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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십자가는 지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365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5일)

1
예수의 십자가는 긍휼의 표시이다. 긍휼은 공감이나 연민을 뛰어넘는 환대의 정신에서 나온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라는 데, 우리는 환대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환대는 공감을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긍휼(compassion)로 치유에 나서는 행동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이다. 예수는 당시 절대 왕권이 있던 세상에서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식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주장하시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셨다. 이는 예수의 몸의 부활보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했던 예수의 정신이 부활한 것이다.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에게 기꺼이 가는 길은 '예수가 하느님 이시다'라고 고백하고, 갖가지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지혜로 사람들과 뭇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복 많이 받아 남보란 듯이 잘 살고, 내세에서도 죽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한 것, 말하자면 '제 목숨', 지금의 '작은 자기'가 잘 되고 영속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작은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면 '참 자기'를 잃을 수밖에 없고, '작은 자기'를 버릴 때 '큰 자기'를 찾게 된다는 거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진정한 제 목숨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역설의 공식이다.

우리가 흔히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데,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바스타제인'의 번역어이다. 이 단어가 지닌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 이다. 구체적으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갈 때 이 동사를 쓴다. <<삶이 고통으로 휘청거릴 때>>에서 송봉모 신부님은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가는 것이다. 안고 가는 것은 단순히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 물론 지고 가든, 안고 가든 짐은 짐이다. 그런 짐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바스타제인'의 느낌으로 어깨나 등으로 짊어졌던 짐들을 풀어 그것들을 품 안에 안는 자세로 바꾸어 보는 거다. 짐의 무게에 짓눌려 등이 자꾸만 점점 더 굽어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늙어가기보다는,  그 짐- 화나게 하는 것, 지치게 하는 것 -들을 눈 맞추고 자장가를 부르며 마음으로 아기를 안 듯 살포시 안아 보는 거다. 어쩌면 그 길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지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 <십자가>를 보면, 그에게 십자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십자가는 희생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다. 십자가가 희생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꽃 피우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십자가는 영광이다. 그 사실을 알면, 십자가가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감사할 줄 안다는 거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목숨을 바쳐 소중하게 그 십자가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거다.

루카 복음 9장 23절에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우선 나를 버리려고 애쓰는 거다. 원하는 것을 줄이고, 가진 것을 내려 놓고, 십자가의 짐을 늘 품으려고 하는 거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녹 9:23)라 말하지만,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 등에 지고 힘겹게 질질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품에 안고 가는 거다. 자신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기며 기뻐하는 마음으로 안고 가는 거다.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이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인내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을 소중히 간직한 채 자기 인생을 완성하는 거다.


십자가(十字架)/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2
아침에 페이스북의 담벼락에서 읽은 것이다. 싸우지 않고 화목하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바보가 되면 가능하다. 모든 조직이 똑똑한 사람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바보처럼 우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성장하는 측면이 있다. 뉴튼, 아인슈타인, 백남준, 스티브 잡스 등 모두가 대단한 성과를 이룬 천재들이지만 이들이 한 때 '바보' 소리를 듣거나 '또라이'로 불리운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을 배려하고 남 뒤에 서면 뒤 쳐지는 것 같다.
양보하고 희생하면 잃기만 하고 얻는 게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

짧게 보면 바보 같지만, 길게 보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고수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사람이 남에게 인정받고 좋은 사람이라 불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빛나는 멋진 바보가 되자.
양보하고 희생하는 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욕심이 생기고, 이득이 먼저 떠오를 때마다, "난득호도, 흘휴시복(難得糊塗, 吃虧是福)"이라는 말을 소환한다.

이 말들이 나온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국 산동성의 지방 관리로 근무하던 정판교(중국 청나라 때의 인물로 서화에 능함, 이름 정섭이고 호가 판교)는 어느 날 먼 친척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옥의 담장을 놓고 이웃과 송사가 벌어졌으니 지방관에게 잘 봐 달라는 편지 한 통을 써 달라는 청탁이었다. 정판교는 편지를 다 읽은 뒤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대신 보냈다.

"천 리나 편지를 보낸 것이 담장 하나 때문인가?
그에게 몇 자를 양보하면 또 어떤 가?
만리장성은 아직 남아 있는데
어찌 진시황은 보이질 않는가?"

