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5월31일)
1
우리 모두는 불안하다. 인문 일지는 그 불안과 싸우는 격전 장이다. 내 <인문 일지>는, 배수아 작가의 <<불안의 서>>에서 아름답게 번역한 말을 빌려 쓰자면, "세상의 모든 책은 여기 우리가 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한 기록" 이다. "위대한 책이 말한다. 우리는 존재했다고"(페르나두 페소아, <<불안의 서>> 배수아 역)
<<주역>>이 말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고 강기진 선생은 말했다. 나도 동의한다.
§ '유부(有孚)', 하늘의 뜻을 믿는다는 것.
§ '유유왕(有攸往)', 하늘의 뜻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이를 구체화하는 것,
§ '정(貞)', 길흉의 질곡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매일 펼쳐지는 다양한 고통의 순간, 변칙과 예외, 본질이 아닌 것은 언제든 지나가고 원칙과 영원의 추세만이 남는다. 그 믿음이 오늘 하루 나의 마음과 태도가 결정되고 그 결정이 나의 미래를 이루는 과거를 결정할 것이다. 불안해 할 필요 없다. 불안은 흔들의자와 같다. 당신이 뭔가를 하도록 만들지만 아주 멀리 까지 데려다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안도 꽃인 것을/이규리
누가 알기나 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것을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죽고 싶다 할 때마다 조마조마 꽃이 피었던 걸
불안으로 한 아이를 낳고
불안으로 젖을 먹이고 몸을 씻기는 동안
불안 속에서 꽃이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 오래 있으면
기막히게 불안해도 쾌감이 있다는 걸
아이가 젖꼭지를 깨물었을 때라 할까
아니면 불륜, 불법, 불신, 불가능의 한 때라 할까
불안으로 시험을 치고 낙방을 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고
그때마다 불안의 꽃이 피었던 걸
그 다음 시절이 일러주었네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말해도 될까
눈부신 구름 꽃 바람 꽃
비가 되었던 물의 꽃
꽃은 불안을 알지 못하지만 불안은 꽃을 알아보더군
천 날 만 날 내일이 불안하고 휴일이 불안하고
지나온 길
그 불안으로 꽃을 피웠으니
여기 이 꽃 무덤들, 이 불안의 무게들
2
불안한 시대를 건너기 위해 나만의 안전지대를 찾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매일 한 개의 사과를 먹는 일이든, 만 보씩 걷는 일이든, 환경보호 단체에 참석하는 것이든 상관없다. 문제는 극단에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다. 육식하는 사람을 혐오하거나, 타 종교를 이단이라 배척하고, 운동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식 말이다. 사람마다 보호색은 제 각각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오독하는 확신범들이 많을수록 오해는 이해의 강에 이르지 못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여야, 타인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 길이 불안 사회를 넘는 거다. 불안 사회일수록 내가 빠진 세계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자신이 불안정한 존재로 느끼기에 자신만의 안전한 지대로 들어가,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그리고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은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는 거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건 불행이 아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불행'이다. 예측 불가능성은 인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일관되지 않은 불안정한 부모의 애정이 아이의 내면을 망친다는 건 심리학계의 정설이다. 저 출산의 기저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지금 ‘일 한다'는 것은 곧 ‘새로 배운다'는 의미와 동일 해졌다. AI 같은 기술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과거에 익힌 것들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 탓에 현대인들은 변화의 불안을 견디기 위해 특정 생활 방식, 즉 루틴에 집착하는 경향이 커졌다. 통제를 통해 안정을 얻기 위한 것이다.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에서 악셀 하케는 “어떤 이들은 영양 섭취 면에서 극단적인 방법만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 믿는다. 정치적 올바름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언어에 엄격한 법칙을 정해 놓고 이를 지키려 한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불안정한 존재로 느끼기 때문에 안전하고 확실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운동 중독, 채식주의, 외국인 혐오나 정치인 팬덤 같은 사회 현상을 이해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채식주의자 친구가 비건이 된 건, 사람에게 갈 곳 없던 마음이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했기 때문이고, 이민을 간 한 친구는 언어와 문화 차이 때문에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그때 그녀를 지켜준 건 방과 후 특별활동이었던 수영이었다고 한다.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물살을 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는 것이다.
진화 심리학은 불안이란 제거 대상이 아니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보장치라고 말한다. 인지과학은 불안은 뇌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생각과 사실을 분리하는 길로 안내해 준다. 그리고 불교는 사성제, 즉 고집멸도의 진리를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욕망과 생각의 과잉을 끊어내야 한다고 했다.
