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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생명은 가만히 있지 않다. 끊임없이 "복"한다. 근본으로 되돌아간다.

373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6일)

1
지난 주말에 <<주역>>의 <복괘>를 읽은 다음, 우연히 만난 민웅기 폐친의 글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관하여>를 읽고 큰 통찰을 얻었다. 

"​계산과 예측의 틈 바구니에서 숨이 가쁘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다음으로 올 가장 ‘확률 높은’ 결과를 내놓고, 인간의 선택과 욕망마저 알고리즘의 궤적 안에서 움직인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듯한 지금, 2,500년 전 노자가 던진 ‘자연(自然)’이라는 화두는 도리어 새롭다. 자연은 정지된 풍경이 아니다. 우리말로 풀면 그저 ‘스스로[自] 그러함[然]’이라는, 살아 꿈틀거리는 역동의 상태다."

민웅기의 이 글을 <페이스북>에서 읽고, <<주역>>의 <지뢰 복> 괘의 <단전>에 나오는  "復其見天地之心乎(기견천지지심호)"라는 말이 소환되었다. 복괘에서 비로소 우리는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천지는 온 생명이고, 생명인 이상 "마음"이 없을 수 없고, 그 마음은 "복(復)"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 "복"이 "천지지심(天地之心)", 즉 천지의 마음이 '스스로 그러함'이 아닐까? "복"이 '자연, 스스로 그러함'이 아닐까? <<역>>은 말한다. "복"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생명의 특징은 끊임없이 다시 약동(엘랑 비탈, Elan vital)한다는 데 있다. 봄에 숲이나 밭에 나가 만물을 보면, 그 속에 '약동(Elan vital)'을 만난다. 그러니까 그 안에 "복"이 숨어 있음을 본다. 이게 자연이고, '스스로 그러함'이 아닐까?

 이 지점에서 민웅기의 다음 말이 쉽게 이해된다. "​기계는 스스로 그러하지 못한다. 아무리 정교한 인공지능이라도 인간이 부여한 목적과 데이터, 즉 외부의 원인이 있어야만 움직인다. 철저하게 입력과 출력이라는 타율(他律)의 질서다. 반면 생명은 외부의 강제가 없어도 내면의 고유한 결을 따라 움직인다. 봄이 오면 씨앗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단단한 땅을 뚫고 싹을 틔우듯, 생명은 본래 제 안의 힘으로 존재하는 법이다." <복괘>기 그것을 잘 말한다. 왕필이 "복기견천지지심호"에 대해 단 주석을 좀 길지만, 공유한다.

"'복(復)'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간다(反本, 반본)는 것을 의미한다. 천지는 근본을 그 마음으로 삼는다. 대저 움직임(動, 동)이 멈추게 되면 고요함(靜, 정)이 온다. 그렇다고 고요함이 움직임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움직임을 포섭한다']  말(語, 어)이 멈추게 되며 침묵(沈默)이 온다. 그렇다고 침묵이 말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포섭한다.] 그런 즉, 천지가 비록 크다고는 하나, 만물을 풍부하게 포섭하고 있고, 끊임없이 우레가 치고 바람이 분다. 그래서 운화(運化)가 만변(萬變)하지만 그것이 조용하게 되면 무(無)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무(無)야말로 천지의 근본이다. 그래서 우레의 움직임이 땅 속에서 쉽의 상태에 있는 것, 바로 이 상태에서 천지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만약 천지가 유(有)를 가지고 마음을 삼는다면 다양하게 다른 종류의 사태를 포섭하지 못할 것이다."

왕필은 '무(無)'를 배타성이 없는 포섭적인 천지의 마음으로 규정한다. '포섭적인 천지의 마음'을 자연으로 읽고, 생명으로 보니 '스스로 그러함'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민웅기의 글에 나오는 장자의 "순기자연(順其自然)"이라는 말이 더 쉽게 가슴에 와 닿았다. 우선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한편 장자가 말한 ‘순기자연(順其自然)’, 즉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라는 명제는 흔히 오해를 받는다. 흐르는 대로 아무렇 게나 살라 거나, 매사에 무기력하게 방임하라는 뜻으로 읽기 쉽다. 물리학의 눈으로 보면 우주는 가만히 둘 때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방치된 방에 먼지가 쌓이고 뜨거운 커피가 식어가듯, 우주의 만물은 본래 흩어지고 낡아간다."

