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20일)
1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春分)이다. 말 그대로 하면, '봄을 둘로 나눈 중심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춘분'은 '한봄', 봄의 한가운데란 뜻으로 읽히고, 영상과 영하로 나누어 기온이 더 이상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기준이 되는 날로도 읽힌다. 물론 둘로 나눈(분) 듯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라는 뜻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제 '하지'까지 낮이 계속 길어지고, '추분'이 오기까지는 낮이 밤보다 조금이라도 더 긴 '빛의 계절'을 살게 된다.
'춘분'이 되면, '경칩'에 깨어나 기지개를 켠 자연의 모든 것들이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덤불 속에, 가지 끝에 숨겨둔 '봄의 쪽지'를 찾아 산책하는 계절이다. 원래 산책(散策)이란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니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산보(散步)'도 있다. '바람을 쐬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멀지 않은 곳을 이리저리 천천히 거니는 것으로 산책과 거의 같은 뜻이다. 둘 다 불필요한 것을 털어내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산책의 한자어인 '散策'은 '흩을 산'과 '꾀 책'으로 이루어진 단어로 '한가로이 걷는 것'과는 다르게 '계획적이고 계산적이며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꾀 돌이 생각을 흩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책이란 '아무 생각 없이 한가롭게 거닐며 잔머리 굴릴 생각들을 날려버리는 행위'가 된다. 예를 들어 '인문 산책'이란 말에서 '산책'은 부담 없이 둘러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산책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더 깊이 사유해 볼 생각이다.
그러나 '춘분'에 하는 산책은 다르다. '봄 찾기', 아니 '봄의 신호', '봄의 쪽지'를 찾는 행위이다. 보려 하는 사람만이 보게 되는 자그마한 봄의 단서들, 겹겹이 오므린 꽃송이나 새싹은 실제로 여러 번 접힌 쪽지를 닮아 있어 더 반갑다. 어렸을 때 소풍을 가면 선생님들이 미리 바위틈이나 덤불 속에, 소나무 가지 위에 숨겨둔 쪽지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춘분 무렵은 연중 산책 생활이 가장 바빠지는 시기이다. 나뭇가지도, 덤불도, 땅 위의 새싹도, 꽃망울도 하루 지나면 하루 만큼씩 달라져 있어서 도무지 산책을 거를 수 없기 때문이다.
2
옛사람들은 봄의 첫 달을 맹춘(孟春), 둘째 달은 중춘(仲春), 마지막 달을 계춘(季春)이라 불렀다. 맏이 '맹(孟)'은 첫째, 버금 '중(仲)'은 둘째, 끝 '계(季)'는 막내이니 봄의 세 형제라 볼 수 있다. 절기로 보면 입춘과 우수는 '맹춘' , 경칩과 춘분은 '중준', 청명과 곡우는 늦봄 '계춘'에 해당한다. 봄이 짧다고 말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봄은 산과 들에 꽃이 만발한 정명 무렵의 모습이다. 봄을 그렇게만 알고 그것 만을 봄이라 부르니, 이미 봄이 곁에 와 있는데도 봄을 기다린다. 입춘부터 곡우까지, 모든 모습이 다 봄이다. 그걸 알게 되면 봄이 짧다는 말 대신 눈 앞의 봄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우수의 절기에 봄을 인문 적으로 말하면, 나무이다. 봄은 목요일, 나무이다. 그리고 맹자가 말하는 인(仁)이고, 그것이 밖으로 나오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따뜻한 사랑이다. 오늘도 남이 나와 다르지 않으니, 내가 대접 받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해주라는 Golden Rule(황금률)을 실천하는 멋진 날이 되길 노력하였다.
