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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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디지털 기기에 '중독'되어 있다. 여기서 중독은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부르어 박사는 스마트폰을 "주머니 안의 슬롯머신"이라고 표현했다. SNS의 숫자 표시는 사용자가 앱을 열자마자 불과 몇 초 안에 뜨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 짧은 기다림은 마치 슬롯 머신의 바퀴가 맞춰 지길 기다리는 시간과 동일하다. 사람들을 계속 앱으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활용한 것이다. 실리콘 밸리의 천재들은 빅데이터를 통해 어떤 트릭이 우리를 끌어들일지 정확히 알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있다. 그건 진화의 역사를 보면 필연적이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가 이러한 생존 전략을 개발해온 이유는, 먹을 것이 잇는 곳을 기억하고 있어야 굶어 죽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을 것을 보고, 그것을 먹고 나면, 위가 뇌에 신호를 보내서 좋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화학 물질인 도파민을 분비하게 한다. 이 물질은 코카인이나 엑스터시 같은 약물을 흡입했을 때나, 폭식을 할 때, 섹스를 할 때, 도박을 할 때, 혹은 무엇이든 즐길 만한 일을 하고 있을 때 분비된다. 다음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자극, 행동, 보상이다. 그런데 이 뇌 내 과정이 오늘날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예전에는 음식이 자극 요인이었다면, 요즈음은 따분함이 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은 들어가거나 자신의 뉴스 피트나 인스타그램을 확인 하는 거다. 그렇게 따분함을 벗어난다. 이렇게 들뜬 상태가 되면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게 보상이다.
역설적인 사실은 인류의 생존에 도움을 주었던 이런 메커니즘이 오늘날에는 인간의 건강에 해가 되고 있다는 거다. 이제 사람들은 힘든 것을 참지 못한다. 즐겁지 않은 기분, 예를 들어 따분함 같은 게 느껴지면 예전에는 그냥 그 상태에 머무르면서 뭔가 생산적인 배출구를 찾아냈다.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정신을 딴 데로 돌리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스마트폰은 "정신을 위한 정크 푸드"(댄거트)가 된다. 우리가 따분함을 죽이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꺼내거나 컴퓨터나 티브이를 켤 때마다, 스트레스 수용력이라는 배에는 조그만 닻이 새로 생겨 배를 더 깊은 곳으로 끌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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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주립대 연구진에 의하면, 줄 서기나 기다리기 같은 일상적인 스트레스 요인들을 가만히 견뎌내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뇌 질환에 대한 저항 력이 향상된다고 했다. 뇌 건강에 도움을 주는 일상적인 스트레스 요인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우리를 심리적으로 더 건강하고 활력 있게 만들어주는 것 이외에, 따분함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막대한 장점이 바로 창의력을 키워준다는 거다. 따분함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찾다 보면 창의력이 발동한다.
우리는 따분함을 다루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래야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인스타그램을 뒤지는 것보다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으로 따분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따분함이 더 창의적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맞지 않다. 따분함은 우리를 더 창의적으로 만들지 않고 다만 우리한 테 "뭔가 해!" 하고 말한다. 그 '뭔 가'가 우리 마음을 비집중 모드로 이끌어준다면, 보통 사람들처럼 미디어로 머릿속을 덮어버리는 대신, 따분함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말 그대로 다른 파장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게 사실 창의성이 살아나는 방식이다.
쏟아지는 정보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바라게 된다. 이곳에 있으면 저곳에 가고 싶고, 여기에서 저기를 꿈꾼다. 이런 이유로 어떻게 모든 것을 해낼 것이냐 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더 소중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마음에 ‘빈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호흡을 수련 하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과거, 미래의 생각을 알아채고, 현재로 돌아와 바로 여기에 머무는 명상은 오래전부터 현자들의 지혜였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스마트폰으로 오염되고 분절된 시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멍’이다. 타닥타닥 타 들어 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불멍’부터 호숫가에 앉아 잔 물결을 바라보는 ‘물멍’, 한강이 보이는 호텔에 앉아 차를 바라보는 ‘차멍’, 집중해서 간식을 먹거나 노는 반려견을 하염 없이 바라보는 ‘멍멍’은 현대인이 특별한 수련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상의 명상’이다. 멍해지는 동안 시간은 느려지고, 잡념은 옅어 지고, 호흡과 맥박이 안정되는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과열된 뇌를 식히는 것이다. 쉬는 것과 잘 쉰 것 같은 느낌은 다르다. 최근 각광 받는 ‘간헐적 단식’ 역시 내장 기관에게 주는 휴식이다. 불멍은 ‘뇌’에게 주는 휴식이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필요한 건 훈련이 아니라 휴식이다. 마음이 부러진 사람 역시 그렇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멍 때릴' 필요가 있다는 거다. '멍 때리기'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판단 중지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니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자기 방어 기재로 쓰는 거다. 자기만의 진공 상태를 만드는 거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에, 노아의 방주처럼 진공의 배를 만드는 거다. '멍하다'는 말은 외국어로 번역이 안된다. 이를 위해, 나는 생각에 "괄호"를 치곤 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말이다.
