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6월 12일)
1
삶이 지루하고 신명(神明)이 없었던, 어거스틴(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은 엘리야가 들었다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자신의 내면으로 부터 들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이제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섬세하고 미세하지만 강력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심연을 응시할 수 있었고 자신의 귀로 내면의 소리, 침묵의 소리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 소리를 우리는 '톨레 레게(tolle lege)'라고 한다. 톨레 레게를 번역하자면, '한 가지 원칙을 선택하여 집어 들고, 그 선택한 것을 너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알려라'란 의미이다. 오늘 나는 무엇을 취사선택(取捨選擇)할까? 이 기준의 원칙은 선하게 살려는 의지이다. 예를 들어, 이집트 사막에서 홀로 수도 생활을 했다는 성 안토니우스가 들은 것이, '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였던 것처럼,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었다고 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그때 부터 그는 과거의 어거스틴이 아니라, 미래의 어거스틴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한 순간의 취사선택을 통해 그리스도교라는 웅장한 건물의 틀을 잡은 사람이다. 예수는 앞으로 등장할 그리스도교의 청사진을 찍었다면, 바울과 베드로는 그리스도교의 터전을 마련했고,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외벽을 만든 자였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그후, 그의 삶은 단정(端正)해졌고, 타인과 경쟁하여 제압하려는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제 신의 옷을 입은 자로, 신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톨레 레게는 라틴어로 "취하여 선택하라"는 말이다. 톨레(tolle)는 고속도로의 톨게이트(tollgate)에서 알 수 있듯이, '벌금을 부과하다', '사용료를 지불하다'란 의미이다. 라틴어 톨레레(tollere)는 '선택하다, 집어 들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다'란 의미이다. 레게(lege)는 '읽다'란 라틴어 'legere'에서 파생한 단어로 더 근본적인 의미는 '선택하다, 추리다'란 의미이다.
2
"편한 날의 행동은 습관이 되고, 힘든 날의 행동은 실력이 된다." 이를 습련성(習鍊成), 영어로는 Easy days build habit, hard days build skill라 폐친 강성구는 표현했다. 아침에 좋은 화두를 던진 폐친에게 감사하다.
언젠가 알았던 Hard Choice, easy life/Easy choice, hard life라는 말이 소환된다. 이 말은 예지 그레고렉(Jerzy Gregorek)이 한 말이다. 그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과 같은 힘든 선택이 우리를 선(善)한 삶으로 안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진정한 성공은 "선한 삶을 선택하는 결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삶을 주인(마스터, master)으로 사는 방법에 대한 그의 말을 직접 소개한다.
"우리의 마음에는 숙명론자와 마스터(master)가 살고 있다. 선한 삶을 통해 위대한 성공을 얻으려면 먼저 숙명론자의 속삭임을 거부해야 한다. 쉬운 선택을 집요하게 권하는 숙명론자가 이길 경우, 우리가 처한 상황은 약화되고 삶의 질도 추락한다. 다행인 것은 숙명론자 만큼이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마스터의 목소리도 뚜렷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스터가 숙명론자를 이기려면 처음에는 51% 대 49%의 미묘한 차이만 벌릴 수 있어도 된다."
우선 견고함에 약간의 '틈'을 벌려야 한다. 실제로 예지 그레고렉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다 보면 점점 숙명론자를 새로운 방법으로 함정에 빠뜨려 이길 가능성을 5% 또는 10%로 늘릴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숙명론자에게 패배하던 삶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되는 것 같다. 살면서, 마스터에게 최소 51% 이상의 힘을 실어주려면 점점 망설이는 시간을 줄여 나가다가 어느 순간 어떤 두려움도 없이 곧장 '힘든 선택'을 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방법이란 '선하게 살 궁리"이다.
에베소서 4:28장을 페친이 올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선하게 살 궁리를 하면, 일상에서 선한 자극을 받고, 보다 쉽게 자기희생으로, 자신의 불편을 자초하며 타인을 돕는 일에 쉽게 뛰어들며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한 번 더 예지 그레고렉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삶의 지혜를 일상에 적용할 수 있게 해준다. "내 안의 마스터를 점점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내 삶에 대한 내 책임 비중을 점점 더 늘려, 마침내 100%로 만드는 것이다." 이게 인문운동가가 늘 꿈꾸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우리가 행복해지지 않는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한 반응에 너무 예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존재나 행동 때문에 화를 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누군가 때문에 살맛도 나고 죽을 맛일 때도 있다. 마스터가 된다는 건 누군가의 자리에 '나'를 놓는 노력이다. 나에 대한 완전한 결정권을 내가 가질 때 비로소 타인을 돕는 힘든 선택이 가능해진다." 살면서, 가장 힘들지만 선하고 위대한 선택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결정권, 그리고 타인을 향한 탁월한 책임의식일 것이다. 예지 그레고렉은 어려운 선택을 하면 인생은 쉬워진다고 했다.
