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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365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13일)

1
어제는 미사 후 성당 공동체 아미쿠스에서 <엠마오 가는 길> 행사를 했다. 엠마오 출신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를 보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가에서 ‘낯선 자’를 만나,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 낯선 자가 예수였다는 이야기이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 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예수가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가 된 것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원칙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원칙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과 주변, 특히 옆에 있는 나그네의 처치를 생각한 것이다. <엠마오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인식하게 된 유일한 통로는 '낯선 자'를 인식하고 그에게 비정상적인 만큼의 호의를 베푼 것이다. 예수는 '낯선 자'이다. '낯선 자'에게 행동으로 긍휼을 보여줄 때, 신의 신비가 우리 눈 앞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때 예수가 사라진 것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이 낯선 자가 '진짜' 예수라고 사칭하면서 종교 장사를 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예수가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로 예수를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 예수라 부른다. '신'의 특징은 '낯섦'과 '다름'이다.

2
노자 <<도덕경>>을 책으로 묶을 생각이다. <<노자 인문학: 나 답게 사는 길>>이라 제목을 붙일 생각이다. 이미 <인문 일지>에 오랫동안 써 놓은 것이 있어 다듬으면 된다. 부제는 "프랑스 문학 박사가 읽는 <<도덕경>>"이라 할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그동안 잘 이해하지 못했던 주제들을 다시 정리해 볼 생각이다.

<<도덕경>> 제2장에 나오는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라는 문장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번역하면,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것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뭔 말인지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아름다움은, 다른 면에서 보면, 추악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좋다고 알고 있는 훌륭함도 다른 면에서 보면 못난 것일 뿐이다."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의 경계가 있는가 혼자 생각해 본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가 확실한가? 다이아몬드는 아름답지만, 그 다이아몬드가 광산에서 채굴되어 유통되는 과정을 들여다 보면, 피로 얼룩진 추악함이 있다. 향기롭게 마시는 거피 한 잔에 불공정 무역과 부당 노동, 환경 파괴의 추악함이 있다.  건강식품으로 알려진 아보카도 한 개를 수확하는 데 68리터의 물이 들어가고, 그 지역 주민은 물 부족으로 신음한다. 선(善)함은 좋다는 것이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면에는 좋지 않음(不善)이 공존하고 있는 것과 같다. 노숙자에게 적선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그 이면에는 노숙자가 평생 노숙자로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나쁜 일일 수도 있다. 

노자는 '도(道)'의 양면성을 말한다.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모습의 '도'는 어느 한 편으로 설명되거나 정의되어서는 안된다는 거다. 이런 '도'의 존재 방식으로 이해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성인을 자유인으로 읽는다. 나는 자유인으로 '미추(美醜)'를 동시에 보려고 애쓴다. 아름다움(美)과 추악(醜惡)함은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자주 “선과 악의 파집(破執)“이라는 말을 소환한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말하는 도덕은 결국 “선(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다. 이 명제는 도덕이 인간을 향해 내리는 명령이자, 동시에 인간을 일정한 형식에 가두는 규범의 언어이다. 선함을 전제로 하여 도덕이 필연화(必然化)되고, 정치가 정당화(正當化)되는 철학적 문제를 불러온다. 이러한 통찰은 <<유마경(維摩詰所說經)>>에 잘 나타나 있다. <<유마경>>은 선악에 대한 집착 자체가 번뇌(煩惱)의 원천임을 드러낸다. "著於善者(착어선자) 是為惡法(시위악법) 憎惡惡者(증오악자) 心則不淨(심즉부정): 선(善)에 집착하는 자는 곧 악한 법이고, 악(惡)을 미워하는 자는 곧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維摩詰所說經(유마힐소설경)>>.

역설적으로 선한 인간은 선악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불교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로 “파집(破執)“은 집착을 깨뜨림 또는 고집을 허물다는 의미이다. 견해나 분별에 대한 집착(執)을 파괴(破)하는 수행의 핵심을 나타낸다. 특히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분별심과 고정된 견해를 깨는 것이 깨달음의 시작이라 보기 때문에 중요한 개념이다.