그런데 생명은 가만히 있지 않다. 끊임없이 "복"한다. 근본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민웅기는 이렇게 말한다. "​놀랍게도 생명은 이 거대한 우주의 관성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유일한 존재다.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우주의 무질서를 체외로 방출하며 스스로 내부의 질서를 세우는 ‘음의 엔트로피(Negentropy)’ 상태라고 정의했다. 세포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정교한 단백질 구조를 유지할 때, 생명은 우주의 흩어짐에 저항하는 강력한 질서의 의지를 발현한다.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는 것은 결코 생명의 창조적 의지를 꺾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계적인 유기체로 전락하지 않고, 본연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예컨대 극도의 몰입 상태에 진입한 연주가나 스포츠 선수를 보라. 생각을 멈추고 몸의 리듬에 모든 것을 맡겼을 때, 억지로 쥐어짜는 인위(人爲)를 넘어선 최고의 퍼포먼스가 터져 나오지 않는가? 뇌과학에서 말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의 원리 또한 이와 같다. 뇌가 아무런 의도적 생각을 하지 않고 휴식할 때, 자아를 성찰하고 창조적 영감을 빚어내는 신경망은 비로소 가장 활발하게 깨어나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은 다시 우리 자신의 생명성으로 돌아온다. 기계가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답을 내놓는 세상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는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의 자극 없이도 내 안에서 솟아나는 맑은 의지, 내 생명력을 믿는 거다. ​ 민웅기는 더 구 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선택지에 영혼을 의탁 하지 않는 것. 
▪ 세상이 정해준 속도와 효율성이라는 강박에 조급해 하지 않고, 
▪ 내 안의 고유한 호흡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인공지능 시대의 순기자연(順其自然)은 무기력한 방관이 아니라, 외부의 소음을 끄고 내면의 질서를 스스로 구축해 나가는 생명의 가장 뜨거운 능동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저, 스스로 그러하면 된다." 잘 먹고, 잘 호흡하며 하루를 잘 지내는 거다. 스스로 그러함 속에 회복력이 있다.

2
스스로 그러하다고 가만히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뢰 복> 괘는 우레괘로 움직이고 땅괘로 순하게 움직이는 덕을 갖추고 있다. 이를 동순지덕(動順之德)이라 한다. "복"을 요즈음 말로 하면 '초기화'되는 거다. 기존의 흐름에 역해하는 흐름이 있어야 초기화가 된다. 복은 그 흐름의 변화의 터닝포인트이다. 복은 절망 속에서 싹트는 희망이다. 복은 죽음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움틈이며, 암흑을 뚫고 피어나는 광명의 툴발이다. 이때 동하지만 순하기도 해야 한다. 여기서 순(順)은 <곤괘>에서 말하는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를 소환해야 한다. 곤(坤)은 땅의 형세라 하였다. 지구가 공전하면서 나타나는 계절변화, 즉 춘하추동 사시에 있어 음기(陰氣)가 응결되는 자연현상이 서리(霜)이다. 맨 아래에서 음기인 서리가 엉기니, 그 서리를 밟아 가면 굳은 얼음이 된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는 거다. 이는 곧 마치 곤(坤, 땅)의 도가 건(乾, 하늘)의 도에 순하여 뒤에 하듯이, 모든 일에 천리(天理)와 천성(天性)에 순하게 나아감을 말한다.

이 말은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머뭇거리며, 주저하며 살아가라는 거다. 왜 인간 안에는 성(聖)과 속(俗)이 공존한다. 군자와 속인이 정해진 신분이 아니라, 내 안에 두 객체가 모두 함께 담겨 있다. 그런 군자인 듯 행동하다가 때로 소인의 행실이 나오기도 하고 소인처럼 행동하다 가도 때로 군자다운 행실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때로 선인으로, 때로 악인으로 살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니 인간은 슬픈 존재이다. 그 슬픔을 아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예수는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말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걷는 이의 발걸음은 흔들림은 있을지언정 방향을 잃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의 '팔복'을 길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에 든든한 지주를 세우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눈이 열린 이들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는다. 그 길로 삼은 나는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채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해 벗삼아 살아 간다. 얼 바람 맞은 사람처럼 겅중거리며 사는 이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슬픔을 이야기 하니, 다음 시가 떠오른다.

슬픔을 물들이다/손세실리아

셀프 염색을 지켜보던 남편이
세월에 순응하는 것도
지천명의 덕목 아니겠냐 길래
산수국과 동박새와
늙은 등대와 길고양이 랭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라 대꾸하고서
서릿발 내린 머리카락이
물들기를 기다리다
별안간 목울대가 뜨거워져
엊그제 엄마에게 다녀왔는데
몰라보더라고
자식이 둘도 아닌 딱 하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아무래도
반백 때문인 것 같다고
실토하며 어깨 들먹이는

3
다음 팔 복 중, 슬퍼하는 자의 복은 두 번 째이다. 늘 기억해야 할 8 가지이다.