하루의 삶 속에서 선택은 정확하게 말하면, 취사선택(取捨選擇)이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하루는 취사선택을 수련하는 훈련장이다.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는 것이다. 그걸 훈련하고 수련하는 도장(道場)이 하루의 일상이라는 거다.
우리가 무식(無識)하다는 사람은 글을 몰라 무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돌보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배운 사람, 학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무식한 경우가 많다. 자신이 감히 알고 있는 내용이 진리라고 착각하고 타인에게 우기기 때문이다. 반대인 유식(有識)은 즉흥적이며 포용적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자신이 앞으로 알고 깨달을 지식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겸손(謙遜)하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지나치지 않음"이다.
지나치지 않음에 대하여/박상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한다.
아침 신문도 우울했다.
지나친 속력과
지나친 욕심과
지나친 신념을 바라보며
우울한 아침,
한잔의 차는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케 한다.
손바닥 그득히 전해오는
지나치지 않은 찻잔의 온기
가까이 다가가야 맡을 수 있는
향기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지나친 세상의 어지러움을 끓여
차 한 잔을 마시며
탁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세상의 빛깔과
어디 한 군데도 모나지 않은
세상살이의 맛을 생각한다.
"습련성"이라는 말을 보고, 이어진 생각들이다. 다시 되돌아 온다.
§ 습(익힐 習): 반복하여 몸에 베게 한다.
§ 련(단련할 練): 어려움을 거치며 단단하게 벼린다.
§ 성(이룰 成): 마침내 이루어지고 갖추어진 상태
"습련성"을 다시 풀이하면, 편한 날의 행동은 삶의 습관으로 쌓이고, 힘든 날에도 멈추지 않은 행동은 결국 사람의 실력으로 완성된다는 거다. 사람은 대체로 여유가 있을 때는 움직이기 쉽다. 그때의 행동은 반복 되며 루틴이 되고, 루틴은 습관이 된다. 하지만 진짜 차이는 힘든 날에 드러난다. 몸이 무겁고 마음이 지치고, 핑계가 생기고, 멈추고 싶을 때에도 해야 할 행동을 이어가는 사람은 다르다. 이걸 안락과 불편함의 선택으로 읽어 본다. 편한 날, 아니 안락을 선택한 날의 행동이 생활을 정리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편한 행동이 잠식한다면, 불편함을 선택하여야 한다. 그런 힘든 날의 행동은 사람을 단련하고 실력을 만들기 때문이다. 습관은 쉬운 날에 만들어지고, 실력은 어려운 날에 증명된다는 거다.
§ Easy days: 모든 조건이 좋고 행동하기 수월하고 편안한 때이다.
§ Build habit: 반복을 통해 몸에 밴 습관을 만든다.
§ Hard days: 지치고 흔들리고 포기하고 싶어 지는 날들, 그러나 자발적 불편함을 자신을 편안하고 나태한 생활로 부터 틈새를 벌이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 Build skill: 그런 날에도 이어 간 행동이 결국 실력과 내공이 된다.
Easy days build habit, hard days build skill를 '편한 날의 반복은 습관을 만들고, 힘든 날의 지속은 실력을 만든다'로 읽으니, 실력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안락을 피하고 불편함을 초래한 일상이 그 사람의 성품의 깊이를 만들어 주고, 그것이 실력이 된다는 말로 나는 이해를 했다. 습관은 좋은 조건에 쌓이지만, 실력은 나쁜 조건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행동에서 만들어 진다는 거다. 두 가지 실천 사항이 나온다.
§ 불편을 자초한다.
§ 하기 싫은 일상의 루틴을 조금씩 늘려간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정해진 루틴대로 처리하고, 하기 싫은 순간이 오면 그대로 한 번 더 그리고 10분만 더 밀고 가는 거다. 바로 그 10분 또 한 번의 반복적인 습관이 실력으로 바뀐다.
