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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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절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즉 부활을 위해 예수는 죽은 거다. 그러니까 죽어야, 우리는 부활한다. 언젠가 채현국 어른은 한 인터뷰(경남도민일보)에서 좋아하는 이의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죽는 사람 사람이 있어야 새로 태어난 사람도 있는 거요, 모든 생명이 다 그래요. 늙은 별이 폭발하여 새 별이 생기듯이 종말이 있어야 새로운 게 나오는 법이요."
즈와외즈 빠끄(Joyeuses Paques)! 프랑스어로 부활을 축하합니다!란 말이다. 오늘이 부활 주일이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는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뜻이다. 나는 아침에 2CELLOS의 <Benedictus>들었다. <베네딕투스>는 즈카르야의 노래 "Benedictus deus Israel(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에서 나왔다. 이건 루까 복음 1장 68절이다. '찬미'란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나 위대한 것 따위를 기리어 칭송함"인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리는 노래'라고 보아야 한다. 길가의 은행나무를 보라. 하느님은 어느 가지 하나도 소홀히 다루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하느님에게 가는 길은 '예수가 하느님이다'라고 끊임없이 고백하고 갖가지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사람들과 뭇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 분 사랑이 우리에게 완성됩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요한 1서 12-16)
예수의 부활절은 각자 스스로 변화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터닝 포인트를 주는 날이다. 그래 부활은 희망이다. 우리도 과거의 잘못된 낡은 악습과 어두운 절망은 모두 무덤 속에 묻어두고 희망 가득한 새 삶으로 이 봄과 함께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이고, 우리가 부활의 의미로 사는 것이다.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은 고난의 현장으로 가라는 말이다. '교회 밖으로 나가라'는 말이다. 최후의 만찬으로 가라는 말이 아니다. 교회 안에 머무르라는 말이 아니다. 부활은 예수의 삶이 옳았다는 하느님의 선언이다. 우리도 예수처럼 살라는 하느님의 부탁이다.
부활은 예수 죽음에 대한 관찰보다 예수 삶에 대한 집중을 요청한다. 예수는 부활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부활하지 않았다. 악의 세력이 버티는 한 세상은 부활하지 못한다. 부활을 믿는 자,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예수처럼 죽더라도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부자와 권력자 그리고 그들에게 빌 불어 백성을 속이는 종교 사기꾼들이 악의 세력이다.
선한 자,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진짜 부활한다. 악인은 부활할 가치가 없다. 우리 자신이 부활한다면, 세상에 도움이 될까 민폐가 될까? 각자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다. 예수를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살 일이다.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서 부활 찬미하는 것은 자신과 남을 속이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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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충분한 고통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고통이 없는 부활은 존재할 수가 없다. 만일 누가 그런 부활이 존재한다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가짜다. 부활은 진주와 같다. 찬란한 진주는 연체동물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기생충이나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때, 서서히 형성된다. 충분한 고통과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견디는 과정이 곧 부활이다.
수난 주일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를 또 만났다. 이 말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당신은 나를 버리십시까?'라고 해석된다. 이것은 시편 22장 1절이기도 하다. 예수는 믿었다. 인간은 모두 '신의 형상'으로 창조됐고, 그 형상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이며, 신의 형상의 가시적인 표현이 사랑이라고. 인간이 다른 사람,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대상도 신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사상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인권 사상이며, 누구나 신의 자녀라는 평등 사상이다.
