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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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영성(sprituality)'이라는 말을 만났다. 평소 내가 생각하는 '영성'은 다음과 이해하고 있다.
나는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 , '3 지(知)'을 구별한다. 여기서 지식은 주로 정보, 물질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걸로 인간이 누리는 부를 확장하는 것으로 본다. 고미숙은 이걸 '기술지(技術知)'라 부른다. 지성은 '문명지(文明知)'라고 정의한다. 물질을 알고 부를 확장하면 그걸 어떻게 나누고, 이걸 어떻게 인간 삶에 적용할까, 이 문제가 부각되는데, 그럴 때 관계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지성이다. 기술지와 접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지혜이다. 인간은 천지를 연결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너머가 궁금하다. 그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묻게 된다. 그리고 지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질문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 영역으로 가면 기술지와 문명지처럼 손에 잡을 수 있는 게 없다. 거대한 무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생명과 우주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면 그 보이는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다. 그걸 지혜라고 부르는데, 동시에 영성(靈性)이라고도 한다. 그걸 인류학적 용어로 쓰면 '자연지(自然知)'이다.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알려면, 이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의 인드라망 순환을 보아야 한다. 그 순환을 통해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인간다운 앎은 지혜, 영성이다. 그래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기술지와 문명지도 그 활발한 역동성을 갖게 된다. 왜 그런 가? 지식은 계속 기술을 확대해서 인간 마음에 소유에 대한 증폭, 곧 욕망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지 게 하는 거다. 이 마음을 해체하는 게 지혜인데, 이 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무조건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가 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다. 한편 지성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많은 시행착오와 토론, 논쟁, 교육 등을 주도하는데, 이 지성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강화되는 쪽으로, 그래서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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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가 "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이라는 제목의 탐색 보도를 시작했다. 그 기획 시리즈에 나오는 인물은 다음과 같이 15 인이다. 제14번째인 문선명과 한학자는 <세계일보>가 통일교의 소유이기 때문에 넣었을 것이다. 뭐라고 쓰는지 한 번 지켜 볼 거다. 나머지 14인을 늘 좀 자세하게 그 서사를 알고 싶었다.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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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을 회복해야 할 시기이다. 오늘의 세계는 눈부신 기술 발전과 물질적 번영의 외피 속에서 깊은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첨단 과학이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내면의 불안과 고립, 존재론적 허무는 그 어느 때보다 깊어 졌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혐오는 인류가 여전히 힘과 공포의 야만적 논리에 갇혀 있음을 증명한다. 물질적 풍요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현대인이 삶의 본질적인 의미와 보편적 도덕, 공동체적 연대에 목 말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간은 경제적 효용과 기술적 편리함 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위기 때마다 내면의 신성과 영성을 새롭게 발견하려 했던 이유를 추적하는 이 여정을 통해 오늘의 물질문명이 마주한 한계를 성찰하고 인간 다움의 본질과 영성이 지닌 힘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는 <세계일보>의 기획 시리즈를 매주 잘 따라가 보려 한다.
오늘은 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모세 이야기를 공유한다. 잘 정리되어 있어 좀 길지만 천천히 읽을 가치가 있다.
▪ 한 공동체는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질문 가운데 하나 이다. 그러나 지금도 매우 유효하다. AI 시대가 또다른 문명의 변곡점이기 때문이다. 그 답은 무엇일까? 힘인가. 군대인가. 돈인가. 아니면 인간보다 더 높은 어떤 질서와 믿음인가? 고대 이집트의 벽돌 굽는 노예들 속에서 등장한 한 인물은 여기에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의 이름은 모세(Moses)였다. 오늘날 그는 유대교의 예언자이자 지도자로 기억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모세는 종교 지도자를 넘어선 존재였다. 그는 흩어진 노예 집단을 하나의 민족으로 조직했고, 공동체를 유지할 윤리와 율법을 전했으며, ‘보이지 않는 신(神)’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 의식을 만들어냈다. 그 점에서 모세는 세계사 최초의 거대한 ‘정신적 국가 건설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 기원전 13~15세기 무렵의 인물인 모세 이야기는 성서 속에서 극적인 서사로 펼쳐진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시절, 이집트 왕 파라오(Pharaoh)는 히브리 민족의 인구 증가를 두려워해 남자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집트 북동부에서 태어난 모세는 이 명령을 피해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띄워졌고, 파라오의 딸에게 발견되어 역설적으로 이집트 왕실에서 자라게 된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노예 민족 출신이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성서는 젊은 모세가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치는 장면을 전한다. 여기까지의 모세는 아직 ‘예언자’가 아니었다. 이후 이집트를 벗어나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살아가던 그는 불타지만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부름을 받는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보았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히브리 민족을 이끌어내라고 명령한다. 성서 속 모세는 영웅이라기보다 오히려 두려움 많고 망설이는 인물에 가깝다. 그는 스스로 말주변이 부족하다고 호소하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한다. 그러나 바로 그 연약함 때문에 모세라는 인물은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세계 종교의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완벽한 초인이 아니라, 오히려 흔들리고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출발한다.
