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29일)
1
나만의 중심과 취향을 만들려면 감각부터 점검해야 한다. 감각은 육체적 느낌이고, 감정은 마음의 느낌이다. 마음 공부를 해야 한다. 그건 '마음 먹기' 훈련을 하는 거다. 풍요롭고, 물질적으로 안락하면 우리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계속 그저 편안하고 싶을 뿐이다. 불편을 자초해야 한다. 불편을 스스로 초대해야 한다. 그래 <<편안함의 습격>>(마이클 이스터, 김원진 역)이란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은 우리가 도달한 현대 문명의 정점, 그 안락한 공간에서 잃어버린 감각과 생존의 본능을 되짚어 보는 여정이다. '충분함'이란 '평온함'과 '어려움'의 결합이다. 적절한 의식주와 양질의 의료를 확보해 삶의 불안과 부담을 덜어내는 마음이 충분함의 필수조건이라면, 욕망이란 모두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삶의 결핍과 실패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좋음, 자신만의 의미, 자신만의 온전성을 스스로 찾아내려 애쓰는 일이 충분조건이다.
'충분함'의 핵심이 실패에도 감사할 줄 아는 단단한 마음을 얻고, 피할 수 없는 번뇌를 다루는 기술을 익히며, 자기 삶을 의미와 가치와 한계의 연결 고리로 인식하는 법을 배워 나가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필요한 것이 술은 반취(半醉), 꽃은 반개(半開), 복(福)은 반복(半福)이다. 술을 마시되 만취(滿醉)하면 '꼴' 사납고, 꽃도 만개(滿開) 상태보다 반 쯤 피었을 때가 '더' 아름답다. 사람 사는 이치(理致)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충분한 만족(滿足)이란 있기도 어렵거나 와 혹 그렇다면 인생이 위태로워 진다. 결핍은 부실함이 아니라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결핍은 견디기 어려우나, 오히려 풍요가 우리를 타락시킨다는 게 나의 철학이다. 어려운 상황은 사람을 분발하게 하지만 안락한 환경에 처하면 쉽게 죽음에 이른다. 맹자는 이를 "生于憂患 死于安樂(생우우환 사우안락)"이라 했다. 이를 말 그대로 하면, '우환이 나를 살리게 할 것이고, 안락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뜻이다. 결핍으로 불편 해져야 삶이 자란다는 거다.
<<편안함의 습격>>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자 하는 불편함 속에 야 말로 진짜 삶이 숨 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편안함"에 중독되어 있는 지를 날카롭게 짚어내며, 그로 인해 잃어버린 정신적 회복력과 삶의 생동감을 되는 법을 제시한다. <인문 일지>에서 틈 나는 대로 그 방법들을 공유할 생각 이다.
우리가 흔히 불편을 느끼는 것은 낯선 환경, 신체적 도전, 불확실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편함에서 인간 본연의 강인함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게 내 지론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일부러 불편함을 초대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무디어진 정신을 날카롭게 세우고 육체의 한계를 넓혀 생존 능력을 더 키우는 거다. 불편함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있게 한다.
2
우리가 질 좋은 수면을 하려면, 어둠과 적막이 필요하다. 신경학자 수면 연구자인 크리스 윈터(Chris Winter)에 따르자면, 미국인의 3분의 1은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7시간에 미치지 못한다. 오늘날 수면 장애의 대부분은 적절한 어둠과 적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 가지 조건 속에서 잠을 자도록 진화해왔다. 물론 고단한 정도로 육체를 사용하는 일이 드물어진 것도 하나의 요인이다.
