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12일)
1
7월 초인데, 이른 더위가 왔다. 한낮의 뙤약볕은 거대한 돋보기를 통과한 빛처럼 뜨겁다. 불볕더위와 습도는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든다. ‘찌는 무더위'는 가마솥 안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푹푹 쪄내는 것 같다는 뜻이다. 이 때 에어컨만 사용하다 보면 오히려 몸의 리듬이 깨진다.
이때 인문 운동가가 무더위를 이기는 방법 중 하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거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을 실천하는 것이다. 단 저녁 무렵에만.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사이는 농부들도 일 안 한다. 위험하니까. 대신 저녁 무렵에 집에 걸어오기, 텃밭 일하기, 산책하기 등으로 땀내기를 하는 것이다. 한 시간 여 동안 몸을 움직이면, 온몸이 땀으로 폭포수가 된다. 나는 가게 청소를 한다. 그러면 습기는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은 물줄기가 되면서 눅눅하고 끈끈한 기운이 사라진다. 온몸에 쌓였던 독기, 열기 때로는 한기까지도 일제히 밖으로 나오며 정화되고 새로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무더위를 이기다가 새롭게 맞는 새벽의 서늘한 바람 한 조각은 훨씬 더 값지다. 그리고 습기를 머금은 무더위와 달리, 햇빛이 폭염(사납게 불탄다)인 날은 눅눅한 마음을 잠깐 씩 밖으로 나가 햇빛에 말리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습한 몸과 눅눅한 마음이 다 날아가니까. 사람은 다 ‘때’ 가 있다. 이 때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는 좀 쉬면서, 두꺼운 책을 읽는 것이 나의 더위 극복 방법이다. 평소에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할 책을 이 시기에 읽는 것이다. 그것도 정리해가면서. 그 때 깨달음이나 평소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똑 떨어지게 정리된 정언을 만나면 더위가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엘렌 바스
삶을 사랑하는 것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을 때에도,
소중히 지고 있던 모든 것이
불탄 종이처럼 손에서 바스러지고
그 타고 남은 재로 목이 멜지라도
삶을 사랑하는 것
슬픔이 당신과 함께 앉아서
그 열대의 더위로 숨 막히게 하고
공기를 물처럼 무겁게 해
폐보다는 아가미로 숨 쉬는 것이
더 나을 때에도
삶을 사랑하는 것
슬픔이 마치 당신 몸의 일부인 양
당신을 무겁게 할 때에도,
아니, 그 이상으로 슬픔의 비대한 몸집이
당신을 내리누를 때
내 한 몸으로 이것을 어떻게 견뎌내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당신은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듯
삶을 부여잡고
매력적인 미소도, 매혹적인 눈빛도 없는
그저 평범한 그 얼굴에게 말한다.
그래, 너를 받아들일 거야.
너를 다시 사랑할 거야.
2
어제 오전에 제24괘인 <지뢰 복> 괘를 함께 다 읽었다. <<주역>>에서 말하는 "복"은 사람이 타고난 본성을 욕심 때문에 잃었다가 회복한다는 거다. 또는 군자가 소인에게 빼앗겼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외도 "복"은 나갔던 사람이 돌아온다 든지, 잃은 물건을 되찾는다 든지 하는 모든 회복을 말한다,
회복 중에 원칙의 회복이 중요하다. 흔히 정치판에서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원칙이 같지 않은 사람을 통합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원칙의 회복에 맞지 않는다. 통합의 상징은 ‘출신의 통합’이 아니라 ‘원칙의 통합’이어야 한다. 통합은 ‘문제 있는 인물’을 억지로 껴안는 방식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통합은 오히려 상식과 몰상식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공직 윤리의 기준을 높이며, 상처 받은 이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자라난다.
