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6월 17일)
1
우리들의 삶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 분잡에 휩쓸리다 보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스러지고 살아남기 위한 맹목적 앙버팀만 남는다. 숨은 가빠지고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서슴없는 언행과 뻔뻔한 태도가 당당함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전장으로 변한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법, 종교의 영역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가 있다면 ‘머뭇거림'이 아닐까? '머뭇거림'은 다음을 내포한다.
•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는 겸허함,
•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
'머뭇거림'의 반대가 '서슴없음'이다. '서슴없다'는 말이나 행동에 망설임이나 거침이 없다는 뜻이다. 주로 '서슴없이' 부사로 쓰인다.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의견을 말하거나 행동할 때 쓰인다. 시몬느 베이유(Somone Veille)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이라 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머뭇거림은 답답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머뭇거림 속에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확신은 고단한 생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지만, 그 확신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에 갇힐 때는 아집에 불과할 수 있다.
모든 틈은 깨진 상처인 동시에 빛이 스며드는 통로인 것처럼, 머뭇거림은 우유부단(優柔不斷) 함처럼 보이지만 나와 타자가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머뭇거림이 사람을 자기 초월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세상의 어떤 이론도 지혜도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에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만 근사치일 뿐이다. ‘알 수 없음'이야 말로 생명의 실상이다. 여기서 경외가 시작된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결국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허세 부리려는 욕구에서 해방된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평화가 시작된다.
그런 사람/류시화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는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이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을 찾아서
지상의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고요 잃지 않는 사람
마른 입술은
물이 보내는 소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
혼탁한 세상을 맑게 만든다.
2
"옛날부터 도를 잘 실천하는(또는 깨달은) 자는 미미(微微)하고 묘(妙)하며, 가믈(玄)하고 통달(通)해 있다"고 하며, "그걸 알 길이 없지만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억지로 형용하자면" 다음의 7가지 태도라고 노자는 말한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 豫(예): 코끼리가 겨울 살얼음 내 건너듯이 늘 조심스럽다. 豫焉 若冬涉川(예언 약동섭천) - 코끼리가 겨울에 살어음판 건너듯이 신중함처럼 말이다.
§ 猶(유): 원숭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듯 늘 경계한다. 猶兮 若畏四隣(유혜 약외사린) - 원숭이가 사방을 돌아보며 경계하듯이 조심함처럼 말이다.
§ 儼(엄): 점잖기는 마치 손님처럼 공손하다. 儼兮 其若客(엄혜 기약객) = 초대받은 손님처럼 공손하다. 또는
§ 渙(환): 따뜻하기는 마치 얼음이 녹아 내리 듯 부드럽다. 渙兮 若氷之將釋(환혜 약빙지장석) - 봄 날에 얼음 녹아 내리듯이 따뜻하다.
§ 敦(돈): 돈독하기는 마치 통나무처럼 순박하다. 敦兮 其若樸(돈혜 기약박) - 자르지 않은 통나무처럼 순박하다.
§ 曠(광): 포용력은 마치 골짜기처럼 넓다. 曠兮 其若谷(광혜 기약곡) - 모든 것을 품어주는 계곡처럼 포용력이 있다.
§ 混(혼): 다양하기는 마치 섞여 있는 물처럼 모두 받아들인다. 混兮 其若濁(혼혜기약탁) - 서로 다른 물이 섞여 있는 흐린 물처럼 다양하게 받아들인다.
"예-유-엄-환-돈-광-혼"으로 기억해 두면 좋겠다.
이 말들이 얼른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도덕경>의 원문을 보면, 이 말들이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사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예를 들지 못하면, 나는 그것을 관념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예증보다 더 나아가 그것을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다면, 나는 훨씬 더 쉽게 잘 이해하며 그것을 높이 산다. 노자는 시적으로 미묘현통한 도의 구현자들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 머뭇거림은 마치 살얼음 낀 겨울 강을 건너는 것 같고,
§ 주춤거림(망설임)은 마치 사방의 주변을 두려워하는 것 같고,
§ 어려워함(엄숙함)은 마치 손님이 된 듯하고,
§ 맺힘이 없음(넉넉함)은 마치 얼음이 녹는 듯하고,
§ 소박함(질박함)은 마치 다듬지 않은 통나무와 같고,
§ 트임은 마치 골짜기와 같고,
§ 탁함은 마치 흙탕물처럼 흐리다.
