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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

373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7월 3일)

1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건넨 말씀은 선언이나 명령이 아닌 다음 질문이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요한복음 1:38>)
성경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스승님'으로 번역된다.)" "왜 따라오느냐"가 아니라, 찾고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함으로 이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드러내게 만드셨다. 감추어져 있거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욕망을 스스로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이 질문을 하면, 그 일의 방향성이 나온다.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이 질문은 인간 존재의 심층을 흔드는 근원적 질문으로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너희의 욕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네 마음의 중심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느냐?” 그리고 세상은 “무엇을 가져야 행복할까?”라고 끊임없이 묻는다. 성공과 돈, 명예와 인정, 영향력, 겉보기에는 이 모든 게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에 관한 자연스러운 대답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을 소유하고 나면 다시 공허가 찾아온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적잖은 이들이 안정된 삶과 인정받는 자리, 성공적인 관계를 원한다고 답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얻고도 여전히 마음이 공허한 이유는 이것들이 머물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는 변화 가운데 ‘거할 자리’와 ‘안식처’, ‘지속되는 관계’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직장과 인간관계, 신앙 마저도 흔들린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묻는다. “나는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내가 거주해야 할 진정한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

마이클 J 바클리 예수회 신부는 <<무엇을 찾는가>>란 책에서 “예수의 물음은 단순한 욕망의 나열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사랑과 관계의 자리로 이끈다”고 말했다. <요한복음>의 장면을 보자.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을 봤다(38절). 믿음은 인간이 하느님을 찾기 전, 그분이 먼저 인간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심판보다는 초대를, 통제보다는 사랑을 주는 예수님의 시선 앞에서 제자들은 자기의 갈망을 비로소 자각한다. 제자들은 묻는다. “랍비여,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응답은 간결하다. “와서 보아라”(39절).
‘찾다’, ‘머물다’, ‘보다’, 이 세 단어는 요한복음 전체를 꿰뚫는 영적 흐름이다.
▪ 찾음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 머묾은 관계와 친교를 만들며,
▪ 봄은 계시의 완성에 이르게 한다. 

바클리는 말한다. “예수의 질문은 제자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시선을 하느님께로 들어 올린다.” 인간의 욕망은 자신을 넘어설 때 비로소 충만해진다. “와서 보아라”란 예수님의 답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를 가리킨다. 머묾의 자리는 공간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다. 우리와 함께 거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우리 안에 머무신다. 신앙의 성숙은 찾음에서 머묾으로, 불안한 욕망에서 충만한 관계로 옮겨가는 여정이다. 질문은 결국 하나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요한복음>은 ‘머물다’란 단어를 반복해 강조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머묾은 관계의 지속, 사랑의 인내, 신뢰의 표현이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바클리는 다시 말한다. “찾는다는 건 아직 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형태이며, 머문다는 것은 사랑이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끝없는 추구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영원히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 안에 머무르면 불안은 평화로, 결핍은 충만으로 변한다.

오늘의 교회와 사회가 잃어버린 것은 이 ‘머묾의 영성’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머물 곳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투기의 대상으로 받아 들이니, 이웃과 관계를 하지 않는 거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도,  사람들은 쉽게 상처받고 빠르게 떠나며,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은 머물 때 자란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와 기도, 공동체와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충만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의 안정과 신뢰, 사랑의 충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란 예수님의 질문에 섣불리 답하기보다, 먼저 멈춰 서서 그분의 시선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는 물어야 한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그때 들려온다. “와서 보아라.” 그분을 따라 걷고, 함께 식탁에 앉고, 그분과 함께 침묵 속에 머무는 가운데 우리는 깨닫는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평생 찾아 헤매던 ‘머물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영안 교수의 글을 갈무리 한 것이다.

2
주님께서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무엇을 찾느냐?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시게 하라. 그러면서 그분 곁에 머무르며 그 분과 대화를 하는 거다. 변화하는 노년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맞을 수 있을지 노력하는 것은 나만의 특권이다. 그 속에서 긴장과 불완전함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받아들이는 거다.

죽음이란 자신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말해주는 자연의 방식이다. 그러니 노년의 영성을 위해서는 자연을 자주 바라보며 관조하는 거다. "구름은 하느님의 손글씨이다"(샤르댕). 관조(contemplation)는 접두사 'con'은 '가까이'라는 뜻이고, 'templum'은 라틴어로 성전이라는 말이다. 관조한다는 말은 우리를 신성한 장소로 인도된다는 거다. 여기서 신성함이란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며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느낀다는 거다.

