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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역사의 천리(天理)는 단 한 치의 망령됨(妄)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대전_신성동_와인숍_바 #뱅샾62 #천뢰_무망_괘 #별_헤는_밤 #윤동주 #삶에_필요한_두_가지_능력

369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5월27일)

1
지난 5얼 26일에 다 하지 못한 <천뢰 무망> 괘 이야기를 좀 더 한다.

"무망"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망령됨, 허황됨이 없는 것'이다. 주희는 "무망"을 "실리자연(實理自然, 인위적 조작을 떠나 있는 천리의 실상)"으로 풀었다. '실제의 이치 스스로 그러하다'는 거다. 은 우주의 만물과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근본적인 이치(理)가 인위적이거나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고 운행됨을 뜻한다. 그러니까 <천뢰 무망> 괘는 '인욕(人欲)의 얕은 잔대가리를 부수고 무망(无妄)의 우레를 내려라'는 메시지이다. 역사의 천리(天理)는 단 한 치의 망령됨(妄)도 결코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기>>에서는 "무망(無妄)"을 "무망(毋望, 无望)"으로 쓰였다. 그것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无妄"과 "无望"은 그 뜻이 상통한다. 

주역의 <서괘전(序卦傳)>은 역사의 준엄한 법칙을 이렇게 갈파한다. “정도(正道)가 회복되는 복(復)이 이루어지면 망령됨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복괘 다음을 무망(无妄)괘로 받는다(復, 則无妄矣, 故受之以无妄).” "망(妄, 망령됨)은 자만에 빠질 때 나온다. 송대의 철학자 정이천(程伊川)은 천뢰무망(天雷无妄)괘를 두고 벼락같이 일갈했다. “진(震)은 움직임이니, 그 움직임을 하늘로써 하면 무망(无妄)이 되고, 그 움직임을 인욕(人欲)으로써 하면 망(妄)이 되는 것이다(動以天, 為无妄; 動以人欲, 則妄矣).” 주역 대상전(大象傳)은 “하늘 아래 우레가 치는 것, 그것이 만물에게 허망하지 않은 진실의 계기를 부여한다(天下雷行, 物與无妄)”고 선언했다. 얕은 꼼수가 아니라, 망령된 시기에는 삿됨을 부수고 천리를 바로 세우는 무망(无妄)의 무서운 우레가 필요하다. 

<천뢰 무망> 괘가 <지뢰 복> 괘 다음에 오는 이유는 "복(復, 정도에의 복귀)이 이루어진 사회일수록, 그 '이룸'이라는 것이 매우 일천하고 또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 진실 무망한 역사적 프로세스의 '다짐'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복(復)"은 대세(大勢)이고, 천리(天理)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복"의 운세를 탄 지도자들은 그 대세를 이어 나가고 굳히기를 "무망(無妄)"으로 해야 한다.

"석과불식(碩果不食)"으로 살아남아 새로운 세상을 여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단순히 사회를 새롭게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그 과정을 거치며 의식이 진화를 경험한다. "무망"은 그렇게 새로운 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원한 윤동주는 삶 자체가 "무망'과 이어져 있다고  김재형은 <<시로 읽는 주역>>에서 말하였다. 윤동주 시인을 미 <천뢰 무망> 괘와 연결하여 읽으니, "무망의 의식 단계"에서 윤동주가 썼던 <별 헤는 밤>이 다시 읽힌다. <<주역>>에서 <복(復)괘>는 동지(冬至)라는 상징을 통해 회복의 의미를 표현한다. 동지가 되면 태양은 3일 동안 깊은 잠을 잔 뒤 다시 길어지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와 예수의 3일 간의 죽음은 동, 서양이 함께 공유하고 있던 동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회복의 시간은, 마음의 회복 뿐 현실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어 있는 음력 11월이다. "무망'의 마음은 이런 차가운 현실 속에서 <박괘>와 <복괘>를 지나며 자기 속에 있는 빛을 찾아낸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다. 