3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로 <마태오 11,25-30>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내 멍에를 메어라"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넘겨주셨으니>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마태 11,27)
하느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넘겨주셨으니
믿음으로
믿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희망을
넘겨주셨으니
희망함으로
희망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넘겨주셨으니
사랑함으로
사랑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빛을
넘겨주셨으니
빛남으로
빛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쁨을
넘겨주셨으니
기뻐함으로
기뻐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움을
넘겨주셨으니
고움으로
곱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드러움을
넘겨주셨으니
부드러움으로
부드럽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곧음을
넘겨주셨으니
곧음으로
곧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품음을
넘겨주셨으니
품음으로
품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눔을
넘겨주셨으니
나눔으로
나누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돌봄을
넘겨주셨으니
돌봄으로
돌보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살림을
넘겨주셨으니
살림으로
살리게 하렵니다
4
지금 내가 ‘손해’라 여기며 주저하는 그 자리가, 사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자리는 아닌가요?
2026/6/12/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마태오 복음 11장 25-30절: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
아버지의 선하신 뜻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냐’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면, 땅에 계신 아버지는 늘 걱정하셨습니다. 정답 없는 세상을 온몸으로 겪으셨기에, 걱정 속에서 신앙과 세상살이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은 늘 계산을 요구합니다. 얻을 것이 있어야 움직이고, 승산이 보여야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계산 밖에 서 계십니다.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이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드러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대로 손익을 따져 움직이는 사람보다, 손해인 줄 알면서도, 아니 손해인지조차 모른 채 그저 그렇게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낸다고 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초대는 바로 그런 이들을 향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에게 배우고, 내 멍에를 함께 메자고 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습니다. 지친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 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하느님의 신비가 있음을 떠올립니다. 손해 보는 자리에서, ‘철부지’라는 말을 듣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더 선명하게 만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희망해 봅니다. 박성재 엠마누엘 신부(살레시오회)/생활성서 2026년 6월호 '소금항아리'에서⠀
6
2026년 6월 12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오늘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고 뜨거운 사랑을 상징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터져버린 예수님의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가슴 속 깊은 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살리는지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과연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며 스스로를 의심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된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잘났거나 수가 많아서 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신명 7,8 참조)입니다. 사랑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증명해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아끼시는 것이며, 예수 성심은 바로 이러한 조건 없는 선택의 완결판입니다.
요한 사도는 신앙의 정수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하느님은 사랑을 단순히 소유하신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외아들을 속죄 제물로 보내셨고,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온 인류를 씻어내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게 되며, 예수 성심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뜨거운 교과서가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성과를 내고 완벽해 지며 남보다 앞서라고 다그치지만, 그 무게에 짓눌린 우리를 향해 주님은 다정히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심장 곁을 내어 주십니다. 그분 곁에서는 나를 증명하거나 잘 보일 필요 없이, 그저 주님의 심장 박동에 내 호흡을 맞추며 쉬기만 하면 됩니다. 혼자 메는 짐은 고통이지만,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메는 멍에는 기쁨과 가벼움이 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나는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려 애쓰다 영혼이 지쳐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또한 나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내 곁의 지친 이들에게 따뜻한 쉴 곳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창에 찔려 열린 예수 성심의 틈은 우리를 향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곳은 세상의 비난이 닿지 않는 피신처이자 상처 입은 영혼이 새살을 돋우는 치유의 방입니다. 오늘 하루, 복잡한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사랑한다, 내가 너를 안다, 여기서 쉬어라"라고 속삭이시는 주님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지극히 온유하신 예수 성심이여, 저희의 마음을 당신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 지치고 병든 저희 영혼이 당신 곁에서 참된 안식을 얻게 하시고, 당신께 받은 그 뜨거운 사랑으로 저희 또한 세상을 치유하는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7
우리가 무언가를 증명해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아끼시는 것이다. 이제 알겠다. 요한 사도는 신앙의 정수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하느님은 사랑을 단순히 소유하신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 이신 분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외아들을 속죄 제물로 보내셨고,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온 인류를 씻어내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게 되며, 예수 성심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뜨거운 교과서가 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심장 곁을 내어 주십니다. 그분 곁에서는 나를 증명하거나 잘 보일 필요 없이, 그저 주님의 심장 박동에 내 호흡을 맞추며 쉬기만 하면 됩니다. 혼자 메는 짐은 고통이지만,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메는 멍에는 기쁨과 가벼움이 됩니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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