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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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사진은 맨발 걷기를 하는 숲이다. 얼마 전부터 자주 가는 곳이다. 비가 그친 후 갔더니 앞새들의 초록이 오늘 아침 시를 소환했다.
7월의 시/오세영
7월의 대지는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따뜻하고 풍요롭다.
초록의 잎새들이
저마다 목을 축이며 자라나는 이 계절,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어머니의 품 안에서 숨 쉬듯 평온하다.
거친 비바람이 불어와도
7월의 숲이 그늘을 만들어 주듯,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감싸 안는 지치지 않는 초록이다.
오늘 아침 <인문 일지>는 '2030 세대'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의 2030세대를 말하라고 하면 두 가지 평가가 있다. 어느 쪽의 평가가 맞다기보다 기성 세대가 보기에는 까다롭고 계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보다 아마도 둘 다 일정 부분은 맞고, 또 둘 다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 이들이 공정과 정의에 민감하고, 권위보다 합리성을 중시하는 세대이다.
▪ 지나치게 개인주의 적이고, 공동체 의식이나 역사 인식이 부족하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시대의 산물이다. 우리와 같은 기성 세대가 고도 성장과 산업화, 민주화의 격변 속에서 '열심히 하면 나아진다'는 경험을 했다면, 지금의 2030 세대는 이미 포화 된 사회에 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안정된 주거, 결혼과 출산까지 모두 경쟁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노력 만으로 삶이 나아진다는 믿음이 크게 약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모습들로 나타난다.
그들은 공정에 민감하다. 그런데 공정의 의미를 잘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공정은 거창한 이념이라 기 보다 "출발선이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지는 않은가 하는 기회 평등의 문제, 규칙이 투명한가 하는 과정과 절차의 투명성, 보상은 이해할 만 한 가라는 결과의 정의로운 사용이라는 것에 가깝다. 다음은 내 생각이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의(justice)의 세상을 넘어 공의(righteousness)의 세상이다. 롤즈(Rawls)의 정의론은 일단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난 지의 문제는 더 이상 따지지 말고 태어난 사람들이 가장 정의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가며 사회 정의 이론을 기초했다. 그 기초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이다.
▪ 기회의 평등,
▪ 과정과 절차의 투명성,
▪ 결과의 정의로운 사용
그러나 ‘반칙과 특권이 없는 나라’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는 하나의 레토릭(rhetoric)이다. 어쩌면 현실의 벽 앞에서는 '개소리'일 수 있다. 왜냐하면 롤즈(Rawls)의 정의론에서 보이는 다음과 같은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 유전자 복권 당첨자(좋은 머리와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기회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복권에서 배제된 사람들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는 혜택을 누린다.
▪ 과정과 절차의 투명성으로 다시 한번 당첨자들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경기를 응원하고,
▪ 이렇게 해서 얻은 우월한 결과를 개인들에게 귀속 시켜준다.
주목해야 할 것이, 이 이론은 당첨자의 행운을 이중 삼중으로 세탁해서 불평등을 정당화해주는 역기능을 더욱 심화 시킨다.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불공정의 세탁소로 전락했다. 불공정한 양극화가 정당화 된다. 예컨대, 롤즈의 "무지의 커튼"을 빌미로 유전자 복권 장본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운이 좋아서 복권에 당첨된 사실을 감추고 모든 결과를 자신이 스스로 땀 흘려 일군 것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억세게 운이 좋은 것도 자신이 남들과 달리 특별하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얻었다고 포장한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일군 것처럼 스스로도 믿게 되면 마치 세상을 다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권능감을 가지게 되고 어느 순간 더불어 커져 가는 오만과 거만 그리고 탐욕을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만과 탐욕이 거인처럼 커지게 되면 결국은 탐욕으로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추락하게 되는 운명에 처한다는 거다. 모든 복권 당첨자들이 불운하듯이 이점이 바로 "유전자 복권" 속에 숨겨진 불운의 그림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복권 당첨자", '금 수저'가 나는 '마냥' 부럽지 않다. 아이들에게 돈만 물려주는 '금 수저'는 다음과 같이 4 가지를 갖지 못하게 된다.
