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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는 자유인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18세기에 에픽테토스를 상상해 그린 초상화. 노예 출신 철학자였던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가장 흠모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았을 정도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위키피디아

373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7일)

1
오늘 아침의 화두는 '마음'이다. 마음 중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능력은 삶을 가꾸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라는 것을 소환한다. 마음은 분위기를 많이 탄다. 날씨만 좋아도 기분이 밝아지고, 흐릿한 날에는 절로 우울해 진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고 살림살이도 넉넉할 때는 즐거운 기운이 감돌지만, 대하기 버거운 이들이 곁에 있는 데다가 형편까지 어려워지면 얼굴도 어느새 어두워지지 않던가. 하지만 이렇게 상황과 처지에 따라 기분이 흔들린다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훌륭하게 삶을 헤쳐가는 이들은 힘든 사정이 있어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나아가, 달뜨고 흥분한 상황에서도 담담한 자세로 냉철하게 현실을 살필 테다. 이 점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능력은 삶을 가꾸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다.

생각을 바꾸어 마음의 평화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는 균형이고 평정심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마음을 편히 먹고 일상적인 습관을 형성하려는 태도에 달려 있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들은 무언가 다르다. 그들 각자는 매일 평정을 유지하는 훈련을 한다. 그건 안식처와 고요함을 찾아, 내면에 집중하는 거다. 그리고 무언가를 시작하기전에 세상에 맞서는 일부터 멈춰야 한다. 세상은 늘 무언가를 하라고 강요하고, 사람들을 밀어붙이며, 투쟁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버려 두어야 저절로 풀리는 일들도 있다. 다만 현재에 집중하는 거다.

현재를 사는 일은 줄타기와 같다. 줄에서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만, 연습하다 보면 더 오랜 시간 줄 위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현재에 전념하는 전략이, 서두르면서 살지 않는 거다. 그리고 모든 일에 필요한 만큼 시간을 들이는 거다. 필요한 일을 하는 동안 온 정신을 거기에 집중한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말이다. "필요한 만큼 시간이 걸리겠지. 서두르지 않겠어." 현재라는 줄 위에 오래 견딜수록 삶은 더 나아진다.

체온의 시/문정희(1947~)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뜻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늘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주리

2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는 자유인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우레리우스 황제가 흠모한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그런 사람이다.

로마 시대의 철학자 에픽테토스(55?~135?)는 평온한 마음을 지키는 데 있어 ‘끝판왕’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노예였다. 첫 주인은 무척 잔혹해서 에픽테토스의 다리를 비틀어 불구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에픽테토스는 스스로를 주인보다 훨씬 자유로운 사람이라 여겼다. 왜 그랬을까? “당신이 내 발을 쇠사슬로 묶어 놓을 수는 있겠지요. 그렇지만 최고의 신 유피테르일지라도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하는 자유는 어쩌지 못할 겁니다.”

에픽테토스의 말이다. 노예라는 처지는 자신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괴롭힘 앞에서 겁에 질려 울부짖을지, 의연한 모습을 보일지는 여전히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런 에픽테토스의 눈에는 네로 황제도 노예와 별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평판에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하는 데다가, 자기 욕심을 채우지 못해 화와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탓이다. 상황이 이끄는 대로 감정이 휘둘리며 고통의 나락 속에서 지낸다는 점에서는 노예와 다르지 않은 모양새다.

에픽테토스는 누가 노예이고 자유인인지는 자신의 신분이 아니라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한 마리 말(馬)이 우쭐대며 ‘나는 아름답다’고 하는 경우는 괜찮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는 아름다운 말이 있어’라고 자랑할 때는 어떤가? 그대는 자신이 아닌, 말이 훌륭하다고 으스댈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재산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서, 사람들에게서 꼭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질투와 시기에 휩싸이기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반면,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날 때는 다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진리를 오해했다고 해서 진리가 상처받지 않는다. 이를 잘못 받아들인 사람들이 어리석어 질 뿐이다.” 에픽테토스의 조언이다. 그러니 우리는 높은 자리에 가려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만큼이나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인은 자기 밖의 상황이나 처지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의 중심을 굳건히 잡고 있기에, 언제나 한결같이 평온하게 삶을 이끌어간다. 이 점에서 그는 신과도 같다. 신은 무엇도 아쉬워하지 않고, 고통을 당하지도 않으며 변함없이 맑은 정신을 지키고 있는 존재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신과 같은’ 마음을 갖추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갖추도록 일상에서 꾸준히 노력해 보자. “그대는 자신도 모르고 있는 진정한 힘을 이미 갖고 있다. 그 힘을 줄곧 사용해 보라. 아픔과 나약함에는 끈기라는 힘이, 쏟아지는 욕설에는 인내심이 그대가 가진 자원이다. 당신이 인생에서 겪는 낱낱의 사건마다 당신이 지닌 능력을 펼치는 ‘습관’을 갖춘다면, 더 이상 삶의 여러 상황에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될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도 말한다. “올리브기름을 엎지르고 포도주를 도둑맞았다면 이렇게 되뇌어 보라. ‘나는 지금 마음의 평정을 지키기 위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았다면, 나는 평온함을 유지하는 훈련을 제대로 한 셈이다. 