국가는 그 상처를 외면하지 말고, 넘어뜨린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민주 진영의 훼손된 자산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 일은 진영의 싸움이 아니라, 사회의 기본 상식과 공정,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회복하려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한 것은 ‘상징적 통합’이 아니라 ‘원칙의 회복’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또 필요한 것이 영성을 회복해야 할 시기이다. 오늘의 세계는 눈부신 기술 발전과 물질적 번영의 외피 속에서 깊은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첨단 과학이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내면의 불안과 고립, 존재론적 허무는 그 어느 때보다 깊어 졌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혐오는 인류가 여전히 힘과 공포의 야만적 논리에 갇혀 있음을 증명한다.
물질적 풍요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현대인이 삶의 본질적인 의미와 보편적 도덕, 공동체적 연대에 목 말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간은 경제적 효용과 기술적 편리함 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위기 때마다 내면의 신성과 영성을 새롭게 발견하려 했던 이유를 추적하는 <세계일보>의 기획 시리즈를 통해 오늘의 물질 문명이 마주한 한계를 성찰하고 인간 다움의 본질과 영성이 지닌 힘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인간의 영성을 회복해 보자는 의도가 마음에 든다.
도덕이 권력보다 앞서야 한다는 신념을 말했던 사람이 공자이다. 오늘날 공자는 흔히 도덕과 예절을 강조한 사상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의 공자는 단순히 “착하게 살자”고 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무너져 가는 세계 속에서 인간 사회를 다시 붙들 수 있는 질서의 회복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평생 고민했던 인물이다. 인간 다움의 회복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나라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인간 사이의 신뢰인지 모른다.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중국은 그런 시대였다. 주(周) 왕실의 권위는 무너지고 있었고, 진(秦)·초(楚)·제(齊)·진(秦) 등 제후국들은 영토와 패권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충돌했다. 훗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 불리게 되는 이 혼란은 정치적 전쟁으로 그치지 않았다. 오래 유지되던 질서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왕은 왕답지 못했고, 신하는 신하다움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족과 공동체를 지탱하던 예(禮)는 무너졌고, 사람들은 힘과 이익을 좇아 움직였다. 바로 그 시대에 한 사내가 나타난다. 그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도 않았다.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러나 25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동아시아 문명의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은 공자(孔子)였다.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인(仁)’이었다. 그는 인을 “사람을 사랑하는 것(仁者愛人)”이라고 설명했다. 인은 흔히 ‘어질다’로 번역되지만, 친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음, 타인을 향한 공감과 책임 의식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공자는 인간 사회가 유지되려면 먼저 인간이 서로를 사람 답게 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가족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군주와 신하 사이의 책임과 도리를 강조했다. 현대인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함이나 권위주의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실제로 후대의 유교 문화는 때로 지나친 위계질서와 형식주의로 흐르기도 했다. 여성 억압이나 경직된 신분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측면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 사상의 모든 모습은 아니다.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에게 중요한 가치는 “인간 다움의 회복”이었다.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군자구제기, 소인구제인)" 즉, '군자는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원인을 찾는다'는 이 말은 인간 다움이란 타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도 인간이 최소한의 품격과 책임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3
<<주역>>의 <복괘>는 우리에게 하늘의 운행을 잊지 말고, 일상에서 엔트로피가 커지면 질서를 회복하라고 한다. 하늘의 운행은 "굳건하고(健, 건)", "끝에서 다시 시작하여(終則有始, 종즉유시)", "양이 점점 사그라들며 소명하여 텅 비었다가 양이 점차 자라며 번성하여 가득 차고(消息盈虛, 소식영허)", "도가 반복되어 칠일 후에 회복하는(反復其道七日來復, 반복기도칠일래복)" 이치를 따른다. 한마디로 하늘의 운행 법칙은 '끝없는 순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공자가 <지뢰 복> 괘를 꼭 집어 하늘의 마음을 보라고 한 것은 이 순환이 선순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늘의 뜻은 생명을 죽이는 데 있지 않고 살리는 데 있으며, 마감하는 데 있지 않고 시작하는 데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復)"은 회복(回復)으로 원 상태를 되찾는 것이다. 또한 복귀(復歸)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복(反復)으로 순환의 도를 되풀이하는 것이고, 부활(復活)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먹지 않고 남겨 두었던 <산지 박> 괘 '상구'의 "석과(碩果)"가 제2괘 <중지 곤> 괘의 대지에 씨앗으로 묻혀 <지뢰 복> 괘 '초구'의 새 생명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가치와 본성의 회복이고, 초심과 당위(當爲)로의 복귀이며, 생사와 종지의 반복이고, 희망과 용기의 부활이다.