사람들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기 위해 수면 시간부터 줄인다. 마거릿 대처나 로널드 레이건, 윈스턴 처칠 같은 인물이 하루 4~5시간만 자고도 많은 일을 했다는 건 널리 알려졌다. 이들 모두가 ‘낮잠러’에 시간 관리의 달인이었지만 말년에 모두 치매에 걸렸다는 건 그저 우연이 아니다. 찰스 스펜스의 책 <<일상감각 연구소>>에는 불면증이 만성 통증에 이어 둘째로 흔한 정신 질환이며, 유병률이 33퍼센트라고 밝힌다. 여섯 시간보다 적게 자는 사람이 1942년에는 8퍼센트 미만이었지만 2017년에는 두 명 중 한 명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만약 청소부나 관리인이 사무실을 청소해놓지 않는다면 아침 사무실 풍경은 어떨까. 교체하지 않은 전구는 여기저기 깜빡일 거고 쓰레기통마다 오물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의 뇌를 사무실이라고 가정하면 수면은 청소부 역할을 한다. 청소부가 밤새 사무실의 이곳저곳을 청소해 리셋하지 않으면 상쾌한 아침은 물 건너간다. 고도의 주의력을 요하는 중요한 일에 실수를 거듭하는 건 수면 부족과 연관이 깊다. 필립스의 2021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일 평균 수면 시간은 6.7시간이다. 2016년 OECD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의 평균 수면 시간은 7.51시간으로 회원국 평균인 8시간 22분보다 31분이 부족한 꼴찌다. 수면 부족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사람이 적은 게 안타깝다. 잠은 낭비가 아닌 투자다.
3
이젠 <<편안함의 습격>>의 한 챕터인 "고요함의 스트레스 완화 효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고요함을 불편해 한다. 깊은 숲에 혼자 있으면 귀에 들리는 것은 먼 개울에서 아련하게 울려오는 메아리와 나의 숨 소리 뿐이다. 그리고 다른 소리도 들려온다. 바람 소리가 들리고, 또한 새 소리가 크게 들린다. 도시의 새들도 소리를 만들어 낸다. 지구 상의 모든 강이, 바람이, 야생 동물이 저마다의 음악을 연주한다. 그러나 그 소리의 태반이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소음에 묻혀버린다. 자연 세계의 고요함은 갈수록 듣기 힘들어지고 있다.
하버드대학교 인류학과 대니얼 리버만(Damiel Lieberman)교수에 따르면,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환경에서 수많은 감각 입력을 제거해 왔다.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는 예전에 비해 온도 변화를 덜 느낀다. 두 발은 신발에 감싸여 있어 예전만큼 많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 냄새 맡는 일도 줄어들었다. 먹어도 탈이 없는 것인지 알아 보기 위해 음식에 코를 갖다 대는 일이 줄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맡는 냄새는 대개 비누처럼 기분 좋은 것들 뿐이다. 예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이 법칙에서 유일한 예외가 청각이라고 리버만은 말한다. 인류는 세상의 시끄러움을 네 배로 끌어올렸다. 현대인은 높은 소음 에벨 속에서 살고 잇다. 소음과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진 결과 끊임없이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편안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조용한 곳을 더 어색해 한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TV를 오락의 도구로써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처럼 여기는 추세이다. 일할 때, 요리할 때, 간단한 집안 일을 할 때 TV룰 계속 켜놓는 사람들이 많다. 조용함이 야기한 불편함은 학습된 행동이라는 거다.