3
깨달음은 관조 하는 데서 시작된다. 과다한 정보들이 넘쳐 나는 초-정보사회는 정신의 고도 긴장의 시대가 되었다. 정보의 쓰나미는 우리의 지각 기관을 지속적으로 자극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각 기관은 더 이상 관조(觀照)의 상태로 전환되지 못한다. 정보의 파편 화는 우리의 주의 집중을 파편 화하여 분산 시킨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기와 귀 기울이기에 필요한 '관조적 머묾'을 방해한다.

<<서사의 위기>>에서 한병철에 의하면, "디지털로 된 종이의 숲인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 없다"는 거다. 정보 사냥꾼들이 꿈의 새를 사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과잉활동성 안에서 우리는 결코 깊은 정신적 이완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거다. 반면 이야기를 할 때는 이완의 상태가 필요하다. 벤야민은 정신적 이완의 결정을 위해 지루함을 강화한다. 이 지루함이 "경험의 알을 부화시키는 꿈의 새"(벤야민)라는 거다. 인터넷 안에서 나는 바스락대는 정보 소음은 꿈의 새를 쫓아낸다. 이 숲에서는 더 이상 이야기의 짜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정보만이 자극의 형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며, 바로 휘발된다. 즉 남는 게 없다.

현재 우리들은 핸드폰에서 무슨 정보든지 캐낼 수 있다. 이 편리함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실(失)이 되었다. 핸드폰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해 주는 문명의 이기(利器)이서 동시에 우리들을 자신의 정보로 시야를 가리는 색안경(色眼鏡)이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혹은 그 대상 안으로 들어가 대상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킨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오랫동안 관조하여, 그 대상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생각하려는 ‘거울 신경 계’를 뇌 속에 장착하였다. 창의성의 작동 원리인 거울 신경계가 마비되어, 누군가가 편집한 정보만 편식하는 인간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두 개의 대립되는 가치의 정도와 경중을 깊이 관찰하고 측정하는 과정을 '쎄오리아(theoria)'라고 했다. 이를 우리 말로 하면 '관조(觀照)'이다. 이것은 사물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어제의 관습대로 보지 않고, 그 대상 자체로 보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 그리스어는 영어의 '씨오리(thory)'가 된다. 한국 말로는 '이론(理論)'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론은 '한참 보기'란 인내를 통해, 그 대상 그 자체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섬광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항상 제 3자가 되어 관찰하는 행위를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
관조를 하려면, "나는 삶이라는 연극 무대의 배우인가? 아니면 관람석의 주인인 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종종 삶이라는 연극 속에서 너무나 열정적인 배우가 된다. 예를 들면, 분노라는 독백을 읊을 때는 온몸을 떨며 화를 내고, 슬픔이라는 장면에서는 세상이 무너진 듯 오열 한다. 문제는 이 연극에 "커튼 콜(Curtain call, 공연 종료 후 내려간 막을 관객이 다시 불러낸다)'이 없다는 점이다. 배역에 완전히 함몰된 채로 무대 위를 허덕이다 보면, 어느덧 내가 배우인지 배역 그 자체인 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이때 배역은 곧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다. 하지만 자신은 정말 자신이 느끼는 그 감정인가? 자신이 하는 생각인가? 잘 모른다.

인생/권대웅

구름을 볼 때마다
달팽이가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느릿느릿 지게를 짊어진 할아버지처럼
밤하늘의 달을 볼 때마다
세간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 같았습니다
흥했다 망했다 살다 간 아버지처럼
그렇습죠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겠어요
하늘에 세 들어 사는
구름처럼 달처럼
모두 세월에 방을 얻어 전세 살다 가는 것이겠지요

4
지난 한 세기 동안 정보는 "신 존재 형식, 즉 신 지배 형식"(한병철)으로 변했다.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정보 체제가 스마트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명령이나 금지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에게 침묵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마트한 지배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의견, 필요, 선호를 소통하라고, 삶을 서술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를 걸라고 요구한다. 이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때 자유는 억압 되기는 커녕 철저히 혹사된다. 게다가 스마트한 지배는 그 존재를 특별히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이들은 자유와 소통의 탈 속에 숨어 있다.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거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의 흐름에 예속시킨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현대인들은 정보와 소통에 도취되어 몽롱하다. 우리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알고리즘으로 조종되는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예속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블랙박스의 손에 맡겨진다. 그리하여 인간은 제어하고 착취할 수 있는 데이터 기록으로 축소되고 있다. 인간 다움이 걱정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관조이고, 독립적인 삶으로 완성하는 인간 다움이 자유이다.