▪ 제1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는 거다. 그리고 지연의 흐름에 맡기면서 무위(無爲)적 삶을 사는 거다. 마음이 가난 하려는 것은 존재 자세의 문제이다. 초조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그 일 자체로 돌아가 즐기며 몰입하고 전념하는 하는 거다.
▪ 제2복: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프면 슬퍼하라. 아픔이나 고통을 피하지 마라. 어려움을 피하지 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생로병사에 두려워 마라.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다.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 한다. 슬픔의 끝에는 반드시 위로가 있고, 힘을 얻는다. 그래 사람들은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 제3복: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 하라. 성격, 태도가 부드러운 거다. 그 말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는 거다. 내려놓음에서 나온다. 그건 나를 비우고 '도'의 세계에 맡기는 거다. 온유는 단순히 마음이 약하거나 유순한 것을 넘어, 강한 힘이나 열정을 스스로 잘 통제하고 다스리는 성숙한 인격을 의미하며, 교회에서는 하느님께 내 삶을 온전히 맡기는 태도이다.
▪ 제 4복인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의 문제는 '의(義)'로, '정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맹자 식으로 말하면,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그 반대로 의로운 사람은 그 자체로 흡족하다. 그 반대가 찝찝함이다. 양심이 다 말해준다. 
▪ 제 5복인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의 문제는 '인(仁)', 즉 자비, 아니 사랑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 제 6복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의 문제는 '예(禮), 예절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 제 7복인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의 문제는 지(智), 지혜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제 8복인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의 문제는 신(信), 믿음의 이야기라 볼 수 있다.

4
지난 5월25일(현지시각) 레오 14세 교황이 바티칸에서 즉위 뒤 첫 회칙인 ‘고귀한 인류’(마그니피카 후마니타스, Magnifica humanitas)를 직접 발표했다. 인공지능 시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회칙은 그 시대의 중요한 영적이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교회의 공식 입장을 담은 문서이다. AI 시대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왔다.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들 때까지 알고리즘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읽으며, 어떤 선택을 해야 효율적인지 계산해준다. 질문을 던지면 망설임 없이 즉각 답하는 이 시스템은 매력적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디지털 봉건주의에 진입하고 있다. 그 결과 부와 알고리즘 권력이 이윤 중심의 인공지능(AI)을 통해 소수의 거대 기술 독점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위협의 다양한 측면을 지적해왔지만, 가장 명확하고 광범위한 통찰을 제공하는 이는 올해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를 발표한 교황 레오 14세다.
교황은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그 기술을 설계하고 자금을 지원하며 규제하는 이들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새로운 엘리트를 비판하는 한편,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의 공동 책임을 강조한다. 또한 알고리즘 발전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서는 안 되며,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못 박는다.

교황이 경고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누구일까? 답은 자신이 반대하는 이들을 모조리 적그리스도라고 공격하는 그 인물, 바로 피터 틸이다. 데이터 정보기업 팔란티어의 창업자인 그는 국제기구와 금융 감독, 기술 규제를 ‘적그리스도적’ 세계 질서라고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기술 엘리트가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인공지능 중심의 정치 질서를 지지한다. 이는 강력한 기업에는 경제적 자유를 허용하면서, 종교와 이념을 통해 사회 규율을 유지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체제는 자유의 외형을 유지하지만, 알고리즘의 영향력과 디지털 감시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은밀하게 조종한다. 그 결과 인공지능은 해방의 수단이 아니라 지배의 도구가 된다.

이러한 비전은 인공지능을 인간의 책임 아래 두어야 한다는 교황의 요청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교황은 나아가 인공지능 논의를 근본적인 철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는 ‘알고리즘의 최적화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성의 핵심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그 답을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실패와 한계의 역할에서 찾는다. “무능력, 질병, 노화, 고통, 취약성은 교정되어야 할 결함으로 여겨지지만, 인간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를 통해 번영한다. 알고리즘에 오류는 수정되어야 할 결함이지만, 인간에게 오류는 심오한 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영국 밴드 애니멀스가 불러 유명한 민요 ‘해 뜨는 집’(The House of the Rising Sun)을 생각해 보자. 노래 속 ‘집’은 술집일 수도 있고, 성매매 공간일 수도 있으며, 도박장이나 도둑 떼 소굴일 수도 있다. 이 모호함은 노래에 강력한 울림을 부여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이러한 흐릿함을 현실의 일부로 지각하지 못한 채, 확정적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을 그저 실패로 간주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죽음, 성, 불완전성과 같은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기술을 통해 모든 한계를 제거하려는 욕망은 실패 없는 인간을 상상하지만, 그러한 인간은 인공지능에 완전히 몰입되어 정신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박탈당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투명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러한 불투명성은 일시적 결함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다. 완전성은 불완전성에 의존하며, 불완전성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그것이 떠받치던 이상 또한 함께 사라진다.