인간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청각적 파노라마(Soundscape) 속에서 진화해 왔다. 먼 옛날은 조용했고, 큰 소음은 대개 문제를 알리는 신호였다. 예를 들면, 포식자의 포효나 적이 내지르는 함성, 사나운 폭풍의 쿵쾅거림, 혹은 암석 붕괴의 굉음 같은 소음은 위기 신호였다. 즉 인간의 뇌 회로는 "시끄러움=위험"으로 사고하도록 진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투쟁도피반응(Fight-or-flight, 스트레스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빠른 방어 행동 또는 문제 해결 능력을 보이기 위한 흥분된 생리적 상태)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분비함으로써 대응한다. 소음이 야기한 호르몬 분비 현상을 그리 잦지는 않았지만, 생명을 보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거슬리는 배경 소음도 똑같은 '투쟁도피반응'을 일으키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거다. 이로 인해 우리의 호르몬은 마치 물고문처럼 천천히 떨어지는 방식으로 작용하며, 지속적인 소음은 우리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안겨준다. 사실 오늘날 1등 살인자가 된 심장병은 단지 지나친 소파 사용과 탄수화물 섭취의 결과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는 거주 공간을 채우고 있는 끊임없는 데시벨의 흐름이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2,000건에 가까운 유럽 내 심장마비 사망의 원인이 지나친 소음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 증가가 심장병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생활 공간 주변의 소음이 10 데시벨 증가할 때마다 항 불안 제 복용이 약 28%씩 증가하며, 시끄러운 도로 주변에 살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25%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배경 소음이 주위 력, 기억력, 학습 능력, 타인과 상호 작용 능력을 감퇴 시킨다는 연구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소음이 자신을 끌어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살들이 자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요는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비록 처음에는 불편함을 선사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고요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날아다니는 비행기, 열차, 자동차가 없고, TV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다만 자연의 소리만 있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무반향실'이라는 게 있다. 동네의 표준과학연구소에 있다는 말만 들었지 가보지는 못했다. 곧 가보고 싶다. '무반향실'은 완벽하게 고요한 방이다, 이 '무반향실'에 처음 들어가면 사람들이 극한 고요함에 불편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완전한 소리의 부재가 독특한 감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다고 했다. 마음이 점점 차분해짐과 동시에 소리에 대한 감각이 재 조정 되면서 안정되기 시작한다는 거다. 방에 들어가 30분이 지나는 시점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귀에서 나는 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고, 팔과 다리의 관절이 움직이는 소리도 듣는다는 거다. 어떤 사람은 폐에서 공기가 흐르는 소리나 피가 경동맥을 통해 뇌로 흘러가는 소리까지 듣는다 했다. 처음에 '무반향실' 방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듣는 건 자신의 소리라는 거다.
진실은 고요한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각의 제조정과 미세한 인식의 증폭은 우리에게 평온함을 가져다 주고 불안감을 줄여주고, 특히 극강의 고요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스트레스 유발 소음을 우리 머릿속에서 씻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분야의 전문가 스티븐 오어필드(Steven Orfield)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사람들은 '무반향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내 머리가 이렇게 상쾌했던 것이 정말 오랜만이다' 라고 말하고 합니다. 한번은 중동의 항공 모함에서 근무했던 사람이 왔는데, 그는 일상 생황 속에서도 항상 전투기가 이륙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반향실'에 다녀온 후 그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청각 능력이 다시 제로 상태로 리셋된 거죠."
극한의 고요함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 특히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 받는 참전 군인들에게 유명한 치료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무방향실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도시의 소음에서 잠시 벗어나기만 해도 큰 이점을 얻을 수 있다는 거다. 도시에 사는 사람을 공원으로 데려가면, 즉시 더 차분해지는 걸 볼 수 있다. 인류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진화했다. 자연의 소리는 인간을 평온하게 만드는 내면의 음표를 건드린다. 예를 들면, 물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인공적인 소음을 들은 사람들에 비해 스트레스 수준이 현저하게 감소하는 현상을 과학자들은 발견했다.
우리는 또한 전자 기기를 끌 때마다 찾아오는 일상의 고요를 추구하는 일이 우리의 뇌와 신체에 유익하다. 만약 도시에 살고 있다면 귀마개를 꽂거나 소음 제거 핸드폰을 쓴 채로, 집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2시간의 고요함이 우울증과 싸우고 있는 외 영역에서 더 많은 세포의 생산을 이끌어낸 것으로 연구 결과는 말하고 있다. 집이 조용한 것이 모차르트를 듣는 것보다도 더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고 했다. 또 다른 연구는 2분간의 고요가 다른 몇 가지 이완 기술에 비해 혈압과 심박수, 호흡 빈도 같은 이완 수치를 더 많이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젠 고요를 자주 즐길 생각이다. 내 동네에는 조금만 걸어 나가면 자연의 고요를 즐길 공간이 있다.
4
지난 주 성경 말씀에 “돌을 치워라.”(요한 11,39),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4)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돌은 단순히 무덤을 막는 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죽지 않았지만, 우리의 가슴 속에는 돌을 가지고 있다. 흔히 체념의 돌이다. "이제는 늦었다", "여기까지 이다" "더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돌 하나를 가지고 와 어떤 자리를 막아 버린다. 그 돌 뒤에는 아직 말하지 못한 슬픔,이 있고, 풀리지 않은 관계가 있고, 다시 시작하지 못한 삶이 있다.