모세는 두려움에 떨다가 신의 근심을 알고 이집트로 돌아가 파라오와 맞선다. “내 백성을 보내라.” 하지만 파라오는 거부한다. 그리고 성서에는 유명한 ‘열 가지 재앙’ 이야기가 이어진다. 강물이 피로 변하고, 메뚜기 떼가 들판을 덮고, 흑암이 땅을 뒤덮는 장면들은 이후 서양 문학과 예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연이은 재앙은 단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성서 안에서는 인간 권력의 오만에 대한 심판처럼 묘사된다. 결국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의 ‘출애굽’을 허락한다. 절대 권력도 더 높은 질서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왜되었지만, 모세의 서사 속에서 지금도 배워야 한다. 인간 권력의 오만을 읽어야 한다.
▪ 마침내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를 탈출한다.
목적지는 ‘약속의 땅’이라고 불리는 가나안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국경을 벗어나는 마지막 관문에서 거대한 ‘홍해’라는 벽에 부딪힌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해 온다. “두려워하지 말라. 굳게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세는 이렇게 외쳤고, 절망 속에서 바다를 향해 손을 들자 물길이 갈라졌다는 이야기는 이후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렬한 종교 서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은 자유를 향한 원형적 서사이다. 물론 오늘날 역사학과 고고학에서는 출애굽 사건의 규모와 역사성을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실제 대규모 탈출이 있었는지, 성서 기록이 후대에 상징적으로 구성된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견해도 나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수천 년 동안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작동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출애굽은 억압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인간의 원형적 서사가 되었다. 이후 수많은 시대와 공동체가 자신들의 고난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출애굽 이야기를 호출했다. 미국 흑인 인권 운동에서 조차 모세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노예제(奴隸制)와 차별 속에서 자유를 꿈꾸던 사람들에게 그는 해방의 지도자였다.
▪ 이집트를 완전히 벗어나 광야로 나온 히브리인들은 곧바로 가나안에 도착하지 못한다.
성서에 따르면,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다. 배고픔과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불평하고 흔들린다. 주목할 점은 모세의 위대함이 단지 기적을 일으킨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집단을 끝까지 이끌어 가는 데 있다. 그리고 시나이반도 중앙의 험준한 암산 시내산(해발 약 2,200m)에서 모세는 십계명을 받는다. 흔히 말하는 모세의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기초로 하여 이후 공동체 질서를 규정한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규범 체계를 가리킨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오늘날에는 너무 익숙해 보이는 십계명의 문장들이지만, 당시로서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윤리 선언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법이 왕의 변덕이 아니라 ‘신 앞의 법'이라는 형태를 띠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권력이 법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시대였지만, 십계명 이후 권력자 역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더 높은 질서 아래 있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 훗날 서구 문명의 법과 도덕 체계는 이런 유대교 전통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된다.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 역시 모세를 중요한 인물로 받아들이며, 그의 이야기는 세계 종교사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모세의 삶은 영화, 시, 소설, 희곡 등으로 변주 되어 예술과 대중문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남겼다. 특히 영화는 모세 서사를 반복적으로 재현해 왔다. 대표적인 작품이 1956년 제작된 영화 《십계》이다. 찰턴 헤스턴이 모세 역을 맡은 이 작품은 당시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지금도 성서 영화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거대한 홍해를 가르는 장면과 시내산의 계시는 당시 기술로 구현하기 어려운 스펙터클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압도적 장면들이 모세 신화를 현대 대중에게 다시 각인시켰다. 이후에도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등 수많은 작품이 모세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했다. 시대마다 표현 방식은 달라졌지만, 공통점은 하나였다. 인간은 여전히 자유와 구원의 이야기에 끌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윤리 선언 서사가 있다. 동시에 십계명 이후 권력자 역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더 높은 질서 아래 있다는 인식의 싹을 심었다. 법이 왕의 변덕이 아니라 ‘신 앞의 법'이라는 인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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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합니다’(문과라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문과를 졸업하면 취업이 어렵고, 실생활에서도 쓸모없는 학문 취급을 받는 씁쓸한 현실을 반영한 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현상은 더 심화했다. 인문학 계열 학과들은 천덕꾸러기가 됐다. 상위권 대학은 예외지만, 철학 등 순수 인문학 학과들이 몇몇 대학에서 정원 미달과 학과 폐지로 내몰리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대학가의 인근을 지켰던 그 많던 책방은 자취를 감췄다. 10여년 전 ‘인문학 열풍’이 잠시 불었지만, 현실로 이어지지 않았다. 요즘 말로 그저 ‘힙’해 보여서 반짝 인기를 누린 정도다. 