그는 이 시와 함께 "난득호도"와 "흘휴시복"이라고, 직접 쓴 편액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난득호도(어리석기도 어렵다)란 글에 대하여 정판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지만,
총명하면서도 어리석기는 더욱 어렵다.
집착을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서면 즉시 마음이 편안하니
뜻하지 않고 있노라면 후에 복으로써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일상에서는 똑똑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기는 더욱 어렵다. 똑똑하면 꼭 똑똑한 티를 내고, 매사 똑똑한 체하게 하기 때문이다. 제일 좋은 상태는 똑똑한 사람이 똑똑한 척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 말은 '항상 겸손하여야 한다'는 뜻이고, '물과 같이 몸을 낮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실제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 대화는 실종되고, 논쟁만 있게 된다. 자기가 옳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득호도"가 절실하다.

그리고 "흘휴시복(손해 보는 것이 복을 받는 것)"이라는 글자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찼다는 것은 장차 비게 될 징조이고
비었음은 이제 차게 될 조짐이다.
내가 손해를 보았으면 누군가 이익을 보았을 것이다.
이에 내 마음이 가라앉아 평안할 것이니
그 자체로서 복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살다 보면, 입장이 바뀌게 마련이다. 서로 베풀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의미이다. 이득을 보는 사람은 즐겁고, 손해 보는 사람은 마음이 편하다. 서로 윈-윈이다. 조금 손해를 봐서 어리석게 보인다면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 복을 부르는 것이다. 당장 손해를 보는 듯 보여도 멀리 보면 손해 랄 것도 없다. 비워야 얻을 수 있고 비워 두어야 비로소 채울 수 있다. 지는 것이 나중에 이기는 것이다. 싹쓸이나 궤멸을 추구 하다 가는 역풍을 맞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어리석음을 선택하여 양보하고 촌스러움, 겸허함 등의 태도는 화를 피하고, 복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해를 보는 것이 복이다라는 말은 삶의 지혜이다.

3
지난 4월 2일에 이어, 배고픔의 재발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의 위장에는 기계적 수용체가 있어서 위가 충분히 채워졌 때 뇌에 포만감을 전달한다. 만약 수용체들을 만족시키려면 450g(1파운드)의 음식이 필요하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어떻게 적은 칼로리로 배부를 수 있게 할까? 이 질문이 오늘의 화두이다.

일반적인 성인 남성은 하루 역 2,400-2,700칼로리, 여성은 2,000-2,200칼로리를 권장한다. 이는 활동량, 나이, 체중, 성별에 따라 다르며, 보통 성인은 표준 체중(Kg)당 25-30칼로리를 곱하여 계산한다. 어쨌든, 하루 2,000칼로리를 네 끼니로 나눠 먹고 싶다고 할 때 한 끼당 500칼로리로도 배부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한 끼를 올리브 오일로만 먹는다면, 딱 한 잔 만에 식사는 끝나고, 그 양으로 몸에 필요한 에너지는 제공할 수 있지만 위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너무 적어 금방 배고파진다. 물론 아무도 점심으로 올리브 오일만 먹지 않는다. 

"나는 밀도가 적음 음식만 멌겠어. 채소와 신선한 과일을 잔뜩 먹으면 배도 부르고 살도 빠질 거야" 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몸은 바보가 아니다. 뇌와 위는 긴밀히 소통한다. 몸은 위에 뭔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그 뭔가가 나를 움직이는 데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디 따지기 시작한다. 결국 뇌는 위에 들어찬 것이 정상적인 기능에 충분한 에너지를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인류의 생존을 보장해 준 또 하나의 방어 메커니즘이다. 만약 이런 방어 기제가 없었다면 인간들은 허기를 느낄 때마다 진흙 같은 것을 먹고 만족한 끝에 결국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먹으면 살이 빠진다. 그러니 뇌가 칼로리 밀도가 높은 음식을 향한 초강력 욕구를 내뿜는 반응을 하기 전까지는 살이 빠진다. 그러나 욕구가 발현되면, 결국 폭식을 하게 되고, 살이 다시 찌게 된다. 역설이다. 우리는 이를 요요 현상(다이어트로 감량한 체중이 다시 증가하거나 이전보다 더 늘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어떤 음식 조합이 최적인가?

암은 대사 불균형으로 인해 촉진되는 다요인성 질병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암을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건강한 체중을 유지하고, 질병에 강한 몸을 만드는 식단이 필요하다. <미국암연구소>에 따르면, 이상적인 식단은 약 450g당 약 567칼로리를 포함하여야 한다고 했다. 트레버 캐시(Trevor Kashey)는 567이라는 숫자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450g당 약 567칼로리를 갖고 있는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예를 들면, 비가공 통곡물(먹기 전에 물에 삶거나 끓여야 하는 곡류, 쌀, 귀리, 퀴노아 등으로 이런 곡물의 에너지 밀도-그램당 칼로리-는 요리 후를 기준으로 측정), 뿌리 채소, 과일과 채소, 저지방 동물성 단백질이다. 이러한 음식 조합이 건강한 체중을 유지하면서도 식사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준다.  한 접시로 치면, 동물성 지방으로 1/4, 통곡물이나 뿌리채소로 1/4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채소와 과일이 좋다.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통곡물이나 뿌리 채소 절반에 채소나 과일 1/4도 괜찮다.  초만감을 더하기 위해 식사에 양배추나 시금치 같은 저칼로리 음식까지 추가하면 좋다. 이런 음식 조합은 그동안 수년간 권장해 온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유행 다이어트 방법과 상충한다. 저 탄수화물도 아니고 저지방도 아니다. 비건도 아니고 구석기 다이어트도 아니다.

