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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늘 함께 온다.

370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5월30일)

1
어제 오전에 <<주역>> 함께 읽기를 하다가, "미유여야(未有與也)"라는 말에 꽂혀 오랫동안 사유를 했다. "유여(有與)"라는 좋은 말을 배웠다. 그리고 안도현 시인의 <배경이 되는 기쁨을> 소환하여 읽었다.

"유여"는 <산지 박> 괘의 두 번째 효에서 나온다. "剝牀以辨(박상이변)이니 蔑貞(멸정)이라 凶(흉)"이고, 공자는 "未有與也(미유여야)"라는 말을 쓴다. 침상의 모서리가 문드러진다. 바름이 무너지니 흉하다. 서로 손잡고 함께 있을 수 없다. 공자는 이런 상황이 된 이유를 함께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첩은 양쪽 날개가 있어야 상판과 다리를 연결할 수 있다. 한쪽만 있어서는 원하는 두 물체를 연결할 방법이 없다.

나는 여기서 주변에 막 깍여나가며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가 어쩌면 "배경이 되는 기쁨"을 만끽할 때가 아닐까? 그렇지만, <신지 박> 괘의 '초육'부터 '육사'에 이르기까지 효의 흐름을 통해 우리는 재앙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징조를 보이며 사람이 대비할 시간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한다. 사람의 대비는 작심과 실천이 합해져야 한다는 거다. 징후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느끼면서도 무시한다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대응조차 할 수 없게 큰 몸집의 재앙과 만나게 될 수 있다는 거이다. 그러니까 조짐을 읽으며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한다.

<<주역>>에서는 <건괘>에 나타나는 하늘의 마음을 지닌 군자가, 용(龍)을 품고, 세상에 대한, 선한 삶에 대한 집착으로 물러설 줄 모르는 반면, <곤괘>에 나타나는 땅의 마음을 지닌 군자는, 말(馬)을 품고 훨씬 더 신중하게 세상을 바꾸되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할 일만 하고 물러서는 거다. 그가 물러설 수 있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이어질 가치와 정신을 만드는 데 집중하려는 거다. 이게 땅의 모습이다. 그리고 "평평하기만 하고 비탈지지 않은 땅은 없으며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주역>>  <태괘>에 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 "무평불피 무왕불복(無平不陂, 無往不復)." 위기 없는 인생은 없다. 운명의 속절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계속 전진만 할 수 있는 인생도 없다. 그러니 잘 나갈 때 교만하지 말고 어려울 때 크게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교만, 그건 인간의 속성이다. 어떤 신부님이 말했다. "교만은 인간이 죽은 후 세 시간 뒤에나 죽는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은 그 반대가 된다. 그래 특히 리더는 성찰의 능력과 시간을 갖추어야 한다. "고난 속에서도 정도를 지키면 화를 면할 수 있다." 난 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늘 함께 온다. 오늘도 성찰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교만을 피하고, 배경이 되는 삶으로 살고 싶다.

배경이 되는 기쁨 /안도현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구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별을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함께 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연어떼처럼

2
아침에 내 의지와 관계 없이 알고리즘의 꼬임에 감창옥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가 강의에서 했다는 다음 말 때문이다. "상대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나서서 묻지 마세요."

김창옥은 국내에서 소통 전문가로 손꼽히는 강사다. 원래 전공은 성악이었다 한다. 그런데 발성 강의를 하다가 "진짜 문제는 목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 소통 강사로 방향을 튼 결정적 계기였다고 그는 밝혔다.

