게 하라는 것으로 읽는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이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이다. 이 말은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란 뜻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만물이 더불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고 해석한다. 나는 '만물이 다 함께 자라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로 본다"로 읽고 싶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 모양 속에서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는 거다.

나는 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되돌아 감"을 나는 늘 주목한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이를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제40장)라 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되돌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너무 그리워하지 말자. 때는 기다리면 온다.

뇌과학적으로 이를 설명하자면,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 네트워크가 잠시 침묵하고, 대신 '연결된 의식의 확장'이 일어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내 안의 좁은 창문이 사라지고, 온 세상이 나의 정원처럼 느껴지는 개방성이다. '소'도 없고 사람도 없기에 오히려 그곳에는 온 우주가 가득하다.

페친 민웅기는 이런 질문들을 한다.
- 자신은 지금껏 '나'라는 좁은 감옥을 짓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는가?
- 그 견고한 벽을 허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여행의 마침표가 아닐까?
- 자신이 '나'라고 붙잡고 있는 그 고집을 내려놓는다면, 그 빈자리에 무엇이 차오를 것 같은가?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다시 태어나는 길이다. 텅 빈 원 안에서 나는 이제 비로소 자유롭다.

5
연중 제16주간 월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2,38-42> "요나의 표징" 이다.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참된 함께>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마태 12,38ㄴ)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39ㄴ)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
나의 무엇이
아니라
나를
믿고
바라고
사랑하듯
나의 무엇이
아니라
내가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바라고
사랑합니다

6
나는 표징을 찾습니까? 말씀에 맛들입니까?
2026/7/20/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마태오 복음 12장 38-42절: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표징 너머
이탈리아 파도바 근처의 몬테 루아Monte Rua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1530년 무렵 지어진 까말돌리회 봉쇄 수도원이었는데, 지금은 수사님들의 수가 줄어 수도원의 일부를 순례객들을 위해 개방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봉쇄 수도원 독방에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방으로 들어가며 깜짝 놀랐습니다. 돌로 둘러싸인 좁은 방에는 책상, 침대, 제대, 성경책과 아무 문양도 없는 십자가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단순할 수 있느냐는 제 질문에, 안내하던 수사님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깊이 기도할 때, 때로는 색깔도 걸림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은 “스승님,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감각에 걸리는 자극적인 표징들을 요구하는 건 비슷한 듯합니다. 나주의 윤 율리아와 그를 따르는 신자들이 떠오릅니다. 그곳을 보면 눈물, 피눈물, 성모상 등등 감각적인 표징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더 자극적인 표징들로 홍보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지요.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가장 거룩한 시기인 성주간에 성당 내부의 모든 성상, 성화, 심지어 십자가도 자주색 천으로 가립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최용감 안젤로 신부(광주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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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화려한 축복만을 바라며 하느님을 찾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닌 ‘삶의 변화’와 ‘겸손한 동행’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미카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일종의 ‘법정 공방’을 벌이십니다. 하느님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그들을 구해내고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으나,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잊고 하느님과 멀어졌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성들은 번제물이나 엄청난 양의 제물, 화려한 종교 의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사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미카 예언자의 입을 통해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본질’을 선포하십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제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세상에서 정의롭게 살고(공정),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며(자애), 내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의 손을 잡는 것(겸손한 동행)이야말로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된 예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본질을 놓친 채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미 수많은 기적을 목격하고도 예수님을 시험하며 더 자극적인 표징을 요구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9).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 니네베를 회개시켰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표징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코앞에서 더 크신 분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을 꾸짖으시며, 말씀 한마디에 온 고을이 단식하며 회개했던 니네베 백성과 지혜를 찾아 땅끝에서 온 남방 여왕의 열정을 본받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처럼 나만의 조건부 표징을 요구하며 주님을 시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눈을 들어보면 우리는 이미 과분할 정도의 기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생명의 기적,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사랑의 기적, 그리고 대가 없는 용서와 자비가 이미 우리 곁에 가득합니다. 주님은 더 이상의 기적 쇼를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말씀에 응답하여 회개할 때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이용해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변화되는 것입니다. 거창한 무언가를 바치려 애쓰기보다, 오늘 내 곁에 있는 지친 가족의 손을 잡아주고 작은 이기심을 내려놓는 ‘삶의 회개’를 봉헌합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최고의 제물입니다.
사랑과 공정의 주님, 저희가 눈앞의 화려한 기적만을 좇으며 이미 베풀어 주신 수많은 은총을 알아보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소서. 거창한 형식보다 ‘공정과 자애와 겸손’을 원하신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게 하소서. 오늘 저희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낮춤으로써, 매 순간 당신과 기쁘게 동행하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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