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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지식과 지혜를 잘 구분해야 한다.

374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13일)

1
여름을 즐기려고 하는데, 너무 덥다. 그래도 오늘은 이 더위를 좀 즐기려 한다. 작열하는 태양도, 대지의 열기도 즐기려는 인간의 욕망보다 더 뜨거울 순 없다.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피서 일 것이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덥고, 춥다 춥다 하면 더 춥다. 하늘과 땅이 신열을 앓는 듯 펄펄 끓는다.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문명의 힘에 의지해 피하는 것이 나쁠 수는 없다. 하지만 에어컨 인공의 찬바람도 온종일 맞고 있다간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더위를 이기려면 더위와 하나가 되라는 말이 있다. 무엇을 집중하다 보면 더위도 쉽게 잊을 수 있다. 땀을 흘리더라도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더위는 벗이라고 여기며 여름을 나는 것도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더운데 혼자 신 나서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백일홍나무이다. 이 것을 편한 발음으로 하다 가 배롱이 되었다 한다. 그래 배롱 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배롱 나무의 특징은 매끈한 껍질이다. 나무 껍질이 미끄러워 원숭이도 미끄러진다는 뜻에서 일본에서는 '원숭이 미끄럼 나무"라 부른다. 또는 내가 어린 시절에는 '간지럼 나무' 라고도 했다. 사람의 피부처럼 보이기 때문에 간지럼을 잘 탈 것 같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나무를 간질이면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가지 끝이 흔들린다. 그렇게 보인다. 배롱 나무의 개화 기간으로 따지면 최고이다. 장마가 끝난 9월까지도 계속해서 꽃이 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무색하게 하는 백일홍처럼 오래도록 피는 나무라 하여 '백일홍나무' 또는 '나무 백일홍'이라 하던 것이 변해 배롱 나무가 되었다. 한 송이의 꽃이 실제로 그렇게 오래도록 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꽃이 계속해서 피고 지는 거다. 그런 특징에 주목해 주로 경관수로 심고, 최근에는 가로수로도 많이 활용된다.

목백일홍/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서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 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 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 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2
지식과 지혜를 잘 구분해야 한다. AI가 지식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젠 인간의 지혜를 길러야 한다. 조벽 교수의 말도 그렇다. "인간은 정답 없는 문제 푸는 데 도사가 돼야 한다. 지식 기반은 AI한테 맡기고 인간은 지혜 기반으로 가야 된다."