괄호처럼/이장욱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거기서 너와 함께 살아온 것 같았다.
텅 빈 눈동자와 비슷하게
열고
닫고
저 너머로 달아나는 너를 뒤쫓는 꿈
내 안에서 살해하고 깊이 묻는 꿈
그리고 누가 조용히 커튼을 내린다.
그것은 흡.
내가 삼킬 수 있는 모든 것
오늘의 식사를 위해 입을 벌리고
다 씹은 뒤에 그것을 닫고
그 이후 배 속에서 일어나는 일
몸에 창문을 만들지 않아도 가능한 일
블라인드를 올리지 않아도
길을 걷다가 조금씩 숨이 막힐 것이다.
발을 헛짚어 뚝.
꺼지는 구덩이가 되어
이제 모든 것이 너를 포함할 것이다.
가만히 제 눈꺼풀을 열어보는 사람이 되어
무서운 어둠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너의 모든 것을 품고 싶은 것이다.
커다란 기념 수건으로
잠든 네 입을 꼼꼼히 틀어막는
이 기나긴 시간처럼)
3
195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스 폴 토런스(Ellis Paul Torrance)는 미국의 교실에서 뭔가를 이상한 범을 발견했다. 교사들은 주로 얌전하고 독서량이 많아 아는 것이 많은 학생을 선호했고, 에너지가 넘쳐 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아이들, 가령 예문을 읽고 엉뚱한 해석을 내놓거나, 숙제를 안 한 이유를 발명해내며, 과학 실험을 하는 날이면 괴짜 과학자처럼 행동하는 학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교육 시스템은 이런 아이들을 '문제아'로 여겼지만, 토런스는 이런 학생들이 오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현실 게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은 하나같이 해답을 책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답이 책에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때 창의력이 필요하다.
토런스는 일생을 바쳐서 창의력과 그 유용성을 연구했다. 그가 1958년에 창안한 '토런스창의력 테스트(Torrance Test of Vreative Thinking)'는 창의력을 측정하는 표준이 되었다. 토런스 이 테스트로 미네소타주의 공교육 시스템에 속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시험을 실시했다. 시험 문항 중에는 장난감을 보여주면서 "이걸 더 재미있게 만들려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하는 질문이 들어 있었다. 모든 아이들의 점수를 분석한 뒤 추적 조사를 계속하며 생애 업적을 조사했다. 2003년에 토런스가 사망한 이후에도 연구는 지속됐다. 아이들 중 누군가 책을 썼거나 사업을 시작했거나 특허를 출원했다면 그 사실을 기록했다. 모든 생애를 꼼꼼히 기록한 후 이 거대한 추적 조사가 발견한 것은 기존의 지능에 관한 고정관념에 주요한 의문을 제시했다.
초기 테스트에서 더 많은 아이디어와 더 나은 아이디어를 낸 아이들이 가장 성취를 많이 한 성인이 되었다. 이들은 뛰어난 발명가, 건축가, CEO, 대학 총장, 작가, 외교관 등으로 성장했다. 사실 토런스의 테스트는 IQ 테스트를 훨씬 능가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연구에 참여했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창의력은 IQ 점수보다 학생들의 성취를 예측하는 데 세 배 더 정확한 지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창의력의 주요 동력 중 하나였던 "마음의 유랑(mind-wandering)'을 사실상 없애버렸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월리엄엔메리대학교의 한 연구자는 1950년 이후 실시한 30만 건의 토런스창의력테스트를 분석한 결과, 1990년부터 창의력 점수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인류가 현재 '창의력 위기'에 직면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원인으로 '늘 바쁘고 할 일이 넘쳐 나는 현대인의 생활'과 '전자 오락 도구들과 상호 작용하는 시간의 지속적 증가'를 지목했다. 나쁜 소식이다. 특히 근력보다는 뇌를 쓰는 일이 훨씬 많은 오늘날의 경제에서 창의력이야 말로 핵심적인 능력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다.