▪ 영혼이 성숙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영적인 성숙은 피, 땀, 눈물이라는 3가지 액체를 많이 흘리지 않고는 어렵다. 그들의 인격은 빈곤해 진다. 돈이 좀 부족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자아를 덜어낼 수 있다. 그 순간 겸손해지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정말로 감사의 마음이 솟구친다. 이 비움과 감사를 훈련하는 게 바로 영혼의 성숙이고 그게 영성의 회복이 된다.
▪ 부모로부터 통제를 많이 받으면 세상을 보는 관점의 독립을 갖지 못한다. 세상과 사람을 보는 나 만의 독립적인 관점을 가질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들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는 약점도 갖는다. 인생을 실패해 봐야만 완전한 제로 베이스에서 인생 출발을 다시 할 수 있다. 그래야 철저하게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획득하게 된다. 주입된 관점에서는 창조를 못한다.
▪ 다른 이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사람들을 못 믿는다. 물질적, 신분적 풍요는 가식(假飾) 속에서 생활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산을 물려받은 2, 3세는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의심 병도 많다. 가식을 많이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살면서 무척 경계심이 많다. 그래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출발 조건과 행복한 삶과는 관계가 크지 않다. 그 큰 유산을 가졌다면 걱정이 없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 그들은 상처 받기 쉬운 내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돈을 뜯길까 봐, 의심이 그의 머리에 먹구름처럼 떠다닌다.
▪ 일을 하지 않아, 무균 실 안의 '금 수저'들은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현실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한다. 사실 노동과 일자리는 인생을 설계할 때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일을 통해 자신이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느낌과 배움을 얻고, 도전에 맞서 성장하며,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자립하는 동시에 공동체에 속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쓸모 있고 생산적인 존재라고 느껴야 성숙해진다. 그래 우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있다면, 돈에만 집중하지 않고 삶에서 의미 있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그리고 일은 가족으로부터 조금이 나마 독립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개인적인 각성도 중요하지만, 사회 시스템의 대 개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양극화의 해소가 대안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이야기 한다. 지금은 우리 사회의 2030 세대의 모습들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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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존중 받아야 한다 거나, 조직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그래야 하는 가를 묻고, 그 기준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가를 따진다.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까다롭고 계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우리 사회를 더 투명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2030 새대들이 소위 '영포티'를 싫어한다. ‘영포티’는 젊게 사는 중년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최근 2030세대에게는 겉으론 젊고 트렌디하려고 하지만 자기 과시적이고 허세만 있는 중년, 나이 듦을 인정하지 않는 세대로 냉소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 “열심히 일해서 몇 년 전 운 좋게 서울에 아파트를 사는 데 성공했습니다. 순조롭게 승진을 했고, 연봉도 만족스럽습니다. 좋아하던 아티스트의 콘서트에 가고, 패션이나 음식 기호도 확고해서 섬세한 취향이라는 평을 들어요. 교육비가 많이 들기 시작했지만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도 거르지 않습니다. 하프 마라톤을 뛸 정도로 운동도 제대로 합니다.”
이 말을 듣고, 2030 세대는 '영포티'를 미워한다. 약간의 부러움이 섞여 있지 않을까? '영포티'는 부동산 폭등기가 오기 전에 운 좋게 아파트 구매에 성공한 사람이 많다. 서울 ‘마용성’ 지역의 신규 매수자에 '영포티'가 많다. 반면 2030세대는 집값이 뛰어 버린 탓에 꿈도 꾸지 못한다. 소득이 한창 최고조에 오르고, 와인이나 음악 같은 취향을 즐기면서 주거도 안정된 '영포티'를 보면 부러움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은데 몇 년 차이로 저 멀리 서 있는 걸 보니 얄밉지 않을까? 그러니 갈등과 긴장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영포티'는 억울해하기보다, 미안함과 인정의 태도가 필요하다. 가까운 사이라 내 현재를 말했을 뿐이라 해도 자랑이나 잘난 척으로만 들리기 쉽다. 같은 편이라 여기고 불평을 하는 것도 배부른 소리로 비칠 뿐이다. 2030 세대와 친해지려 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젠 인생 후반전으로 넘어가야 한다. 중년은 ‘인생의 정오'라 하는데, 성취한 것이 많다면 오후를 맞는 마음이 가뿐할 거다.
