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9일)
1
"슬픔의 둑이 무너져 내린 것"(서윤규, <눈물>)처럼, 장마 같은 비는 쉬지 않고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며 '일정한' 소리를 낸다. 조용히 '빗물'을 생각한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리고 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간다. 바다가 바다인 이유는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주기 때문이다. 물은 '내려감'이 결국 '올러감'임을 잘 알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며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가는 물에게서 우리는 겸손을 배워야 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같이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봄비, 여름 장마비, 가을의 이슬과 서리 그리고 겨울의 눈(雪), 물의 순환으로 자연은 우리에게 말없이 가르친다. 그러니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성주괴공(成住壞空, 우주의 생성-성장-퇴화-소멸의 과정)의 우주에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볼열갈결’(사계절) 비는 그 철을 돕거나 재촉하는 촉매제 같은 것이다. 봄비에 만물이 잘 보이고, 열비에 튼실한 열매 열리고, 갈비에 나뭇잎 보내고, 졸 가리 훤한 나목에 결비 내린다." (김래호) 장마를 '열비'로 읽으니, 난 슬프지 않다. 그리고 비에 지지 않을 거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비에도 지지 않고/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욕심은 없고
절대로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고 있는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야채 조금을 먹고
여러 가지 일에 자신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이해하고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소나무 숲 그늘의
조그마한 이엉 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가 있으면
가서 간호를 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달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시시할 뿐이니 그만두라고 말리고
가물 때에는 눈물을 흘리고
찬 여름에는 허둥지둥 걸으며
모두에게 얼간이라 불리고
칭찬받지 못하고
근심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네
2
영성을 회복해야 할 시기이다. 오늘의 세계는 눈부신 기술 발전과 물질적 번영의 외피 속에서 깊은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첨단 과학이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내면의 불안과 고립, 존재론적 허무는 그 어느 때보다 깊어 졌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혐오는 인류가 여전히 힘과 공포의 야만적 논리에 갇혀 있음을 증명한다. 물질적 풍요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현대인이 삶의 본질적인 의미와 보편적 도덕, 공동체적 연대에 목 말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간은 경제적 효용과 기술적 편리함 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위기 때마다 내면의 신성과 영성을 새롭게 발견하려 했던 이유를 추적하는 <세계일보>의 기획 시리즈를 통해 오늘의 물질 문명이 마주한 한계를 성찰하고 인간 다움의 본질과 영성이 지닌 힘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은 노자가 보였던 영성의 힘 이야기를 한다. 세상은 왜 점점 더 복잡해지는가? 문명은 발전하는데 인간은 왜 더 불안해지는가?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는데도 왜 마음은 더 메말라지는가? 2500년 전 중국에도 비슷한 고민을 품은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노자(老子)였다. 오늘날 노자는 흔히 신비로운 철학자나 은둔의 현인처럼 기억된다. 실제로 그의 삶은 지금도 안개 속에 싸여 있다. 공자처럼 비교적 구체적인 생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실존 인물이었는지조차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전해지는 이야기 속 노자는 주(周) 왕실의 도서관 관리 같은 일을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이 점점 혼란과 욕망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결국 문명을 등지고 서쪽으로 떠나려다 국경의 관문에서 한 관리에게 붙잡힌다. “그냥 떠나실 수는 없습니다. 후세를 위해 말씀을 남겨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남겨졌다고 전해지는 책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이다. 내 인생의 후반기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다. 그런데 책의 분량은 의외로 짧다. 불과 5000자 남짓.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신문 칼럼 몇 편 정도의 분량이다. 긴 서사도 없고, 체계적인 철학 논문도 아니며, 문장은 짧게 압축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도 이 작은 책은 이후 동아시아 정신 세계 전체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3
<<도덕경>>은 크게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으로 나뉘며, 모두 81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 핵심은 ‘도(道)’라는 개념이다. 노자가 말한 '도'는 단지 ‘길’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을 움직이는 근원적 질서와 흐름에 가깝다. 인간은 그 흐름을 억지로 거스르지 말고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노자 사상의 중심이었다. 책의 첫 문장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라는 구절은 진리의 본질을 인간의 언어와 개념만으로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의 좁은 언어로 진리를 규정하려는 오만을 경계한 것이다.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봐야 한다. 당시 중국은 공자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나라들은 서로 싸웠고, 사람들은 권력과 이익을 좇았다. 더 강해지려 했고, 더 많이 가지려 했다. 그러나 노자는 정반대의 노선을 걷는다. ‘정말 더 강해져야 하는가?’ ‘정말 더 많이 가져야 하는가?’ ‘억지로 세상을 바꾸려는 욕망이 오히려 세상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공자가 무너지는 질서를 다시 세우려 했다면, 노자는 애초에 인간이 자연의 흐름을 거슬렀기 때문에 혼란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노자의 대표적 사상인 "무위자연(無爲自然)" 역시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흔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 되지만, 노자가 말한 "무위"는 게으름이나 포기가 아니었다. 억지와 과욕으로 세상을 조작하려 하지 말라는 뜻에 더 가까웠다.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인간 역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을 때 가장 조화로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상선약수)”고 자주 이야기했다.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는 것도 결국 물이다(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이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더 강할 수 있다는 통찰이었다. 그는 강함과 채움, 성공을 쫓는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어 바라보며, 낮아짐과 유연함 속에서 진정한 영적 힘을 발견한 역설의 영성가였다.