상지종 신부님은 카톡에 이런 글을 올렸다.
"벗이여! 돌을 치우시게나!
믿음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불신의 돌을
희망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절망의 돌을
사랑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미움의 돌을
함께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독선의 돌을
섬김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억압의 돌을
평화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폭력의 돌을
살림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죽임의 돌을"
"돌을 치워라" 하신 말씀의 돌을 나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는 마음, 이 일을 여기서 끝났다는 판단의 돌로 읽었다. 그 돌을 치우면, 멈추어 있던 삶이 다시 길 위에 서는 거다. 멈춰 서서 더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삶이 다시 한 걸음 내딛는 일이 시작되는 거다. 우리 안에 있는 무덤도 열리는 거다. 그러니 "돌을 치워라"는 말씀은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주에 돌이 한 번 더 나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유다인들처럼 ‘돌을 집어 드는 것’과 예수의 말씀처럼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른 진실을 만났을 때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가장 쉬운 도피처이다. 하지만 예수는 약속하신다.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이 말씀은 육체적인 죽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영적인 죽음’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 안에 머물러 영원히 기억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붙들 때 영원을 살게 된다.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당신을 거부하고 돌을 던지려는 마음 안에는 주님께서 머무르실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도 내 고집과 편견이라는 돌을 들고 누군가를, 혹은 하느님의 뜻을 치려 하고 있지는 않나?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하느님 앞에 엎드려 그분의 약속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묻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내 안의 돌을 치우는 일일 것이다.
5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말씀은 <마태오 21,1-11>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와 <마태오 26,14-27,66>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이다.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믿음의 길과 배신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순명의 길과 거역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진리의 길과 거짓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순결의 길과 음모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겸손의 길과 교만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비움의 길과 탐욕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베풂의 길과 착취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섬김의 길과 억압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인내의 길과 회피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용맹의 길과 비겁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결백의 길과 오욕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영광의 길과 수치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평화의 길과 폭력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찬미의 길과 모독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희망의 길과 절망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사랑의 길과 증오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포용의 길과 배척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존중의 길과 혐오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살림의 길과 죽임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한 걸음도 멈출 수 없는 삶의 길에서
나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6
예수님과 함께 걸어 들어가야 할 나의 ‘예루살렘’은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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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3/29/주님 수난 성지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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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26장 14절─27장 6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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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성지 주일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랑의 사명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기꺼이 들어가신 예수님의 특별한 하루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고통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으시고, 오해와 죽음이 점철된 곳으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을 맞이하던 성지 가지는 곧 그분을 후려치는 가지로 돌변합니다. 환호와 찬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롱과 야유로 바뀝니다.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을 가장 잔인한 죽음으로 없앨 준비를 합니다. 군중의 흐름에 생각 없이 몸을 맡기는 삶의 위험성을 우리는 이 성지 주일에서 목격합니다. 그래서 성지 주일은 질문의 날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첫걸음은 “왜?”라는 질문을 하는 습관으로 시작됩니다. 왜 나는 이것을 선택하고 있는지, 왜 나는 이 방향으로 가고 있고, 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질문 없는 순응은 쉽게 폭력에 가담하게 하고 무감각하게 만들며, 질문 없는 신앙은 쉽게 광신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굳이 폭풍우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까? 왜 부당한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을까? 우리가 이 질문 앞에 멈추어 설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더 이상 과거의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 안으로 내려올 것입니다. 성지 주일은 답을 주는 날이 아니라, 질문을 허락하는 날입니다. 그 질문을 끝까지 품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배우는 날입니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하느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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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엽 베네딕토 신부(예수회)
생활성서 2026년 3월호 '소금항아리'에서
- 호산나: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야샤(구원)+안나(간청)의 합쳐진 말로 간구이자 메시아를 향한 찬양의 환호성.
- 종려나무, 올리브가지 측백나무는 승리와 영광을 상징로 성지(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승리하실 왕이자 구세주임을 경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주간의 시작이고, 고통을 통해 영광에 이른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마태 27ㅈㅇ 46절)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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