강연에서 김창옥이 직접 꺼낸 사례는 구체적이다. 그에게는 가장 자주 밥을 먹고 하루에도 문자를 여러 번 주고받는 절친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 집에는 아이가 없다. 안 지 몇 년이 됐지만, 김창옥은 단 한 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가 없는 건지, 안 낳는 건지, 안 생기는 건지, 그걸 왜 물어봅니까? 상대방이 얘기하기 전까진 묻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발언에 내가 주목한 이유는 단순하다. 실제 우리는 '좋은 마음에서' 한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게 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옥은 한국인이 유난히 타인에 대한 관심이 많고 코멘트를 잘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고 짚으면서도, 그 관심이 때론 상대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관계의 친밀도는 종종 '얼마나 속내를 물을 수 있느냐'로 측정되곤 한다. 결혼은 했냐, 아이는 언제 낳냐, 집은 샀냐, 연봉은 얼마냐. 이런 질문들이 오히려 관심의 표현으로 여겨지는 문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김창옥의 논리는 다르다. 진짜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가 꺼내기 어려운 주제를 굳이 먼저 건드리지 않는 것이 배려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직 정리가 안 됐거나, 이야기하고 싶지 않거나, 혹은 그 주제 자체가 상처와 연결돼 있을 수 있다. 그 침묵을 존중하는 것이 진짜 친밀함의 조건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심리적 경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상대의 '심리적 경계'를 넘으면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선의로 던진 질문이 상대에게는 "왜 아직도 그러냐"는 압박으로 읽힐 수 있다.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나도 그런 경우를 일상에서 자주 만난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들이다. "아직 손주 없어요?", "몸은 좀 어때요?"처럼 배려로 시작한 말이 상대에게 부담이 되는 상황을 매일같이 마주한다. 

김창옥이 강조하는 소통의 핵심은 역설적이게도 '말하지 않는 것' 이다. 그는 여러 강연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매력적"이라고 반복해서 말해왔다. 상대가 꺼내지 않은 주제를 묻지 않는 것, 그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가 아이가 없는 친구에게 수년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던 것은 무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 주제가 얼마나 무거울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일부러 꺼내지 않았던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 태도가 둘 사이의 신뢰를 쌓는 방식이었다는 거다.

3
우리 사회 불안의 서사는 다음과 같다. 어느 자매님이 상담을 청해와서는 아이가 시험을 망쳤다며 어쩌면 좋겠냐고 통곡하듯 말했다. “자매님, 그게 그렇게 울 일인가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은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서 부모 마음을 모르시는군요?” “제가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만 시험 좀 못 봤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니 너무 울지 마세요.” “인생이 끝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요즘 같은 취업난에 어디 취직이나 하겠어요. 취직도 못하는데 결혼은 어떻게 해요. 이 일 저 일 전전하며 혼자 근근이 먹고 살다가 나이 들고 기운 없어지면 일거리도 없어서 지하철에서 노숙이나 하며 살겠죠. 그러다 병을 얻어 죽어도 아무도 찾지 않을 겁니다. 이래도 인생이 끝난 게 아니라고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이어 붙이며 비극 영화 한 편을 만든다. 최악의 경우를 끝없이 상상하며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불안하다. 우리의 삶 자체가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요즘 여기저기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런데 이런 불경기에도 유독 호황을 누리는 곳이 있다. 바로 점집이다. 점쟁이들은 사람들의 불안을 먹고 산다. 삶이 팍팍해 지고 미래가 불안해질수록 사람들은 미래를 확실히 말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나는 점집을 찾는 대신 고전을 읽는다. 고전에서 말하는 지혜가 나를 안온(安穩)하게 한다. 그리고 고전 속의 살아 남은 말들을 갖고 마음 챙김을 한다. 예를 들면, <<주역>>의 <지천 태> 괘의  '구삼' 효사인, "무평불피(無平不陂) 무왕불복(無往不復), 간정무구(艱貞無咎)"이다. 이 말은 '현재는 평평하지만 언덕질 날이 있고,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 어렵고 바르게 하면 허물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평평하다 가도 언덕이 있는 것이 자연의 지세(地勢)이며, 좋은 세상이 있다가도 나쁜 세상이 오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이다. 그러니 태평할 때에 그 태평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어렵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르게 해야 허물이 없다는 거다. 태평한 시절이라고 방심하고 과소비하고 부도덕하게 편히 살려고 하며 퇴폐 풍조로 흐르면 안 된다는 거다. 어려운 시기가 다시 돌아올 것을 염려하여 어렵게 여기고 바르게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면 허물이 없게 된다는 거다.

특히 나는 "간정무구(艱貞無咎)"라는 말을 좋아한다. 평탄하고 태평하던 국면이 위태롭게 기울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며(无平不陂, 무평불피), 떠나가는 것이 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无往不復, 무왕불복).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쇠운의 조짐이 보이는 때에는 그러한 법칙을 전체적으로 조감하면서 간난 속에서도 올바른 미래를 향해 물음을 던져야 한다(艱貞, 간정).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无咎, 무구). '언덕 없이 마냥 평평한 땅이 없고,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거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법화경>>)이 소환된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 온다'는 말이다. 연(緣)에 따라 윤회를 한다는 거다.