조교수는 AI의 발전으로 공부의 의미 자체도 달라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앞으로도 잘될 것이다. 단, 공부의 의미가 달라진다. 공부의 내용도 달라지고 공부하는 방식도 달라 진다"라고 말했다. 그는 "AI는 12분 공부해서 시험 치러 만점 받는 세상이 왔다. 이미 팩트다"라며 AI와 차별화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AI와의 변별력을 극대화하는 교육을 해야만 자녀의 미래가 있는 법이다"라고 했다. 조 교수는 AI 시대에는 정답을 암기하는 교육보다 스스로 해답을 찾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봤다. 그는 "교육의 주도권을 넘겨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좋은 대학과 안정적인 직장을 목표로 한 기존의 교육 전략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 수능 점수보다 인간만의 고유한 역량과 스스로 해답을 찾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이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조교수는 '좋은 대학은 폐기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는 "성공 전략이 뭘 조금 더 하는 개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걸 해야 한다"라며 "성공은 대학이 아니라 델타"라고 진단했다. 그는 AI 시대에도 여전히 좋은 대학 진학 만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교육 방식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너무나 많은 학부모가 오늘날 높은 수능 점수 얻고 좋은 대학 들어가고 거기에 지금 매달려 있는 것"이라며 입시 중심 교육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것을 놔야만 시대에 걸맞은 것을 잡을 수가 있는데 그걸 못 놓는 것이다"며 기존의 성공 공식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AI의 발전으로 공부의 의미 자체도 달라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앞으로도 잘될 것이다. 단, 공부의 의미가 달라진다. 공부의 내용도 달라지고 공부하는 방식도 달라 진다"라고 말했다. 그는 "AI는 12분 공부해서 시험 치러 만점 받는 세상이 왔다. 이미 팩트다"라며 AI와 차별화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AI와의 변별력을 극대화하는 교육을 해야만 자녀의 미래가 있는 법이다"라고 했다. 조 교수는 AI 시대에는 정답을 암기하는 교육보다 스스로 해답을 찾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봤다. 그는 "교육의 주도권을 넘겨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인간은 정답 없는 문제 푸는 데 도사가 돼야 한다. 지식 기반은 AI한테 맡기고 인간은 지혜 기반으로 가야 된다"라고 했다. AI가 정답을 제시하는 시대일수록 질문을 통해 자신만의 해답을 만들고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 졌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미래 인재상의 핵심으로 '기여'를 제시했다. 조 교수는 이러한 역량이 세계 주요 대학이 요구하는 인재 상과도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의 올해 세계 최고 명문 대학 열 개를 보면 홈페이지나 입학처에 '기여'라는 단어가 예외 없이 나온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기여한다는 것은 희생하고 봉사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쓸모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대가 오든 쓸모 있는 사람은 성공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과 학습이 아닌 배움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교육은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가르치는 일이다. 그리고 학습은 대체로 주어진 것을 익히고 따라 하는 말이다. 물론 둘 다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사람을 온전히 세울 수 없다. 스스로 묻고, 자기 삶을 돌아보고, 친구와 더불어 자라고,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힘까지 길러야 한다. 그래서 교육과 학습을 넘어 배움이 필요하다.  배움이 길러주는 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아닐까? AI 시대에는 더 필요하다.
▪ 스스로 질문하는 힘
▪ 자기 삶을 되 돌아 보며 성찰 하는 힘
▪ 친구와 더불어 함께 자라는 힘
▪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는 회복하는 힘
▪ 나만의 뜻을 세우는 힘
▪ 세상을 살리는 데 참여하는 힘
교육과 학습만 있으면 시키는 대로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배움을 누리면 자기 삶을 스스로 꾸미는 사람이 된다.

학교 문법이 이젠 바뀌어야 한다. 이제 까지의 경우들을 보면, 공부를 잘 할수록 더 센 경쟁 터로 옮겨졌다. 그리고 친구는 배움 벗이 아니라 이겨야 할 경쟁자가 되었다. 협동, 이해, 양보, 배려보다 1등, 출세, 돈이 앞섰다. 결국 성취는 높았지만 삶의 즐거움과 추억은 사라졌다. "16년 동안 즐거웠던 추억이 하나도 없어요. 공부한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어요." 이 말은 줄세움 자체가 아이의 삶과 마음을 어떻게 메마르게 하는지 보여 준다.

배움이 필요하다. 아는 게 아니라, 할 줄 아는 게 많아야 한다. 배움은 점수를 높이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힘을 길러 주는 일이다.

3
조벽 교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생하는 인간이 아닌, 기여하는 인간으로 살자고 말했다. "내가 먹여주고 태워주고 입혀주고 뭐 사주고 다 할 테니까 넌 그냥 앉아서 공부만 해. 공부해서 남 주냐? 오로지 너만을 위해서, 네 주변에 있는 거 네가 다 끌어다 써라." 이런 말을 듣고 큰 사람이 기생하는 존재의 특성이다. 기여하는 존재가 되게 하려면, '공부해서 남 주냐"며 이기심을 부추기는 풍토를 반성해야 한다.