별 헤는 밤/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 외다.

2
<<주역>>에서 "무망(無妄)"은 하늘 아래 우레가 울리는 상으로, 뇌성벽력(雷聲霹靂, 우레-천둥 소리와 벼락)이 일어날 때 누구나 하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반성하듯이, 천명(天命)에 따라 정도(正道)로써 행해 나아가면 "무망"이 된다는 거다. "무망(無妄)"에는 하늘과 같이 무사무위(無事無爲, 마음에 거리낌이나 억지스러운 일이 없고, 인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는 상태)의 마음을 갖추고 특히 '여색(女色)'을 멀리하여(妄- 수신에 힘쓰지 않고 여색을 가까이 하면 패가망신한다) 본성 그대로 행해 나아가는 뜻이 들어 있다. 효사에서 양이 음을 만나는 것을 재앙으로 보아 흉하게 말하였다.

<천뢰 무망> 괘의 효사들을 정리하면, 
- '초효'는 처음으로 무망을 이루는 순진한 자리이기 때문에 무망 그 자체로서 어디를 가도 길하고 뜻을 이룬다. 
- '이효'는 음이 음의 자리를 얻고, 중을 얻어 중정하므로 공연 욕심을 부리지 않아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이외로 거두는 바가 있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게 되는 식으로 욕심 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무망'의 진수가 여기에 있는 거다. 
- '사효'는 어떤 사람이 어느 마을에 소를 메 놓고 잠깐 볼일을 보고 온 사이에 지나가던 사람이 그 소를 끌고 가버렸는데, 그 소이마는 다짜고짜 마음 사람에게 소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니까 소를 끌고 간 사람 따로 있고 소 잃은 사람 따로 있고, 애매하게 당하는 사람 따로 있는 거다. 세상은 이렇게 무망중에 "비무망"의현실도 일어난다.
- '사효'는 대신의 자리이므로 국민에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일관성 있게 무망만을 견고히 지켜야 탈이 없다.
- '오효'는  무망중에 난 병이므로 약을 쓰지 말고 정신을 단정히 하면 치유된다.
- '상효'는 극도로 망동한 자리이므로 궁할 대로 궁 해져서 재앙만 남는다.

3
모든 삶은 풀어야 할 숙제를 안고 태어난다. 그 삶의 숙제를 잘 하려면 우선 다음 두 개의 힘을 기르고, 그 힘으로 일상을 영위하면 된다. 개인적인 철학이다. 다시 말하면, 삶에 필요한 두 가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다. 
§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  
§ "자신과 이웃, 더 나아가 낯선 자와 원수까지 사랑하며 살아갈 힘".

이어지는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첫 번 째로, "자기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기꺼이 제 스스로 해결하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필요한 능력을 다음과 같이 나열해 볼 수 있다.
§ 한마디로 제 삶의 주인이 되어 그 주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다. 
§ 그것은 때로 도전과 역경 앞에 바위처럼 맞서는 용기와 내면의 힘을 갖추는 것이지만, 
§ 한편으로는 겨울을 만나는 독사처럼 물러설 줄 아는 지혜를 포함하고 있는 힘이다. 
§ 또한 필요와 상황에 따라 내어줄 것을 내주면서 협력하고, 홀로 만의 문제가 아닐 경우에는 연대를 이끌어내고 기꺼이 연대할 수 있는 관계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은 온전한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두 번 째로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 '측은지심(惻隱之心)' 이다. 즉 사랑, 자비라는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결여되면 자신이 준 것과 받지 못한 것에만 집착하게 된다. 이런 피해의식이 방어기제로 작동하면 '측은지심'이 사라진다. '측은지심'이 사라지면, 이런 시스템에 동의하게 된다.
§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당연시하기 때문에 무한대의 빈부의 격차를 인정하는 신자유주의에 동의하게 된다.
§ 자본주의가 창출할 수 있는 최악의 버전은 기본적으로 상위 1%를 위한 하위 99%를 착취하는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이 배제된 이념이자 체제이다. 체제의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측은지심'이 있어야 한다. '측은지심'을 현대식으로 말하면 '공감능력' 이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말하면 '사랑'이다.  몇 일전부터 <인문 일지>에서 말하고 있는 '거꾸로 사랑'까지 포함한다. 우리는 사랑할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는 조금만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는데 늘 후회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주장하는 사랑, 믿음 그리고 소망 가운데 가장 으뜸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따뜻함이다. 사랑은 불이다.  이 우주의 원동력도 사랑이다. "사랑이 세상을 움직이며, 사랑만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동력입니다"(김수환추기경). 사랑의 힘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내가 물질 뿐만이 아닌 마음으로, 삶으로, 타인을 섬기는 도구가 되어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 힘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매너의 부재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변에서 ‘꼰대’들이 많아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꼰대’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다른 사람을 내 몸같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고리타분한 어른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를 ‘겉늙은 녀석’, ‘애어른 같은 녀석’이라고 부르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꼰대’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꼰대’들의 특징은 공감능력의 부재로 인한 소통 장애자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만든 세상 속에 갇힌 채 다른 사람의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주 하는 말은 ‘난 그러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해봐서 안다’ 등이다.