▪ ‘친하게 가까이’ 말고 거리를 유지하는 거다. 2030은 사회적 미소로 웃으며 응대하는 것이지 개인적 호감이 있는 게 아니다. 알아차려야 한다.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내 직급이 높으니 고개를 끄덕이고 눈꼬리를 올려줄 뿐이다. 잘못 해석해서 '착각 서사'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 친근하고 격의 없이 대하지만 권위가 살지 않아 휘둘리는 선배가 되기보다 적당히 무섭기도 하고, 분명한 선을 지키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확실히 구분해주는 사람이 되는 거다. 권위적인 것과 권위가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무섭지만 배울 게 많은 사람"이란 인상이 되는 쪽을 선택하자.
▪ 후배들 앞에서 살짝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거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큼 꼴불견이 없다. 저기압일 때 짜증 낸 건 쉽게 잊지만, 후배들은 그걸 더 오래 기억한다.
젊게 보이려 애를 쓰지만,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나를 보는 시선이 이미 저 멀리 가 있다. 받아들여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뒷자리로 물러나고, 후배에게 공을 돌리며, 기세보다 요령으로 일하는 거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글에서 얻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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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3 세대가 말하는 공정에 대한 감각이 때로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특혜로 오해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문제는 능력주의를 지나치게 절대 화하면, 부모의 재력이나 교육 환경, 사회적 배경처럼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의 차이를 보지 못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2030 세대가 공동체 의식이 약하다는 비판도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청년 세대의 이기심으로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청년들에게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요구해 놓고, 다시 왜 공동체 의식이 없느냐고 묻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역사 인식의 문제도 그렇다. 기성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험을 몸으로 겪었다. 그러나 2030 세대에게 그 역사는 체험이 아니라 교과서와 미디어를 통해 접한 정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 인식이 부족하다고 꾸짖기 전에, 우리는 그 역사를 젊은 세대의 삶과 어떻게 연결해 주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과거의 성취만 자랑하고 현재의 불평등과 불안을 소홀히 한다면, 2030 새대들이 그 역사에 공감하기 어렵다.
기성세대는 2030 세대들에게 훈계하기 보다 이해가 앞서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기적이다'라는 말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다음과 질문들을 해 보아야 한다.
▪ 왜 이들이 공정에 민감한지?
▪ 왜 조직보다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지?
▪ 왜 기성세대의 말보다 제도의 투명성을 요구하는지?
끝으로 말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 그들에게 공동체를 말하려면 먼저 일자리와 주거, 채용과 승진, 교육과 복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이와 관련, 2030 세대들을 위한 별도의 예산 확보 등이 필요하다.
▪ 그리고 불투명한 관행과 연고주의, 특혜와 불평등을 그대로 둔 채 공동체 정신만 구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 능력주의도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라 보완해야 한다. 성과와 능력은 인정하되, 출발선의 불평등을 줄이고, 실패한 사람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와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잘 보면, 2030 세대는 이기적인 세대라 기보다 불안한 세대를 공정이라는 언어로 견디는 세대이다. 공동체 의식이 약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역사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설득력 있는 언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우선인 것 같다. 우리 동네의 어른인 염홍철 시장의 <아침단상>에서 하신 말씀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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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에 관한 글을 하나 더 공유한다. '영포티'가 달갑지 않은 청년들을 보살펴야 한다. 젊게 사는 40대 '영포티'가 '나잇값 못하는 세대'로 조롱 받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유행 중인 다음과 같은 ‘영포티’ 밈을 볼 수 있다. 인공지능(AI)으로 캐리커처 화한 '영포티'의 모습은 뉴에라 모자, 찢어진 청반바지에 나이키 조던 운동화를 신고 신형 아이폰을 들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갤저씨’(갤럭시+아저씨)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는데 이제는 아이폰을 쓰면 ‘아재’라 한다.