오늘 아침에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어떤 존재 든 극단적으로 아름답거나 선하다고 정의할 수 없다. 원자력이 세상에 도움을 주지만 세상을 파괴하는 도구이기도 하고, 군대가 국민을 지켜주는 조직이지만, 침략의 주체로 활약학도 한다. 그래서 수련을 한 자유인은 자신이 믿고 확신하는 선악의 가치관을 주장하며 세상을 대해서는 안 된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무위(無爲)를 실천하는 지도자, 성인의 통치(統治) 방식이다. 나는 여기서 자유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방식을 보았다. 

<<도덕경>> 읽다가, "시이성인(是以聖人)"이라는 문구를 만나면, 노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다. <<도덕경>> 패턴 중 하나가 어떤 자연의 원리나 세상의 이치를 말하고, 그것을 근거로 "그래서 성인은 이렇게 해야 한다"로 이어지는 거다. 미추(미추)의 구분은 없다. 선악(선악)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세상은 양면성을 띠고 존재한다.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음악과 소리, 앞과 뒤는 모두 상대적이다. 그러나 성인, 리더는 어떤 특정한 믿음이나 가치를 가지고 백성을 이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리더가 아니라 자유인도 마찬가지이다. 리더가 '이것은 좋아, 저것은 나빠'라는 어떤 특정한 생각이나 믿음을 갖고 조직원들을 대했을 때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특정 종교만 정의이고, 기타 종교는 사이비 이단이라는 생각으로 탄압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이념이나 신념이 프레임이 되고, 그 프레임이 폭력과 강압으로 발전하게 된다. 

세상의 양면성을 보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든다. 나의 행복이 타인의 불행일 수도 있다는 거다. 아무리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라도 이전에 있을 타인의 희생을 생각하자는 거다. 그리고 나만이 선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의 행복 저편에 한숨짓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눈이 바로 떠진 것이다. 식탁에 오른 기름진 육류 뒤에 보이지 않는 아픔까지 볼 수 있다면 '도'의 안목이 생긴 것이다.

농담으로 가장 무서운 개 중에 무서운 것이 편견(偏見)과 선입견(先入見)이다. 편견과 선입견은 다음과 같은 5가지의 경우 속에서 나온다. 그 중에 하나만 결핍되어도 편견과 선입견이 나온다. (1)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 (2) 상상력 부족 (3) 오만과 자만심 (4) 공감 능력의 부족 (5) 삶의 내 외부 균형 상실. 인문 운동가가 매일 <인문 일지>를 쓰는 이유는 "현재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태들에 대하여 감각의 문을 활짝 열고, 고집스런 내 편견과 선입견을 사슬을 끊고 풀어헤치려"는 목적이다.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자연은 대립면의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대립, 노자가 말하는 무와 유의 대립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자는 이것을 "유무상생'이라고 한다. 전관(全觀)적인 시선을 갖는 거다. 노자 철학에 따라, 무심하게 순환하는 역사(시간=도)의 장 위에서 오늘 나의 삶을 위하여 무언 가를 창조하는 한 걸음을 내 딛는 거다. 역사 그 자체에 의미부여를 하는 어리석은 짓을 때려 치고, 역사의 계기 계기에 아름다운 무위(無爲)의 실천,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불선이 하나되는 전관(全觀)적인 삶의 건강을 실천하는 거다. "전관의 지혜를 가지는 자는 대대(對待) 관계의 양면을 포월(包越)한다"(김용옥)는 거다. "대립하는 것들은 서로 의지하여 자신의 존립을 도모한다. 유가 있기 때문에 무가 있으며, 무가 있기 때문에 유가 있다. 그래서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이라고 말했다. 즉 대립자들은 대립하는 가치들을 포섭하는 것이다. 유는 무를 포섭하고, 무는 유를 포섭한다. 어려움은 쉬움의 포함하며, 쉬움은 어려움을 포함한다. 그런데 결국 이 대립자들은 서로 대립되는 상대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쉬움이 어려움이 될 수가 있고, 어려움이 쉬움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대립되는 양면을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통일하는 것이 포월(包越, 품어 안고 넘는다)의 지혜"(김용옥)라는 거다. 그 길이 전관(全觀)의 인간이 되는 거다.

