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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연은 신경 안정제

363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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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화두는 '자연은 신경 안정제'라는 거다. 모든 스크린 타임은 나쁘다. 다행히 나는 스크린을 멀리하고,  TV를 잘 보지 않는다. 그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픽셀로 구분된 세상에 갇혀 보내는 모든 시간이 우리 삶에 나쁜 것을 더하는 것 뿐만 아니라, 좋은 것을 빼앗아 간다는 점이다.

<트랜드 코리아 2026>의 핵심 키워드 중에 ‘짧고 강렬한 순간이 힘이 된다’는 "픽셀라이프(Pixelated Life)"가 들어 있다. 길고 무거운 경험보다 짧고 강렬한 순간이 더 오래 기억된다는 거다. 짧은 영상, 한 문장 카피, 5초의 감동이 소비자를 사로잡는다. 이처럼 ‘픽셀 단위의 경험’이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은 큰 이벤트보다 일상 속의 작은 즐거움을 더 자주 찾고 있다는 거다.

그러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즉 야외 활동을 하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 간 사람들이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이 계속 줄어든다. 왜냐하면 자연은 불편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이유이다. 자연에 나가면 적막을 경험할 수 있고, 다음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 전혀 알 수 없다. 정신분석학자 부르어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인간의 뇌는 '내가 제어할 수 있거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줘'라고 말한다"고 했다. 인간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과거에 생존에 도움이 되었던 정보를 추적하도록 진화했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면, 다음 끼니가 어디서 올지 아는 것과 같은 정보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안전망 속에 우리를 가두는 일종의 '편안함에 의한 잠식'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도전이나 김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 Wilson)은 '바이오필리아(biophilia hypothesis, 생물 친화 가설)'라는 이론을 주장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가지 상반된 본능을 가지고 있다.
▪ 환경을 통제하려는 진화적 욕망
▪ 자연 속에 존재하고자 하는 본원적 충동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 속에서 진화했고, 따라서 우리의 유전자 안에는 자연 속에 존재하면서 살아 있는 것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마치 육체와 정신과 자아에 필수 영양소가 결핍된 것처럼 이상 상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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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 들어 가면, 참호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뇌가 점점 깨어나는 느낌이 들면서, 마치 한 달 하안거(夏安居)를 마친 수도승의 뇌로 바뀐다. 바이오필리아 이론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 그런 절대 자연을 누릴 수 있는 숲이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다. 윌슨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의 심미적, 지적, 인지적, 나아가 영적 만족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했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을 천연 신경 안정제로 여겨왔다. 
▪ 기원전 1550년 무렵 이집트에는 스트레스 해소를 목적으로 설계한 '쾌락 정원'이 있었다.
▪ 기원전 500년 경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복잡한 도시 시민들의 건강을 개선하고, 도시의 평온함을 증진하기 위해 정원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 이후 거의 모든 문명에 공원과 정원이 있었다.
단지 식물을 보기 위한 목적 하나 만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일종의 기쁨을 얻는 장소들 말이다. 그러나 과학은 대개 이런 관념과 바이오필리아 이론을 점성술 정도로 취급했다. 자연이 인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단순히 자연 속에서 하는 활동, 예를 들어 하이킹 같은 운동 때문이지, 자연 자체와의 본질적인 관계 때문은 아니라고 여겼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인의 접근 방식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이 갈수록 도시 화 되고 기술 중심적인 사회가 되어가던 1980년대 초, 일본 산림청은 자연에 기반한 건강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산림욕'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핵심은 숨 속에 앉아 있기와 걷기 그리고 자연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을 장려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후에 나온 '산림욕'에 관한 연구들에 따르면, 자연 속에서 15분 정도 앉고 걷기를 하면 혈압 수치, 심 박동 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 등 모든 종류의 해로운 수치가 낮아졌다. 그리고 스트레스 수치가 높은 사람들은 단 2시간 동안 숲 속에 머물게 한 결과 불안, 우울, 적개심 등이 눈에 띄게 감소하는 현상을 관찰했다. 그 후의 많은 연구에 따르면, '산림욕'을 하면 모든 집단이 다음과 같은 개선 효과를 얻었다.
▪ 심장 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혈압 수치는 의사가 건강하다고 할 만한 수준으로 떨어졌고,
▪ 당뇨 환자들의 혈당 수준은 정상 수치에 가까워졌다.
▪ 면역 체계가 취약했던 사람들은 NK 세포(Natural Killer cells, 바이러스 및 암 세포 대응 백혈구)를 150% 더 쏟아냈다. 이 세포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감염 증을 자연스럽게 일소하는 역할을 한다.

온 세계가 아픈 사람으로 넘쳐 나고 있다. 소파나 탄산음료 판매 대에 가까워질수록 그 수는 급증한다. 만성적인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비율이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질병을 다루는 현대 의료의 방식은 불완전하다. 원인이 아니라 증상을 치료하니, 막대한 부작용이 따르는 값비싼 약을 몸 속으로 퍼붓고 있다. 그러나 숲을 걷는 것은 공짜이다. 