'영포티'는 젊게 사는 40대를 긍정적으로 담은 개념이 아니다. 젊어 ‘보이는’ 아이템을 고수하며 나잇값 하지 못하는 세대를 비아냥 섞인 시각으로 풀어낸 이미지에 가깝다. 여기에 20대 이성을 노리며 젊음을 과시하는 40대에겐 ‘스윗 영포티’라는 더 농도 짙은 조롱이 더해진다. 40대는 이런 밈이 불쾌하다. 어릴 적부터 애용한 브랜드를 그대로 착용할 뿐인데, 젊은 패션은 모두 2030의 점유물이라는 듯한 태도가 달갑지 않다. 나이에 비해 좀 젊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대수인가?
그러나 밈의 세계에선 긁히면 진다. 분노하는 40대의 반응은 또 다른 밈으로 확산하고 있다. 몇 년 전 만들어진 ‘노무(NOMU·No More Uncle·더 이상 아저씨가 아니다)족’이라는 신조어가 발버둥치는 4050을 희화화하는 단어로 재조명될 정도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중국에선 ‘유니중년’(油腻中年·기름진 중년)이라는 말이 있다. 배에는 기름이 끼고, 담배 냄새를 풍기며 꼰대스러운 농담을 일삼는 4050을 젊은 층이 인터넷에서 조롱할 때 쓰는 말이다. 서구권 ‘젠지’(GEN-Z·2000년대 이후 출생자) 사이에선 베이비붐 세대를 향해 ‘오케이 부머’(OK, Boomer·그래, 베이비부머야)라는 말이 유행했다. ‘라떼는(나 때는)' 식의 철 지난 훈수를 두는 기득권을 향한 따가운 시선은 특정 문화권의 특징만은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영포티' 현상을 그저 웃어넘기기엔 영 찝찝하다. 한국 청년들의 뒤틀린 시선 밑바닥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자리한다. 2030 청년들의 삶은 전례 없이 버겁다. 고용률이 고령층을 못 따라가는 역전 현상이 반년 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8월 청년층 고용률은 45%로, 60세 이상(48%)에 못 미쳤다.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으니 너도나도 자영업에 뛰어들지만 생존이 쉽지 않다. 10여 년 전엔 수억 원으로 내 집 마련이 가능했다는데, 십 수 억원을 훌쩍 넘긴 서울 집값은 청년들의 박탈감을 더욱 극대화한다. 청년들의 뒤틀린 시선엔 '갖지 못한 자'의 울분이 자리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고 정치권에서 희망을 보기도 어렵다. 고용노동부가 ‘고용’ 간판을 뗄 정도로 노동 전성 시대라지만, 청년 일자리 정책은 실종되고 그 자리를 중 장년의 정년 연장 논의가 채우고 있다. 누군가는 오히려 주 4.5일 근무제를 도입하자는 배부른 소리를 꺼낸다. ‘더 내고 더 받는’ 연금개혁이 지난해 여야 합의로 통과된 것도 주요 담론에서 청년이 빠져 있다는 방증이다. 기성세대가 견고하게 쌓아 올린 시스템 속에서 청년을 위한 구명줄은 쉽사리 내려오지 않는다. 한 정치인의 표현을 빌리면, 스마트폰을 갖고 싶다는 청년들에게 공중전화 박스를 잔뜩 지어주자는 담론만 되풀이된다. 청년 문제 손 놓은 정치권에서 구조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불행에서 파생된 화살은 가까운 방향을 향하기 때문이다. 좌절은 공격으로, 불운은 희생양 찾기로 전환된다는 건 심리학에서도 증명된 이론이다. 고작 먼저 태어났을 뿐인데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진 듯한 40대가 주요 타깃이다. 안정된 일자리와 부동산을 운 좋게 선점한 세대가 ‘젊음’까지 빼앗아 가려 한다니, 독점 자본마저 위협받는 세대의 불안감도 이해는 간다. 구조적인 청년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다면 '영포티' 현상은 한때의 밈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젠더 갈등이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소모적 대결로 몰아넣었는지를 생각하면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문제다. 당시에도 ‘한남’(한국남자)이니 ‘꼴페미’(꼴페미니스트)'니 하는 단어가 내전의 시작이었다. 혐오는 늘 혐오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을 배울 때도 됐다.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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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간 수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10,1-7>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부르시고 닮게 하시어 보내시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마태 10,5)
당신께서
나를
가까이
부르시니
나
당신
가까이
다가갑니다
당신께서
나를
당신
닮게 하시니
나
당신
오롯이
닮아갑니다
당신께서
나를
벗에게
보내시니
나
당신
가시듯
떠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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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이 닿는 곳은 어디인가요?