3
<<도덕경>>은 시(詩) 같기도 하다. 노자는 글자 수와 운율을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도'의 상대적 존재 방식을 네 글자의 단구로 표현하는 제2장이 그렇다.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6개의 네 글자 단구가 그렇다. 해석하면,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긺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음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다. 이렇게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은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렵과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흥미로운 말이다. "유무상생(有無相生)"이란 말부터 보자. 모두 상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라는 거다. "유무상생"은 노자가 말하는 세상의 원리이다. 없음과 있음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고, 없음이 있기에, 있음이 존재한다는 거다. "유무상생"은 두 줄로 꼬인 새끼줄을 이 세계, 아니 우주의 원리라는 거다. 나는 타인, 환경 등 객체와 분리된 개념이 아닌, 함께 할 때, 그 존재가 무엇인지 이름을 가진 언어로 말할  수 있다. 상호 보완, 상생의 존재로 보아야 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고, 이름을 붙여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은 내가 늘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 문장이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음과 양의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그냥 한 문장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세상을 이해하는 답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原理)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관계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관계적' 태도로 하루를 사는가에 따라 일이 순리(順理)대로 가느냐 아니면 그 반대가 된다.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자연은 대립면의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역』 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대립, 노자가 말하는 무와 유의 대립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자는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한다. '무'와 '유'는 같은 '도'에서 나왔지만 이름이 다를 뿐이다. '무'와 '유'가 한 몸으로 이루어지는 과정, 찰나, 경계에 도가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밝을 ‘명(明)'자이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자를 풀이하면, 달과 해가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안다고 하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안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외치다 죽은 이유를 난 알겠다. '명'자는 그런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이런 경계에 있는 자는 고독하다.  '유'와 '무'를, '해'와 '달'을, '양'과 '음'을 동시에 품은 자는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의 세계'만을 가진 자들과 달리 '홀로' 고독하다. 양쪽을 품은 경계에 선 신비적 존재는 고독하다. 고독한 자는 개방적이고, '인위적 절반의 세계"에서 편안한 자는 폐쇄적이다. 

4
생성형 AI는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며 의사 결정을 돕는다. 글로벌 빅테크는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할 AI 혁명을 약속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긍정적인 전망의 이면에는 부작용과 의구심도 공존한다. <가트너(Gartner)>가 지난 3월 발표한 보고서는 AI 확산이 초래할 수 있는 생산성의 역설을 지적했다. 최근 기업들은 AI 챗봇을 넘어 AI 에이전트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AI는 반복 업무 시간을 단축해 직원이 더욱 가치 있는 업무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개발 현장에서의 체감 속도는 더 빠르다.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한 개발자는 “AI로 6개월이 걸리던 웹앱을 6주 만에 만들었다”며, API 호출 작업의 편의성 등을 높게 평가했다. 회의 요약, 일정 관리, 이미지 생성 등 다양한 도구들이 일상의 수고를 덜어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AI가 시간 효율을 높여주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업무 하중을 오히려 가중 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AI가 업무 속도를 높이는 만큼 직원의 핵심 역량을 퇴화 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며, 인간과 AI 사이의 명확한 역할 분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트너>는 AI가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업무량을 오히려 증가시키는 ‘워크 서지(work surge)’ 현상을 초래한다고 분석했다. AI가 시간을 아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업무와 마찰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AI로 인한 업무 증가 유형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 AI의 저 품질 결과물을 처리하고 정리하는 노동인 ‘AI 슬롭(slop)’ 
• AI 도구 설정과 신뢰성 검증 등 운영 부담인 ‘AI 오버헤드(overhead)’ 
•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되 재 설계가 필요한 ‘AI 세렌디피티(serendipity)’다. 
결국 AI는 새로운 형태의 일을 만들기에 AI 도입이 곧 ‘칼퇴’를 보장하지 않는 셈이다.