인간의 주체성은 해결될 수 없는 타자성과 끝없는 질문에 직면하기 때문에 비로소 형성된다. 한계는 극복해야 할 걸림돌이 아니라 초월이 가능해지는 공간을 여는 조건이다. 기독교에서 이 통찰은 신에게까지 적용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은 온전한 신이 되기 위해 유한하고 취약한 인간이 된다. 신성은 저 높은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계를 지닌 이 비참한 세계 속에서 치열하게 싸움으로써 신성을 실현할 수 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인 슬라보이 지제크의 글로 번역 김박수연이 했다. <한겨레 신문>에 쓴 칼럼이다. 이 시대의 화두이다. 다시 말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죽음, 성, 불완전성과 같은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기술을 통해 모든 한계를 제거하려는 욕망은 실패 없는 인간을 상상하지만, 그러한 인간은 인공지능에 완전히 몰입되어 정신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박탈당한 존재일 뿐이다.

5
연중 제14주간 월요일로 <마태오 9,18-26>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손 닿을 그만큼>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태 9,21)

닿을
그만큼
가까이
몸으로
마음으로

닿을
그만큼
가까이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닿을
그만큼
가까이
섬김으로
살림으로

6
주님의 눈에는 무엇이 비칠까요?
2026/7/6/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마태오 복음 9장 18-26절:“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인식의 차이
오감五感. 사람이 느끼는 다섯 가지의 감각을 말합니다. 이중 하나라도 중요하지 않은 감각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각을 하나 꼽으라면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많은 것을 파악합니다. 사물의 위치부터 인물의 상태 판단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는 시각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있는 그대로의 정확한 모습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을 내 눈앞에 가까이 가져와 멀리 있는 방문과 나란히 겹쳐 봅니다. 이렇게 하면, 연필과 문의 크기가 비슷하거나, 혹은 연필이 더 큰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이 훨씬 더 큽니다. 그리고 연필보다 문이 크게 보일지라도, 우리가 가진 상식 안에서 연필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이것이 바로 ‘인식’입니다. 우리의 눈은 비추기만 할 뿐, 실제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과 머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유다인들과 복음을 읽는 우리는 누워 있는 한 소녀를 만납니다. 그 모습을 두고 모두 ‘죽음’을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자고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눈과 주님의 눈, 과연 어느 쪽의 인식이 정답일까요?/김경태 마르티노 신부(서울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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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는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 고백과 함께, 그 사랑이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우리 삶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바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그로 인한 생명의 회복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마치 열렬한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다가오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잊고 세상의 우상인 바알을 쫓아 영적으로 가출해버렸을 때에도, 하느님의 선택은 징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호세 2,16.21).
하느님은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는 세상의 화려함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척박하고 외로운 곳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음이 사라졌기에 역설적으로 오직 하느님의 목소리만 또렷이 들리는 ‘은총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가 인생의 실패나 고독이라는 광야를 지날 때,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깊이 속삭이기 위해 우리를 따로 부르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생의 가장 깊은 광야를 걷던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여인과, 금방 숨이 넘어간 어린 딸을 둔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군중의 벽을 뚫고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여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굳건한 믿음뿐이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 9,21). 당시 율법으로는 부정한 여인이 타인에게 손을 대면 상대방도 부정해지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부정이 예수님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함이 자신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줄 것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숨은 믿음을 보시고 “      ”라며 그녀를 축복하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이미 숨이 끊어져 초상집이 되어버린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사람들은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지만, 절망과 냉소가 가득한 그곳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아이의 손을 잡으십니다. 죽은 이의 몸을 만지는 것 역시 율법으로는 부정해지는 일이었으나,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마저 힘을 잃고 물러납니다. 주님이 손을 잡으시니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부정한 여인의 터치를 허락하셨고, 죽은 아이의 손을 먼저 잡아주심으로써 인간의 법과 한계를 뛰어넘어 상처 입고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셨습니다.
참된 신앙은 멀리서 예수님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분과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늘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우리와 영원한 사랑의 언약을 맺으시고, 예수님은 직접 손을 내밀어 우리의 아픔을 만져주십니다. 오늘 하루,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여인처럼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읍시다.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이번 한 주간은 절망이 희망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기적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성실하신 하느님, 저희가 인생의 광야를 걸을 때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저희 마음에 대고 속삭이시는 당신의 사랑 노래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하혈하는 여인처럼, 회당장 야이로처럼 오직 당신만이 저를 살리실 수 있다는 절박한 믿음을 주소서. 오늘 저희의 상처 입은 영혼에 손을 대시어, 저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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