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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프랑스 국가대표 축구 팀은 프랑스의 현재를 잘 대변한다.

374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14일)

1
오늘 아침 사진은 어제 오후 산책 길에서 만난 들꽃이다. 나에게 인사를 했다. 김재진 시인의 시가 소환되었다.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흔들리고 있다면/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네 곁에 흐르리라."

 아름다움은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더러움은 더럽게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 별거 아니다. 함부로 하고, 제멋대로 하는 건 아름다움의 정반대이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천천히 어렵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 윤리와 떨어질 수 없는 건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욕 한 번하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한번 꿀꺽 삼키고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입술을 깨물고 참는 데서 나온다. 손님이 나가자마자 문을 꽝 닫아버리거나, 친구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 닫고 가버리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그건 예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떠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는 그 짧은 순간이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친구가 되리라.

친구에게/김재진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 
네 곁에 흐르리라. 
저물 녘 들판에 혼자 서서 네가 
말없이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면 
작지만 꺼지지 않는 모닥불 되어 
네 곁에 타오르리라.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면 
손수건 되어 네 눈물 닦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 내게 온다면 
가만히 네 손 당겨 내 앞에 두고 
네가 짓는 미소로 위로하리라.

2
FIFA랭킹 1위부터 4위까지 모두 4강에 오른 것은 이번 월드컵이 처음이다. 그러다 보니 네 나라 중 누가 우승을 해도 이상하지가 않다. 특히 수요일 새벽에 치러질 프랑스와 스페인의 대결은 더더욱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스피드와 개인기를 앞세우는 프랑스, 패스로 축구에 아름다움을 불어넣는 스페인,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스타일로 세계 축구의 흐름을 만들어왔다. '음바페의 프랑스냐, 야말의 스페인이냐' 두 스타의 대결 구도도 눈길을 끄는데, 마리아노 라호이 우파 정치인이자 스페인 전 총리가 인종차별 발언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프랑스 대표팀은 피파(FIFA) 랭킹 1위이며 선수단 수준도 매우 높지만, 거기에 프랑스인은 없다." 이민자 가정 출신이거나 유색 인종인 선수들을 프랑스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황당한 발언이다.

프랑스는 반발했다. "용납할 수 없는 발언", "인종차별적 폭언" 이란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주스페인 프랑스 대사관은 아예 공식 설명을 내놨다. "프랑스 대표팀의 모든 선수는 프랑스인"이라며 "26명의 선수 중 23명은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해외에서 태어난 3명 역시 프랑스인"이라고 밝혔다. 스페인 정부도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진화에 나섰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현 총리는 "아직도 사람의 소속을 성(姓), 출생지, 혹은 피부색으로 재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는 그 나라를 사랑하고 기여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것이다. 인종차별 발언으로 스페인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프랑스 대표팀, 준결승전에서 만난다. 더 뛰어난 팀이 승리하길 바라며, 인종주의는 패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페친 목수정은 '선명한 진보 주의자'로 평가 받는 현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의 인상에 대해 말했다. 그래 나도 그의 사진을 찾아 보았다. 목 작가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가져 왔다. "형태는 수면 위로 떠오른 내면이다." 흔히 중요한 건 본질이고, 겉모습은 중요치 않다고 하는데, 위고는 형태란 내면의 본질이 배어 나와 형성된 결과라고 보았다는 거다. 뽈 발레리의 다음 말도 소환했다. "육체의 끝엔 정신이 있고, 정신의 끝엔, 육체가 있다." 그러면서 다음 같이 설명을 덧붙였다. 

"타인의 내면을 알 수 있는 통로는 그 사람이 보여주는 몸짓, 표정, 얼굴, 혹은 그의 말, 행동이다. 우리는 삶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조각 해낸다. 따라서 자신이 잘 살아가고 있는지는 살피려면 거울을 살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거울 속에 마음에 드는 모습의 인간이 보인다면, 우린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 테고, 보기 싫은 인간이 있다면, 자신의 뜻을 배반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리라. 과도한 성형을 통해 제 <꼴>을  인위적으로 위장하는 방법을 택한다면, 내용과 형식의 부조화가 일어날 테고, 드러날 통로를 차단당한 내면과 인공적으로 덧 씌워진 가면 사이에 균열이 일어날 것이다. 마치 AI로 쓴 글처럼,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킨다. 추한 생각, 추한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고, 반듯한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의 얼굴은 점점 보기 좋아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젊었을 때 얼굴 표정은 선천적인 것이라면, 40대 이후의 얼굴 표정은 후천적인 것으로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3
프랑스 국가대표 축구 팀은 프랑스의 현재를 잘 대변한다. 흑인 혹은 흑인 혼혈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그들이 체력적으로 뛰어나단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갈리아인, 로마인, 게르만, 노르만인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나라고, 온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부지런히 제국주의를 하던 19세기 이후, 수많은 이민자들이 모여드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 프랑스 팀의 주전 선수들은 모두 프랑스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프랑스인의 정신을 가진 프랑스인들이다. 마이클 올리제만, 런던에서 나이지리아 아빠와 프랑스 계 엄마에게서 태어났으나, 엄마의 나라에서 뛰고자 하는 본인 의지에 따라 프랑스 대표팀에 합류했다. 프랑스인들의 그의 선택을 고마워하고 있다.