4
트레버 캐시(Trevor Kashey)에 따르면, 중요한 원칙은 매 끼니를 '포만감'을 넘어서 '극도의 편안함'을 느낄 정도로 과식하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음식의 조합 원리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다. 건강에 매우 좋은 데다가 포만감이 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짜 배고픔'으로 보상받는 것을 조절하고, 적절한 양만 섭취하도록 돕는다. 또한 이 방식에는 도파민을 자극하는 정크 푸드도 죄책감 없이 포함시킬 수 있다. 다만 그 대가로 나중에 더 배고픔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캐시의 다음 말을 잘 기억하고 싶다. "음식은 단순히 에너지를 제공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가족, 공동체, 문화, 정체성과도 연결되어 있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음식도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고에너지 식단을 섭취한 그룹은 자연스럽게 하루 500칼로리를 더 섭취하면서 체중이 증가한 반면, 위에서 말한 저에너지 밀도 식단을 섭취한 사람은 체중이 감소했다.  

서구적 양식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전총 사회에서 살고 있는 여러 원시 부족들이 저에너지 밀도 식사 원리를 지키고 있음이 밝혀졌다. 파푸아 뉴기니에 있는 키타바 섬 부족들이다. 이들은 수렵 채집과 생존형 농경의 중간 쯤에 해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었다. 뿌리채소(주로 참마, 고구마, 토란)가 주식이고, 과일, 이파리, 코코넛, 생선, 옥수수, 타피오카, 통으로 보충했다. 이따금 먹는 코코넛을 제외하면 모두 칼로리 밀도가 낮은 식품이었다. 부족민은 칼로리 70%를 탄수화물에서 얻고 있었고, 창고에 식량이 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2,200칼로리 정도만 섭취했다. 고탄수화물 다이어트법을 실천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결정적으로 키타바 부족은 가공된 고밀도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다. 과체중인 사람은 한명도 없었고, 심장볍 징후도 전혀 없었으며, 심장마비나 뇌졸증 병력의 증거도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을 박혀낸 사람은  스웨덴 인류학자 스타판 인데베리(Staffan Lideberg) 이다.  그에 따르면, 부족민 대부분 50세가 넘은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는 90세가 넘은 고령자들도 있었다. 실로 현대 의학 없이 이룬 기적이라 할 만하다. 이에 반해 그의 조국 스웨덴에서는 국민의 절반 가까이 과체중 아니면 비만이었고, 제1사망 원인 심자엽ㅇ과 뇌졸증이었다. 비밀은 역시 식단에 있었다. 자연 식품 중심 식단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발병률이 낫다.

또 다른 발견도 있다. 볼리비아 원시 부족인 치마네 사람들은 쌀, 질경이, 뿌리채소, 옥수수, 손수 사냥한 고기나 강에서 잡아 올린 생선, 과일, 이따금 땀 먹는 애생 견과류를 먹는다. 여러 연구팀에 따르면, 치마네 부족의 심장은 전 세계 조사 역사상 가장 건강한 상태를 기록했다. 탄자니아의 하드자 부족에게는 만성 질병이라는 것이 없는데, 이들이 주로 먹은 것은 야생 뿌리채소, 과일, 고기이다. 이런 일반적 법칙은 고밀도 음식을 덜 섭취하는 현대 산업 사회에도 적용된다. 일본인들은 문명 세계를 통틀어 평균 수명이 가장 길고 심장병과 암으로 사망할 확률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그 원인의 일부로 학자들은 쌀, 식물성 단백질, 채소로 구성된 일본의 전통적 식단을 들고 있다. 