하나 더 예를 들면, <<도덕경>>의 제16장에 나오는 다음 말이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라고 한다. 원문은 이렇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다시 마음을 비우고, "오이관복(吾以觀復, 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한다. 나는, 최근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이해가 안 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 해지려고 한다. 특히 "오이관복(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을 소환하며 나를 위로 한다. 세상 모든 이치이다.

사실 점집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신경증적 불안 증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일종의 병적인 불안이다. 반면 정상적인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다. 앞날을 알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불안감을 지니고 있어야 무리하지 않고 조심하며 살아갈 수 있다. 만약 자신은 하느님을 온전히 믿기 때문에 전혀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믿음이 깊다 기보다 현실 감각이 결여된 상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홍성만 신부님 말씀이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신경증 적인 불안이다. 이 증상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 우선 앞날에 대해 최악의 경우만 생각한다. 
§ 또 주변의 조언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 채 스스로 불안을 키우곤 한다. 
§ 심지어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을 때조차 결과를 미리 걱정하는 이상한 습관 속에서 살아간다.

마음 챙김을 하지 못하거나, 고전을 읽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불안은 증폭된다. 
§ 신문이든 TV이든 세상에는 불안을 부추기는 기사들이 넘쳐난다. 
§ 사람들은 불안하니까 더 들여다본다. 
§ 그렇게 보고 있노라면 가슴 밑바닥에 숨어 있던 불안이라는 녀석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그것을 붙들고 이리저리 만지다 보면 불안은 점점 더 커진다. 
§ 그러다 감당이 안 되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 자신의 불안을 털어놓는다. ‘내 걱정이 나만의 생각은 아니구나’ 하고 확인 받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게 과연 무엇인가? 결국 남는 것은 불면증과 우울증, 그리고 불안장애 뿐이다.

이럴 때, 홍 신부님이 제안하는 방법이 좋다고 본다. 불안을 떨쳐내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겸손이라는 거다. 불안은 결국 미래를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데 그렇게 되지 않아 생기는 교만한 감정이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 좌절하고 불안에 압도당할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늘에 맡길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거다.

하늘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을 가르쳐 준다. 나는 우주의 원리 그리고 하늘을 믿는다.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는 "극즉반(極即反)"을 믿는다. 정점에 도달하면 내려올 일 밖에 남지 않고, 반대로 최저점으로 추락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도 있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는 거다. 난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믿는다.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정점에 달하면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 나는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는다. 

하늘이 충분히 어두워야 별이 보인다. 어둠이 짙어야 별을 볼 수 있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이고, 별이 보이면 날이 곧 밝아온다. 우리는 당장 전개되는 현상에 교만 해지거나 혹은 의문을 품고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거기엔 하늘의 섭리가 있으니 겸손히 그 뜻을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개인의 인생이나 기업, 권력도 마찬가지로 흥망성쇠의 원인과 결과가 있다.

문제는 이 모두가 인간의 눈에는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하는 일은 사람이 보기에 난해하다. 그래서 신의 섭리는 없거나 침묵하고 있는 듯이 비쳐진다. 사람의 손길은 피할 수 있어도 신의 손길은 피할 수 없다. 하늘의 섭리는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는 이렇게 표현했다. “하느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지만 갈지 않는 것이 없다.”

평생 역사를 연구해서 얻은 교훈으로 찰스 비어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꼽았다. 
§ 하늘의 맷돌은 멸망시킬 자에게 권력을 줘 날뛰게 한다. 하늘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의식하지 못한다. 하늘은 오만한 사람을 파멸시키려고 할 때는 먼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권력에 중독되게 한다. 개인이나 국가나 이기적인 생각과 권세욕, 욕망과 교만에 날뛰면 결국 멸망한다는 사실이다.
§ 하늘의 맷돌은 더디게 돌지만 아주 작은 것까지 간다. 하늘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도는 것 같아도 반드시 미세한 부분까지 분쇄 시킨다. 하늘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가지만, 마지막에 가서 결국에는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거다.