AI가 초반 80~90%는 빠르게 만들지만, 실제 제품화 과정과 같은 핵심 작업 10~20%를 완성하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 통용된다. AI가 대량 생성한 코드를 시스템에 통합할 경우, 장기적으로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코드가 쌓이는 ‘이해 부채'가 생긴다. 이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는 인간의 역량을 약화 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니까 생산성 지표보다 경계해야 할 지점은 '인간 역량의 퇴화(skill atrophy)' 이다. <가트너>는 AI 확산이 업무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직원의 핵심 역량을 약화시키는 새로운 리스크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품질 엔지니어링, 문제 해결, 협업과 갈등 조정 같은 인간 고유 영역을 AI에 과도하게 의존할수록 실무를 통한 학습 기회가 줄어들고, 대인 관계 능력도 녹슨다는 분석이다. 물론 이러한 흐름은 피할 수 없다. 과거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그랬듯, 기술의 효용이 단점을 넘는 순간 인간은 그에 맞춰 적응하기 마련이다. 향후 AI는 지적 노동을 수행하는 초개인화 도구를 넘어 물리적 영역까지 범위를 넓힐 전망이다. 누구나 맞춤형 앱을 제작하고 AI를 무기 삼아 업무를 내재 화하는 시대에는 아이디어가 최고의 경쟁력이 된다.

중요한 것은 AI가 가치 중심의 의사 결정이나 비판적 사고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트너>는 미래 IT 인재의 핵심 역량으로 기술적 실행보다 지적 실험과 오케스트레이션(조율) 능력을 꼽았다. 특히 혁신 및 문제 해결 능력(52%), 비판적 사고(45%), 협업(41%)이 AI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필수 역량 상위권에 올랐다. 특히 기업은 AI 도입 속도에 발맞춰 인간 역량을 보존하는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 인간과 AI의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하고, 이를 시스템적으로 정착 시켜야 한다. 보고서는 자동화 프로세스 내에 인간의 판단 지점을 남겨두고, 직원이 기본기를 다질 수 있는 실무 경험을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그대로 쓰는 건 단기적으로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 역량을 갉아먹는다. <가트너>는 2028년까지 엔지니어링 기업의 80%가 생산성 외에 ‘창의성’과 ‘혁신’ 지표를 별도로 측정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개인 역시 AI 결과물을 검증 없이 수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AI는 ‘프로토타입을 빠르게 만드는 도구’일 뿐, ‘내 판단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다. AI가 내놓은 답이 올바른지 의심하고 자신의 언어로 다듬는 과정에서 전문성은 완성된다.