첨단기술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 이런 세태를 탓할 수 없지만 씁쓸한 지점이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인문학은 인간의 쓸모, 인간의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스스로 질문하고 중심을 잡도록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인문학을 공부해야 나란 존재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바른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인문학에 대한 경시는 결국 우리 스스로에 대한 무시와 경시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런데, AI 시대를 맞아 인문학이 재조명되고 있다. AI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질문하는 능력’이 중요한데, 이 때문에 인간 본질을 탐구하고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우는 철학 등 인문학의 가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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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화요일로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이 나에게 달렸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사랑이
나에게
달렸다
내가
사랑할
네가
아니라
너를
사랑할
나에게
사랑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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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상황이, 혹시 아버지 하느님을 닮아갈 기회의 자리는 아닐까요?
2026/6/16/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마태오 복음 5장 43-48절: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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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자녀로서의 삶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 무게를 잘 몰랐는데, 살면서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든든히 곁에 계셔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릅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이 서른에 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저 정성스럽게 살았습니다. 아버지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겠다고 한 수도생활이었지만, 언제부턴가 마음 한편에 인간관계에서 오는 아쉬움과 불만, 서운한 마음들이 슬그머니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일이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 바로 그 자리가 아버지 하느님을 닮아가는 기회의 자리입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삶이 아닙니다. 이미 아버지의 자녀로 불린 우리가 그 하느님의 모상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박성재 엠마누엘 신부(살레시오회)/생활성서 2026년 6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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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오늘 전례의 말씀은 인간의 논리로는 가늠하기 힘든 하느님의 파격적인 자비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어제 우리는 나봇의 생명을 빼앗고 포도밭을 가로챈 아합 임금의 악행을 보았지만, 오늘은 그토록 사악했던 악인조차 품으시는 하느님과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예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통해 아합의 죄악을 엄중히 꾸짖으시고 비참한 종말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기세등등하던 악인 아합이 자신의 옷을 찢고 자루옷을 입으며 단식하는 등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느님의 반응입니다. 주님께서는 아합이 보인 찰나의 겸손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1열왕 21,29). 우리의 시선으로는 그런 악당이 이토록 쉽게 용서받는 것이 불공평해 보일 수 있으나, 하느님은 죄인이 단 한 순간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길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산상설교의 결론과도 같은 중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를 미워하고 상처 준 이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이런 숙제를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하려 노력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완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사람의 악행을 정당화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속 복수심이라는 감옥에서 나 자신을 해방하라는 초대입니다. 아합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심판을 유예받았듯이, 우리도 원수 앞에 나를 낮추고 그를 위해 기도할 때 미움이 주는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결단입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으니 당신의 사랑을 제 마음에 부어주십시오"라고 청하는 것이 그 위대한 시작입니다.
오늘 하루,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짧은 화살기도 한 번을 바쳐봅시다. 이 작은 기도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고, 아합의 대를 넘긴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삶으로 불러오는 소중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아합의 작은 겸손도 기쁘게 받아주신 당신의 너그러움을 찬양합니다. 저희에게 원수까지 품을 수 있는 커다란 심장을 주시고, 미움으로 얼룩진 저희의 시선을 거두어 주시어 당신처럼 모든 이를 품어 안는 '완전한 사랑'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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