지금은 바이오필리아 이론을 연구하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가 생겼다. 이들은 각종 만성 질환과 과도한 스트레스, 과도한 자극, 과도한 일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야외 활동이 유력한 처방임을 밝혀냈다. 연구자들은 일, 육아, 다양한 책임으로 바쁜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자연을 쉽게 삶에 통합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내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마이클  이스터의 <<편안함의 습겨>>을 읽으며 얻은 생각들이다. 자연을 만나는 일이 좋다는 것을 알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인문 일지>에 정리하고 있는 거다.

3
시련을 피하면, 오히려 더 약해진다. "시련, 와라! 나는 다 극복할 것이다." 젊은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해초가 많아 고기 잡는데 방해가 되었다. "독한 약을 풀어서 해초를 다 없애 버려야겠다." 그러자 늙은 어부가 말했다. “해초가 없어지면 물고기의 먹이가 없어지고, 먹이가 없어지면 물고기도 없어 진다네.” 우리는 장애물이 없어지면 행복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장애물이 없어지면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욕도 함께 없어지게 된다. 오리는 알 껍질을 깨는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만, 살아갈 힘을 얻으며, 누군가 알 깨는 것을 도와주면 그 오리는 몇 시간 못 가서 죽는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시련이 있어야 윤기가 나고 생명력이 있게 된다.

남태평양 사모아 섬은 바다거북들의  산란 장소로 유명하다. 봄이면 바다거북들이 해변으로 올라와 모래 구덩이를 파고 알을 낳고 깨어난 새끼들이 바다를 향해 새까맣게 기어가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한번은 해양 학자들이 산란기 바다 거북에게 진통제를 주사해 보았다. 거북은 고통 없이 알을 낳았다. 하지만, 거북은 제가 낳은 알을 모조리 먹어 치워 버렸다. 과학자들은 고통 없이 낳은 알이라, 모성 본능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만약 밝은 대낮만 계속 된다면, 사람들은 며칠 못 가서 다 쓰러지고 말 것이다. 누구나 어둠을 싫어하지만 어둠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 갈 수 있다. 낮도 밤도 모두 삶의 일부인 것이다. 다들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대하고 소망 한다. 그러나 어둠이 있어야 빛이 더욱 빛나듯 시련이 있어야 삶은 더욱 풍요로워 진다.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수많은 시련 중에 내가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시련이 닥쳐 올 것이다. 때론 그 시련을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이 더욱더 윤기가 나고 또 다른 행복감을 안겨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해 오늘 다가오는 어떠한 시련도 좌절하거나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꿋꿋하게 헤쳐 나가자. 다짐하는 아침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노해 시인의 시 한 편을 공유한다.

거친 길을 걸어라/박노해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거친 음식을 먹어라

야생의 대지에서 거칠게 자라난
야채와 곡식을 거친 상태로 먹고
햇살과 바람의 거친 땅을 걸어라

병을 달고 죽고 싶으면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라

흰 쌀과 흰 밀가루와 살찐 고기를
부드럽게 가공한 상태로 먹고
편리한 도시공간을 바퀴로 달려라

인생에서 중요한 게 건강뿐일까

네 영혼도 사랑도 마음의 평화도
거친 진실과 정의를 씹어 먹어라
거친 저항과 시련의 길을 함께 걸으라

4
최근 핫 한 시대의 뉴스를 점검한다. “권리에는 의무,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 문장은 인문 운동가가 자주 해야 하는 말이다. 이건 기본이다.

SBS 노조의 인식이 위험한 이유는 “언론 자유"를 “오보 책임"과 맞바꾸려는 데 있다. 이번 논란의 출발점은 간단하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2018년 방송에서 이재명 당시 지사 관련 의혹을 다뤘고, SBS가 2026년 3월 20일 “확실한 근거 없이 의혹을 제기했다"는 취지로 사과 입장을 냈다. 그 뒤 노조는 대통령의 사과 요구를 “언론 길들이기” “언론 독립 침해"로 규정하며 반발했다. 대통령은 “권리에는 의무,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언론 자유는 특권이 아니다"라고 맞받았다. ​여기서 노조가 놓친 핵심이 있다. 권력 감시는 언론의 사명이다. 그러나 감시가 허술한 근거 위에 서면, 감시는 공익이 아니라 피해가 된다. 이번 사안은 “권력이 보도를 막으려 한다"라기보다, “당사자가 오보로 인한 피해를 문제 삼고 사과와 정정을 요구한다"에 더 가깝다. SBS가 사과를 했다면, 최소한 그 사과의 취지와 같은 방향에서 책임의 언어가 먼저 나와야 했다. 

그런데 노조는 사과 요구 자체를 탄압 프레임으로 밀어 넣었다. 이 순간, 언론 자유는 시민의 권리가 아니라 언론 조직의 방패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언론 자유는 ‘무엇이든 말할 권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보도할 의무, 잘못했을 때 고칠 책임을 포함한다. 대통령의 메시지에서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 대목은 원칙론이지만, 이 원칙론이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언론이 가장 먼저 꺼내야 할 문장이다. 그런데 노조가 이 원칙을 거꾸로 세우면, 시민은 “언론은 남을 검증하면서 자기 오류는 면책하려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이 언론 신뢰를 더 빠르게 무너뜨린다.