나는 친 프랑스파이다. 가장 뜨거웠던 내 젊은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월드컵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프랑스 팀에 흑인 선수들이 많은 걸 가지고 오해들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건 프랑스 축구팀의 특징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사회의 정체성이다.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세상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사는 나라이다. 프랑스 축구팀 선수들은 다양한 출신의 부모들을 가졌지만, 그들 모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랐고, 프랑스에서 축구를 배운 선수들이다.

한때 한국에서 프랑스적인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톨레랑스’라는 개념이 많이 회자되었다. 홍세화의 책에서 소개되어 널리 알려진 ‘톨레랑스’는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관용’ 정도가 되겠으나, 동양적인 정서인 ‘너그러움’과는 다른 개념이다. ‘너그러움-관용’이 서로 간의 차이를 덮어두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화합’을 강조하는 태도라면, ‘톨레랑스’는 차이를 더 도드라지게 강조하되 서로를 인정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라 할 수 있다. 독재 정권 하에서 고도의 압축 성장을 이룩하며 효율성과 획일성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다 보니 ‘다름’이 곧 ‘틀림’으로 간주되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톨레랑스 개념은 사람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깊게 이해하면, 프랑스인들이 신봉하는 가치는 ‘톨레랑스’보다는 다양성, 프랑스 말로 ‘디베르시테(diversite)’에 방점을 찍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이기는 하지만, ‘톨레랑스’는 어디까지 나 ‘디베시테’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톨레랑스’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다양한 배경과 사상과 아이디어를 수용하기 위해서는(디베시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톨레랑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톨레랑스’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특정 사안들, 가령 나치 추종과 인종차별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앵톨레랑스’, 즉 불관용을 견지하는 것이 자연스레 설명된다. 즉 상위의 목표인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에는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다. 프랑스 팀은 돈을 주고 사온 용병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는 프랑스 사회의 정체성이 만들어 낸 것이다. 피부색이 다르다 해도, 공을 잘 차면 국가 대표가 될 수 있다는 거다. 다름을 받아 들이는 프랑스 축구팀의 강점이 여기서 나오는 거다.

그래 우리는 프랑스 축구를 '아트 사커'라 한다. 예술 축구에서 예술가는 '먼저 보는 자'이다. 먼저 보는 일은 익숙한 자신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다. 한 예술가가 저항의 힘을 잃고, 저항했던 기억의 지배를 받는다면, 이젠 예술가가 아니다. 먼저 본 사람은 남몰래 봐 버린 그것을 '갑자기' 드러낸다. 예술의 힘이다. 픅히 킬리안 음바페에게서 보았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해, 술, 도박, 정크푸드 광고는 거부한다. 그에게 원칙이 있다. 자신이 하는 축구에 집중하기 위해 경기 전후에 열리는 공식 기자 회견에도 불참한다.

 

4
인문 운동가도 아티스트(artist)이다. 예술가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미래는 '지금-여기'에서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부단히 수련할 때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또한 미래는 '지금 이 순간-저기가 아닌 여기'에 몰입해 최선을 다할 때 자연스레 다가오는 신의 선물이다. 그 때 내 일상(日常)은, 신의 선물인 예술로 승화된다. ‘예술’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아르스(ars)’의 원래 의미가 ‘우주의 질서에 알맞게 만물(萬物)을 정렬 시키다'라고 한다. 일상을 지배하며, 몇 가지 삶의 규칙을 가지고 '지금-여기'의 삶을 정돈하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그는 시간 있다고 TV만 보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  '저 너머'를 꿈꾼다. 생존만을 위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으로 기능적이다. 그가 음악 공부를 좀 더 하면, '뮤지션(음악가)'이 된다. 또 그가 인생을 알고, 특히 술을 알고 세상을 알게 되면 아티스트(예술인)가 된다. 1에서 2로 가는 것보다, 2에서 3으로 가는 길이 더 멀고 험난하다. 음악이나 미술을 한다고 모두 예술가의 반열로 올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음악이나 미술의 세계만을 표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음악이나 미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을 표현 할 수 있으면, 혹은 '인간과 세계 자체'를 표현할 수 있으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예술가'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체득을 해야 예술가가 된다. 그것은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이나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접촉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예술가는 인문적 지식이 부족해도, 그 지식을 단숨에 건너뛰어 버리는 '인문적 통찰력'이 있다. 예술가는 지식이 마침내 넘고자 하는 봉우리를 불안한 고뇌로 빚어진 고도의 감각으로 단숨에 넘어간다. 예술가의 고뇌는 인간의 무늬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서 나온다. 예술가는 이 무늬에서 저 무늬로 이동하는 인간과 세계를 포착하다가, 이곳에 있는 자신이 저곳을 봐 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이곳과 저곳 사이에 걸쳐져 있어 분열을 겪는다. 이 분열은 저곳으로 건너가려는 저항의 모습에서 나온다. 익숙한 이곳에 대한 배반이며 변신이다.