조 교수는 한국에 돌아와 들은 말 중 ‘공부해서 남 주냐’가 가장 충격적인 것 중 하나였다며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산 사람이, 훗날 돈도 벌고 얻을 거 다 얻은 후에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기여하겠다는 것은 헛소리”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30~40년을 살아 온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것”이라며 “인재라는 것은 도달하는 목표점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주입식 교육을 넘어 아이들에게 꿈마저 주입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아이들의 장점을 키워주는 대신 의사 등 특정 직업을 목표로 ‘국영수사과(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에 매달리게 하고 단점을 메우는 데 집중함으로써 결국 평범한 수준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부모들이 주입하는 꿈은 결국 악몽이지 진짜 꿈이 아닙니다. 그리고 20년 후에 그 부모님의 악몽이 시작될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 너무 많이 봤거든요. 사회적으로 성공했는데 40대, 50대 돼가지고 우울증에 걸려 죽고 싶다 그래요. 그리고 그 나이에 부모님을 탓합니다. 엄마 아빠 얼굴도 보기도 싫다고 해요.”

기여하는 인간은 집단 지성을 발휘한다. 우리 사회에는 ‘집단 지성’ 대신 ‘집단 실성’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다. 조 교수는 또 한국 사람들이 ‘실력이 없으면 인성이라도 좋아야지’ 하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성이 ‘실력자에게 갑질을 당해도 비굴하게 빌붙는 태도’가 아니라 ‘타인과 협력해서 일할 수 있는 실력’이라고 정의했다. 인성이 곧 실력이라는 것이다.

조교수는 흔히 말하는 실력이 전문 지식과 기술이라면 인성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요소이며, 따라서 인성 역시 실력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성 교육의 세 가지 요소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자기조율’,
• 다른 사람과 어울려 일할 수 있는 ‘관계조율’,
• 공동체를 위해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공익조율’을 꼽았다.

그는 특히 다가오는 AI시대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익적인 목적으로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능력이 더 없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한국을 보니까 집단지성이 아니라 그냥 집단이에요. 끼리끼리 모여 있는 집단.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쳐 가지고 기득권 유지에만 목표를 두고 있어요. 끼리끼리 모여 가지고 온갖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는 게 바로 집단 실성하는 거죠.”

아이를 그냥 '금수저'로 키우기 보다는, ‘정서적 금수저’로 키우려고 해야 한다. 조 교수는 빈부격차에 따른 신분 세습을 의미하는 ‘금수저’ ‘흙수저’와 달리, ‘정서적 금수저’와 ‘정서적 흙수저’도 있다고 말했다. 부부가 자주 싸우거나 자녀들과 애착관계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 경우 아이들이 주의력결핍장애(ADHD) 등 심신의 문제를 일으키고 심각한 경우 우울증, 중독, 자살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아이들을 ‘정서적 금수저’로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서 아이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행동을 곧바로 지시하기보다 정서적 지지를 앞세우는 ‘감정 코칭’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의 마음 상태를 먼저 이해하고, 부모가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 뒤 행동의 한계를 그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벽 교수는 “부모들은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행동코칭’ 대신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정서적 지지를 앞세우는 ‘감정코칭’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TMI: 아웃사이더 인생, ‘독특함’으로 승부하다. 조 교수는 열대 의학을 전공한 의사 아버지를 따라 10살 때 자메이카로 이주한 뒤 대학 공부는 미국에서 했기 때문에 청소년기는 흑인들 사이에서, 대학생 때는 백인들 사이에서 늘 ‘아웃사이더(외부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소수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최고(베스트)’가 되기보다는 ‘독특함(유니크)’으로 승부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말했다. “초임 교수 시절, 연구 부담으로 강의 준비 시간은 부족하고 학생들은 수업이 지루하다는 반응이어서 거의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죠. 한 해를 그렇게 보낸 뒤 교수법 책이란 책은 다 찾아서 독학을 했습니다. 강의 기법에 투자하지 않는 교수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유니크하고 독보적인 존재가 됐죠.” ‘교육계의 마이클 조던’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교수법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심리학 전문가인 아내 최성애(63) 박사의 도움으로 이론적 토대를 다지면서 교육 혁신 전문가로 입지를 굳히게 됐다고 밝혔다.

