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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안내 지도인 심우도(尋牛圖) 3

375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19일)

1
고진하 시인은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고 말했다. "아라비아 숫자"는 일종의 기호일 뿐이지만 그 숫자 때문에 희망을 품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아라비아 숫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일렬로 세워 계층화 한다. 성인이 되었다고 하여 "아라비아 숫자"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연봉, 타고 다니는 차의 배기량, 살고 있는 집의 평수는 사람들을 가시적으로 서열화 한다. "아라비아 숫자"는 사람들을 우쭐거리게 만들거나 주눅 들게 만든다. "터번도 두르지 않은 아라비아 숫자"는 힘이 세다. 

하지만 "아라비아 숫자"가 할 수 없는 일도 많다. 사람의 품격이나 아름다움, 공감 능력, 책임감, 우정, 사랑 등을 계량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라비아 숫자"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욕망은 특정한 방향을 행해 내달리도록 만든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늘 숨이 찰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백이 자기 속에 없기에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을 보일 수가 없다. 그의 시를 공유한다.

천국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고진하
 
한여름의 시청 광장 
마천루 위에 까마득히 떠 있는 
광고탑, 뜨겁게 달아오른 아라비아 숫자들이 
불인두처럼 이글이글 내 몸에 닿아 
쉬 지워지지 않을 깊은 文身(문신)을 아로새긴다 
아, 악! 
벌려진 입을 
나는 다물지 못한다 순간, 
내 내장을 거꾸로 훑으며 구토하듯 목구멍으로 
쏟아져나온 불, 불타는 아라비아 숫자들이 
너희들 몸에도 깊은 文身(문신)을 아로새긴다 
전염성이 강한 모양이다 
지옥에서 활활 타오르는 결핍처럼 몹시 
전염성이 강한 모양이다 
성적 부진을 비관해 빨랫줄에 목매 죽은 
국민학교 4학년 그 어린것도 
혜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허영게 까뒤집힌 눈동자에 
아라비아 숫자들이 불거져 있었을까 
오, 결핍은 
작렬하는 사막에 솟는 불기둥인 양 
아무데서나 불타오르고 
터번도 두르지 않은 아라비아 숫자들이 
태양을 삼킨 채 
광고탑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깨닫는 것은 순위보다 삶의 태도이다. 순위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다음 말이 소환된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숫자보다 모두가 공생하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2
페친 민웅기의 담벼락을 읽고, 십우도를 갈무리하여 공유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어제부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애쓴다.

불교는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진여(眞如)나 여여(如如)의 경지를 강조한다. 불교는 극단적으로 두 가지 마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집착하는 마음’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 극단적 두 마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삶을 산다.  ‘집착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에 불만족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은 우리의 삶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다는 거다. <<대승신기론>에 이런 문장이 있다. “하나 뿐인 우리 마음에 두 가지 양태, 즉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이 있다.” 이 말은 집착하는 마음도 내 마음이고,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도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진여문"을 '무관심한 마음 혹은 죽은 마음'과는 구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집착이란 자신이나 타인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일 수 있다. 예컨대 외모만 보느라고 다른 모든 가치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망을 통해 존재하는 인연(因緣)의 존재일 뿐이다. "진여의 마음",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란 상대방도 의식하지 못한 그의 모든 가치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다. 예컨대, 외모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가진 나머지 훌륭한 가치들을 돌보지 않기 쉽고, 당연히 그것들은 무관심에 방치된 채 시들고, 마침내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 "진여의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쓸데없는 갈등과 대립도 피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편견을 가지고 어떤 것들을 미리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일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편견 같은 집착을 버려야 그 사람의 정체가 제대로 들어오게 된다. 나나 타인이나 모두 단순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우주에 가까운 수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수많은 특징들은 수많은 인연들과 의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 것, 즉 연기(緣起)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특징으로 하나의 사물을 보는 것이 집착의 마음, 즉 "생멸의 마음"이라면, 하나의 사물을 마치 완전한 하나의 우주인 것처럼 보는 것이 "진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종의 대표자 법장 스님이 <<화엄의해백문>>이란 책에서 “하나의 조그마한 티끌만 보아도 전체가 갑자기 나타나며, 이것과 저것은 서로 받아들이니 가느다란 머리카락 하나만 보아도 모든 사물이 함께 나타난다”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3
오늘은, 어제부터 공유하고 있는, 심우도의 5단계와 6단계를 읽는다.

5단계인 목우(牧牛)는 "야성을 길들이는 고요"이다. '소(참된 나)'를 얻었으나, 그 '소'는 아직 사납고 검은 야생의 빛깔을 띠고 있다. 심우도의 다섯 번째 단계인 '목우(牧牛)'는 붙잡은 소를 길들이는 과정이다. 우리의 본질인 '참 나'를 발견하고 소유(得牛)했다고 해서, 삶이 즉각적으로 평온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삼독(三毒)에 길들여진 뇌와 습관들은 끊임없이 원래의 불협화음으로 돌아가려 한다.

