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5월22일)
1
마음 체크라는 말이 좋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가끔가다 참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겸손이 없어서 이고, 내가 뭐라도 된 사람 마냥 착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빈 자의 인생임을 안다면, 내 모든 것이 감사함 뿐이고, 내 모든 환경에 만족함이 절로 생긴다. 잠깐 왔다 간다는 시인의 말 대로 소풍 온 사람들은 즐기다 가면 될 뿐이다. 나는 마음을 체크할 때마다, 천상병 시인의 시를 암송 한다.
귀천/천상병(1930~1993)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승우는 자신의 소설 <<사랑의 생애>>에서, “진정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삶이 무엇인지 묻고,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건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고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며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아침 사진의 하늘의 보며, 사유한 것들이다. 듣기 싫은 말은 곱씹을수록 화가 나고 흘려 들으면 편하다. 가끔은 들어도 못 들은 척 웃어 넘기는 것이 지혜다. 세상은 내 마음 같지 않다. 나는 나 답게 산다.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좋아하는 사람 만나고, 꼴 보기 싫은 사람 안 만나고, 사람을 억지로 만날 필요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인생이다.
소중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붙들 수 없는 것이 삶의 본질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공(空) 또한 비어 있다는 허무가 아니라, 어떤 것도 영원히 내 것일 수 없다는 맑은 인정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벼워 질 수 있다. "공즉허(空則虛), 허즉무(虛則無), 무즉통(無則通), 통즉영(通則靈). 영즉유(靈則有)"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삶의 지혜에 이르는 사유 체계일 수 있다. 폐친 민웅기의 글을 읽은 것이다. 내일 이 문제는 길게 정리해 볼 생각이다.
그 세계에 이르면, 우리는 내 것이라 우기지 않아도 되고, 더 얻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텍쥐베리는 말했다. 이제는 그 말이 가슴으로 이해된다.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런 것이 아닐까?
§ 곁에 있어 주던 사람의 침묵
§ 말없이 건네던 따뜻한 손
§ 아무 일 없던 평범한 하루
삶의 후반은 더 오르는 시간이 아니라, 덜어내는 시간이다. 쥐고 있던 것을 놓고, 쌓아 두었던 마음을 비우고 남은 것의 고마움을 배우는 시간이다. 하늘은 멀리 있지 않았고, 행복은 도착해야 얻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숨 쉬는 이 순간, 함께 있는 이 사람, 조용히 저무는 하루가 이미 충분한 선물이었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삶을 오래 살아 본 마음에는 또렷이 남는다. 오늘도 무리하지 않는 호흡으로, 붙잡지 않는 마음으로, 잔잔한 평안 속에 머물고 싶다. 늘 그 자리에서.
2
다른 사람의 사정은 깊이 들여다보기 전까진 우리는 결코 잘 알 수 없다. 겸손하게 듣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일상에서 타인에 대한 판단 중지를 하려고 애쓴다. 스캇 펙(Scott Peck)은 "괄호로 묶기"라 했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그를 위한 공간을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 바로 "괄호로 묶기"라며,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확대와 결국에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종교에서는, '판단 보류의 영성'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판단은 보류하고, 사랑은 빨라 하자'는 것이다. '함부로 남을 평가하지 말자'는 말이다. '판단 보류', 나도 이것을 실천하려고 늘 애쓴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부분만 가지고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사람이 다 비슷비슷한 데, 잘나면 얼마나 잘났을까. 인간이 한 세상 사는 동안 서로 연민하며 사는 것 밖에 없다." (이해인 수녀님) 우리는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겸손, 자기의 약점을 항상 자랑할 수 있는 겸손을 가져야 한다. 이 보류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꾸 실수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다 비슷비슷하다. "참 너도 노력하는데 뜻대로 잘 안 되지"라며 연민의 정을 갖는 거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네가 잘나면 얼마나 잘 낫냐" 며 당당해 하는 거다.
