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0월 4일)

지금 우리는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중 네 번째인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자신하고만 비교하라"는 규칙을 말하고 있다. 오늘 이 네 번째 법칙은 마친다.
오늘은 우선 인간의 욕망과 욕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본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굶주림과 외로움, 갈증과 성욕, 공격성, 두려움과 고통을 느낀다. 이런 욕망과 욕구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기본 요소이다. 이런 원초적인 욕구를 잘 분류하고 정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현실적인 제약이 많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의 욕망을 나의 다른 욕망과 충돌하고, 다른 사람의 욕망과 경쟁하며, 더 나아가 세계 전체의 욕망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아내서 정리한 다음, 우선순위를 정하고 서열을 매겨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욕망이 세련되게 다듬어져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작동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욕망은 질적인 상승을 거듭하고, 더 높은 가치를 행해 움직이며, 궁극적으로는 도덕성을 갖추게 된다. 오늘의 화두는 옳고 그름, 도덕성에 대한 담론이다. 그전에 욕구와 욕망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와 이론들을 좀 공유해 본다.
내가 대학원 시절에 배운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소환한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주체-중개자-대상'이라는 삼각형 구조를 갖는다. 곧 나는 항상 중개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그럼으로써 대상에 다가간다. 마치 기사소설을 읽고 진정한 편력기사가 되길 원하는 돈키호테가 전설적인 기사 아마디스의 삶을 욕망하는 것과 같다. 파리 사교계를 열망하는 <<보바리 부인>>의 엠마는 연애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의 삶을 욕망한다. 그 여자들의 모든 것을 모방한다. "엠마-여주인공들-파리 사교계'라는 욕망의 삼각형이 형성된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이란 단지 "타인을 따르는 욕망"으로서 '사회적 산물'에 불과하다.
문제는 욕망이 종종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폭군이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의 요구를 욕구와 욕망으로 구분했다. 예컨대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으려는 것은 욕구이지만, 즐기기 위해 음식을 먹으려는 것은 욕망이다. 더위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옷을 입으려는 것은 욕구이지만, 사치하기 위해 화려한 옷을 찾는 것은 욕망이다. 이러한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서 노력하면 어떻게든지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정신적 요구로서 어떻게 해도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 욕구는 채우되 욕망을 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욕망은 영어로 desire(프랑스어로는 envie)이고, 욕구는 need 혹은 want(프랑스어로 besoin)이다. 욕구는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결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라면, 욕망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결핍을 채워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과정이다. 욕구는 생존과 같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욕망은 행복 추구와 같이 '있으면 좋은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욕구는 뭔가 결핍이 생긴 상태를 의미하고, 욕망은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갈구하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구별하기 힘들다면, 욕구는 무의식적으로 결핍된 상태를 채워서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이고, 욕망은 자기 스스로, 즉 의식적으로 부족을 느껴서 탐하는 것이므로 욕구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참고로 탐욕은 욕망을 뛰어 넘어 남들이 보기에도 과도하게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 단계가 되면, 남들에게 피해를 줄 정도일 것이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분류했다. 먹고, 입고, 성욕을 느끼는 생존의 욕구, 이런 것들을 안정으로 받는 안정의 욕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관계의 욕구,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존경의 욕구, 자신이 차별적 존재임을 실현해보고 싶은 자기 실현의 욕구가 그것이다. 여기서 생존과 안정의 욕구는 결핍의 욕구이고,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는 생성의 욕구이다. 관계의 욕구는 결핍의 욕구이기도 하고 생성의 욕구이기도 하다. 이 다섯 단계를 다시 정리해 본다.
(1) 생리적 욕구(식욕, 수면 욕, 성욕): 세포적 레벨의 건강함의 항상성 유지
(2) 안전의 욕구(질서, 안정된 수입, 나를 지켜주는 지도자): 개체적 라벨
(3) 소속과 애정의 욕구(친밀감, 배려, 재미, 애정, 호감, 남들과 원만한 관계): 사회적 레벨(수평)
(4) 자존의 욕구(타인으로부터 높은 평가와 존경을 원하는 욕구): 사회적 레벨 (수직)
(5) 자아실현의 욕구(끔을 실현): 역사적 레벨(시간 초월)
들뢰즈는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규정하고, 욕구와 욕망 사이의 연결을 시도했다. 생존의 욕구나 안정의 욕구처럼 존경의 욕구나 자아실현의 욕구를 기계적 일상처럼 반복하는 삶을 통해 더 나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오늘은 어제가 개천절 국경일인데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대체휴일이다. 가을이 깊어 가는 시기인데, 오늘은 날이 흐렸다. 나는 이쯤 되면 다시 기억하고 싶은 시가 있다. <가을의 문턱에서>이다.