한 사회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도덕적 규범이 통용되고 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 규범을 충실히 따른다. 그런데 그 규범을 따르는 이유가 전체주의적 통제의 결과이고, 이를 어기면 엄청난 처벌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전체주의 사회는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제한한 파시스트 사회를 말한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그 대표적 예이다. 또 이념을 통해 인간 개조 작업을 시행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공산주의 사회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그 사회 속에서는 인간 다움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율성이 상실했기 때문이다.
자율성은 주체성, 자기 결정권, 자주권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 지를 그려 본 뒤, 주어진 상황을 점검하며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앞날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율적 삶은 본능과 습관에 종속되는 않는 거다. 금방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의 성찰 없이 기존의 이념에 종속되어 있거나, 그것에 세뇌 되어 로봇처럼 따른다면 이 또한 자유롭지도 자율적이지도 않은 상태라는 말이다.

한 사람의 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여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 반대가 외적인 강제와 간섭에 의해 선택의 문이 닫혀 있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소극적 자유'이다. 결핍된 자유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채 무언 가가 없어야 성립하는 자유이다. 즉 나의 선택을 가로막는 장애 또는 강제가 없어야 한다는 소극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편 장애물이 없어서 선택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음에도 자유가 없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예의 경우를 보면, 그의 행동을 가로막는 간섭과 장애는 없으니 앞서 말한 소극적 의미의 자유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노예를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빠진 것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자기의 계획에 따라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다. 외부의 간섭과 장애가 없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자유, 이것을 '적극적 자유'라 한다.

인간 다움은 적극적 의미의 자유, 즉 자율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사람 답기 위해서는 이웃을 나와 같은 귀한 존재로 여겨야 하는데,  이 마음이 외부의 통제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이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자발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물론 소극적인 자유가 인간 다움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간 다움을 이야기할 때 필요한 것은 더 두터운 의미의 적극적 자유(자율)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5
너무 멀리 왔다. 다시 품격 있는 황혼을 위해 노인의 영성 이야기로 다시 돌아 온다. 영성은 전적으로 하느님과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년의 여성은 나 자신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것이다. 변화하는 노년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노력하는 것은 나만의 특권이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나의 인생이라는 작품을 창조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나 자신을 이끄는 신성한 손길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온전히 맡기는 거다. 그리고 긴장과 불완전함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불안함을 받아들이는 거다.
그렇지만 <<주역>>이 말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강기진 선생에게서 배웠다.
▪  '유부(有孚)', 하늘의 뜻을 믿는다는 것.
▪  '유유왕(有攸往)', 하늘의 뜻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이를 구체화하는 것,
▪  '정(貞)', 길흉의 질곡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매일 펼쳐지는 다양한 고통의 순간,  변칙과 예외, 본질이 아닌 것은 언제든 지나가고 원칙과 영원의 추세만이 남는다. 그 믿음이 오늘 하루 나의 마음과 태도가 결정되고 그 결정이 나의 미래를 이루는 과거를 결정할 것이다. 불안해 할 필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불안해 하는가?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지금 ‘일한다’는 곧 ‘새로 배운다’는 의미와 동일해졌기 때문이다. AI 같은 기술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과거에 익힌 것들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 탓에 현대인들은 변화의 불안을 견디기 위해 특정 생활 방식, 즉 루틴에 집착하는 경향이 커졌다. 통제를 통해 안정을 얻기 위한 것이다.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에서 악셀 하케는 “어떤 이들은 영양 섭취 면에서 극단적인 방법만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 믿는다. 정치적 올바름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언어에 엄격한 법칙을 정해 놓고 이를 지키려 한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불안정한 존재로 느끼기 때문에 안전하고 확실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운동 중독, 채식주의, 외국인 혐오나 정치인 팬덤 같은 사회 현상을 이해해볼 수 있다.

불안한 시대를 건너기 위해 나만의 안전지대를 찾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매일 한 개의 사과를 먹는 일이든, 만 보씩 걷는 일이든, 환경보호 단체에 참석하는 것이든 상관없다. 문제는 극단에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다. 육식하는 사람을 혐오하거나, 타 종교를 이단이라 배척하고, 운동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식 말이다. 사람마다 보호색은 제각각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오독하는 확신범들이 많을수록 오해는 이해의 강에 이르지 못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여야, 타인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 길이 불안 사회를 넘는 거다. 불안 사회일수록 내가 빠진 세계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자신이 불안정한 존재로 느끼기에 자신만의 안전한 지대로 들어가,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이게 요즈음 현실이다.