뿌리채소와 통곡물 위주의 식단이 몸에 좋다는 것은 모든 저탄수화물 다이어트의 조언, 유행 다이어트 방법들이 하는 이야기, 영양 관련 기사들 과도 상충한다. 예를 들어 문제는 감자 튀김이다. 그러니까 감자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감자를 다루는 방식이 문제이다. 감자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온 모든 음식의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연식을 도파민을 폭발 시키는 음식으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감자를 작은 스틱이나 칩 형태로 잘라 뜨거운 기름에 튀긴다. 아니면 감자를 삶아서 으깬 다음 버터와 크림을 섞는다. 그런 다음 구워서 버터와 샤워 크림, 아니면 치즈와 기름진 고기 소스까지 추가한다. 이렇게 하면 음식의 에너지 밀도가 급격히 상승한다. 예를 들어 감자튀김 450g에는 1,500칼로리가 넘는 에너지 밀도를 갖는데 반해, 그냥 구운 감자는 400칼로리밖에 도지 않는다. 문제는 감자 자체가 아니라, 감자를 어떻게 조리하느냐 에 달려 있다.

이렇게 식단 조절을 통해 체중을 감량하면, 체중 대비 근력이 더 강해진다. 더 많은 에너지가 느껴지고 여러 몸의 통증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몸의 배고픔 관련 호르몬이 정상화되고, 배고픔을 다루는 방식이 변한다. 배고픔이 '비상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진짜 배고픔이 진짜 문제인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단순히 먹고 싶은 욕구일 뿐이다. 

5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로, 말씀은 <요한 20,1-9> "부활하시다" 이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히 다시 만나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불신의 어둠을 가르는
믿음의 한 걸음
내딛는 사람
살아나신
빛나는 믿음을
영원히 다시 만나다
절망의 어둠을 가르는
희망의 한 걸음
내딛는 사람
살아나신
빛나는 희망을
영원히 다시 만나다
증오의 어둠을 가르는
사랑의 한 걸음
내딛는 사람
살아나신
빛나는 사랑을
영원히 다시 만나다
거짓의 어둠을 가르는
진리의 한 걸음
내딛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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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나 감정이 있다면 용기를 내어 신뢰할 만한 이에게 나누어 봅시다.
2026/4/5/주님 부활 대축일/식목일·청명: 요한 복음 20장 1-9절

내적 부활 체험
저는 감정을 다루는 데 서툰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통해 그동안 외면하고 억압해 왔던 제 감정들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감추어 왔던 내면의 상처를 바라보며, 저 자신과도 화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에게 이것은 일종의 부활 체험이었습니다. 저처럼 감정을 다루는 데 서툰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마치 무덤처럼 마음 깊은 곳에 가두어 둡니다. 감정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드러날까 두려워 더욱 감추지요. 대사제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경비병을 세운 것처럼 스스로를 감시하며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정은 그 자체로 중립적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부르는 분노나 미움조차도 말입니다. 감정 자체는 죄가 아닌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표현하느냐입니다. 억압된 감정은 더 큰 심리적·정신적 스트레스로 되돌아오기에, 오랫동안 묵혀온 감정일수록 마주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빈 무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놀라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혼자 붙들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지요. 그들이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처럼, 누군가와 함께라면 어려움은 훨씬 줄어듭니다. 감정은 내 마음이 나 자신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혼자가 어렵다면 사제, 영적 지도자, 전문가, 또는 신뢰할 만한 이에게 도움을 청해 보십시오. 나를 괴롭힌다고 여겼던 감정이 실은 내게 중요한 의미를 전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때 우리는 내적 자유를 얻고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예수회)
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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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Pascha)[파스카]는 원래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자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리는 날이었다. 그러나 전례적으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부터 주님 부활 대축일 제2저녁기도까지의 3일간을 ‘파스카 삼일’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신비를 기념한다.

파스카는 어원적으로는 ‘통과하다, 지나가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말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들의 축제일을 일컬었다. 이 축제는 탈출기 12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해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축제다. 하느님이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치실 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거르고 지나가셨다. 그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나간다’는 의미로 한자로는 과월(過越)절이나 유월(踰越)절로, 영어로는 Passover라고 번역한다.

이 구약성경의 파스카 사건은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죽음·부활로 새로운 파스카로 거듭난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키고 이날 성체성사를 제정하며 성찬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모든 인간을 위한 파스카의 어린 양이 됐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공적 활동을 세 번의 파스카 축제를 중심으로 정리하며 예수가 “하느님의 어린 양”임을 밝히고 있다.(요한 1,29) 사도 바오로도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1코린 5,7)라고 고백하고 있다.

교회는 파스카 삼일을 통해 ‘하느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지만, 사실 파스카 신비 기념은 모든 미사에서 이뤄진다. 바로 성체성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완성된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마치 이집트를 탈출할 때 어린 양을 바친 것처럼,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기억하고 그 수난과 죽음, 부활에 동참하고자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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