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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내가 아프면 타인도 그만큼 아프다.

366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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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파국과 공존의 갈림길 위에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은 고조되고, 이란과 미국, 그 이스라엘 사이의 충돌 위험은 여전히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제 질서는 힘의 논리에 의해 작동해왔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 위해 세워진 번영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역사가 이미 보여주었다.

"내가 아프면 타인도 그만큼 아프다."(이재명) 이 문장은 인간 존재의 근원을 다시 묻는 질문이며, 국제 정치의 냉혹한 계산을 넘어서는 윤리적 기준의 복원을 요청하는 말이다. 나는 세속주의 도덕률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런저런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데서 나온다. 살인은 외부로부터 온 금지된 행동이 아니라, 지각 있는 존재에게 막대한 고통 끼치기 때문에 금지한다. 세속주의자들은 딜레마에 직면하면, "신이 뭐라고 명령하는가?"라고 묻는 대신, 관련된 당사자들의 느낌을 신중히 저울질하고 폭넓게 관찰하고 가능성을 검토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타협책을 찾는다. 예컨대, 동성애자 문제를 바라보는 세속주의자들의 의견은 이렇다. 건강한 관계에는 감정적인 차원과 지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영적인 깊이까지 필요하다. 결혼에 그런 깊이가 없으면 불만스럽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정신도 더 성장하지 못한다. 두 남자 끼리는 확실히 감정적, 지적, 영적 욕구를 서로 충족시킬 수 있지만, 염소 같은 짐승과의 관계에서는 불가능하다. 결혼을 일종의 기적적인 의례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호모 사피엔스의 정신은 로맨틱한 결합이 부모의 유대감과 잘 섞이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세속주의자들이 과학적 진실을 중시하는 것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이다. 나의 필요 때문에 누군가 고통받으면 미안한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피해의 기억이 학살의 면허가 될 수 없다.

2
일상에서 주저함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과 불선 말이다. 김기석 목사가 자신의 칼럼, <자기도취에서 벗어나기>에서 한 다음 말을 잘 새길 생각이다. "가끔 내게 존경심을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그 마음을 고맙게 받지만 돌아서는 순간 나 자신에게 말한다. “너 알지. 네 실상을.” 존경받을 만한 것이 내게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해도 우리 속에는 언제든 발화될 수 있는 악의 가능성이 있다. 거칠고 메마른 사막에 비가 내리자 모래 속에 숨어 때를 기다리던 씨앗들이 일제히 발아해 꽃이 피어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지금 우리가 다소 선한 것처럼 보인다면 악이 발화할 계기가 미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에 늘 조심스럽다." 나를 뒤돌아 본다. 내 리듬으로 살아가리라.

그러나 나를 지키는 싸움은 쉽지 않다. 왜?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잘 싸우는 방법은 '싸움의 타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와 갈등을 빚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존재 전체'와 싸운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특정한 생각과 싸우는 것이다. 사람을 싫어할 때도 사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싫어할 순 없다.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장을 싫어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갈등에 대처하기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실제로 적은 내 안에 있다. '나는 결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나르시시즘에서 나온다. 나는 그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없다." "I'm nothing." 사실 나는 싸울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처럼, 원하는 것이 별로 없고, 적으니, 두렵지 않고, 자유롭다. 그래 나는 류시화 시인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그런 사람/류시화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는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이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을 찾아서
지상의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고요 잃지 않는 사람
마른 입술은
물이 보내는 소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 

3
우리들의 삶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 분잡에 휩쓸리다 보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스러지고 살아남기 위한 맹목적 앙버팀만 남는다. 숨은 가빠지고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서슴없는 언행과 뻔뻔한 태도가 당당함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전장으로 변한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법, 종교의 영역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가 있다면 ‘머뭇거림'이 아닐까? '머뭇거림'은 다음을 내포한다.
•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는 겸허함, 
•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

모든 틈은 깨진 상처인 동시에 빛이 스며드는 통로인 것처럼, 머뭇거림은 우유부단(優柔不斷) 함처럼 보이지만 나와 타자가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머뭇거림이 사람을 자기 초월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세상의 어떤 이론도 지혜도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에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만 근사치일 뿐이다. ‘알 수 없음'이야 말로 생명의 실상이다. 여기서 경외가 시작된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결국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허세 부리려는 욕구에서 해방된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평화가 시작된다.

4
이런 이야기들을 말하면 사람들은 비웃는다. 재미없다고, 그리고 글이 길다고. 원래 노자도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말할 수 없다." <<도덕경>> 제41장에 나오는 말이다. 