2026/7/8/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마태오 복음 10장 1-7절: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호세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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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가치
제가 인상 깊게 본 영화 중에 〈쿵푸팬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그저 재미있는 만화영화인 줄 알았는데, 커서 다시 보니 꽤 의미 있는 메시지를 많이 담고 있더군요. 영화의 주인공은 조금 독특하게도 살찐 팬더입니다. 뚱뚱한 팬더가 중심이라고 하니, 등장인물들도 저도 일단 웃고 보았습니다. 주인공은 극중에서 온갖 조롱과 고난을 맞닥뜨리는데, 그때 그의 스승은 이런 대사로 그를 응원합니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but Today is a Gift. That is why it is called the Present.” 즉, 지나간 일들과 다가올 일들에 얽매이지 말고, 이 순간이라는 선물에 감사하라는 뜻이죠. 이 대사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우리 역시 주인공과 별반 다르지 않게 과거나 미래에 얽매여 오늘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과거도 미래도 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음과 같은 번역을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는 손에서 떠나간 고금이며, 내일은 손에 들어오지 않은 궁금이나, 오늘은 손에 있는 지금이니, 이야말로 지극히(至) 귀한 황금(金)이라.” 내 손에 있는 지금至金,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바로 지금只今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경태 마르티노 신부(서울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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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신앙의 ‘회복’과 ‘새로운 출발’에 대해 강력하게 일깨워 줍니다.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풍요로움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진 이들을 향해 영적인 개간을 촉구하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범하고 약점 많은 이들을 부르시어 하느님 나라의 강력한 전령으로 파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풍요로워질수록 더 많은 우상의 제단을 만들었고, 땅이 비옥해질수록 석상들을 더욱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축복을 오히려 죄를 짓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호세 10,2 참조)라고 진단합니다.
방치해 둔 밭이 시간이 지나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리듯, 우리의 마음도 세상의 안락함과 이기심에 길들여지면 ‘묵은 땅’이 되어 버립니다. 말씀의 씨앗이 도저히 뿌리내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언자는 간절히 외칩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호세 10,12). 신앙의 회복은 내 마음에 굳어진 고집과 이기심의 흙덩이를 주님의 십자가로 갈아엎는 ‘불편한 수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의 밭을 갈아엎은 자리에 주님은 당신의 일꾼들을 세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열두 제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며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명단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성격이 불같았던 베드로와 요한, 로마의 앞잡이로 손가락질받던 세리 마태오, 그리고 로마를 무력으로 쫓아내려던 혁명당원 시몬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한자리에 섞일 수 없고, 배움도 부족하며 허물 많은 평범한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완벽한 사람들을 골라 쓰신 것이 아니라, 부족한 이들을 불러 당신의 능력으로 완벽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강력한 ‘권한’을 주시며,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포해야 할 메시지는 단 하나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10,7).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 각자의 이름도 똑같이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잘 몰라서” 혹은 “수양이 부족해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대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열두 제자가 증언하듯, 중요한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분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내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엎고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은 우리에게도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우고 지친 이들을 위로할 영적인 권능을 가득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거창한 신학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묵은 땅 같았던 내 마음을 주님의 자비로 갈아엎고, 내 삶의 자리에서 따뜻한 미소와 용서의 한마디를 건넬 때 바로 그곳에서 하늘나라가 시작됩니다. 오늘 하루, 내 안의 완고함을 뉘우치며 주님의 이름을 부릅시다. 지금이 바로 주님을 찾을 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적셔주시고, 우리를 통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부르심의 주님, 저희가 세상의 풍요와 편안함에 눈이 멀어 마음의 밭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소서. 저희의 완고한 마음을 당신의 사랑으로 갈아엎어 주시어, 정의와 자애의 싹이 돋아나게 하소서. 허물 많은 제자들을 불러 쓰셨듯이 부족한 저희도 당신의 도구로 택해 주셨으니, 오늘 저희가 보내진 삶의 자리에서 ‘하늘나라의 가까움’을 당당히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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