주목할 것은 노자의 사상이 현대인에게 오히려 더 새롭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오늘의 세계는 끊임없이 경쟁을 요구한다. 더 빨리 성공하라고 가르치고, 더 많이 소유하라고 말한다. 인간은 쉬지 못하고 계속 비교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달려가면서도 어디로 가는지는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노자는 아마 이런 인간을 보며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과 인위성을 경계했다. 문명이 지나치게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인간은 본래의 삶에서 멀어진다고 보았다. <<도덕경>>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 지족불욕 지지불태)." 오늘날처럼 끝없는 소비와 경쟁이 반복되는 시대에 이 문장은 묘한 울림을 남긴다.
물론 노자의 사상에도 한계는 있다. 현실 정치와 사회 개혁 문제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실제로 유교 전통에서는 노자의 사상이 현실 책임보다 은둔과 회피를 조장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지나친 긴장과 경쟁 속에 몰릴 때마다 다시 노자를 찾았다. 권력과 욕망의 소음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자연과 단순함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래서 노자의 사상은 철학을 넘어 선(禪)과 동양 미학, 자연주의, 명상 문화 등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생각을 가라앉히는 선(禪) 불교의 형성과 동양 예술에서 여백의 미학이 강조되는 데에는 노자의 영향이 적지 않다. 모든 것을 꽉 채우려 하기보다 비어 있는 공간 속에서 조화를 찾으려는 감각이다.
4
노자가 ‘약함’을 반복해서 강조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말하지만, 노자는 오히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가장 오래 남는다고 보았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딱딱하게 굳고, 풀과 나무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으면 말라 비틀어진다는 뜻이다(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인지생야유약 기사야견강 초목지생야유취 기사야고고). 그런 통찰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처럼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인간 문명은 오랫동안 ‘정복’과 ‘성장’의 방향으로 달려왔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과도 멀어졌다. 노자는 그 문명의 질주 한가운데서 조용히 질문을 던졌던 사람인지 모른다. '정말 그렇게까지 애쓰며 살아야 하는가?.'
2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지쳐 있다. 연결은 넘치지만 마음은 고독하고, 속도는 빨라졌지만 삶의 의미는 더 흐릿해졌다. 그래서 현대인은 다시 산과 숲을 찾고, 명상과 느린 삶을 이야기하며, 비움과 단순함을 동경한다. 인간은 너무 멀리 갔다고 느낄 때마다 다시 노자를 떠올렸던 것은 아닐까? 노자는 거대한 변화를 외치기보다 한 걸음의 중요성을 말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千里之行, 始於足下, 천리지행 시어족하)”는 그의 말은 조급함에 사로잡힌 현대인에게 여전히 유효한 충고로 다가온다. 세상을 이기려 하지 말고, 자연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라는 가르침, 이는 오늘날 지친 인류가 영성 회복을 위해 붙잡아야 할 가장 실천적인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노자는 세상을 흑백으로 나누지 않았다. 강함 속에 약함이 있고, 성공 속에 실패가 있으며, 채움 속에 비움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서로 반대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의 흐름 안에 있다고 이해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 하지만, 때로는 비워야 채워지고 물러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노자가 말한 ‘도(道)’는 인간을 넘어선 거대한 질서와 근원을 향한 물음이었다. 도는 또한 어떤 이에게는 신의 섭리로, 어떤 이에게는 우주 만물을 관통하는 근원적 질서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세계일보> 정성수 기자의 글을 갈무리한 것이다.