"混兮 其若濁(혼혜기약탁), 흙탕물처럼 탁하다'는 '도'의 "티끌과 하나됨(同其塵, 동기진, 제4장)"같이, '도'를 알고 따르는 사람은 고고하게 자기 혼자만의 결백성을 주장하며 산에서 홀로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탁해지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물들거나 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탁함을 고요히 하여 드디어 맑게 하고, 정지되어 맑게 된 것을 다시 움직여 결국은 생동하게 하는 일을 한다는 거다. 오강남 교수는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를 "혼탁하면서도 고요히 하여 서서히 맑아지며 편안해 하면서도 움직여서 서서히 살아나니 이런 도를 간직한 사람은 채워 짐을 원하지 않는다"로 풀이한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흙 탕 속에서 피어 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더러움(진흙)과 깨끗함(연꽃)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세속은 이분법적으로 쪼개진 세계의 공기를 마신다. 선이 있어야 악이 있으니, 선하게 살 일도 아니다. 붓다가 말하는 해탈의 세계는 선과 악의 대립이 없다. 성경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하느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신다." 선악을 가르는 화살이 녹은 자리에 핀 꽃이 연꽃이란다. 그래서 이 꽃의 이름은 '해탈'이기도 한다. 해탈의 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왜? 더 이상 진흙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채워 지길 바라지 않는다. 인간이란 생래적으로 '채움의 길'을 간다. 뭐든지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더 채우고 더 가지려 한다. '도'를 알고 따르는 사람은 '채움의 길'을 버리고 '비움의 길'을 걷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 로다"하고 노래할 수 있다. '있음 그대로(being)'에 자족 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새로운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夫唯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도올 김용옥 교수는 "그러므로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부질 없이 새롭게 작위(作爲)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로 풀이한다. 허(虛)를 극대화 시키면서 자꾸 채우려 하지 않는다는 테마를 강조한 것이라 본다. 욕심을 채우려 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그래서 혼탁한 세상을 맑게 만든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탁한 것을 고요하게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하고,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누가 자기를 안정시켜 오래가게 하며 천천히 움직여서 온갖 것을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夫唯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새로운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
3
조벽 교수가 전하는 "스펙보다 인성이 중요한 이유"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다. 그래서 공유한다.
§ 스펙은 결국 ‘비교 경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스펙은 정해진 기준 안에서 누가 더 많이 쌓았는지를 비교하는 방식이다. 학벌, 자격증, 점수, 경력처럼 눈에 보이는 기준은 평가하기 쉽지만, 모두를 비슷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문제는 이런 경쟁이 결국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배자를 만든다는 점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스펙을 갖췄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더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AI 시대에는 단순히 많이 쌓은 이력보다, 어떤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통해 어떤 사람으로 성장 했는 지가 더 중요해 진다. 즉, 남들과 비슷한 스펙보다 자신만의 인생 스토리와 태도가 경쟁력이 된다.
§ AI 시대에는 혼자 잘난 사람보다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AI와 개인이 혼자 맞서서 이기기는 어렵다. 정보를 찾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일은 이미 AI가 빠르게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중요한 능력은 혼자 모든 것을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 큰 결과를 만드는 능력이다.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때 집단 지성이 생긴다. 그런데 모두가 똑같은 스펙만 쌓으면 팀 안에 새로운 시각이 생기기 어렵다. AI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정답만 잘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협력해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 인성은 착한 성격이 아니라, 갈등을 조율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성은 단순히 말을 잘 듣거나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성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갈등을 조율하며, 함께 목표를 향해 가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생각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일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 차이 때문에 갈등은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갈등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을 협업으로 바꾸는 힘이다. 상대의 말을 듣고, 내 생각을 조리 있게 전달하고, 서로의 차이를 조정하는 능력이 바로 인성이다.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함께 일하기 어렵고, 타인을 무시하고, 갈등을 키우는 사람은 오래 신뢰 받기 어렵다.
§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힘은 결국 관계에서 나온다.