4
김창옥의 강연 맥락과 일반적인 관계 심리학 원칙을 바탕으로 관계를 망치는 말 습관, 즉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배웠다.
§ 김창옥이 직접 꼽은 1 순위가 상대가 말하지 않은 것을 먼저 묻는 것이다. 아이, 이혼, 병, 실직, 가족 갈등처럼 상대가 스스로 꺼내지 않는 주제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모른 채 "요즘 아이 소식은 요?" "부모님 상태는 좀 어떠세요?" 등의 질문처럼 때로는 배려의 질문이 침범이 될 수 있다. 상대가 말할 준비가 됐을 때 말할 수 있도록 그 공간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게 김창옥이 수십 년 간 강조해온 '진짜 소통'의 출발점이라 했다.
§ 2위는 위로 대신 판결을 내리는 말로  "그건 네 잘못이야" 이다. 힘든 상황을 털어놓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해결책이나 평가가 아니라 수용이다. "그러니까 네가 먼저 그러지 말았어 야지" "그건 네가 좀 잘못한 거 잖아" 등의 평가는 상황의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는 말은 고백한 것에 대한 후회를 남긴다. 이후에 그 사람은 다시 속내를 꺼내지 않는다.
§ 3위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말로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다.  오랜 관계에서 자주 나오는 이 표현은 상대의 거절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무력화하는 데 쓰인다.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따져" 라는 말은 친근 함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세운 경계를 무시하겠다는 선언이다. 관계가 오래됐다고 해서 상대의 불편함을 들어줄 의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 4위는 상대의 선택을 판단하는 질문으로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이다. 직업, 거주지, 생활 방식에 대해 "왜 아직도 그 일 해요?", "왜 이사 안 가요?", "왜 그렇게 살아요?" 처럼 상대의 현재 상황을 문제로 규정하는 질문이다. 이런 말에는 '지금 네 상태는 잘못 됐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상대가 그 상황에 있는 이유는 수십 가지일 수 있고, 대부분 이미 본인도 고민 중이다. 외부에서 다시 짚어주는 것은 자극이지 도움이 아니다.
§ 5위는 "요즘 살쪘네요" 같은 외모 언급이다. 이것은 칭찬도 독이 된다. 외모에 관한 말은 친한 사이일수록 더 함부로 나온다. "살쪘다", "늙어 보인다", "피부가 안 좋아졌다"는 발언은 아무리 걱정의 뜻을 담아도 상대에게는 결함을 지적 받은 것으로 인식된다. 특히 중 장년 이후에는 체형이나 외모 변화에 이미 본인도 예민해져 있는 시기다. 상대가 먼저 언급하지 않으면 외모 관련 코멘트는 꺼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니까 나도 다음과 같은 말들은 정말 듣기 싫다. "요즘 아이 소식은 요?", "재혼했어요?", "그건 네 잘못이야",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왜 아직도 그 일 해요?", "왜 그렇게 살아요?", "살쪘다", "늙어 보인다", "피부가 안 좋아졌다" 등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대화 습관을 바꿔야 할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화 습관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좋은 지혜이다. 말 한마디를 바꾸는 것 만으로 관계의 온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음 내용들은 일상 대화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천 항목들이다.
§ 질문 전에 3초 멈추는 습관을 들인다. 말이 입에서 나오기 직전, '이 질문이 상대를 위한 것인가, 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인 가'를 짧게 따져보는 것 만으로도 불필요한 침범을 상당수 막을 수 있다.
§ "어떻게 됐어?"보다 "잘 지내?"를 먼저 쓴다. 전자는 결과를 요구하는 질문이고, 후자는 상태를 묻는 질문이다. 상대가 꺼내고 싶으면 스스로 이어간다. 결과를 먼저 요구하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황을 억지로 꺼내게 만든다.
§ 위로할 때는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네가~", "아마 상대방이 ~"처럼 상황을 분석하고 원인을 짚는 말 대신, "많이 힘들었겠다"처럼 감정을 받아주는 말로 끝내는 연습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는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들어 주길 바란다.
§ 침묵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대화 중 어색한 공백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그 질문이 민감한 주제로 흘러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침묵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관계를 지키는 기술이다.
§ 조언이나 충고는 요청 받았을 때만 한다. "내 생각엔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 데"라는 말은 상대가 먼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물었을 때만 꺼내는 게 원칙이다. 요청 없는 조언은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평가처럼 들린다.