생산성 전문가들이 사람들에게 심고 있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과 실적을 향상 시키는 핵심은 '가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마음의 유랑' 상태는 우리를 색다르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고유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게 해준다. 스티브 잡스도 "나는 따분함을 신봉하는 쪽입니다.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낸] 모든 것이 대단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 역시 충분히 대단할 수 있습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단한 발언이다. 오늘날 따분함은 좀처럼 흔치 않은 현상이라, 누군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거슬러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 '휴대폰 사용 줄이기'보다 '따분함을 늘리기'가 더 생산적인 선택이 될 것 같다. <<편한함의 습격>>의 이 부분을 읽고, 실제로 나는 휴대폰 사용을 가능한 한 줄이고, 따분한 시간을 더 늘리며 "마음의 유랑"을 즐긴다. 특히 숲 속 산책을 할 때는 이어폰을 끼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버려두고 자연의 숲 소리를 들으며 '멍 때리듯이 걷는다. 그러면 머리가 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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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3월 22일 오늘은 유엔(UN)이 지정한 “세계 물의 날"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념하며 ‘물의 소중함'을 소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물’을 너무 가볍게 소비하고 있다. 수도꼭지를 틀면 언제든 나오는 물, 그것이 얼마나 희귀한 자원인지 체감하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는 물을 ‘항상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세계의 절반은 그렇지 않다.
지구에는 약 13억 8600만 km³의 물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중 97.5%는 바닷물이다. 인간과 생태계가 사용할 수 있는 담수는 2.5%에 불과하며, 실제로 쉽게 접근 가능한 물은 전체의 0.01%에도 못 미친다. 인류 문명은 이 극도로 제한된 물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을 너무 쉽게 소비하고 있다. 전 세계 물 사용의 약 70%는 농업, 20%는 산업, 10%는 생활 용수로 쓰인다. 우리가 마시는 물은 전체 사용량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 ‘일부’ 조차도 불평등하게 분배 돼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 에서는 물을 얻기 위해 하루의 절반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아프리카 사하라 남 지역의 많은 여성과 아이들은 매일 물을 얻기 위해 하루 2~4시간을 걸어 우물이나 공동 수도로 이동하는 일이 일상이다. 그마저 도 그들이 가져오는 물은 깨끗하지 않다. 오염된 물은 질병을 낳고, 질병은 삶을 갉아먹는다. 물은 그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다. 그러나 같은 지구에서 한국을 비롯한 많은 도시 사회에서 물은 소비재가 돼 버렸다. 우리는 아침에 샤워를 하고, 저녁에 다시 샤워를 한다.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채 설거지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세탁기와 식기 세척기는 매일 돌아가고, 수도는 아무 생각 없이 틀어 놓는다. 여름철에는 하루 두 번 이상 샤워하는 것이 일상 화 되어 있다. 물은 더 이상 생존의 조건이 아니라, 편리함과 쾌적함을 유지하기 위한 소비재가 돼 버렸다.
세계자원연구소(WRI)에 따르면 전 세계 25개국이 ‘극도로 높은 물 스트레스’ 상태에 있다고 경고한다. 이들 국가에는 약 20억 명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인권의 문제다. 국가 별 물 상황을 보면 이 불균형은 더욱 극단적이다. 브라질, 캐나다, 러시아와 같은 국가는 막대한 담수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중동과 북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는 극심한 물 부족 상태에 놓여 있다. 특히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물 스트레스 국가들이다. 이들 국가는 물을 ‘생산’해야 한다. 해수를 담수화하고, 식량을 수입하며, 생존을 유지한다.
대한민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물이 풍부한 국가로 인식되지만, 그러나 국제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실제로는 재생 가능 수자원의 상당 부분을 이미 사용하고 있는 ‘고 스트레스 국가’에 속한다. 높은 인구밀도, 산업 집중, 그리고 계절 별 강수 편차로 인해 물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물 압박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 인가? 우리는 물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수도 시스템은 물을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편리함은 물의 희소성을 감췄다. 우리는 물이 어디서 오는지, 얼마나 제한된 자원인지, 얼마나 많은 생태 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물 부족은 ‘다른 나라 이야기"로 치부 되고, 우리의 과소비는 ‘생활의 편리 함’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우리가 낭비하는 물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 물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키는 구조의 일부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생태계의 물’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과 습지, 숲은 단순한 자연 경관이 아니라 물을 저장하고 정화하며 순환 시키는 자연 시스템이다. 특히 식물은 물을 흡수해 대기로 방출하는 '증산작용(transpiration)'을 통해 구름과 비를 만들어낸다. 숲은 비를 만들고, 습지는 물을 정화하며, 토양은 물을 저장해 홍수와 가뭄을 완화한다. 물은 인간이 생산하는 자원이 아니라, 생태계가 만들어내는 흐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스템을 수시로 파괴하고 있다. 습지를 매립하고, 강을 콘크리트로 직선화하고, 숲을 제거하고 물의 순화 시스템을 파괴하고 있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한쪽에서는 가뭄이, 다른 한쪽에서는 홍수가 동시에 발생하는 극단적 불균형이 증가하는 ‘물의 극단 화’가 진행되고 있다.
