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6월 13일)
1
거대한 황금 축구공이 그라운드 한복판에 떠오르자, 경기장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아스테카 전사를 연상시키는 무용수들의 몸짓과 강렬한 북소리가 어우러지며 2026 북중미 월드컵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어제 화려한 개회식을 열고 39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개회식이 열린 멕시코시티 스타디움은 역사상 최초로 세 번의 월드컵 개막전을 개최해 그야말로 ‘축구의 성지'가 됐다. ‘축구 황제’ 펠레가 1970년 브라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가 1986년 ‘신의 손’ 골을 터뜨렸던 바로 그곳이다.
개회식은 공동 개최국 멕시코의 전통과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무용수들은 깃털 장식을 두른 채 경기장을 누볐고, 황금색 의상을 입은 공연자들은 패스를 주고받는 듯한 군무를 펼치며 고대 문명과 현대 축구의 결합을 선보였다. 이날 개회식의 백미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에서 ‘골든’을 불러 스타덤에 오른 한국계 싱어송라이터 이재와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의 공식 주제가 ‘DNA’ 공연이었다. 이재는 “또 넘어져도 난, 또다시 일어나”라는 한국어 가사를 불렀다. 4년 전 카타르 대회 방탄소년단(BTS) 정국에 이어 두 대회 연속 한국계 아티스트가 월드컵 공식 주제가를 부르는 기록을 세웠다.
월드컵 공식 주제가 <It's our DNA> 는 우리에게는 다시 일어나는 DNA가 있다는 거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한민족이 증명해 온 생존의 철학이다. 이재가 직접 가사를 쓴 이번 월드컵 주제가는 축구가 전 세계를 연결하는 힘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런 가운데 ‘또 넘어져도 난 또다시 일어나’라는 한국어 가사가 여러 번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침략과 식민지. 전쟁과 독재, IMF와 외환 위기 그리고 촛불 혁명. 우리는 수도 없이 넘어졌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다. 반도체와 AI, 조선과 자동차, K-POP까지. 오늘의 우리 사회를 만든 힘은 천재성이 아니라,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는 회복력', 바로 대한민국의 DNA 이다.
정치판만 개판이다. 아직도 진영논리 싸움만 한다. 비판은 민주주의의 생명이다. 그러나 같은 진영 안에서 다른 의견을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파벌주의로 추락한다. 정책 경쟁은 사라지고 중성 경쟁만 남는다. 비판은 내부 총질이 되고 토론은 배신이 된다. 결국 조직은 잡단 사고에 빠지고, 비판자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그 조직은 반드시 무너진다. 비판을 진영논리로 왜곡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멈춘다. 조금만 다른 말을 하면, "배신자", "프락치", "수박"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 순간 토론은 끝나고 논리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증오 뿐이다.
이재의 노래는 실패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자는 거다.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보다 더 위험한 것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우리는 수없이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났다. 그 DNA로 문화강국이 되었고, 기술강국이 되었으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이제 정치가 그 DNA를 배워야 한다.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 비판을 수용하는 성숙함, 책임을 지는 리더십, 계파보다 공동체를 앞세우는 정치, 무엇보다 진영논리라는 망국병부터 끊어내야 한다. 대한민국의 DNA는 서로를 끌어내리는 데 있지 않다. 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있다.
2
"인간은 달과 같아서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어두운 면이 있다."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사건적 트라우마가 있고, 집단적으로 경험한 역사적 트라우마도 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강하다. 지금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보다 힘들지는 않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다시 나아가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살아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위해 자신을 다시 양육하여야 한다. 이를 'reparenting(재양육, 혹은 다시 부모 되어주기)'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재 양육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자신의 부서진 배를 고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맹자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장차 큰 임무를 내릴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의지를 시험하고, 근골을 수고롭게 하고, 배를 굶주리게 하고, 몸을 궁핍하게 하고, 그가 하는 일을 어긋나게 하고 어지럽힌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그가 마음을 진작 시키고 성품을 단련 시켜, 그가 해낼 능력이 없는 일에서 조차 이루는 바가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맹자(孟子)>>의 <고자장구(告子章句)下 15장>>에 나오는 거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천장강대임어사인야):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사람에게 맡기려 하면
必先勞其心志(필선노기심지):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苦其筋骨(고기근골): 근육과 뼈를 깎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餓其體膚(아기체부): 몸과 살을 굶주리게 하고
窮乏其身行(궁핍기신행): 생활을 빈곤에 빠뜨려
拂亂其所爲(불란기소위):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所以 動心 忍性(소이 동심 인성): 이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길러 주기 위함 이며
增益 其所 不能(증익기소불능):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 이니라
어떤 비바람과 폭풍은 우리의 인생을 깨끗이 씻겨주려고 온다. 고통 속에 숨겨진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는 사람은 반드시 새로 태어난다. 불행한 순간이 야 말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우리는 움직인다. 고난 속에서도 중심을 지킨 사람만이 '다음'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시기는 사실 배를 더 단단하게 하고, 항해의 기술을 배우는 시간이다. 그 다음에 오는 약한 비바람에는 흔들리지도 않게 될 것이다. 어려운 일 앞에서,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원망하는 마음에서 '이 일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인 가' 라는 생각으로 각도를 바꾸면 새롭게 나아갈 수 있다.