4
지식은 본래 귀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왕이나 귀족, 사제나 학자 같은 소수만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지식의 정수인 책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만, 권력자들은 신의 비밀을 알려주고 통치의 비결을 담은 책을 한 장소에 모아 독점하려 했다. 10세기 중국 송나라에서 인쇄 혁명이 일어나고, 15세기에 활판 인쇄술이 서양에 전해져서 누구나 책을 쉽게 손에 쥘 수 있을 때까지, 지식은 소수의 손에만 머물러 있었다.

오늘날 지식은 너무나 흔해 져 버렸다. 네모난 창을 열고 적절한 질문을 적어 넣으면, 언제 어디서나 무슨 답이든 곧바로 쏟아내는 기계들 덕분이다. 특히, AI는 지식과 정보를 특권 삼아 살아가는 이들을 크나큰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 기계는 세상 모든 지식을 두루 섭렵한 다음, 적당한 형태로 가공하고 정리해 최적의 답을 내려준다. 이제 머릿속의 앎을 남 앞에서 자랑하는 건 바보로 보이기 딱 좋은 일이 되었다.

바둑 경기를 중계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프로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바둑 돌을 놓을 때마다, 인공지능이 그 유불리를 즉각 계산해서 결과를 알려준다. 하나의 수평선 위에서 딱 절반씩 나누어졌던 흑백 영역이 한 수 한 수에 따라 미세하게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걸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다. 복잡한 상황에서 다음에 어떤 수를 두는 게 최선일지도, 그 변화가 어떠 한지도 명확히 알려준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바둑을 두거나 보는 재미가 크게 줄어든 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게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다른 길을 찾아내는 데 익숙하다.
▪ 일찍이 붓다는 세상 모든 게 영원하지 않고, 모든 존재가 불완전함을 알았다. 이것은 궁극의 앎으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할 법칙이었다. 실망하고 좌절했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히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오랫동안 수행한 끝에 그는 집착을 끊고, 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깨달아 끝내 해탈에 이르렀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끝이 아니다. 모든 앎은 다른 앎을 향한 여정의 시작을 뜻할 뿐이다.
▪ 지식과 정보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줄 수는 있어도, 우리 삶을 멈추게 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모든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우리를 좌절 시키진 않는다. 오히려 한 번 뿐인 이 삶을 순간 순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열렬히 삶을 살아갈 이유를 제공해 줄 뿐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 유명한 서양 속담은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삶에 더욱더 충실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좋지만, 아무리 많은 앎도 그 자체로는 별것이 아니다. 그 앎을 어떻게 다루어 내 삶에 적용하느냐 에 따라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게 달라진다. 