4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기분이 좋은 것도 중요하다. 미래에 대해 설렘이 없는 경우,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어 막막하게 느끼는 고등학생에게 하는 오은 시인의 다음 말에서 나는 어떤 통찰을 보았다.  “그래서 저는 하루에 하나씩 뿌듯한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뿌듯함은 기쁨으로 벅찬 상태지만, 당시의 나는 그 기준을 낮추자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말하기, 급식노동자 선생님께 잘 먹었다고 인사하기, 사탕 한 봉지를 사서 나눠 먹기, 기숙사 화장실 세면대에 묻은 얼룩 지우기 등 하나같이 그리 어렵지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누가 손가락질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상하죠? 그 뒤로 꽉 막혔던 제 마음에 여유가 생겼어요.”

그리고 오은 시인은 내친김에 아이들에게 최근에 했던 가장 뿌듯한 일에 관해 물었다 한다. 한 아이가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헌혈을 했어요. 시내에 나갔다가 약속 시간이 남아서"라고 말하며 겸연쩍다는 듯 웃는데, 시인은 그 웃음을 어디선가 본 듯싶었다  한다. 그렇다, 다름 아닌 우리의 웃음이었다. 칭찬을 하는 데도, 듣는 데도 서툰 우리다. 더군다나 칭찬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면 도망가고 싶어 지지 않은가? 기대가 없다는 예의 그 아이가 이어 말했다. “친구랑 쿠키를 구워서 동아리 애들이 랑 나눠 먹었어요. 제가 생각해도 객관적으로 맛있었어요.” 그제야 아이가 설핏 웃는다. 

듣고 보니 다 나누기가 더하기가 되는 마법 같은 거다. 여유가 없을수록 나누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떻게 든 일상의 틈을 벌려 좋은 걸 발견해도 좋지만, 그보다는 인사와 웃음과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삶의 여유를 더하는 게 좋다. 어떤 나눗셈은 덧셈으로 되돌아온다. 삶은 나누기가 더하기가 될 때 마법이 탄생한다. 나누기에 제일 좋은 것이 포옹이다. 그 포옹은 100퍼센트 유기농이고, 방부제도 없으며, 돈도 들지 않지만 최고의 치유와 격려의 힘을 가진 행동이다. 세상과 미디어에 만연한 미움과 분쟁에서 멀어져, 서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안아주는 그 포옹은 감동이 뒤따른다.

