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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369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5월27일)

1
지방 선거로 세상이 온통 몰입하는 동안 오월은 꽃을 남기고 저만치 뒷모습으로 걸어간다. 아침에 떠나가는 오월을 잡고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소중하다  그러니 좋은 사람을 찾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 주고, 좋은 조건을 찾지 말고 내가 좋은 조건이 되는 사람이 되자. 좋은 사랑을 찾기 전에 좋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 주고,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지 말고, 좋은 하루를 만들어보자. 털어서 흠 없는 사람 없다.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다. 장미가 좋아 꺾었더니 가시가 있고, 친구가 좋아 사귀었더니 이별이 있고, 세상이 좋아 태어났더니 죽음이 있네. 살만 하니 떠나는 게 인생 이다. 

오늘 아침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시를 먼저 공유한다. 문정희 시인이 "쓸"을 조형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흥미롭다. 위로는 산 두 개가 겹쳐 있고, 아래로는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 글자다. 산과 강물만 있는 적막 강산의 구도, 그래서 "쓸쓸"인가?  이 시를 소개한 [먼. 산. 바. 라. 기.]님의 글을 공유한다. "인생의 반쪽만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쓸쓸"을 찾아 나서고 싶어 진다. 외로움과 쓸쓸함은 미묘한 어감 차이가 있다. 외로움이 물리적 고독이라면, 쓸쓸함에는 발효된 고독의 뉘앙스가 풍긴다. 외로움이라는 칼로 삶의 껍데기를 벗겨 내면 "쓸쓸"이 얼굴을 내민다. 모든 인생은 쓸쓸하다. 사랑 속에도 쓸쓸함이 숨어 있다. 설익은 감을 씹으면 처음에는 떫지만 자꾸 씹으면 단맛이 나듯이, "쓸쓸"도 그럴 것 같다. 감히 쓸쓸함을 사랑하고 싶어 진다. 빛보다는 그늘에 들고 싶다. 거기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미지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쓸쓸/문정희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 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 글씨로 써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 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이윽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2
지난 5월 24일에 말했던, "공(空)"에 대해 다시 사유하는 아침이다. 불교는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진여(眞如)나 여여(如如)의 경지를 강조한다. 불교는 극단적으로 두 가지 마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집착하는 마음’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 극단적 두 마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삶을 산다.  ‘집착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에 불만족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은 우리의 삶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다는 거다. <<대승신기론>에 이런 문장이 있다. “하나 뿐인 우리 마음에 두 가지 양태, 즉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이 있다.” 이 말은 집착하는 마음도 내 마음이고,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도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진여문"을 '무관심한 마음 혹은 죽은 마음'과는 구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집착이란 자신이나 타인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일 수 있다. 예컨대 외모만 보느라고 다른 모든 가치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망을 통해 존재하는 인연(因緣)의 존재일 뿐이다. "진여의 마음",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란 상대방도 의식하지 못한 그의 모든 가치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다. 예컨대, 외모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가진 나머지 훌륭한 가치들을 돌보지 않기 쉽고, 당연히 그것들은 무관심에 방치된 채 시들고, 마침내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 "진여의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쓸데없는 갈등과 대립도 피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편견을 가지고 어떤 것들을 미리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일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편견 같은 집착을 버려야 그 사람의 정체가 제대로 들어오게 된다. 나나 타인이나 모두 단순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우주에 가까운 수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수많은 특징들은 수많은 인연들 과의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 것, 즉 연기(緣起)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특징으로 하나의 사물을 보는 것이 집착의 마음, 즉 "생멸의 마음"이라면, 하나의 사물을 마치 완전한 하나의 우주인 것처럼 보는 것이 "진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종의 대표자 법장 스님이 <<화엄의해백문>>이란 책에서 “하나의 조그마한 티끌만 보아도 전체가 갑자기 나타나며, 이것과 저것은 서로 받아들이니 가느다란 머리카락 하나만 보아도 모든 사물이 함께 나타난다.”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홀로 앉아 선정(禪定)을 버리지 말고, 모든 일에는 늘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 가는데 있어 우환(憂患 )을 똑똑이 알아, 무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화가 났을 때 화냄을 알아차리고, 생각하는 생각을 알아차리면, 이미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지혜로 더 나아가 깨달어야 한다. 무엇을? 세상은 공(空)이다. 그래 오늘부터 내 호중의 하나를 '지공(指空)'으로 정했다.  뜻은 '늘 이 세상은 공이라는 것을 소환하고 생각 하자'는 거다. '공'은 '순아타'를 번역한 것으로,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본래 없다가 단지 지금 있는 것("本無今有 空卽是色 본무금유 공즉시색")이고, 지금 있음이 지나면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旣有還無 色卽是空 기유환무 색즉시공)을 뜻한다. '공 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상을 가리키는 불교 교리이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이법(理法)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불교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공'은 부처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진리에 기원한다. 일체의 만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 의존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는 내용이다.