<<종이 위의 직관주의자>>(싱긋)에서 디자이너 박찬휘는 앎을 두 가지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독일어에는 ‘알다'라는 뜻이 있는 단어가 두 가지 있다. 케넨(kennen)과 비센(wissen)이다. ‘케넨’은 몸으로 직접 겪어서 깨닫는 것이고, 비센(wissen)은 책이나 강의로 배워서 아는 것이다. ‘케넨’은 우리말의 지혜에, ‘비센’은 우리말의 지식에 대응한다. 인공지능과 문답을 거쳐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비센’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앎을 착각한다. 우리말에서는 두 가지 모두 ‘알다’라는 동사 하나로 통용되는 까닭이다. 프랑스어로는 알다라는 단어가 'connaitre'와 'savoir'가 있다. 앞의 것은 명사가 뛰따르고, '~을 알다'란 것이고, 후자는 동사가 뛰따르며, ~을 할 줄 알다'라는 뜻이다. 박찬휘에 따르면, 지식은 ‘답변’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정해진 답이다. 지식은 ‘○○이란 ○○○○이다’의 형식, 즉 “완성된 질문의 끝에 답이 있는 선형적 텍스트 형태”를 띤다. 어떤 사람이 지식을 얻는 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 먼저 자기 안에 어떤 질문이 생기고,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
▪ 그와 관련한 답을 찾는 과정,
▪ 적절한 답을 찾아 이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지식의 가장 큰 장점은 시행착오를 줄여준다는 점이다. 이미 정해진 답을 향해 직선으로 빠르게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지식엔 여러 단점이 있다. 특히, “일방적으로 주입 되는 지식에 함몰되는 순간, 창의적 사고도, ‘나’라는 주체도 사라져 버린다.” 그냥 어떤 질문이나 문제를 이해하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 더 나아가려면, 그 지식을 해석해야 한다. 좀 다른 문제이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떤 질문이 생기고, 답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걸 고민하고 또 깨닫는다. 그 고뇌의 와중에 다른 질문이 생겨나면서 사고가 여러 갈래로 생긴다. 때로는 처음에 자신이 품은 질문이 허깨비 같은 ‘가짜 질문’임을 알기도 한다. 이 과정 자체가 공부의 진짜 모습이다. 이게 해석하는 과정이다. 옛날에는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이 책 저 책 뒤적이고, 멀리 까지 스승을 찾아가 그 이야기를 들어서 답을 알아내곤 했다. 이럴 땐 무언가를 아는 일이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하나의 풍부한 경험이 되었다. 그렇게 얻은 지식에는 저절로 자신만의 통찰과 지혜가 깃들었다.

그런데 정제된 답을 찾아서 곧바로 나아가면, ‘사고의 외주화’가 일어나면서 다른 질문들, 다른 답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인공지능의 검색 창은 다른 사고, 다른 대답의 존재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런 지식에 길들면, 창의성은 갈수록 고갈된다. 요즘, 인공지능을 잘 이용하는 방법을 다룬 글들이 무수하다. 그 모든 글에서 공통으로 권하는 게 하나 있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란 말이다. 이를 ‘프롬프트 디자인’이라고 한다. 이 그럴듯한 말이 바로 함정이다. 그렇게 질문할 수 있다는 건 내가 이미 정해둔 답, 바라는 답이 있는 것과 다름없다. 질문을 좁힐수록, 답도 좁아지는 까닭이다. 그러면 “두루뭉술한 대답이나 내가 예상한 답이 아니면 쉽게 배척해 버린다.”

공부는 파편적 지식의 기계적 습득으로, 탐구는 굳어진 신념의 반복적 확인으로 바뀐다. 이는 지식을 “가능성의 시야를 넓히는 쪽이 아니라 좁히는 쪽으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다른 길이 있다. 명확한 답을 찾는 대신 시도와 탐구를 거듭하면서 느리게 ‘지혜’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길은 단순히 지식을 빨리 습득하는 걸 목표로 삼지 않는다.

지혜는 어떤 지식을 삶의 다양한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적용하고 실현하려고 할 때 생겨난다. 아는 게 없으면 지혜로울 수 없기에 우리는 끝없이 배워야 한다. 그러나 지식의 양이 지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책상 물림은 현장에서는 무능력하기 십상이다. 지식은 고정된 게 아니다. 지식을 절대 화해서 아무 생각 없이 추종하기보다 내 몸과 마음에 맞추고, 상황과 장소에 맞게 이용하며, 삶의 방향과 목적에 따라 자유롭고 용기 있게 변형하는 일에서 비로소 경험을 품은 지식, 즉 지혜가 생겨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를 기르는 거다. 요리의 명인들은 책이나 유튜브를 쫓아 요리하지 않는다. 먹는 사람에 따라, 그날 그날 재료의 상태 따라, 극도로 단련한 손끝의 감각으로 다르게 요리한다. 정해진 지식에 갇히지 않는 사람만이 창의성을 얻는다. 박찬휘는 말한다. “지혜는 옳은 길을 따라 걷는 게 아니라 각자의 길을 걷다 만나는 일이다.” 지식이 흔해 진 시대, 빠르고 쉽게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품어야 말이다.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에게서 얻은 생각이다.