上士聞道(상사문도) 勤而行之(근이행지): 훌륭한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동에 옮기고
中士聞道(중사문도) 若存若亡(약존약망): 중간치기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며 의심하고, 
下士聞道(하사문도) 大笑之(대소지): 하류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不笑 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 : 하류 사람들이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각자 자신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그 구속을 풀어야 '도'를 알고, 자유로울 수 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하면 믿지 못하는 것은 장소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비에게 겨울철의 눈보라를 말하면 믿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구속 때문이다. 극히 편향된 지식인에게 도를 말하면 비웃는 것은 가르침의 구속 때문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는 것은 귀의 구속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은 눈의 구속 때문이다. 닫고 싶은 것만 담으려 하는 것은 마음의 구속 때문이다.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에, 진리는 역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상적 상식인으로서 이렇게 한 가지 사물이 정반대되는 두 특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식적인 이분법의 단선적인 사고 방식에 지배 받고 사는 우리로 서는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소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크게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했다. 정확한 통찰이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이 아니라는 뜻이고, 역설적이 아닌 것은 궁극 진리가 아닌 것이다. 궁극 진리는 언제나 일상적 의식을 근거로 한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 지기들은 일언지하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그럴까 안 그럴까 반신반의하는 "방법적 회의"(데카르트)를 하며 의심한다. 여기서 또 한 단계에 더 올라서서 사물을 변증법적, 역설적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리 자체에 아무런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열심히 따르고 실천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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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4. 17. 부활 제2주간 금요일로 말씀은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시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나의 벗이여, 자리 잡게 하게나>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요한 6,10)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그대의 눈길에
자리 잡게 하게나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울부짖는 사람들이
그대의 귀길에
자리 잡게 하게나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쓰러진 사람들이
그대의 손길에
자리 잡게 하게나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버려진 사람들이
그대의 발길에
자리 잡게 하게나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외로운 사람들이
그대의 품길에
자리 잡게 하게나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사람이고픈 사람들이
그대의 삶길에
자리 잡게 하게나

6
결핍을 안고 나아가십시오. 감사하며 봉헌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기적을 볼 것입니다.
2026/4/17/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복음 6장 1-15절: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결핍에서 풍요로움으로
오늘 복음은 굶주리는 군중과 이에 따른 예수님 자비의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계산하며 답합니다. 그의 대답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필립보처럼 우리도 이런저런 상황 앞에서 계산부터 합니다. 시간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환경이 안 되고, 재정이 부족하다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가진, 어쩌면 보잘것없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올려지자,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게 되는 풍요로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작은 것이 그분의 은총으로 풍성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작고, 우리의 사랑 역시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손에 들리게 되면 은총과 축복의 통로가 되지요. 문제는 우리의 희생과 봉헌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에 올려놓았는지 아닌지입니다. 이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계산이 그릇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을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손에 올려놓고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먼저임을 잊지 맙시다.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도미니코 수도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4월 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기적 중 하나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을 마주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단순히 과거에 기적을 베푸신 분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삶의 다양한 허기를 채워주시는 생생한 현존임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라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는 필립보가 답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의 용량’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필립보는 즉시 인간적인 계산기를 두드리며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라고 답변합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문제 앞에서 자신의 재산이나 인맥, 능력만을 계산해 보고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라고 결론 내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바로 나의 계산이 끝나는 지점에서 하느님의 일이 시작됨을 믿는 것입니다.

이때 안드레아는 한 어린아이가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옵니다. 장정만 오천 명인 군중 앞에서 그것은 턱없이 부족하고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작고 초라한 봉헌을 손에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기적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작은 정성, 곧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라고 생각하기 쉬운 사소한 희생을 주님 손에 올려드릴 때 일어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 부족함을 기꺼이 내어놓는 마음을 통해 풍요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율법 교사 가말리엘은 박해받는 사도들을 두고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사도 5,39)는 현명한 말을 남깁니다. 사도들은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했는데, 이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흔들리고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이 주님을 향한 길이라면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역사는 늘 부족함에서 시작하여 넘침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적 끝에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는 낭비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린 아주 작은 정성 하나도 결코 헛되이 버려지지 않으며, 반드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양식으로 사용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짓누르는 ‘허기’는 무엇입니까? 외로움이나 불안 혹은 무력감입니까? 그리고 오늘 여러분이 주님 손에 올려드릴 수 있는 ‘보리 빵 다섯 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작은 친절이나 화살 기도 혹은 누군가를 향한 용서일 수 있습니다. 이제 내 계산기를 잠시 내려놓고 주님의 풍요로움을 신뢰해 봅시다.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릴 때, 우리 삶은 겨우 버티는 수준을 넘어 ‘열두 광주리가 남는 풍성한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 제 보잘것없는 일상을 당신 손에 드립니다. 저를 통하여 당신의 풍요로운 기적을 완성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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