그런 깨달음은 당시 유대교 신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희생 제사를 지내고, 바리새인들이 해석해주는 성서를 일방적으로 듣고, 그들이 만들어낸 교리를 준수하는 것이 당시 유대 신앙이었다. 천국은 그런 종교 행위를 반복하고 교리를 수용할 때, 들어갈 수 있는 '복권'이었다. 그러나 예수에게 천국의 의미는 달랐다. 예수는 천국을 '신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할 때, 그 안에서 구축되는 이상적인 관계로 봤다. 그런 예수의 주장은 당시 종교인들에게 신성 모독이었다. 급기야는, 혹은 당연하게 당시 종교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안정을 원하는 로마 제국의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형으로 처형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당신은 무엇을 위해 저는 이렇게 버리십니까?' 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다. '왜' 대신 '무엇을 위해'로 말이다. 실존적인 질문이다. 니체는 "인생에서 '왜'(why)를 아는 사람은 어떤 역경을 동반한 '어떻게 이럴 수가'(how)를 견딜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에게 묻는 질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혹은 "당신이 목숨을 바칠 만큼 높고 귀한 가치를 찾으셨습니까?" 부활은 충분한 고통과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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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부활절 아침의 글쓰기를 봤더니, 류시화 시인의 '낫싱 스페셜(nothing special)!' 이야기를 공유했었다. 이 말을 프랑스어로 하면, '빠 드 스페씨알(Pas de special)!이다. 한국말로 하면, '큰일 아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가 된다. 이건 류시화 시인의 다음 말에 대한 해석이다. "단지 하나의 시선일 뿐인 데도 우리의 마음은 그 하나를 전체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겪는 문제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괴물이 되어 더 중요한 것에 멀어지게 된다. 그걸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고, 문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커진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이다. 그러니 살아남아야 한다. 알렐루야 ~~
부활절은 날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 날은 3월 25일에서 4월 22일 사이로 날짜는 유동적이다. 춘분이 지난 후 첫 보름달이 뜨는 그 주의 일요일이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교회의 종들이 로마에서 각자의 하늘로 날아오다가 초콜릿으로 만든 계란을 떨어뜨렸고, 이것을 아이들이 정원에서 주웠다고 한다. 계란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끝으로 부활절을 라틴어로는 파스카(Pascha), 프랑스어로는 빠크(Paques), 영어로는 이스터(Easter)라 한다.
파스카는 히브리어 '페사흐'에서 유래하여 '건너가다', '통과하다' 또는 '거르고 지나 가다'는 뜻을 지닌 카톨릭 및 정교회의 핵심 용어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출애굽 사건(해방절)에서 유래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의미한다.
파스카, 부활은 어둠에서 빛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죽음에서 생동으로 건너가기를 하는 신앙의 여정이다. '건너 가기'에 방점을 찍는다. 살면서 계속 건너 가자는 것이 내 철학이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으며,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만난 누구든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는 맛은 관계이고, 거기서 일어나는 활동의 폭이 확장될 때 일어난다. 게다가 관계와 활동 속에서 일어나는 수렴하고 발산하는 순환 가운데 내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다. 이걸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소유 욕망에 사로잡혀 집착하기보다 존재로 건너가기를 하며, 자유를 확장해 나갈 때 발산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관계와 활동이 작동된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와 똑같은 말만 하는 사람은 필요 없다. 그래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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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아침에 다시 소환한다. ‘안분지족’. 이 말은 노자 <<도덕경>> 제44장의 다음 문장을 불러온다.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可以長久(가이장구)" 이 말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으니 오래오래 삶을 누리게 된다' 이다.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만족(足)을 알고 그치는(知) 것이 내 몸을 살리고, 내 정신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해답이다. 만족을 모르고, 행복을 쫓는 사냥을 끝없이 펼치다 보면 결국 얻게 되는 건 불행이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을 알자는 거다. '안분지족'은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分數)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이란 뜻이다. ' 자기 분수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만족하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거다. 윤리적으로 인격이 높은 덕망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잣대로 오만(傲慢)에 빠지거나 자만(自慢)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나 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삶의 아름다운 향기가 풍긴다. 이렇듯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야 말로 '멋진' 삶이 아닐까?
소유는 나눔을 통해 빈자리가 비로소 채워진다. 지속(長久) 성공과 생존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분지족'의 소박함은 칭찬과 인정의 문제 와도 관련이 있다. 자신에게 귀속되는 양보다 더 많이 요구하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화자찬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과 만족은 겸손을 갖추었을 때 라야 비로소 효과가 있는 법이다.
성숙한 사람들은 대개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행동, 어떤 계획, 어떤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게 한 처음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 대부분은 지극히 사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혹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취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보다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비범함이다. 타인의 평가에 얽매인 채 끝없이 괴로워하는 것이야 말로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지독한 불행이다.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대신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극단을 멀리하는 거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지 말고, 중용을 추구하는 거다. 소박하게 지낸다. 드높은 소나무는 바람에 자주 흔들리고, 가장 높은 탑은 더욱 육중하게 무너져 내리며, 산꼭대기는 번개를 맞게 되는 법이다. 순풍이 불어 돛이 부풀어 오를 때 돛을 다시 접을 수 있어야 한다. 평안한 삶은 무기력한 삶이 아니다. 본능적 과시욕을 자제하려면 용기와 명철한 정신이 필요하다.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이다.