가을의 문턱에서/김보일
무엇에 지칠 만큼 지쳐보고서 입맛을 바꾸어야지, 무엇을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이거저거 집적대는 것은
자연(自然)이 젓가락을 움직이는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초록이 지쳐 단풍든다는 말이 자연의 이치를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말은 아닐지. 영과후진(盈科後進), 물은 웅덩이를 다 채우고 흘러간다던가. 지칠 만큼 여름이었고, 벌레들은 제 목청을 다해 울었으니 이제 가을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가을일 것이다.
옳고 그름, 도덕성을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윤리학이다. 윤리학은 더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윤리학보다 더 긴 역사를 지닌 종교는 윤리학의 범위를 넘어선 심원한 영역을 다른다. 종교는 옳고 그름만이 아니라 선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색한다. 그리고 종교는 '올바른 행동'을 이야기 한다. 종교(宗敎)를 말 그대로 하면 '으뜸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떤 목표도 세울 수 없다. 그러니까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 모르고, 어찌어찌 훌륭한 목표를 세웠더라도 목표를 이루는 법을 모른다. 그리고 목표로 정할 것이 없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목표가 없으니 방향을 잃고 방황한다.
제대로 훈련 받은 사람은 적어도 잘 연마된 도구와 같다. 훈련이나 신념은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시각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도구는 목적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목적이 없다면 쓸데 없는 도구이다.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시각이다. 이런 시각이 필요하다. <<도마 복음>>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말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온 땅에 뿌려져 있지만 사람들은 그 나라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종교적 영향을 받았다.
어쨌든 인간이 가진 믿음에 대한 지식 중 일부가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각 문화권의 근본적인 깨달음을 전하는 <<도덕경>>, <<베다>>, <<성경>>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집단적 상상력이 불가해한 힘에 이끌려 기나긴 시간 동안 깊은 심연에서 끌어올린 지혜의 보고서들이다. 주의 깊게 꼼꼼히 파헤치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에 대한 근원적인 가르침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고전들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목표로 삼아 본다. 더 나은 삶이란 목표가 다른 사람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면 그 목표는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더 나은 삶을 목표를 정하면, 이제 눈길이 향하는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짓누르던 한계 너머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자신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이 나타나고,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삶이 질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더 나은 삶이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되는 거다. 여기서 더 나은 사람이란 삶의 조건이 보편적으로 향상된 모든 인간의 삶을 의미한다. 이런 생각 끝에 이르면, 우리는 과감히 행동에 나선다.
그 행동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현재 내 주변을 둘러싼 물리적인 환경과 심리적인 환경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며 주목한다.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 게 뭔지. 신경 쓰이는 게 뭔지, 걱정거리가 뭔지 정확히 파악하라. 그리고 자신이 바로잡을 수 있는 것과 바로잡아야 할 것에 주목하라. 그리고 그런 것들을 손쉽게 찾게 하는 다음의 세 개 질문이 만들 수 있다.
(1) 이것이 지금 나를 짜증 나게 하는 것인가?
(2) 이것은 내가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인가?
(3) 정말 나는 이것을 바로잡을 의지가 있는가?
이 질문들 중 '아니요'라는 답이 하나라도 있으면 시선을 돌려야 한다. 목표를 낮춰도 좋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 바로잡고 싶고,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나올 때까지 찾아보고,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하루면 충분하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서툴러도 자꾸 하다 보면 능숙 해진다. 잘 안 되면, 오늘 하루 할 일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 본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것 만큼은 꼭 끝내자 하고 부탁해 본다. 한 동안 매일 이렇게 해본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습관을 유지해 본다. 그러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면서 말이다. '내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면서 오늘에 집중한다. 그래야 현재를 온전히 살 수 있고, 바로 눈 앞에 놓인 그 일에 완전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힘을 쏟을 수 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마태복음> 제6장 25절에서 34절을 공유한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현재에 집중한다. 다른 사람의 삶이 내 삶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는 누구도 시기하지 않는다. 목표를 낮추고 인내하는 법을 알기에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이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도 깨달어 간다. 그래서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에 대한 본인만의 해법을 발견해 간다. 자신이 해야 하 중요한 일이 많기에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남들 일에 간섭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ah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가을의 기도/김현승 (0) | 2021.10.05 |
|---|---|
| 꿈, 견디기 힘든/황동규 (0) | 2021.10.05 |
| 부르고뉴 와인 이야기와 시월 이야기/이향지 (0) | 2021.10.04 |
|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임영준 (0) | 2021.10.04 |
| 메꽃/이안 (0) | 2021.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