​노조의 주장에는 또 하나의 착시가 있다. “사과 요구-외압"이라는 단순화이다. 외압은 취재와 편집의 독립을 침해하는 권력의 강제다. 반면, 사과와 정정 요구는 ‘보도의 결과'를 두고 책임을 묻는 문제다. 물론 권력자가 언론을 겁주려 사과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한 기준이 “그 보도가 사실에 부합했는가, 근거가 충분했는가, 당사자의 반론이 제대로 반영됐는가"다. 이번에는 SBS가 스스로 “근거 없이 의혹을 제기했다"는 취지로 입장을 냈다. 그렇다면 노조가 해야 할 일은 ‘언론 길들이기'라는 거친 딱지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고 어떻게 재발을 막을지에 대한 구체적 약속이다.

언론은 권력을 견제하며 사회적 감시 역할을 한다. 동시에 언론도 권력이다. 노조가 “권력을 감시한다"는 말만 앞세우면, 언론이 가진 영향력과 책임은 사라진다. 그 결과는 뻔하다. 정정과 사과의 기준이 약해지고, 논란이 생기면 ‘언론 자유'로 덮는 습관이 남는다. 시민은 그 습관을 가장 싫어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언론 자유는 지키되, 오보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것이 성숙한 언론의 자세다. 노조가 진정으로 언론의 독립을 말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언론의 책임을 선명하게 말해야 한다. 책임을 회피하는 독립은 독립이 아니라 특권으로 보인다. 지금 SBS 노조가 놓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아침에 만난 내 생각과 같은 글을 페이스북에서 만났다.

5
오늘은 사순 제5주간 화요일로 말씀은 <요한 8,21-30> "예수님의 신원"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갈 수 없는 데>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내가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바로 너입니다

악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바로 선입니다

어둠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바로 빛입니다

불신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곧 믿음입니다

절망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곧 희망입니다

미움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곧 사랑입니다

거짓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곧 참입니다

독선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곧 함께입니다

죽임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곧 살림입니다

탐욕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곧 사람입니다

폭력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곧 평화입니다

우상이
가려하지 않으니
바로 곁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데
바로 하느님입니다

6
내가 마주해야 할 ‘십자가의 자리’는 어디인가요? 나는 이를 통해 하느님과 나를 알아가고 있나요?

2026/3/24/사순 제5주간 화요일⠀
요한 복음 8장 21-30절: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하느님과 나 자신을 알아보는 자리
십자가는 치욕스러운 죽음과 형벌의 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진정 누구이신지를 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역설을 예고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가 드러나는 자리일 뿐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기 위해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 자리입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자리, 외면하고 싶지만 결국 마주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전혀 다른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끝까지 자신을 비우시며, 인간이신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시죠. 그 비움의 순간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신다는 진리가 십자가 사건 안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의 강생은 인간의 시간을 중립적인 흐름이 아니라, 끊임없는 선택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복음을 듣는 이는 누구나 인격적인 결단으로 초대받습니다. 특히 십자가 앞에서 그 초대는 가장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철저히 무력해 보이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외면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사순 시기는 매년 우리에게 다시 주어지는 결단의 시간입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껴안을 것인지, 그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과 나 자신을 새롭게 만날 것인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정강엽 베네딕토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3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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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화요일입니다. 이제 성주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 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독이 퍼져 죽을 수도 있고, 다시 살아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걷다 지쳐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냅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그들은 매일 내리는 만나의 기적을 잊어버렸습니다. 감사가 사라진 자리에 불평이 생기면, 우리 영혼에는 ‘불 뱀’이 나타납니다. 불평은 주변 사람뿐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을 먼저 중독시킵니다. 감사가 메마른 삶은 그 자체가 광야이며, 서서히 죽어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평은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독입니다.

하느님은 불 뱀에 물린 이들을 위해 묘한 처방을 내리십니다. 뱀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뱀 모양을 한 구리 뱀을 기둥에 달아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왜 하필 뱀일까요? 그것은 내가 저지른 죄, 나를 아프게 한 상처를 똑바로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나의 잘못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나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바라본 이들이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내 안의 어둠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바라볼 때, 비로소 치유의 빛이 들어옵니다. 치유는 상처를 직면할 때 시작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들어 올려질 것을 예고하십니다. 구리 뱀이 기둥에 달렸던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라는 기둥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실패와 수치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당신의 정체성, 곧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그 안에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의 진짜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을까요? 내게 피해를 준 남의 잘못만을 주시하며 분노하고 있나요? 아니면, 내게 없는 것, 부족한 것만 쳐다보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제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겨야 합니다. 불 뱀이 기어 다니는 땅바닥, 곧 불평과 미움 대신, 구리 뱀이 달려 있는 기둥, 곧 회개와 자비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온 몸을 내어주신 십자가 위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입에서 불평이 나오려 할 때마다 십자가를 한 번 더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명도 잃지 않고 살려내기 위해 그 높은 곳에 달려 계십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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