평안을 위하여/김남조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 벌판에 앉아 있는
겨울 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오늘보다는 ‘내일'이라는 말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이 오늘을 무사히 마감하고,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하길 바라게 된다. 이런 희망을 하는 이유는 다 ‘사랑’ 때문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니까 나의 내일이 찬란하기를 바라는 거고,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그 사람의 미래가 아름답기를 기원하는 거다. 오늘 부활절 아침에 기도한다. 그래서 김남조 시인의 이 시를 골랐다. <평안을 위하여>라는 작품이다.
아마도 시인은 어느 겨울날, 진혼곡을 듣고 있는가 보다. 진혼곡은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노래이자, 죽은 사람을 보내고 남은 자들의 노래이기도 하다. 노래 주변에 산 자와 죽은 자의 마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의 슬픔을 나눈다고 나 할까. 그 안에서 시인은 살았던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 살아날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서로 함부로 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할 수도 없다. 다정한 믿음 속에서 모두 평온해지시라, 세상 제발 평온해지시라. 시인의 이 기원이 꼭 이뤄지기를 바라본다. 미국이 저지른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 빨리 멈추기를 기도한다.
5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로, 말씀은 <마태오 28,1-10> "부활하시다, 여자들에게 나타나시다" 이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늘 오늘 부활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태 28,7)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없는 벗들에게
그리하여
없는 벗들이
있어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낮은 벗들에게
그리하여
낮은 벗들이
높아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작은 벗들에게
그리하여
작은 벗들이
커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짓밟힌 벗들에게
그리하여
짓밟힌 벗들이
일으켜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쫓겨난 벗들에게
그리하여
쫓겨난 벗들이
보듬어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버려진 벗들에게
그리하여
버려진 벗들이
받아들여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숨죽인 벗들에게
그리하여
숨죽인 벗들이
당당해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묶인 벗들에게
그리하여
묶인 벗들이
풀려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보잘것없는 벗들에게
그리하여
보잘것없는 벗들이
받들어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되살아나신 벗님께서
죽어가는 벗들에게
그리하여
죽어가는 벗들이
되살려지니
늘 오늘 부활입니다
6
나의 신앙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내면의 사랑입니까, 외적으로 보이는 교회 내의 지위나 활동입니까?
2026/4/4/성토요일/파스카 성야
마태오 복음 28장 1-10절: “평안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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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사도
‘사도들의 사도’라고 불리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복음서는 그녀가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지 자세히 전하지 않습니다.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도왔다는 것 외에는, 그녀의 배경에 대한 설명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오늘날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여성의 증언은 법적 효력을 인정받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에서 한 여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고, 그 소식을 처음으로 전하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이끈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신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부추깁니다. SNS는 남과 나를 비교하게 만들고, 돈과 외모, 인기와 권력을 추구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런 데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부활에 대한 신앙은 사랑이 이끌어 주기에 다다를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조차 믿기 어려워했을 만큼 현실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사건이었지요.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현실을 외면하는 이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얻게 됩니다.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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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시기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주님 부활 대축일은 가장 장엄하고 중요한 축일이며, 또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3세기 초까지 교회는 이 부활 축일만을 기념하였습니다.
부활 시기는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오십 일 동안 이어집니다. 교회는 ‘파스카 시기’라고도 하는 이 부활 시기를 마치 ‘하루의 축일’ 또는 하나의 ‘큰 주일’처럼 지내며, 옛부터 은총의 열매를 가장 많이 얻는 시기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부활 축제를 파스카 성야에서 시작하여 그다음 날 해가 질 때까지 지내다가, 부활의 기쁨을 더 누리고자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또다시 부활을 기념하는 6주간의 전례가 더해져 오늘의 부활 시기가 완성되었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의 날짜는 해마다 달라지는데, 교회는 춘분 다음에 오는 보름날 뒤의 첫 주일로 정하였습니다.
부활 시기에는 사순 시기 동안 금지하였던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다시 노래하며, 전례적으로 감사와 기쁨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부활 시기에는 평일에도 전례를 거행할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상징하는 파스카 초를 제대 옆 또는 독서대 옆에 켜 놓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전례 개혁 이후로는 부활 시기가 끝난 다음에도 세례 때나 장례 미사 때에 파스카 초를 밝히도록 하였습니다. 부활 시기에 사제가 입는 제의의 색깔은 기쁨과 새로 태어남을 나타내는 흰색입니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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