5
오늘 말씀은 <마르코 10,46ㄴ-52>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 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 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믿는 이가 길을 나선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52)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모질고 거친 소리들에 묻힌
숨죽인 울부짖음을
기꺼이 들으시는 분을
믿는 이가
숨죽인 울부짖음을
기꺼이 들으러
제 가고픈 길을 거두고
들으시는 분을 따라
길을 나선다

제 살길 찾기에 핏 발이 선
차가운 눈길들이 비껴간
볼품없는 몰골을
기꺼이 보시는 분을
믿는 이가
볼품없는 몰골을
기꺼이 보러
제 가고 싶은 길을 거두고
보시는 분을 따라
길을 나선다

곁을 살필 따스함을 잃은
매정한 발걸음들 거슬러
보잘것없는 이에게
기꺼이 멈추시는 분을
믿는 이가
보잘것없는 이에게
기꺼이 멈추러
제 가고 싶은 길을 거두고
멈추시는 분을 따라
길을 나선다

혹여나 귀찮게 엮일까
모두가 스치듯 지나가는
짐스러운 이를
기꺼이 부르시는 분을
믿는 이가
짐스러운 이를
기꺼이 부르러
제 가고픈 길을 거두고
부르시는 분을 따라
길을 나선다

너와 나 애써 가르는
거친 틈바구니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이와
기꺼이 함께하시는 분을
믿는 이가
함께하지 못하는 이와
기꺼이 함께하러
제 가고픈 길을 거두고
함께하시는 분을 따라
길을 나선다

6
예수님께 다가가려는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벌떡 일어나 그분 께로 갑시다.
2026/5/28/연중 제8주간 목요일
마르코 복음 10장 46ㄴ-52절: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멈추지 않았고 막지 못했다
눈먼 거지였던 바르티매오는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그분을 불렀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사람들의 꾸짖음도 예수님을 갈망하는 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큰 외침은 예수님께 가 닿아 결국 그분을 멈춰 세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앞이 보이지 않으니 어려움도 있으련만 주저함 없이 그분께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한 끝에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지요.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는 헤매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그는 그토록 바랐던 예수님께서 부르시기에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그분께 다가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꾸짖음도, 보이지 않는 눈도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바르티매오를 막을 수 없었지요. 보이지 않는 길을, 자신을 질책하는 사람들 사이를 당당하게 지나 예수님께 성큼성큼 다가선 바르티매오를 상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이제 나 자신을 그곳에 세워봅시다. 내가 예수님께 갈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기도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연 그 이유들이 정말로 나를 예수님께 가지 못하도록, 사랑하지 못하도록, 기도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지요. 김희경 성심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생활성서 2026년 5월호 '소금항아리'에서⠀

8
2026년 5월 28일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오늘 복음에는 예리코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눈먼 이, 바르티매오가 등장합니다. 그는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진짜 빛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외침을 들으시고 어둠에 닫혀 있던 그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신앙의 시력이 현재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깊이 묵상해 봅시다.

바르티매오는 나자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주변 사람들이 시끄럽다며 꾸짖고 조용히 시키려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절함입니다. 그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 살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신앙은 체면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섞인 고백입니다. 세상의 소음과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으려 할 때, 우리는 바르티매오처럼 더욱 크게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전부였던 겉옷까지 내던지고 뛰어 일어납니다. 주님은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이미 그의 사정을 알고 계셨지만, 그의 입술을 통한 직접적인 신앙 고백을 원하셨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을 때, 그는 단순히 육신의 시력만을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보게 되었고, 눈을 뜨자마자 길을 따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내 개인적인 소원이 이루어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의 뒤를 걷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우리 역시 과거에는 바르티매오처럼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이들이었으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선포하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가정과 직장에서 어둠에 갇힌 이들에게 빛이신 주님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세상의 비난이나 시선 때문에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멈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주님께 나의 욕심을 보여달라고 합니까, 아니면 주님의 뜻을 보여달라고 청합시다. 오늘 하루, 우리 영혼을 짓누르는 고정관념과 게으름이라는 겉옷을 내던지고 주님께 달려갑시다. 주님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축복과 함께 우리가 걸어갈 길을 밝게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의 소음에 굴하지 않고 당신께 자비를 청하는 간절함을 주소서. 저희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의 길을 보게 하시고,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주신 당신의 업적을 온 삶으로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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