기후 위기의 본질은 온도가 아니라 결국 ‘물의 위기’이다. 비가 오지 않거나, 너무 많이 오는 것, 이것이 바로 기후 위기의 핵심이다. 21세기의 물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좌우하는 권력이며, 국가 간 갈등의 핵심 요인으로 이미 세계 곳곳에서 물을 둘러싼 분쟁이 증가하고 있다. 물은 21세기의 석유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자원으로 물의 부족은 식량 위기와 에너지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하루 몇 시간을 걸어 물을 구하는 사람들과, 한국같이 하루 두 번 샤워를 하는 사회는 같은 지구에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현실 속에 존재한다. 이 불평등은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다음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과연 물을 정당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물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물은 상품이 아니라 권리이며, 동시에 책임이다. 인간이 물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와 함께 물을 ‘회복’해야 한다. 농업, 산업, 도시, 그리고 자연이 함께 사용하는 새로운 물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유엔이 ‘세계 물의 날’을 만든 이유는 단순하다. 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물을 잘못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물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많은 물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물의 흐름을 되살리는 것이다. 덜 쓰고, 더 공정하게 쓰고, 자연과 함께 순환 시키는 것 그것이 물 위기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배병호 생물다양성 기자의 글을 갈무리 한 것이다. 공유할 의미가 있다. 출처 : SDG뉴스(http://www.sdg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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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제5주일로 말씀은 <요한 11,1-45>으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다" 이다.
그때에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벗이여! 치우시게나! 나오시게나! 걸어가 스미어 그리 되게나!>
“돌을 치워라.”(요한 11,39)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4)
벗이여! 돌을 치우시게나!
믿음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불신의 돌을
희망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절망의 돌을
사랑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미움의 돌을
함께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독선의 돌을
섬김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억압의 돌을
평화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폭력의 돌을
살림에로의 길을 막고 있는 죽임의 돌을
벗이여! 이리 나오시게나!
불신에서 믿음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절망에서 희망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미움에서 사랑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독선에서 함께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억압에서 섬김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폭력에서 평화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죽임에서 살림에로 머뭇거리지 말고 한걸음에
벗이여! 걸어가 스미어 그리 되게나!
믿음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믿음이 되게나
희망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희망이 되게나
사랑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사랑이 되게나
함께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함께가 되게나
섬김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섬김이 되게나
평화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평화가 되게나
살림에로 걸어가 스미어 마침내 살림이 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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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은 어떤 돌로 막혀 있나요?
2026/3/22/사순 제5주일
요한 복음 11장 1-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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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의 돌들
마르타와 마리아의 눈에 예수님은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분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뜻밖의 말씀을 하시죠. “돌을 치워라.” 무덤은 단순히 죽은 이를 묻은 장소가 아닙니다. 무덤은 하느님의 말씀이 더 이상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믿음과 사랑, 희망과 기쁨이 묻혀 있는 우리의 내면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무덤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느슨해지고, 자기 안에 성을 쌓아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면, 그곳이 바로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치우라고 하십니다. 그 돌은 죽음과 생명을 갈라놓는 경계선이자,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어 온 방벽이며 갑옷이죠. 그 돌 덕분에 상처받지 않을 것 같고,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것 같고, 더 깊은 고통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돌은 우리를 생명에서 완전히 단절시키는데, 여러 모습으로 우리 삶 곳곳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틀릴 리 없다는 신념의 돌, 사람을 단정 지어버리는 편견의 돌, 습관과 고정 관념의 돌, 집착과 두려움의 돌, 체면과 거짓의 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무덤을 막아 놓은 돌에 압도됩니다. 우리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덤 안의 죽음이 무덤 밖의 삶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을 치우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의 정체를 알아보고, 그 돌을 치우기로 결단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무덤 밖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리 나와라.” 정강엽 베네딕토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3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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