5
연중 제14주간 목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0,7-15>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하느님 나 벗>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내가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믿음이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희망이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기쁨이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자유가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평화가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돌봄이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섬김이
나를 통해
벗에게
하느님의 살림이
나를 통해
벗에게
6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계신가요?
2026/7/9/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마태오 복음 10장 7-1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
주님 마음
최근 한 신자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로 전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죠. 그분은 유독 죄의식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몸을 다쳐서 한 달간 성당에 나오지 못했다.’ ‘내가 배우자를 너무 미워해서 벌을 받은 것 같다.’ ‘그렇게 미워하니까 벌을 받는 것이라며 자녀들도 내게 쓴소리를 했다.’ 말씀하시는 내내 그분 얼굴에는 정말이지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대화 끝에 주님께서는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할 기회를 마련해 주시는 분이라는 말을 해 드렸더니 그제야 얼굴이 조금 펴지시더군요. 그런데 우리라고 그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사 안에서 주님께서 구원하러 오셨다는 복음 말씀을 듣고 성체를 영해도, 벌을 받는다는 두려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에게는 상급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는 교리가 우리 마음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은 교리보다도 더 확실하게 주님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9)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분은 우리의 부족함을 보고 분노하시기보다는, 어떻게 채워줄까 걱정하며 마음이 미어지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부족함에서도 선함을 발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김경태 마르티노 신부(서울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눈물겨운 사랑 고백과 함께, 그 거대한 사랑을 체험한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 길을 선명히 제시해 줍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기저에는 ‘거저 받은 은총’이라는 따뜻하고도 강렬한 복음의 진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구약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의 부성애(父性愛)가 가장 아름답고도 애절하게 묘사된 대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중한 ‘어린아이’로 부르시며, 그들을 키워낸 세월을 추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호세 11,1.3).
하느님은 인정 많은 농부처럼 이스라엘의 목에서 멍에를 쳐들어 주셨고, 허리를 굽혀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풍요를 누리게 되자 하느님을 잊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정의대로라면 멸망시켜야 마땅하지만, 하느님은 차마 당신 자녀를 버리지 못하십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호세 11,8-9).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본모습입니다. 우리의 배반보다 당신의 사랑이 더 커서, 스스로 당신의 마음을 꺾고 용서하시는 애끓는 사랑, 우리는 모두 이 사랑을 ‘거저’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신앙인이 지녀야 할 가장 순수한 태도를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우리가 누리는 생명과 신앙, 자연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 중 우리 힘으로 벌어서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할 때 대가를 바라거나 세속적인 이익을 챙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길을 떠날 때 금도, 은도, 여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고생을 자처하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수단이나 인간적인 계산에 의지하지 말고 나를 먹이시는 하느님의 섭리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초대입니다. 내 주머니를 비워야만 그 자리에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와 권능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그 평화는 자격이 있는 이에게는 머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환대하든 배척하든, 제자들은 그저 하느님께 받은 사랑과 평화를 쉼 없이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면 그뿐입니다. 설령 배척당하더라도 발의 먼지를 털어버릴지언정, 마음에 미움이나 원망을 담아두지 않는 초연함이 진정한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메마르고 계산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거저 받았다는 은총의 신비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지갑과 마음의 주머니를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 채우고 있기에,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목의 멍에를 쳐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느껴봅시다.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하려던 교만의 주머니를 비우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 대가 없는 미소와 평화의 인사를 건넵시다. 우리가 비워질 때, 주님께서는 우리 삶을 당신의 놀라운 은총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저희가 어릴 때부터 걸음마를 가르치시고 품에 안아 기르시며 거저 베풀어 주신 그 크신 사랑에 감사하나이다. 저희가 세상의 계산법에 갇혀 인색하게 살지 않게 하시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하신 말씀대로 저희의 시간과 사랑을 이웃에게 아낌없이 나누게 하소서. 인간적인 도구에 의지하기보다 오직 당신의 섭리만을 신뢰하며, 오늘 저희가 머무는 모든 곳에 당신의 평화를 심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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