5
연중 제8주간 토요일로 말씀은 <마르코 11,27-33>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이다.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그럼으로 그럼>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
그럼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럼으로
말하여지는
그럼으로
말하는
그럼
이룸으로
말할 수 있는
이룸으로
말하여지는
이룸으로
말하는
이룸
믿음으로
말할 수 있는
믿음으로
말하여지는
믿음으로
말하는
믿음
희망으로
말할 수 있는
희망으로
말하여지는
희망으로
말하는
희망
사랑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랑으로
말하여지는
사랑으로
말하는
사랑
기쁨으로
말할 수 있는
기쁨으로
말하여지는
기쁨으로
말하는
기쁨
나눔으로
말할 수 있는
나눔으로
말하여지는
나눔으로
말하는
나눔
섬김으로
말할 수 있는
섬김으로
말하여지는
섬김으로
말하는
섬김
살림으로
말할 수 있는
살림으로
말하여지는
살림으로
말하는
살림
그럼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럼으로
말하여지는
그럼으로
말하는
그럼

6
예수님, 저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저의 약함을 통해 당신 사랑의 힘을 드러내소서.
2026/5/30/연중 제8주간 토요일
마르코 복음 11장 27-33절: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약한 자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힘
원목 소임을 하는 저는 가톨릭 재단이 아닌 병원에서 일하다 보니 달가운 존재가 아닐 때가 있습니다. 환자들이야 저를 찾고 반가워하지만, 직원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대부분은 긍정적이지만, 면회가 안 되는 병동을 돌아다니고 환자에게 먼저 다가가 함께 기도하다 보니 특혜를 받는 사람으로 보기도 하고, 더 이상의 의료행위가 필요 없는 임종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 중환자실에 들어가 기도할 때면 조금은 성가신 존재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와 비슷한 질문을 하거나 그런 기색을 내비칩니다. 하지만 저는 묵묵히 제 일을 할 뿐입니다. 다행인 것은 제가 해야 할 대답을 환자들이 대신 해주는 것이지요. 대화를 통해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게 된 환자, 기도를 통해 용기와 희망을 되찾은 환자,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족의 죽음을 서서히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보호자들의 모습이 가장 훌륭한 대답이 됩니다. 복음에 나오는 ‘권한’은 하느님의 능력이며 이는 강제하거나 위력을 과시하는 힘이 아닙니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힘, 그래서 늘 약한 자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힘입니다. 열심히 했으니 내 마음대로도 할 수 있다 싶고 공들인 만큼 내 몫도 있다 싶을 때,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게 됩니다. 김희경 성심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생활성서 2026년 5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5월 30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부활 시기를 지나 연중 시기의 첫 주간을 마무리하는 토요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유다 서간은 짧지만 강력한 권고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때로는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목소리들이 들려오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는 명확합니다.
유다 서간의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유다 20).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외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초입니다. 우리 삶의 기초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세상의 정보나 유행 혹은 나의 감정이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거룩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기초가 단단할 때, 우리는 어떤 시련의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영적인 집을 가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내 안의 영적인 집을 잘 가꿀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는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내 욕심을 하느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숨결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버겁다면 성령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둘째,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십시오.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 밖으로 자꾸 나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며 따져 묻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기초를 닦기보다 권위와 논쟁에만 몰두했습니다. 반면, 유다 서간은 우리에게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유다 22)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신앙의 권위는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해 주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권한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입니다.
한 주간을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가꾸어 왔을까요? 혹시 복음의 권력자들처럼 남을 판단하고 내 권한을 주장하는 데 시간을 쓰지는 않았나요? 주님은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기초 위에 서 있기만 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흠 없는 사람으로 만드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기쁘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영혼의 정원을 성령의 기도로 가꾸어 봅시다. 그리고 나보다 더 흔들리는 이웃이 있다면, 비난의 목소리 대신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봅시다. 그것이 바로 한 주간을 거룩하게 마무리하고, 내일 맞이할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로 나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준비입니다.
“주님, 저희가 썩어 없어질 세상 지식이 아니라 거룩한 믿음 위에 인생을 설계하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 안에서 저희 자신을 지키며,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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