3
여백이 사라지는 시대이다. 다 말하지 않고 남겨두는 여백에는 귀를 귀 울이게 하고, 존재에게 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어마어마한 힘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라, 똑 부러지게 충고하는 자들을. 느리고 크게 변할 수 없는 본질과 심성을 지닌 당신을 과거에 그들이 어떻게 좌절 시키고 멈칫대게 했는지를. 지금도 주변의 몇 몇은 그런 사람들이 많다. 너무 쉽게 나에게 똑 부러지게 충고한다.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똑똑한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어떤 상황에서 내겐 불가능한 방식으로 언어를 똑똑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아픈 충고도 많이 듣는다.

시몬 베유의 한 문장이 뒤따라 떠올랐다. “집중은 가장 귀하고 고결한 형태의 관대함이다.” 잊지 말자. 여백과 행간은 인간관계에도 집중하게 한다. 그것은 약간의 조율로 서로를 깊이 알 수 있는 심오한 공간이다. 행간이 없는 관계는 초가공식품처럼 우리를 병들게 할 수도 있다. 행간 속에는 낭만, 관대함, 온정, 자비심 같은 것들이 무한 내재해 있다. 행간을 가지고 말하자. 나부터.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자. 공자가 자신의 습관 위해 말한 "절사(絶四)"가 생각난다. ‘끊을 절(絶)’을 쓰는 ‘절사’는 공자께서 ‘뚝 끊은 네 가지’ 즉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 아침 다시 “의필고아(意必固我)”를 되새긴다. 이 말을 번역하기가 참 어렵다.
▪ 의(意)는 무슨 일이든 확실하지 않는데도 지레짐작으로 단정을 내리는, 사의(私意), 사견(私見)으로 근거 없는 억측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을 갖는다.
▪ 필(必)은 자기 주장을 기필코 관철시키려는 자세로 자기 언행에 있어 반드시 틀림없다고 단정 내리지 않는다.
▪ 고(固)는 융통성 없는 고집, 유연한 관점이 아닌 경직된 틀로 자기의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을 버린다.
▪ 아(我)는 자신을 내세우는 이기적인 것으로, 나를 비우고, 양심이 아니라 욕심을 버린다.

'의필고아'를 이렇게 푸는 사람도 있다.
▪ 의: 현재를 방해하지 마라!
▪ 필: 미래를 기대하지 마라!
▪ 고: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 아: 자아를 내세우지 마라!

나는 이렇게 풀었는데, 오늘 아침 더 좋은 해석을 만났다.
▪ 이런 저런 ‘잡념’ →  억측하지 말자.
▪ 반드시 이러해야만 한다는 ‘기대’ → 독단하지 말자.
▪ 묵은 것을 굳게 지키는 ‘고집’ → 고집하지 말자.
▪ 자신만을 중시하는 ‘아집’ → 자만하지 말자.

억측하여 독단하고, 독단을 끝까지 고집하면서도 자신이 최고라고 자만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독소 덩어리’이다. 독소는 끊어내야 한다. 그래서 공자도 "절사"를 말한 것이 아닐까? 매일 매일 이 네 가지를 놓고 티톡스를 할 생각이다.

여백이 없는 사람은 부풀지 않은 빵과 같다. ‘내가 굶주린 당신을 위해 이처럼 큰 빵을 준비해서 들고 있다’는 투의 말투는 위험하다. 딱딱하고 큰 빵은 몽둥이처럼 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고마운 존재임을 잊지 말자. 이제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충고해주는 이도 귀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여백은 '적정 거리'이기도 하다. 추운 겨울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온기를 나누려 모여들었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서자 서로의 날카로운 가시가 몸을 찔렀고, 아픔에 놀라 너무 멀리 떨어지면 다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적정거리’를 찾아냈다.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딜레마’는 이 적정거리를 잘 설명해 준다. 인간관계도 고슴도치와 다르지 않다. 상대방이 좋다는 이유로, 혹은 가족 및 연인이라는 명목으로 상대의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잦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다정한 간섭이 상대에게는 숨 막히는 구속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의 벽을 너무 높이 쌓으면 극심한 고립과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가족, 친구, 연인, 그리고 직장 동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연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상처의 대부분이 ‘미움’이 아닌, 너무 잘해보고 싶었던 ‘지나친 가까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 삶의 중요한 화두인 적정거리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4
존재보다 쓸모가 우선시되는 세태에서 '공존의 가능성'을 묻고 있는 책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대표 공상과학(SF) 소설가 김초엽의 단편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이다. 

김 작가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이 책에서 "타자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기 전에 이미 우리의 세계에 침투해 있고, 그것을 사후적으로 발견하는 것이 공존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며 "쓸모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내 세계에 침투해 있던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살 것인지, 혹은 내가 바로 그런 존재일 때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거대 기업 '시놉시스'가 로봇과 드론을 앞세워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미래도시. 인간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 시놉시스의 칩을 심고 고용돼 살아가거나, 
§ 미고용 상태로 각자도생하거나. 