마음의 평안을 지키는 힘이 자라난다는 사실은 내가 더 바람직한 수준 높은 생활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그러니 올림픽에 나간 선수가 경기에 집중하듯, 매일매일의 어려움을 통해 인내와 끈기로 정신의 근력을 키우려 꾸준히 애써야 한다. 에픽테토스가 죽었을 때, 그가 쓰던 보잘것없는 등잔이 무려 3000드라크마에 팔렸다고 한다. 이는 현재 가치로 1억5000만원에 상당하는 금액이다. 그만큼 노예였던 그가 로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뜻이리라. 심지어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그를 가장 흠모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을 정도였다. “불쌍하고, 걸을 때마다 쩔뚝거리는 몸을 가진, 노예로 태어난 나 에픽테토스는 신의 친구였다네.” 자긍심에 가득 찬 에픽테토스의 말이다.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는 재산이나 권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평온하고 맑은 마음을 가꾸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셨으면 좋겠다.

3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행복 철학은 독특하다. 노예 출신이었던 그는 자유의 개념에서 행복을 도출한다. 노예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므로 신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엄격한 제약을 받는다. 신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속박이 존재한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자유로울지라도 그의 마음이 무엇에 속박되어 있다면 그를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정념 등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도 그것의 노예라는 게 에픽테토스의 주장이다.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주인으로서 자유를 누릴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세상의 존재들을 나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생각, 판단, 욕망, 분노, 혐오처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이다. 후자는 신체, 죽음, 재산, 운, 인기, 평판, 사회적 지위처럼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고통이나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여기면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은 어떤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생각이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나를 화나게 하는 원인은 무례하거나 공격적인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화나게 하고 있다는 나의 생각이다.”

내 것인 것만 내 것이고, 내 것 아닌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누구도 나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한다. 나에게 달려 있는 것만 추구해야 한다. 심지어 운도 내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매달려선 안 된다. 병이나 죽음, 운처럼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추구하면 불행한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범인(凡人)인 우리들이 스토아 철학자처럼 살 순 없겠지만 지혜는 빌릴 수 있을 것이다. 부부나 자녀 간의 관계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내 마음 대로 하려니까 자연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뜻대로 하려 들지 말고, 나에게 달려 있는 생각이나 분노 등이 내 바깥에서 날뛰지 않게 단단히 고삐를 죄어야 한다. 그것이 대자유인의 삶이 자 행복의 비결이다.

4
에픽테토스는 남다른 고통과 고생을 통해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훈련을 말했다. 그의 철학은 추상적이 개념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일상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 가능한 조언들이다. 예를 들면, "너희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을 것이니, 너희들이 피하고 싶은 상황에 절대 빠지 말아라!" 쉽고도 어려운 조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 '인문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인문 정신이란 자신에 주어진, 자신에게 알맞은 인생의 과업을 심사숙고하여 찾아내는 여정이다. 만일 그가 인생의 과업을 발견했다면, 자신답지 않은 것, 즉 자신이 피하고 싶은 상황을 미리 감지하고 피할 것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알아야, 우리가 피하고 싶은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이젠 그의 조언을 이해했다. 교육도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유도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이 과정을 통해, 누구를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 자아상을 구축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지금' 즐길 수 있다.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일상의 훈련을 통해, 일상을 지배하기 위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분야를 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 욕망(慾望): 욕망은 나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잠재된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겠다는 의지로 정의된다. 에틱테토스는  욕망을 '오렉시스'로 표현했다. 이 말은 '뻗을 수 있는 곳까지 팔을 최대한으로 뻗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욕망은 팔을 움츠리지 말고 최대한으로 펴는 연습을 하라는 조언인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팔로 획득할 수 있는 것과 획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걸 구별하는 것이다. 내 팔로 획득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것은 탐욕이라고 본다. 그러니 내가 잘 할 수 있는 한 가지에 몰입하여 최고의 성과를 내려는 마음이 바로 '오렉시스',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욕망이다. 이 오렉시스를 매일 훈련하라는 것이다.
▪ 선택(選擇): 선택은 나의 최선을 집약 시킬 대상을 선별하는 능력이다. 그리스 단어 ‘호르메’는 원래 강물과 같이 ‘자연스럽고 강력한 흐름’이란 의미다. 이 단어는 ‘시작, 열정, 투쟁, 폭력, 식욕’과 같은 다양한 의미들을 관통하는 ‘힘’이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훌륭하게 마칠 수 있게 하는 내 일은 심사숙고를 통해, 내가 사적으로 한 선택의 결과이다. 또한 선택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단호함도 포함한다. 
▪ 승복(承服): 승복은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완전히 몰입하여 완수하려는 결심이다. 그리스 단어 ‘쉬그카타쎄시스’는 성급에서 야기되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임무의 완성을 위해 1부터 10까지, 그 순서대로 적절하게 배열하고, 그 각각에 자신의 혼신을 바치는 희생이다. 

에픽테토스는 매일 아침 자기 안에서 이 세가지 원칙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배철현 선생은 우리에게 말한다. 매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집중하여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너무 힘들게 살 필요 없다.