그리고 판단 중지하고 진심으로 들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온전하게 집중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그건 진심으로 듣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괄호로 묶는 훈련이기도 하다. 나는 그걸 판단 중지라 말한다. 그것은 가능한 한 말하는 사람의 내면 세계를 그의 입장이 돼서 경험하기 위해, 자신의 편견, 판단 기준, 욕구들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거나 제쳐 두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합일(合一)은 실제로 우리 자신을 확장하고 확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늘 새로운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더욱이 진심으로 듣는 것은 "괄호로 묶기", 즉 자신을 제쳐주는 것이므로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일시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받아 들여지고 있음을 느끼고 듣는 이에게 마음 속에 간직했던 것을 개방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다. 이렇게 됨으로써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고, 사랑의 2인 춤이 다시 시작된다.
정말 자신의 프레임(질문의 틀)이 문제이다. 다음의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본다. 사실은 같지만, 질문의 틀, 즉 프레임을 바꾼 것이다.
§ 기도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는 질문과 담배를 피우는 중에 기도를 해도 되느냐는 질문은 같은 행위를 두고 혀 다른 답을 이끌어낸다.
§ 여대생이 밤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과 수집에 일하는 여성이 낮에는 학교에 다니며 공부한다는 말 또한 사람들의 판단을 정 반대로 바꾼다.
이러한 프레임의 오류는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몇 가지 사례를 나열해 본다.
§ 매일 지각하는 학생을 불성실하다고 단정한 교사는, 병든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요양원에 모셔다 드리느라 늦었던 학생의 사정을 뒤는 게 알고 통렬한 자책에 빠진다.
§ 타고르는 지각한 하인을 해고하려 다가, 딸의 장례를 치르고 왔다는 말에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 알래스카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역시 그렇다. 피투성이가 된 개를 보고 아이를 해쳤다고 단정한 아버지는, 그 개가 맹수로부터 아이를 지키다 죽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고 비통해 했다.
§ 버스 안에서 울음을 멈추지 않던 아기를 향한 승객들의 분노도, 아이 엄마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 공자도 안회의 행동을 오해했다가, 자신의 눈과 생각조차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깨달음을 했다는 말을 제자들에게 전한다.
3
스마트폰 때문에, 어떤 모임이나 회의를 하면, 우리의 정신은 각자의 화면 속 가상 공간에 더 깊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흔하다.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가 소환된다. 인간의 육체는 현실에 있지만, 의식은 전혀 다른 가상 세계에 접속해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또 다른 영화 <아바타(Avatar)>에서는 육체가 있는 곳과 의식이 작동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그 영화들이 상상했던 세계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일상 안으로 들어와 있다.
건축은 오래전부터 공간을 벽과 바닥, 천장으로 정의해왔다. 공간은 물리적 경계에 의해 구획되고, 그 안에서 인간의 행위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스마트폰 이후의 일상에서 우리는 물리적 공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공간에 접속해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일상이 된 지금, 공간의 정의와 그 경계는 급격히 흐려지고 있다. 이제 경계는 눈에 보이는 벽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과 '의식'이 머무는 곳에 새롭게 그어진다.
같은 카페에 앉아 있어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고, 같은 집에 있어도 각자의 화면 속에 머문다. 물리적 공간은 공유되지만, 경험되는 공간은 분리된다. 우리는 한 장소에 모여 있으면서도 함께 있지 않다. 공간의 공존과 의식의 분리가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공간의 정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할까? 좌표와 치수, 재료와 구조로 규정되는 물리적 틀을 넘어, 인간의 인지와 경험까지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공간은 더 이상 '둘러싸인 곳'이 아니라, '의식이 체류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공간이 어디에 놓여 있는 지를 묻고 싶다. 공간의 경계는 이제 벽이 아니라, 화면과 시선, 그리고 마음이 향하는 방향 위에 그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지은 CFA건축사사무소 대표의 글에서 질문을 해본다.