AI는 계산하고, 분석하고, 글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을 읽고, 신뢰를 쌓고, 관계를 조율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중요한 영역이다. AI 시대일수록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차가운 경쟁력이 아니라 더 섬세한 관계 능력이다. 자기 감정을 조절하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며, 함께 일할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해 진다. 그동안 교육과 사회는 점수와 성과를 강조하면서 감정과 관계의 영역을 소홀히 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 능력이 오히려 더 큰 경쟁력이 된다. 결국 스펙은 나를 증명하는 자료일 수 있지만, 인성은 사람들과 함께 결과를 만들어내는 실제 능력이다. 그래서 스펙보다 먼저 길러야 할 것은 사람을 이해하고 관계를 조율하는 힘이다.
인성은 특별한 교육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길러진다. 인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능력이 아니다. 또 단순히 예절 교육을 받는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인성은 자기 감정을 다루고,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고,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반복해서 연습하는 과정에서 길러진다. 학부모라면 아이에게 무조건 “착하게 살아라"라고 말하기보다, 왜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실수했을 때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를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친구와 다퉜을 때 곧바로 혼내기보다 “네가 속상했던 점은 무엇인지”, “상대는 왜 그렇게 말했을 지", “다음에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 지”를 함께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 아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감정을 억누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을 알아차리고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아이는 자기 중심적인 반응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법을 익히게 된다. 결국 인성을 기른다는 것은 거창한 도덕 수업이 아니다. 가정과 학교, 일상 속 관계에서 듣고, 기다리고, 사과하고, 조율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다.
스펙은 결과로 남지만, 인성은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협력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인성 교육은 공부가 끝난 뒤에 하는 부가적인 일이 아니라, AI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기본 능력이다.
4
갈등과 혐오가 팽배한 시대에 환대(hospitality)가 필요하다. 환대가 세계를 연결하는 첫 번째 단어이다. 사랑으로 마음을 넓혀 길을 가면 낯선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 결국에는 낯선 이가 하나도 없게 된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위기를 겪고 있다.
▪ 기후위기와 환경문제
▪ 인공지능혁명
▪ 전쟁과 국제 갈등
▪ 공급망 재편
▪ 인구 이동
AI 기술이 촉발한 거대한 대전환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감각을 회복하고, 느끼는 능력이 이젠 자본이 되고,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한다. 나머지 부수적인 것들은 AI에게 답을 찾으면 된다.
▪ 무엇을 느끼며 살 것인가? 무엇을 알 것인 가는 외우지 말고, 문제 의식만 키우고, AI에게 구체적인 것은 물으면 된다.
▪ 무엇이 나를 나 답게 하는가 질문한다. '나는 나다.' 방심하면 AI 알고리즘이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SNS에 중독되어 있고, 그것이 내 하루의 화두를 결정한다
▪ 어떤 감각이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가 질문한다. 나이가 들면, 감각이 자동 퇴화된다. 짜고 신 맛을 잘 못 느낀다. 감각의 퇴화를 막고, 계속 확장 시키려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질문하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 도전해 보아야 한다. 경험 자본이 감각을 확장 시킨다.
▪ 어떤 경험이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가? 늘 먹고, 마시는 대로 살면 경험 자본이 줄어든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
종합하면 (1) 무엇을 느끼며 살까? (2) 무엇이 나를 나 답게 하는가? (3) 어떤 감각이 나를 더 살아있게 만드는가? (4) 어떤 경험이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가? 이런 질문의 답을 찾아 가는 모든 과정이 곧 '나'를 나 답게 만들어 가는 길이다. 그때 쌓이는 것이 '감각 자본'이고, 이런 사람이 부자이다. 돈, 명예, 권력은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감각 자본'으로 쌓인 존재 소유는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감각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나를 만드는 거다. 그래 "내가 느끼는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된다"(김지수, <<감각자본>>) 그리고 감각은 언제나 기억을 깨우는 열쇠이다. 보이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보인다. 그건 '감각 자본'에서 나온다. 길을 걷다 스친 낯선 향기가 우리들의 기억을 통해 어떤 과거의 시절로 데려간다. 아니면 우리는 그저 그렇게 걷는다. 첫사랑과 마셨던 칵테일의 맛과 향, 여름밤 창문 너머로 들려오던 빗소리, 어릴 적 집안 가득 퍼지던 된장국 끓는 냄새 그 모든 순간이 감각으로 저장된다.