5
연중 제15주간 월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0,34-11,1>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당신처럼 나 그렇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당신께서
나를
나로
믿으시듯

당신을
당신으로

나를
나로

벗을
벗으로
믿게 하소서
당신께서
나를
나로
바라시듯

당신을
당신으로

나를
나로

벗을
벗으로
바라게 하소서
당신께서
나를
나로
사랑하시듯

당신을
당신으로

나를
나로

벗을
벗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6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2026/7/13/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마태오 복음 10장 34―11장 1절:“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오늘 예수님께서는 평소와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렇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 생애 전반을 놓고 보아야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단순히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평화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성지 주일), 무기력해 보이는 예수님에 대한 질책으로 변합니다(성금요일). 하지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타협하지 않으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이 바라는 평화를 절대로 주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의 눈에는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늘의 시민”(필리 3,20)이라 선포합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에 살고 있다는 타협의 자세가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자세로 하루하루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최용감 안젤로 신부(광주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세상이 바라는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말하는 적당한 타협과 안일함(편안함) 속의 거짓 평화를 깨뜨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선택하고 사는 사람이다. 불편하더라도 세상의 안락함보다 주님의 진리를 먼저 선택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평화가 우리 마음 안에 깃들 것이라 믿는 사람이다. 주님의 진리를 따르는 길에는 때로 세상과의 갈등과 영적 투쟁이 따른다. 신앙 때문에 손해를 보거다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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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성경 말씀은 안일함과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의 신앙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웁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알맹이 없는 화려한 종교 의식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시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짜 평화를 깨뜨리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두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적당히 타협하는 신앙'을 버리고, '치열하게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을 선택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고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생활은 겉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제물을 바쳤고, 축제 때마다 성전에 모였으며, 두 손을 높이 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성전 문을 나선 그들의 일상에는 불의와 착취, 그리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무관심이 가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위선적인 예배를 향해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이사 1,11-15 참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형식적인 발걸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 그 자체와 삶의 지향을 원하십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이사 1,16-17).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신앙은 하느님을 감동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을 모욕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깨뜨리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평화의 임금으로 오신 주님께서 왜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칼은 자르는 도구, 곧 ‘분별과 절단’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여 얻는 조용한 안일함이나,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덮어두는 가짜 평화가 아닙니다. 참된 복음이 우리 삶에 들어오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 결별해야 하는 영적 전쟁을 치러야만 합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하느님의 뜻보다 인간적인 정이나 세상적 이익을 앞세운다면, 과감하게 복음의 칼로 그 집착을 잘라내야 합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어떤 것도 결국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8-39).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이기심을 죽이고, 매일 나에게 주어지는 삶의 무게와 책임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손해를 보고 바보처럼 사는 것 같지만, 그렇게 주님 때문에 내 고집과 목숨을 내려놓을 때, 우리 영혼은 비로소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과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신앙은 단순히 내 마음에 위안을 주는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내 안의 악행을 멈추고, 세상의 유혹을 잘라내며, 매일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치열한 선택입니다. 오늘 하루, 내 손에 묻은 이기심과 불의의 때를 주님의 자비로 깨끗이 씻어냅시다. 그리고 내 삶의 자리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향해 따뜻한 선행을 베풀어 봅시다. 그리하여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하느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예배’를 우리의 온 삶으로 봉헌하는 복된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공정하고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가 입술과 형식으로만 당신을 공경하고, 삶 속에서는 불의와 타협하며 이웃을 외면했던 위선을 용서하소서. 복음의 칼을 저희에게 주시어, 저희 안의 헛된 집착과 죄의 유혹을 과감히 잘라내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주어진 저마다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짊어지게 하시고, 세상의 안락함이 아닌 당신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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