예술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정과 사랑에 얽매이면 안 된다. 우리의 삶은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정이 변하면 사랑하는 사람과도 우리는 헤어진다. 같이 갈 수 없는 연인도 있고 친구도 있고 독자도 있다. 그 대신 다른 사랑과 다른 우정이 시작된다. 오랫동안 빠를 하다 보면 단골이 떨어져 나가 슬플 때가 있지만, 그 양만큼 새 손님이 생긴다. 세상은 변하기 때문이다.

나는 초지일관을 싫어해 조삼모사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삶이 변하면 친구들도 사랑했던 사람도 버릴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사랑했던 사람을 버렸기 때문에 삶이 변한 것인 줄도 모른다. 모든 건 변한다는 사실만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이러한 충만을 부여하는 것이 예술이다.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삶은 정당화 된다."(니체) 내가 좋아하는 와인 즐기기도 단순히 취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건강과 젊음 유지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술 마시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계를 아름답고 충만한 것으로 보려면, 우리 역시 건강한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건강한 힘으로 충일해 있는 상태를 ‘도취’라고 한다. 취해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도취라는 고양감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 예술가는 건강한 생명력이 충일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면서 자신에 아름답고 충만하게 드러난 세계를 다른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삶의 유용한 정보를 주지만 우리의 삶을 유의미하고 충만한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옛날에는 종교가 우리들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을 주고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주었지만, 종교가 과학에 의해 무력해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술 뿐이라고 니체는 본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삶의 예술가란 매 순간 도취라는 고양된 기분 속에서 삶과 세계를 아름답고 충만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다.

5
연중 제15주간 화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1,20-24>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기적과 회개>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적
내가
하느님께
회개
하느님께서
나에게
믿음
내가
하느님께
믿음
하느님께서
나에게
희망
내가
하느님께
희망
하느님께서
나에게
사랑
내가
하느님께
사랑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쁨
내가
하느님께
기쁨
하느님께서
나에게
살림
내가
하느님께
살림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적
내가
하느님께
회개

6
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길은 어떠할까요?
2026/7/14/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마태오 복음 11장 20-24절: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을 베푸신 세 고을을 꾸짖으시는 듯한 말씀에서 노기 어린 그분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 인근의 마을로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을들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윤리·도덕적으로 악명이 높아 결국 유황과 불로 파멸되었던 소돔과 고모라보다도(창세 18-19) 못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묵상하다 보면, 그토록 애쓰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음에도 회개의 결실이 없었다는 나무라심은 오히려 그만큼 사랑하는데 이를 알지 못함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연민 어린 음성으로 들려옵니다. 이 말씀을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분명 눈물을 펑펑 흘리셨을 것 같습니다. 매일 희생 제사인 미사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보다 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최용감 안젤로 신부(광주대교구)⠀
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의 삶을 통째로 돌아서게 만드는 ‘회복과 회개’의 역동적인 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 왕 아하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성경은 당시 아하즈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흔들렸다”고 묘사하며 그들이 느낀 극심한 두려움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고 위로하시며,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법칙을 선포하십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9). 아하즈 왕의 진짜 문제는 눈앞의 강력한 적군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권력에 의지하려 했던 ‘불신앙’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삶에 시련의 바람이 불어올 때 세상의 조건에 마음이 흔들리곤 하지만, 하느님이라는 반석 위에 서지 않는 한 그 어떤 세상의 구명보트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셨던 고을들인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혹독하게 꾸짖으십니다. 그곳의 백성들은 주님의 치유와 권능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들의 완고한 삶의 방식을 바꾸는 ‘회개’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약 티로나 시돈, 심지어 소돔이 이 기적들을 보았다면 벌써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라며 탄식하십니다. 은총에 익숙해지면 무서운 영적 불감증이 찾아옵니다. 매일 미사와 기도를 바치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 또한 이 고을의 백성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한 후회의 눈물이 아니라, 내 고집을 버리고 하느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쥐는 결단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흔들리는 아하즈 왕에게 하느님께서 친히 징표를 주실 것이라며, 처녀가 잉태하여 낳을 아들의 이름이 ‘임마누엘’이 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이사 7,14 참조). 우리가 기꺼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서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마다 ‘함께 아파하며 곁에 계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풍랑 앞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은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안의 영적 불감증을 걷어내고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손을 꼭 잡읍시다. 그리하여 세상의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당당하게 믿음으로 우뚝 서는 복된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 저희가 삶의 위기 앞에서 당신의 현존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조건만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음을 고백하며 뉘우치나이다. 저희의 완고하고 무뎌진 마음을 당신의 자비로 녹여주시고, 날마다 베풀어 주시는 은총에 합당한 회개의 삶을 살게 하소서. ‘믿지 않으면 서지 못한다’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겨, 오직 당신만을 저희 삶의 유일한 반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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