이렇게 모인 감각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나만의 안목이 된다. 그걸 프랑스에서는 '봉구(bon gout)'라고 한다. 그 '봉구'가 그 사람이다. 각자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이다. 그래 프랑스에서는 나만의 자유로운 '봉구'를 갖지 못하고 다른 이의 '봉구'를 부러워하고, 흉내를 낸다면,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자유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존재적 가치로 다룬다. 자신의 자유를 다른 곳에 헌납하는 꼴이라는 거다.
5
연중 제11주간 수요일로 <마태오 6,1-6. 16-18>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롯한 만남>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기도
하느님을
만나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아무도 없이
하느님의 나와
나의 하느님만이
오롯이 만나다
단식
나를
만나다
나와 나
사이에
아무도 없이
나의 나와
하느님의 나만이
오롯이 만나다
자선
벗을
만나다
벗과 나
사이에
아무도 없이
하느님과 벗의 나와
하느님과 나의 벗만이
오롯이 만나다
6
지금 내가 하는 선행은 누구의 시선을 향해 있나요?
2026/6/17/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마태오 복음 6장 1-6.16-18절: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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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소리없이 남을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인사조차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어떤 분은 “지금 보답을 받으면,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줄어듭니다~”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합니다. 그 말 속에 신앙의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사람들에게 보이거나 인정받기 위해 행하는 것과 하느님을 위해 행하는 것은 그 깊이가 다릅니다.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마음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집니다. 사람의 시선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시선은 영원합니다. 사람에게 받는 보상은 금방 사라지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 남아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때때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의 사랑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오늘 우리가 작은 선행을 하나 하게 된다면, 그것을 조금 더 조용히, 조금 더 깊이 하느님께만 봉헌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참된 보화를 하늘에 쌓게 될 것입니다. 박성재 엠마누엘 신부(살레시오회)/생활성서 2026년 6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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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신앙의 형식 너머, 그 안에 숨겨진 뜨거운 본질을 마주하라고 초대합니다. 엘리야의 승천을 지켜보며 그 영성을 구했던 엘리사의 간절함과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느님을 향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의 진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스승 엘리야가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엘리사는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며 간절히 청합니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2열왕 2,9). 여기서 '두 몫'은 단순히 스승보다 뛰어난 능력을 얻겠다는 욕심이 아닙니다. 이는 상속법에 따라 맏아들이 받는 몫을 의미하며, 스승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사명을 중단 없이 온전히 이어받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엘리사가 스승의 겉옷을 들어 요르단 강물을 쳤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 옷이 마법의 도구여서가 아닙니다. 스승이 모셨던 하느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엘리사 안에서도 살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할 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연극을 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 나팔을 부는 행위는 알맹이 없는 겉옷만을 탐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를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화려하게 기도하는지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어떤 진실한 마음으로 서 있는지를 보십니다. 엘리사가 겉으로 드러나는 기적보다 스승의 깊은 영성에 목말라했듯이, 우리도 세상의 인정이 아닌 하느님과의 내밀한 소통에 목말라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소중한 '믿음의 겉옷'을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옷을 단순히 거룩해 보이기 위한 장식품으로만 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종교적 예절이라는 형식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엘리사처럼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라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세상이라는 요르단 강 앞에서 그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름 없는 자선을 베풀고 진실하게 기도할 때, 우리 삶 속에는 엘리야의 불 병거보다 더 뜨거운 성령의 기적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나는 신앙의 겉모양에만 치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안의 본질인 영성을 구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의 박수를 기대하며 선행을 베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엘리사가 겉옷으로 강물을 갈랐던 것처럼, 여러분이 오늘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앞에서 바치는 진실한 기도와 작은 사랑은 우리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시련의 강물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허영의 옷을 벗고, 하느님만을 향한 진실함의 옷을 입읍시다.
“주님, 저희가 엘리사처럼 당신의 영성을 간절히 구하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으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오직 숨어 계신 당신 앞에서 진실하게 머무는 골방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저희가 이어받은 신앙의 유산이 삶의 실천을 통해 살아있는 기적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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