6
성 토마스 사도 축일로 <요한 20,24-29> "예수님과 토마스" 이다.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대 바라는 대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믿고 싶은
벗이여
믿게나

곁에
있으니
희망하고 싶은
벗이여
희망하게나

곁에
있으니
보고 싶은
벗이여
보게나

곁에
있으니
듣고 싶은
벗이여
듣게나

곁에
있으니
말하고 싶은
벗이여
말하게나

곁에
있으니
함께하고 싶은
벗이여
함께하게나

곁에
있으니
사랑하고 싶은
벗이여
사랑하게나

곁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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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2026/7/3/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복음 20장 24-29절: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음과 의심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이 냉정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다에게 하셨던 말씀 중엔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24)과 같이 저주하시는 듯한 구절까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꽤 냉정해 보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얼핏 질책처럼 들리기도 하고, 실망의 기색이 담긴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부르짖으셨던 예수님께서 과연 비난을 쏟아내셨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선물을 주었다고 해봅시다. 상대방을 믿는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 기쁨을 느낍니다. 또한 상대방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선한 마음으로 충만해집니다. 반면에 의심하는 사람은, ‘왜 저런 말을 하지? 이 선물을 주는 의도가 뭐지?’ 하며 속으로 되묻습니다. 상대방의 진심과 관계없이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반복하며, 자신을 고통의 굴레에 가두고 마는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그랬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믿었다면, 기다리는 순간들은 ‘언제 오실까?’라는 희망으로 채워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 나에게만 오지 않으실까?’ 하는 질문을 반복하자 그 시간들은 고통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토마스 사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의심과 고통을 남기고 싶은지, 믿음과 희망을 남기고 싶은지 되돌아 봅시다. 김경태 마르티노 신부(서울대교구)/생활성서 2026년 7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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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오늘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분이자, 우리에게는 ‘의심 많은 제자’로 익숙한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서 속 토마스 사도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의 솔직한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의심의 안개 속에서 헤매던 토마스를 어떻게 당신의 빛으로 이끄셨는지, 그리고 그 여정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주는지 함께 묵상해 봅시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기쁨에 겨워 외칠 때,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는 냉정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우리는 흔히 토마스를 불신앙의 대명사로 여기며 쉽게 비난하곤 하지만, 그의 의심 안에는 사실 ‘진짜’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숨어 있었습니다. 남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시련 앞에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라는 의심은 하느님을 향한 반역이 아니라,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영혼의 성장통일 수 있습니다.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 시어 토마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주님은 토마스의 의심을 꾸짖거나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가장 아프고 부끄러운 부활의 상처를 기꺼이 내어 주십니다. 그 자비로운 사랑 앞에서 토마스는 더 이상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신앙 고백을 터뜨립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 고백은 머리로 깨달은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 주님의 자비에 완전히 사로잡힌 영혼의 사랑 노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에페 2,20)이라고 강조합니다. 교회의 기초가 된 사도들은 처음부터 완벽한 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고, 토마스는 의심했으며, 다른 제자들은 두려움에 도망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허물 많고 흔들리던 이들의 ‘약함’ 위에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나약함이 주님의 자비와 부활의 은총을 만나 단단한 ‘반석’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함 투성이인 우리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타인들과 함께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는”(에페 2,22)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내 안의 의심과 불안을 숨긴 채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토마스처럼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내어놓고 있습니까? 나는 내 삶의 상처 속에서, 나를 위해 상처 입으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발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신 후 우리 모두를 향해 소중한 축복을 남기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이 행복 선포의 주인공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비록 눈으로 주님을 뵙지 못하지만, 성체성사와 이웃의 사랑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날마다 체험합니다. 오늘 하루,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할 때마다 토마스 사도의 고백을 나지막이 읊조려 봅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우리의 의심보다 더 크신 주님의 자비가 여러분의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실 것입니다.

“저희의 믿음을 이끄시는 주님, 토마스 사도의 의심을 자비로이 받아 주셨듯이 저희의 연약한 믿음과 흔들리는 마음도 가엾이 여겨 주소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확증을 찾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신뢰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 삶의 모든 순간에 오직 당신만이 ‘내 주님, 내 하느님'이심을 당당히 고백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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