분노와 미움은 몸을 망가뜨리고 정신을 시궁창에 빠뜨린다. 살아가며 가장 에너지를 쏟지 말아야 할 일이다. 과거와 화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살아 있는 것이고, 그 아픔을 뛰어넘어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흉터가 있다면 그건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다는 훈장이다. 결코 흠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기억이 우리의 가치를 감소 시키지 않는다. 그릇이 커지느라, 더 큰 일을 감당할 사람이 되느라 그 과정에 아픔이 따랐을 뿐이다. 똑같은 비극의 상황을 겪었어도 반짝이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곪은 사과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이건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흉터/네이이라 와히드(얼굴 없는 시인으로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시인)
흉터가 되라.
어떤 것을 살아 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상처는 지혜로 바꿔야 다시 살아갈 수 있다. 들킬 세라 무겁게 지고 온 어두움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제는 놓아버리고, 모든 것을 온기와 빛으로 바꿔버리는 태양으로 살아가는 거다, 인생의 파도가 때로 우리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지만, 그곳에 서야 비로소 별이 보인다. 상처를 지혜로 바꾸는 사람만이 끝내 자신을 구한다.
3
일과 일터는 우리에게 생계 수단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일터에서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은 걸 성취한다 해도 내가 스스로 일군 일터의 주인이 아니라면, 그 직함은 다 사라진다. 그러니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건강한 정신으로 사회에 크든 작든 하나의 역할을 하며 의미 있게 나이 들어 가는 것이다. 자기 할 일이 있고, 그 일이 생존에 절대적일 정도로 간절하면, 우울함이나 무기력이 자신의 일상에 끼어들 틈이 없다. 매일 일어나면 그 일터로 나가야 한다. 게다가 자기 일터 밖의 세상 따위에 관심조차 둘 수 없다.
그러니까 자기 일과 일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교할 대상도 없이 자신의 세상 안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 나도 지금 내가 하는 일로, 힘이 좀 부치지만, 인생의 폭풍에 지지 않고 우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일의 의미는 돈을 많이 벌어 다 주는 것보다 그 일이 건강한 삶을 위한 바탕이 되어 준다. 그런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늘 바쁘고 독립적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도, 사소한 일로 가족 간에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없다.
일이란 우리의 정신을 좀 더 또렷하게 건강하게 만들어준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계산하고, 읽으며 머리를 계속 쓰면 뇌의 노화가 늦어진다는 거다. 연구 결과가 아니어도, 열중할 일이 있으면 정신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일에 몰입하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관계서 오는 어려움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다. 계속 할 일이 남아 있으면 우울할 겨를이 없다. 나 자신을 스스로의 힘으로 책임지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려 한다. 일은 생계를 위한 노동이기 전에,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고요한 박동이기 때문이다. 직함이 사라져도 손끝의 일은 남아, 여전히 우리를 삶의 무대 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외 없이 우리는 모두 늙어간다. 그러니까 너 늙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 길은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이다.
§ 내가 겪은 많은 경험 중 어떤 것을 내 안에 남겨서 세상과 나눌까?
§ 가장 나-다움을 발휘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가?
§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며 오래도록, 꾸준히, 행복하게 할 일은 무엇인가?
본래 죽기 전날까지도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끝나지 않는 것이니 어느 때라도 늦은 때란 없다. 자신만의 방향성을 가지고 풍랑이 몰아치는 세상에서 이전보다 덜 흔들리며 생의 끝까지 항해할 수 있는 힘, 차분히 다음 길을 모색할 수 있게 하는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중요하다.
나이 들었다고 꿈을 놓아서는 안 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동안에는 완전히 늙어버리지 않는다. 팽팽하게 당겼던 고무줄을 놓는 순간 고무줄이 힘을 잃고 쭈그러드는 것과 같다. 과거의 후회할 일들은 전부 볏짚처럼 비벼서 날리고, 과거의 나 자신을 용서하며 조금씩 용기를 내어 내가 꿈꾸는 작은 세계를 계속 그려 나가는 거다. 그렇다고 나의 꿈이 실현된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가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다고 늘 생각한다.