5
연중 제14주간 화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9,32-38> "말 못하는 이를 고치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흐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9,35)
믿음이 흐르다
불신의 벽을 부숴
믿음이 흐르다
희망이 흐르다
절망의 늪을 메워
희망이 흐르다
사랑이 흐르다
증오의 담을 헐어
사랑이 흐르다
섬김이 흐르다
독선의 날을 꺾어
섬김이 흐르다
살림이 흐르다
죽임의 덫을 치워
살림이 흐르다

6
진정한 선함이란 무엇일까요?
2026/7/7/연중 제14주간 화요일/소서
마태오 복음 9장 32-38절: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위선僞善과 위선爲善
‘가스라이팅’.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본인의 마음대로 상대방을 장악하려는 심리적 지배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수법 중 “모두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대로 행위의 지향점이 상대방에게 맞춰져 있다면, 이는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향이 실은 본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거짓말일 뿐이지요. 그런데 이 모습이 오늘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바쳤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주님이라 외치면서 신상을 빚어내고, 그것에 경배하지만 정작 주님께서는 이런 일들에 대해 “나는 모르는 일이다”(호세 8,4), “주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호세 8,13) 하시며 선을 분명히 그으시지요. 즉, 이스라엘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본인들의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좋은 것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반면에 복음의 예수님은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조차도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것(善)의 실천, 우리는 과연 그 지향점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요? 사실은 나만을 위한 거짓(僞)인지, 아니면 진정 주님을 위함(爲)인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경태 마르티노 신부(서울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인생의 밭에 무엇을 심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얼마나 깊은 자비로 가득 차 있는지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제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잊은 채 헛된 우상에 열중하다 파멸을 향해 가고 있지만, 복음의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의 나약함과 방황을 보시며 깊은 연민의 마음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보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지도자들을 세웠고, 자신들이 가진 금과 은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그들의 삶을 한 문장으로 엄중하게 요약하십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고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호세 8,7).
‘바람’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허무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재물과 권력, 세상의 쾌락이라는 ‘허무한 바람’을 인생에 심은 결과는 참혹합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통째로 날려버릴 파멸의 ‘광풍’(狂風)이 되어 돌아올 뿐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제단을 많이 쌓아 올려도 그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곳은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죄를 짓는 자리가 될 뿐이라는 성경의 경고를 우리는 뼈아프게 새겨야 합니다.
복음에서 사람들은 말못하는 마귀 들린 이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비로소 그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군중은 이 기적에 찬사를 보냈으나, 마음이 뒤틀린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며 주님의 선행을 악의적으로 왜곡합니다.
말을 못 하게 만드는 마귀는 오늘날 우리 안에도 교묘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입으로 감사의 노래와 찬미의 말, 이웃을 살리는 위로의 말은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게 가로막으면서, 불평과 시기, 남을 깎아내리는 독한 말은 거침없이 쏟아내게 만듭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눈앞의 진리와 선을 보고도 이를 부정하며 비난을 일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영혼을 감옥에 가두는 현대판 ‘벙어리 마귀’의 소행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완고함이 가득한 세상이었지만,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심판이 아닌 ‘연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고, 모여든 군중의 처지를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예수님께서 느끼신 ‘가엾은 마음’은 원어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나약함 때문에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살이에 치이고 상처받아 방황하는 우리 모습을 보며 속이 타들어 가는 아픔을 느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주님이 찾으시는 일꾼은 대단한 능력을 갖춘 영웅이 아닙니다. 주님처럼 상처받은 이들을 바라보며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람, 목자 없는 양 같은 이웃에게 다가가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랑의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닫힌 입과 눈을 열어주시길 원하십니다. 헛된 우상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주님의 자비로운 시선을 마주하고, 원망과 비난의 말을 멈추어 복음을 전하는 참된 일꾼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하루, 내 인생에 헛된 바람을 심었던 이기적인 손길을 거둡시다. 그리고 “주님, 제 마음에 당신의 연민을 심어주소서. 그리하여 저 또한 지친 이웃에게 당신의 위로를 전하는 작은 일꾼이 되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청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가 세상의 허무한 바람을 좇으며 스스로 광풍을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게 하소서. 저희 영혼을 묶고 있는 인색함과 시기의 마귀를 쫓아내 주시어, 저희 입이 오직 당신의 사랑만을 전하게 하소서.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저희를 가엾이 여겨 주셨듯이, 저희 또한 지친 이웃을 사랑으로 품으며 당신의 기쁜 추수에 동참하는 충실한 일꾼이 되게 하소서. 아멘.”

8
주님의 연민을 내 마음의 밭이 심는다.
하느님 능력의 원천은 연민의 마음에서 나온다. 컴패션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감수성이자 능력이다. 컴페션은 다른 사람의 고통(passion)을 자신도 함께(com)느껴,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행동이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이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님이 된다.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이 연민의 마음은 애간장이 타는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은 느력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 안에 어떻게 하면 거룩한 마음, 연민의 마음이 자리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사랑의 마음으로 회복하려는 기도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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