이러한 "복(復)"의 여러 상징 중 공자는 마음의 수양과 정신의 수련, 행실의 교정을 통한 가치의 본성의 회복에 초점을 두었다. 인, 즉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공자는 <<계사전 하>> 제5장에서 제자 안회(顔回)를 기리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子曰(자왈) 顔氏之子(안씨지자) 其殆庶幾乎(기태서기호)인저. 有不善(유불선)이면 未嘗不知(미상부지)하며 知之(지지)면 未嘗復行也(미상부행야)하나니 易曰(역왈) 不遠復(불원복)이라 无祗悔(무지회)니 元吉(원길)이라하니라." 번역하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씨의 자식(안자)이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다. 착하지 않음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하지 않으며[불선을 모르는 일이 없었다는 거다.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 일찍이 다시는 행하지 않으니, 역(易)에 이르길 머지않아 회복한다. 뉘우치는데 이름이 없으니 크게 길하다라고 하였다'가 된다. 안회는 거의 완전하도다! 선하지 않음이 있으면 알지 못함이 없었고, 알면 다시는 행하지 않았다. 역에 말하였다. 머지않아 회복하여 후회하는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으니 매우 길하 것이다. "불선(不善)을 들고 "복(復)"을 이야기했으니 "복"의 의미가 가치와 본성의 회복이라는 점이 명확하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로 32살에 요절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안회의 '인(仁)'을 극찬한 바 있다. 안회를 "복성공(復聖公)"이라고 부르는데, '인을 회복한 성인과 같은 사람'의 뜻이다.
4
나는 회복 탄력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실패 후에 회복하는 능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회복 탄력성을 키우려면 우선은 자신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매일 '완벽을 위해 수련을 하여야 한다. 끝으로 중심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4-1
앞으로의 시대에는 견고한 힘보다 회복력(resilience)이 더 중요하다. 태풍이 불면, 튼튼한 떡갈나무는 박살이 나지만, 나긋나긋 하고 회복력이 있는 갈대는 낮게 몸을 숙였다가 폭풍이 지나가면 다시 벌떡 일어난다. 떡갈나무는 실패에 저항하려 하다 오히려 확실히 실패한다.
전통적으로 대기업들은 '리스크보다는 안전'을, '풀 전략보다는 푸시 전략'을, '창발보다는 권위'를, '불복종보다는 순종'을, '나침반보다는 지도'를, '시스템보다는 대상'을 중시했지만, 인터넷 시대에 성장한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투자 비용이 워낙 적어서 실패에서 배우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례가 유튜브(Youtube)이다.
우리는 흔히 견고함을 중시하도록 배워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주변 환경은 우리에게 회복력을 요구한다. 복잡한 현실에서 흔히 우리는 이기려 들면 지는 경우가 많다. 그냥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그저 일들은 벌어지고, 우리는 그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회복력이다. 회복력이란 다음에 무엇이 올지 내가 예견할 수 없음을 예견하고 상황인식을 높이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받아 들이기'는 또 다른 종류의 ‘용기'이다. 승리나 권력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번창할 방법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짜야 할 사람에게는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때 회복력이 나온다.
토마스 프레이(미래학자)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으로 다음과 같이 7가지를 지적한바 있다. 회복 탄력성(resilience), 창의성, 소통력, 비판적 사고, 협업 능력, 복합적 문제 해결 능력그리고 유연성이 요구죄는 능력이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이 회복탄력성이다.