내 인생의 바다는 어느새 황혼 빛으로 물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항해 중이다. 이루지 못한 일이 아직 많지만, 그건 앞으로 이루어질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 오늘도 나는 기쁘게 살려고 한다. 고집스러운 기쁨을 찾아.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우리를 아주 불편하게 한다. 후회와 불안보다 좋은 음식을 먹고 충분한 잠을 자고 나면, 새롭게 일을 도모할 힘을 얻는다. 하나하나의 시간이 시작이며 또한 끝이다. 얼마나 오래 만나느냐 하는 것보다 하나하나의 시간을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에 듣는 음악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꽃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있음을 늘 잊지 않는 거다. 기쁨의 싹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나는 늘 "고집스럽게 기쁨"을 추구한다. 잭 길버트의 시 <변론 취지서>에는 “우리는 과감히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안 된다/ 이 세상이라는 무자비한 불구덩이에서 고집스럽게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적확한 시인의 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이다. 눈이 녹으면 더러워서, 비가 내리면 단풍이 하수구를 막아서, 봄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이 모든 계절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풍경일까? 한 번뿐인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고집스레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아주 조금, 관점을 바꾸는 순간 나의 삶은 많은 것이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미 지나가서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상황으로, '지금, 이 순간'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 때 마음의 근육이 늘고, 감정 연금은 쌓인다.
4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말씀은 <루카 2,41-51> "예수님의 소년 시절" 이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 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마음속에>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비운
마음속에
신비 넘치네
열린
마음속에
믿음 스미네
찾는
마음속에
희망 샘솟네
고운
마음속에
사랑 영그네
참된
마음속에
진리 머무네
5
지금 내가 품어주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2026/6/13/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복음 2장 41-51절: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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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간직하는 사랑
요즘은 중학교 2학년을 ‘중2병’이라는 말도 모자라 ‘우주인 같다’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생각과 행동 방식을 보이기에, 가끔은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지구에 적응하는 우주인’이라 생각해야 속 편하다는 은유적 표현일 겁니다. 사흘간 발이 닳도록 찾아다녔던 마리아와 요셉에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오히려 당혹스러운 질문을 하는 어린 예수님을 묵상하다 보면, 요즘 아이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나 싶기도 합니다. 아니, 요즘 부모들이나 교육자들이 성모님과 같은 체험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까이 있지만 이해가 안 되는 존재, 그게 바로 그 순간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마리아는 폭발하지 않습니다. 따지거나 억지로 납득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조용히 간직하며 되새깁니다. ‘역대급’ 인내심이라 할 수 있지요.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까지 품어주고, 그 시간과 성장을 기다려 주는 것, 마리아의 기다림이 바로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도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순종하며 자라나셨듯이, 우리 우주인 아이들도 때가 되면 착륙하리라 믿습니다. 이렇듯 이해를 넘어서는 사랑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건네는 초대임을 묵상해 봅니다.박성재 엠마누엘 신부(살레시오회)/생활성서 2026년 6월호 '소금항아리'에서⠀
6
2026년 6월 13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해 터져버린 예수 성심의 뜨거운 사랑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아들의 마음을 세상에서 가장 깊이 닮았으며 그 사랑을 온전히 품어 안으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합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성모님의 마음이 어떤 고통과 신비 속에서도 어떻게 하느님을 향한 기쁨으로 승화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구원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이사 61,10). 이 고백은 성모님의 노래인, 마니피캇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이 '티 없이 깨끗하다'는 것은 단순히 죄가 없다는 교리적 정의를 넘어, 그 마음의 중심에 오직 하느님만을 모셨기에 세상의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기쁨이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입혀주신 구원의 옷을 입은 성모님의 마음은 우리 영혼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정원과도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되찾은 부모의 애타는 심정을 전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에는 인간적인 고통과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러나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여전히 신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때 성모님은 화를 내거나 따지기보다 침묵을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기록합니다. 성모 성심의 위대함은 바로 이 '간직함'에 있습니다. 가슴을 찌르는 예언과 아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까지도 기도의 그릇에 담아 삭여내셨기에, 성모님은 훗날 십자가 아래에서도 끝까지 서 계실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으셨습니다.
성모 성심을 공경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도 성모님을 닮아 정결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걱정, 미움, 비교, 탐욕으로 복잡합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칠 때, 당장 답을 찾으려 조급해하기보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그 일을 바라보며 기도의 그릇에 간직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성모님의 마음이 깨끗한 이유는 고통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칼에 찔리는 아픔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덮으셨기에 그 마음이 티 없이 깨끗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나는 삶의 고통과 의문들을 불평으로 쏟아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모님처럼 기도의 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 성모님의 손을 잡고 우리 마음의 방을 정돈해 봅시다. 불필요한 미움은 비우고 주님이 주신 은총은 소중히 간직할 때, 우리 삶에서도 구원의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여, 저희의 마음을 당신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 고통 중에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주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는 지혜를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 영혼이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기뻐 뛰게 하소서.” 아멘.
8
사실 모든 사람은 자기 뇌의 100%를 사용한다고 한다. 만약 뇌의 10% 정도만 사용하게 된다면 생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말은 잘못이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잠재력이다. 자기가 가진 잠재력의 10%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뇌를 100% 활용하고 있다.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나’를 생각해야 한다. 이 잠재력은 뇌의 활동량과 상관없다.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은 얼마나 쓰고 있을까요? 한 10%는 쓰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일 것입니다.
"슬픔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행복은 하느님을 향해 열린 시선입니다. 회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기는 일, 눈길을 살짝 들어 올리는 일이면 충분합니다"(성 카를로 아쿠티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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