3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게 너무 많이 투사해 지나치게 아이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진로를 몰아붙이면 후회한다. 언젠가 농부가 파를 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내 짐작과 다르게 땅속 깊이 심지 않고 적당히 흙을 덮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어떤 파들은 저러다 뽑히지 않을까 싶게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하지만 농부가 말하길 이렇게 심어야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비바람을 맞으며 굵은 대파로 쑥쑥 큰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 가? 비가 오면 우산이, 햇빛이 쏟아지면 양산이 되고 싶은 애틋함은 때로는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편에서 필요하다고 믿는 것'으로 뿌리내리기 쉽다. 하지만 온실의 적당한 온도와 습도 속에서 자라난 화초는 약하다. 폭우 후 땡볕 같은 방황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뜨거운 여름을 이겨낸 포도는 기가 막히게 달기 때문이다. 때로는 잘못 들어선 길이 새로운 지도를 만든다. 사랑이 과하면 다정도 병이 된다.
현대 사회의 위기는 '마음'의 위기이다. 왜냐하면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 사회 환경의 변화와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물질만능주의는 우리를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체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좋다고 평가하는 것을 쫓으면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진정한 자기'가 실종된 삶을 산다.
니체와 장자의 중요한 가르침은 남의 호흡에 끌려 다니지 말고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남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곧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야말로 함께 있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당연히 마음이 아프다. 나도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을 했다. 한동안 힘들었지만, 그 상실을 극복한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고 부터 이다. 그 방법을 되찾은 것은 매일 아침 <인문 일지>를 쓰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실 후 마음이 아팠던 것은 많이 사랑해서 괴로웠던 것이 라기보다는 많이 의지 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나 자신의 '자기 애'를 굳건히 지키면서 상대를 사랑했더라면 기대에서 오는 상실감이나 의존에서 오는 허전함은 없었을 것이다.
4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기쁠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사랑과 지혜
사랑이 지혜를 낳는 것이지,
지혜가 사랑을 낳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하면 깨닫는다.
승자 독식의 갈등과 탐욕이 가득한 사회에서
우리가 희망을 품고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은
곳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힘든 이들과 나누며 사는
선한 이웃들의 사랑 때문이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이웃의 어려움과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측은지심,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나눔이
차이의 경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 된다.
사람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은
오직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꽃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사랑하여 야만
한 사람의 삶의 열매가 맺는다.
그것은 자기 것을 나누면서부터 시작된다.
나눔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내리는 특혜가 아니다.
우리는 차별과 억압으로
불안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고자
나눔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근원에서
발원하는 연민과 사랑의 실천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형을 이루는 일이다.
꼭 '돈' 만으로 나누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재칠시는
온화한 얼굴과 눈으로 마주 대하고
이웃의 처지를 내 일처럼 생각하며,
위로하는 힘이 돼 주는 말을 건네고,
정성 어린 손길과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아픔을 덜어내고 기쁨을 주는 나눔을 말한다.
한마디로 물질 없이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마음이다.
5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로 <요한 3,16-18>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나이되 너이고
너는 너이되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에게 스미고
너는 나에게 스미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를 너에게 건네고
너를 나에게 건네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너를 나처럼 보듬고
나를 너처럼 보듬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만큼 있고
너는 나만큼 있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처럼 있고
너는 나처럼 있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는 너와 다르되 같고
너는 나와 다르되 같으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와 너 둘이되 하나이고
너와 나 둘이되 하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희망으로 오직 희망으로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6
가장 소중한 것, 유일한 것을 내어주는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2026/5/31/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요한 복음 3장 16-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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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고도 신비로운 사랑
우리말 성경이 아닌 그리스어 성경에서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로 시작하지 않고 ‘후토스’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너무나’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런 방식으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합니다. 즉, ‘외아들을 내주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로 해석되는 것이지요. 외아들은 가장 소중하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방식은 다름 아닌 가장 소중하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존재마저 내어주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사랑입니까?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가 싶어 무척 뭉클하고 벅찬 마음이 됩니다. 더구나 이 사랑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제외되는 이 없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내가 좋아해서, 나를 잘 따라서, 가족이어서, 친구여서, 우리 성당 사람이라서 등 경계선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어주는 하느님 사랑은 대상마저 한계가 없이 ‘누구나’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목적입니다. 믿는 이들 중에도 심판에만 귀 기울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판으로 겁을 주는 목자와 심판을 피하려고 믿는 신자는 모두 하느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멸망을 피하려고 무서워 떨면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이 사랑에서 떠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한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 놀랍고도 신비로운 이 사랑 안에 한껏 머무는 하루를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김희경 성심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생활성서 2026년 5월호 '소금항아리'에서⠀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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