결국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AI 시대에 더욱 유효하다. 현명하게 AI를 활용한다는 것은 AI에게 생각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AI를 활용해 확보한 시간에 더 깊이 고민하고 답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AI보다 더 똑똑해 지는 것이 아니라 AI가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을 더 예리하게 벼리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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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 제2주간 월요일로 말씀은 <요한 3,1-8>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이다.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 3,5-6)
늘 그렇게 빛으로 새로 태어나
빛이 되어가는 빛나는 사람
늘 그렇게 선으로 새로 태어나
선이 되어가는 선한 사람
늘 그렇게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
믿음이 되어가는 믿는 사람
늘 그렇게 기쁨으로 새로 태어나
기쁨이 되어가는 기뻐하는 사람
늘 그렇게 희망으로 새로 태어나
희망이 되어가는 희망하는 사람
늘 그렇게 사랑으로 새로 태어나
사랑이 되어가는 사랑하는 사람
늘 그렇게 평화로 새로 태어나
평화가 되어가는 평화로운 사람
늘 그렇게 사귐으로 새로 태어나
사귐이 되어가는 사귀는 사람
늘 그렇게 품음으로 새로 태어나
품음이 되어가는 품는 사람
늘 그렇게 베풂으로 새로 태어나
베풂이 되어가는 베푸는 사람
늘 그렇게 섬김으로 새로 태어나
섬김이 되어가는 섬기는 사람
늘 그렇게 살림으로 새로 태어나
살림이 되어가는 살리는 사람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다음 10가지로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잇다. 빛으로, 선으로, 믿음으로, 사랑으로, 평화로, 사귐으로, 품음으로, 베풂으로, 섬김으로, 살림으로 살아야 성령이 내 안에 머무르신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적인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야만 갈 수 있다. 물은 우리의 과거와 죄를 씻어내는 세례를, 성령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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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제 안에 사시도록 하소서.
2026/4/13/부활 제2주간 월요일⠀
요한 복음 3장 1-8절: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주님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는 길
영성 신학적 관점에서 ‘신앙’은 구구단을 외우듯 지식으로 ‘아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점차 변화되어 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는 바로 이 영적 여정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니코데모는 율법을 잘 알고 이를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늦은 밤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 ‘밤’은 단순히 시간을 의미한다 기보다 인간이 지닌 영적인 갈증과 내적 갈망을 뜻하지요.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의 의미는 도덕적 차원의 향상이나 종교적 열정의 증대가 아니라, 자아 중심적 삶에서 예수님 중심적 삶으로 옮겨 감을 말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날 때 이 ‘옮김’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지요. 물은 세례를 통하여 자기 확신과 이기심을 씻어 내는 정화의 과정이고, 성령은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그 바람과 같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내 마음속 계획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라고 말입니다.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도미니코 수도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잘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다는 것도 지식으로 ‘아는’ 상태가 아니라, 타인 그리고 세상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점차 변화되어 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 중심적 삶에서 예수님 중심적 삶으로 건너가는 거다. 그 길은 상지종 신부님이 말한 세계로 이동하는 거다. 
• 어둠이 아니라, 빛의 세계로 건너간다. 그건 차가움이 아니라 따뜻함으로 무장하는 거다.
• 불선에서 선으로 건너간다. 그건 진서미를 일상에 실행하는 거다. 제일 먼저 쪽팔리지 않게 사는 거다. 그게 아름다운 거고, 윤리적이고, 착한 거다.
• 불신에서 믿음으로
• 미움에서 사랑으로
• 반목이나 차별에서 평화로
• 따돌림에서 사귐으로
• 배척에서 품음으로
• 채움에서 배품으로
• 섬김을 받음에서 섬김으로
• 죽음에서 살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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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3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내며 우리를 따뜻하게 껴안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묵상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요한 복음 3장의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는데, 그 핵심은 바로 '새로 태어남'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바리사이이며 유다인들의 지도자인 니코데모가 등장합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지식인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영적 갈증은 해결하지 못한 채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밤에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가 아직 진리의 빛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다음과 같이 파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하느님 나라는 인간적인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신앙을 단순히 지식으로만 접근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머리뿐만 아니라 존재의 거듭남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는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 3,4)라고 반문하며 철저히 육적인 시각에 갇힌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을 통한 변화를 말씀하십니다. 물은 우리의 과거와 죄를 씻어내는 세례를, 성령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의미합니다.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난 이들이기에, 이제는 내 힘과 고집이라는 '육'이 아닌 하느님의 이끄심, 곧 '영'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바람과 같습니다.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소리와 흔적으로 존재를 드러내듯 성령의 사람은 세상의 잣대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 속 사도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박해자들의 협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마음으로 기도했으며, 기도가 끝나자 그들이 모인 곳이 흔들릴 정도로 성령으로 가득 차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가두려 했지만, 성령의 바람을 탄 그들은 누구보다 자유로운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며 쉽게 포기하곤 하지만, 부활 신앙은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반드시 변한다"고 선포합니다. 지금 여러분을 짓누르는 고집이나 두려움, 미움과 같은 낡은 자아는 무엇입니까? 오늘 다시 한번 여러분의 영혼을 성령의 바람에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우리를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이끄십니다. 내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고 흔들린다고 해서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사도들이 모인 곳이 흔들린 후에 비로소 성령이 가득 찼듯이, 우리 삶의 흔들림 또한 성령께서 새롭게 일하시기 위한 준비 단계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 성령의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사랑하고 기뻐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주님, 제 낡은 마음을 씻어 주시고, 당신의 성령으로 저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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