페친 민웅기는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Flow)'의 상태를 소환했다. 몰입은 우리가 수행하는 과제와 나의 실력이 균형을 이룰 때 나타나는 최상의 정신 상태다. 도전과 기술의 균형 속에서 자아의 의식이 사라지고 행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최적 경험이다. 목우(牧牛)는 바로 이 몰입의 훈련이다. 억지로 '소'를 굴복 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의 리듬과 나의 의지를 조율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면의 거친 야성을 통제하기 위한 적절한 ‘코뚜레’ 가 필요하다. 그것은 매일의 루틴일 수도, 혹은 감정이 올라올 때 멈추는 짧은 호흡일 수도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제시한 '몰입(flow)의 3 요소'가 있다. 명확한 목표, 즉각적인 피드백 그리고 도전 과제와 개인 능력의 균형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명확하고 구체적인 목표: 자신이 지금 무엇을, 어디까지 완성해야 하는지 뚜렷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모호한 목표는 집중력을 분산 시키지만, 구체적인 목표는 행동의 방향을 잡아준다.
▪ 즉각적인 피드백: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나 과제가 목표를 향해 얼마나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즉각적인 결과 확인은 몰입 상태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된다.
▪ 과제 난이도와 실력의 균형: 수행해야 하는 과제의 난이도와 자신의 현재 능력이 엇비슷해야 한다. 과제가 너무 쉬우면 지루함을 느끼고, 너무 어려우면 불안이나 좌절을 느껴 몰입하기 어렵다.

노자는 다스림의 미학을 이렇게 일러준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물고기를 굽는 것과 같다(治大國, 若烹小鮮, 치대국, 약팽소선)." 작은 물고기를 구울 때 너무 자주 뒤집으면 살이 부서진다. <<도덕경>> 제60장에 나오는 거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라는 '소'를 길들일 때도 조급함은 금물이다. 너무 강하게 몰아붙이면 야성은 억눌릴 뿐 사라지지 않고, 너무 방치하면 다시 고삐를 놓치게 된다. 목우(牧牛)란, 부드럽지만 단호한 의지로 '소'를 관찰하며 그 에너지를 삶의 긍정적인 방향으로 서서히 바꾸어 가는 세밀한 기술이다.

페친 민웅기는 또 검은 소가 서서히 흰 소로 변해가는 과정을, 뇌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 일어나는 과정과 닮았다고 했다. 매일 반복하는 마음의 관찰은 뇌의 신경 회로를 재 배선한다는 거다. 분노의 길을 걷던 뇌가 어느덧 평온의 길을 닦아 나가고, 탐욕의 회로가 닫히고 지혜의 회로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훈련을 통해 검은 야성을 맑은 영성으로 바꾸는 목동의 지혜일 테다.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은 학습, 경험과 훈련에 의해 뇌의 신경 연결 망이 변화하고 재 구성되는 능력을 말한다. 뇌는 고정된 기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운 신경망을 만들고 연결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유연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신경 가소성을 촉진하는 방법으로는 새로운 도전, 꾸준한 반복 그리고 충분한 수면과 운동이 필요하다.
▪ 새로운 도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취미, 운동, 학습 등을 통해 뇌에 지속적인 자극을 준다.
▪ 꾸준한 반복: 신경 회로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매일 조금씩 꾸준히 연습한다.
▪ 충분한 수면과 운동: 수면은 낮 동안 학습한 내용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고 신경 회로를 정리하는 데 필수적이며,, 규칙적인 운동은 뇌 혈류를 개선해 준다.

페친은 "'소'를 억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대신 '소'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우라'라고 했다. 자신의 감정이 날뛸 때, 그것을 억압하지 말고 그저 곁에서 바라보며 부드럽게 방향을 제시하라고 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라 했다. "오늘 지신은 자신의 소를 채찍으로 몰아세웠는가? 아니면 함께 보조를 맞추며 길들였는가?" 진정한 성장은 '소'를 복종 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와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걷는 그 여정 자체에 있다는 거다.