4-2
나의 정체성은 몸(신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이다.
이 세 가지가 완벽한 사람은 없다. 이론적으로만 존재한다.
'완벽한 나'는 완벽한 직선이나 원처럼,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이데아 세계의 추상이다.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를 뽑아낸 것이 추상이다.
완벽이란 완벽에 대한 추구이지 완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이라고 말하면, 대개 '거의 완벽에 근접한' 것들이다.
완벽한 자신을 상상한다면, 그냥 현재의 자신보다 개선(改善)된 자신일 뿐이다.
이데아(idea)와 인간이 사는 현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공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데아는 현실의 개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어떻게? 연습(演習)을 통해서이다. 연습이란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우주의 원칙을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훈련이다.
연습은 완벽이 아니라, 완벽으로 가까이 접근하려는 헌신적인 노력이다. 물론 완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을 추구할 때,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만일 수련자가 자기 스스로 완벽하다고 자신하는 순간, 그는 불-완벽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져, 저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게 오만의 모습이다.
4-3
갈대가 쓰러지지 않는 것은 중심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은 흔들려도 자기 자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힘이다.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의 균형을 회복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곧 중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 중심은 현재의 내 위치를 잘 알고,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를 아는 것에서 나온다.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서경>>). 사람의 마음(=욕심)은 위험해져 가고, 도심(=양심)은 점차 희미해지니, 마음 자체를 맑고 한결같이 하고 진실로 그 중심을 잡으라"는 뜻이다. 여기서 "윤집궐중"은 중심을 잃지 말라는 말이다. 그 중심은 세상의 근본 원리를 확실히 지키는 일이다.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한 말이란다.
세상의 근본은 무엇인가? <중용>을 인용한다.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 (<중용(中庸)>) 희노애락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중'이고, 이미 드러났지만 절도에 맞는 것이 '화'이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고, 화는 천하에 통달한 도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다. 살다보면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화내거나 슬퍼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런 감정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중’이라는 것이다. 그런 감정 자체를 절제하라니 <중용>의 정신은 무서운 것이다. 희로애락이 일어난다 해도, 그 “중절”을 지키면 ‘화’라 한다는 말이다. "윤집궐중" 대신 <논어>에서는 "윤집기중(允執其中)"이라 말한다. "하늘이 내린 차례가 당신에게 있으니, 진실로(允) 그 중심(其中)을 잡으라"는 말이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당부한 말이란다. "기중"은 중용을 말한다.
갈대에게서 배운다. "윤집궐중"이나 "윤집기중"이나 갈대처럼 "중심을 잃지 말라!"는 말이다. 치우치지 않게, 공평하게 중심을 잡으라는 충고이다.
5
연중 제15주일로 <마태오 13,1-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이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사람 씨 땅>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3ㄴ)
씨를 품는 땅과
땅에 스미는 씨를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네
뿌리는 사람과
품는 땅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씨가
사람에 의해
땅에 뿌려지네
뿌리는 사람과
뿌려지는 씨를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땅이
사람이 뿌리는
씨를 품네
6
여러분은 어디에 희망을 두십니까?
2026/7/12/연중 제15주일
마태오 복음 13장 1-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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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신비로움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 말씀의 강력한 힘과 강한 구원 의지를 표명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지고, 어떤 것들은 돌밭에,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데,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 보면, 다소 모순되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 씨앗은 곧 말씀이고,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사명을 완수한다 하였는데, 복음에는 그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으며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내 문제인가 하는 반성 어린 자책을 하는 동시에, 신비로움 역시 함께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당신의 뜻을 이루는 힘을 가지셨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강력한 구원 의지와 그분의 피조물이면서도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지닌 우리의 모습. 그 미묘한 긴장을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임에도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했습니다.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에 희망이 없어 보여도 하느님의 힘에 희망을 두는 삶, 즉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삶’(로마 4,18 참조)! 그게 진정한 신앙인의 삶이 아닐까요? 최용감 안젤로 신부(광주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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