4
진정한 자유는 중력이 있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유는 욕망의 그늘에 머무는 방황일 뿐이다.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야 자유가 방향을 찾아 나선다. 삶이 바람처럼 흐르는 자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깊이로 삶의 중량을 고요히 채워야 한다. 능력의 역량은 키울수록 좋다. 능력의 한계는 자신을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점이 없다고 믿는 완전함은 존재가 아니라 정지일 뿐이다. 삶은 균열이 있어야 틈새로 숨 쉬고, 부족함이 있기에 사람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실패를 길이 끊어진 자리, 추락의 끝으로 만들지 마라. 실패란 그저 다시 일어서기 위해 잠시 호흡을 고르는 시간의 순간일 뿐이다. 호흡이 제자리를 찾을 때 성공은 단전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삶이 무거워질수록 유머를 잃지 말라. 웃음은 가벼움이 아니라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자존감의 증거다. 유머를 통해 희망을 긍정하라. 희망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걷는 용기이며, 반드시 잡을 거란 감각을 품고, 불가능의 벽 앞에서도 한 걸음 내딛게 하는 불꽃이다. 기억해야 하는 건 자신이 삶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서 있을 때, 삶은 흔들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권위를 갖는다. 그 권위는 지구의 중력과 동등한 것이다.
5
부활 제7주간 금요일로 <요한 21,15-19> "예수님과 베드로" 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나 또한 당신처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저를 믿으시기에
당신의 믿음을 저의 믿음에 건네시니
당신을 믿기에
저의 믿음으로 당신의 믿음을 품습니다
저를 희망하시기에
당신의 희망을 저의 희망에 건네시니
당신을 희망하기에
저의 희망으로 당신의 희망을 품습니다
저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사랑을 저의 사랑에 건네시니
당신을 사랑하기에
저의 사랑으로 당신의 사랑을 품습니다
6
우리의 죄로 상처 입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십니다.
2026/5/22/부활 제7주간 금요일
요한 복음 21장 15-19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
세 번의 부인, 세 번의 고백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 번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 대답하지요. 사실 베드로는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먼저 무덤으로 달려갈 수도,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죄책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인간의 나약함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스스로의 응답으로 지난 과오를 씻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배신의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베드로를 염려하시며 세 번의 과오를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덮어버릴 수 있도록, 자신의 한계를 아파하던 베드로가 자신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신 겁니다. 경비병들이 피워 놓은 숯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따뜻한 숯불 곁에서, 이제 베드로는 사랑하겠노라 호언장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사랑과 함께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고백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을 그 누구보다 베드로 자신이 직접 듣도록 하셨습니다. 세 번의 응답은 베드로의 마음속에도 세 번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베드로는 스스로 고백했던 그 목소리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김희경 성심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생활성서 2026년 5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이틀 앞둔 오늘, 전례는 우리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바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배반의 상처를 안고 있던 베드로를 치유하고,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다시 세우는 생명의 부름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총독 페스투스는 아그리파스 임금에게 바오로의 재판에 관해 보고합니다. 세상의 눈에 바오로의 주장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미 죽은 예수라는 이가 살아 있다고 바오로가 주장하는 것”(사도 25,19 참조)이 재판의 쟁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세상의 논리에서 '살아 있는 예수'는 한낱 논쟁거리일 뿐이지만, 바오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감옥과 재판조차 두렵지 않게 만드는 실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는 화려한 말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흐르는 부활의 기쁨과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 숯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아픈 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는 대신, 세 번의 질문을 통해 그가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씻어내 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라는 물음에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자신만만하게 장담하지 못합니다. 대신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님의 아심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주님은 이 겸손한 사랑의 고백 위에 당신의 소중한 양들을 맡기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뛰어난 신학 지식이나 조직 관리 능력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 하나만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고 이웃을 돌보는 유일한 동기는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장차 겪게 될 순교를 예고하시며, 참된 사랑은 주님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오늘 전례력으로 기억하는 '불가능한 일의 성녀' 리타 역시 고통스러운 시련 속에서도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내하며 평화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과거의 실수와 죄책감 때문에 주님께 다가가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완벽한 사람이 걷는 길이 아니라,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믿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의 길입니다. 주님은 오늘 여러분의 약함을 다 알고 계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 베드로처럼 겸손하게 고백해 봅시다. "주님, 제가 부족하지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고, 여러분 곁에 있는 주님의 양들을 돌볼 수 있는 큰 힘을 줄 것입니다.
“주님, 저희의 나약함을 아시는 당신께 저희의 사랑을 드립니다. 배반의 상처까지도 사명의 씨앗으로 바꾸시는 당신의 자비에 의탁하오니, 저희가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의 양들을 정성껏 돌보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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