4
6 단계인 기우귀가(騎牛歸家)는 "야성을 넘어 무심(無心)"으로 이다. 검은 '소'를 정성껏 길들여 이제는 하얗게 변했다. '소'와 나 사이의 갈등은 사라졌고, 야생의 거친 호흡도 잦아들었다. 심우도의 여섯 번째 단계인 기우귀가(騎牛歸家)는 길들여진 '소'의 등에 올라타 유유히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집'은 우리가 떠나온 본래의 자리, 즉 근원적인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주목할 지점으로, 페친 민웅기는  '이중 처리 과정 이론(Dual Process Theory)'을 끌고 왔다. 이 이론은, 뇌 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뇌는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시스템 1'과, 성찰적이고 논리적인 '시스템 2'로 나뉜다는 거다. 목우(牧牛)의 과정이 감정적인 야성을 논리적인 성찰로 다스리는 '시스템 2'의 고된 훈련이었다면, 기우귀가는 이 두 시스템이 완전히 통합되어 자동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다. 애써 참지 않아도 화가 나지 않고, 억지로 착하려 하지 않아도 선함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상태, 말하자면 '무심(無心)의 자동화' 같은 것이라 했다.

이중 처리 과정 이론(Dual Process Theory)은 인간의 뇌가 정보를 처리하고 결정을 내릴 때 두 가지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고 설명하는 심리학 이론이다.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의 저서 <<생각에 관 생각>>을 통해 알려진 이론이다. 크게 시스템 1과 시스템2로 나뉜다. 인간의 사고를 자동적이고 직관적 과정과 의식적이고 분석적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론이다.
▪ 시스템1(빠른 사고):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즉각적인 판단이 필요할 때 최소한의 노력으로 작동하지만, 편향이나 오류에 취약하다.
▪ 시스템2(느린 사고): 느리고 의식적이며, 논리적인 처리방식이다. 주의 집중과 많은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작동한다 인간은 에너지를 정약하기 위해 평소에는 시스템1에 의존하지만, 직관이 틀리기 쉬운 사오항이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시스템 2를 활성화하여 오류를 방지한다.

이와 관련해 내가 가장 아끼는 노자의 경구다. "함이 없으나 하지 못함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무위이무불위)" 이다.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無爲), 본래의 성품대로 살아가니 세상의 모든 일이 막힘없이 이루어진다(無不爲, 무불위)는 거다. <<도덕경>> 제37장에 나온다. '도'는 언제나 '무위'로 해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 도상무위이무불위).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무위 도식'이 아니다. 의식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자연스럽고 과장되고 지나치고 쓸데없고 허세르 부리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모든 행위를 '하지 않음'이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고 속 깊은 데서 저절로 우러나는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행동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위- 함이 없는 함 - 이다.
소 등에 앉아 피리를 부는 목동의 모습은 더 이상 '도'를 닦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이미 길 위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그 자체를 누리며 일상이라는 길을 걷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피로감은 대부분 '의지'와 '현실' 사이의 불일치에서 온다. 무언가를 바꾸려 하고, 무언가를 성취하려 애쓰는 과정 자체가 '소'의 고삐를 억세게 당기는 행위다. 그러나 '소'를 타는 순간, 고삐는 느슨해진다. '소'와 내가 방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강물에 몸을 맡긴 채 노를 젓는 것과 같다고 나 할까? 우리의 의지가 우주의 흐름, 혹은 본질적인 생명의 리듬과 일치할 때, 삶은 비로소 ‘고군분투’에서 ‘유희’로 전환된다.

이제 나의 삶에서도 힘을 빼야 할 때가 왔다. 나의 '소'가 나를 가장 정확한 방향으로 데려다 줄 것임을 신뢰하자는 거다. "자신은 지금 소의 고삐를 쥐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가, 아니면 소 등에 올라타 유유자적 자신만의 피리를 불고 있는가?" 평온함은 목적지에 도달해서 얻는 보상이 아니다. 바로 지금, '소' 등에 올라탄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삶의 방식이라는 거다.

6
나의 판단은 내려놓고,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가 봅시다.
2026/7/19/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마태오 복음 13장 24-43절

종의 마음과 농부의 마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가라지는 벼과에 속하는 식물로 싹이 갓 텄을 때는 주위의 벼나 밀과 비슷해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열매를 맺을 때쯤은 그것들과 선명히 구분됩니다. 즉, 가라지에는 먹을 만한 열매가 달려 있지 않은 것이지요. 또한 가라지는 주변 식물에게 돌아갈 양분마저 가로채어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여간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그런 가라지를 뽑아버릴지 종들이 주인에게 묻자, 주인은 오히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와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말로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울려 살다 보면 자기의 가치 기준에 따라 쉽사리 이웃을 판단하게 될 때가 있지요. 겉으로는 공동체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가라지인가 밀인가 재고 판단하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의 마음입니다. 반면 주인인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내버려두어라”는 말씀은 “너의 판단이나 편견은 내려놓고, 이제는 나의 뜻을 따라라”라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의 마음입니다. 나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신’(요한 15,15 참조)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최용감 안젤로 신부(광주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