쓸모 없어진 기계와 인간은 쓰레기로 뒤덮인 '플라스틱 아일랜드'에서 근근이 살아간다. 통제에 저항하고 시놉시스의 인권유린 현장을 고발하는 '도시탐사대'의 일원인 '타래'는 플라스틱 아일랜드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다. 자연 증식한 해파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 특별한 의지 없이 공중과 지상을 부유하기만 하는 해파리 무리는 어느덧 도시까지 흘러들 정도로 급증하고, 인프라스트럭처들은 마비된다. 쓸모없는 것과의 공존보다 배제에 익숙한 시놉시스가 해파리 제거에 혈안이 된 가운데 사람들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쓸모없다고 밀려난 존재들은 정말 불필요한가?

SF를 현실을 '다르게' 보는 장르라고 정의하는 김 작가는 이번 작품에 무용해 보이거나 쓸모없어 버려진 존재들을 여럿 등장시킨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인공의식을 다룬 <사각의 탈출>, 청소 노동에서 로봇에 밀려나 소외된 채 살아가는 아주머니를 그린 <'끈적이> 등이다. 무용한 존재와의 공존 가능성을 묻는 미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인간이 느끼는 불안의 실체가 되레 선명해 진다. 인공지능(AI)에 대체될 수 있다는 위협이다. 

기능을 박탈당한 인간은 세상과, AI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김자가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잘하거나 잘해왔던 건 대부분 가까운 미래에 AI들이 더 잘하게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인간이 '잘할 수 없는 것'에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복제될 수 없고, '1인칭'이라는 관점을 넘어설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 말이죠. 그래서 타인의 마음과 감정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죠. 우리를 영원히 고독하게 만들지만, 또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애쓰게 하는 인간의 존재 조건이 AI와 다른 '고유성'을 만들어낼 거예요."

5
연중 제8주간 수요일로 말씀은 <마르코 10,32-45>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 출세와 섬김" 이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또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당신께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벗이여, 그리 하게나>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ㄴ)
벗이여
오르려거든
오르게 하게나
벗이여
가지려거든
가지게 하게나
벗이여
채우려거든
채우게 하게나
벗이여
받으려거든
받게 하게나
벗이여
이루려거든
이루게 하게나
벗이여
누리려거든
누리게 하게나
벗이여
살려거든
살게 하게나

6
주님, 오늘 하루도 당신께서 제게 건네시는 잔을 마시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도가 되게 하소서.
2026/5/27/연중 제8주간 수요일
마르코 복음 10장 32-45절: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은총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스승을 따르기 위해 제자가 되는 법인데,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스승님더러 자신들의 뜻을 따라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나의 뜻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바꾸어 기도하는 것과 같지요. 기도를 하면서도 우리의 원의가 다 비워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궁극의 선택을 하느님께 맡겨드릴 때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영광을 받는 길은 영광 받는 사람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 받을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기에, 누군가의 옆을 차지하여 얻어 누리는 것은 결코 내 것일 수 없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기도의 결과는 하느님 아버지의 몫이고 예수님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하시지 않습니다. 단순히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온전히 믿으시기 때문이지요. 아버지께서 마련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은총은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필요한 이들에게 내리는 법입니다. 김희경 성심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생활성서 2026년 5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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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7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 모습을 마주합니다. 한쪽에는 당신이 겪으실 고난과 죽음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엄숙한 모습이 있고, 그 곁에는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라며 세속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음의 길을 향해 걷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권력의 정상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갈망 앞에서 제1독서의 베드로 사도는 우리 신앙의 근거를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은이나 금처럼 썩어 없어질 것으로 구원받은 존재가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명예는 제자들이 탐냈던 것처럼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은 썩어 없어질 씨앗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은 썩지 않을 씨앗입니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르지만 영원히 머무르는 주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높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를 탐내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주님이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는 고난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그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할 수 있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영광에는 동참하고 싶어 하지만, 그 길로 가는 필수적인 관문인 십자가는 피하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영광만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고통에도 기꺼이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의 다툼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려 들지만, 하늘나라의 논리는 그 정반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예수님은 이 말씀의 살아있는 본보기이십니다.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섬김은 나를 낮추는 비굴함이 아니라,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가장 고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가정과 직장,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섬길 때 비로소 썩지 않을 씨앗인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싹트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나는 신앙생활을 통해 세상적인 보상이나 높은 자리를 은밀히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고난의 잔을 함께 마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달콤한 위로만을 찾고 있습니까? 신앙의 성숙도는 내가 얼마나 대접받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를 때 생명을 키워내듯, 하느님의 은총도 교만한 산꼭대기가 아니라 겸손한 골짜기에 고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하루, 내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대접받기보다 먼저 손을 내미는 작은 종이 되어 봅시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이라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는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의 헛된 명예욕과 교만을 꺾어 주소서. 썩어 없어질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영원히 머무르는 당신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게 하시고, 당신이 그러하셨듯 저희도 이웃을 섬기는 기쁨 안에서 진정한 위대함을 찾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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