봄은 반전(反轉)이다. 봄은 어떻게 오는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웃으니 햇볕이 따뜻한 봄이 온다고 한다. 모든 것들이 지구의 중력에 지배를 받지만, 사랑이 동반된 봄의 새싹들은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쏫아오른다. 신비스럽고 장엄하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말이다. 그것은 다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자 친정 어머니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뜨거운 여름이 폭죽처럼 터지다, 가을로 무르익어 가더니만, 온 땅을 초토화 시키는 겨울이 온다. 앙상한 가지만이 해골처럼 남았던 겨울, 푸름이 허물어져 잿빛으로 나뒹구는 땅, 강철같이 단단한 바람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던 계절. 누가 이토록 절망하였기에 겨울이 왔던 것일까? 그러다가 갑옷같이 단단한 나뭇가지의 살갗을 터뜨리며 어린 새순이 솟아나는 봄이 온다. 누가 절망에서 깨어나 새로운 희망을 키워냈을까? 죽은 듯이 황폐했던 땅을 뚫고 풋풋한 새싹이 싱싱한 발톱처럼 돋아난다. 오늘 아침은 이 신비스러운 계절의 변화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야기 해본다.
신화는 이렇게 설명한다. '많은 것을 키워내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외동딸 페르세포네를 얻는다. 데메테르는 땅에 자라는 식물을 주관하는 일을 한다. 그녀가 활기차게 움직일 때, 땅은 아름다운 꽃과 풍요로운 곡식과 과일을 만들어 준다. 그녀에겐 “우윳빛 팔을 가진” 아름답고 사랑스런 페르세포네라는 외동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의 혼백이 살고 있는 저승세계의 왕 하데스가 그 예쁜 딸을 납치해간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것이라면 모두가 가길 두려워하는 지하의 세계로 데려간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정신 없이 딸을 찾아 헤매다가, 자신의 딸을 남편인 제우스의 묵인 속에 하데스가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자신의 딸을 납치해 지하세계로 데려간 사실을 알아챈다. "남편이 자신의 딸을 오빠에게 넘기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던 데메테르는 앙심을 품고 자신이 맡은 일을 거부하고 요즈음 식으로 파업을 한다. 딸을 잃은 그녀가 땅에서 손을 떼자, 땅은 점점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렸고, 앙상하게 뼈를 드러냈다. 꽃이 색과 향을 잃고 시들어갔다. 곡식과 과일이 더는 열리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진 인간 세계는 흉흉하게 메말라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굶주려 죽어갔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제우스는 '비서실장' 역할을 하던 헤르메스를 통해 하데스와 협상한다. 협상은 페르세포네가 일 년의 3/1은 하데스와 함께 있되, 나머지 3/2는 자신과 함께 밝은 세상에서 지낼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봄이 찾아 오는 계절은 이렇게 해서 변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리스인들은 이해했다. 페르세포네가 땅 위로 나와 자신의 친정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보내게 될 때, 데메테르는 행복해 웃으며 기뻐하니 새싹은 돋아나고 곡식이 익어간다는 것이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하지만 가을이 깊어 가면 페르세포네는 다시 땅을 떠나 죽은 자들의 혼백이 머무는 지하의 세계, 남편인 하데스의 곁으로 가야만 한다. 홀로 남은 데메테르는 곧 외로움의 고통에 시름시름 앓으며, 일을 하지 않는다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 계절이 변하여 찬바람이 부는 것은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의 이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데메테르의 우울에서 겨울의 혹독함은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로마 시대(오비디우스)로 오면,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가 케레스와 프로세르피나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딸 프로세르피나가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반은 어머니와 보내고, 반은 남편과 보내는 식으로 이야기 바뀐다. 겨울이 더 길어지는 것이다. 그리스의 계절 변화와 로마의 계절 변화가 차이가 나는 것이다. 페르세포네가 죽음의 세상을 나와 밝은 땅위에서 데메테르를 만나는 까닭에 대지의 여신이 행복해하며, 사랑의 힘으로 싹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며 새들이 노래하고 세상이 깨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녀가 웃으니 햇볕이 따뜻하다는 것이다.
3
이제 춘분이 지나면, 꽃들이 각각 신고식을 할 것이다. 그런데 봄 꽃은 작고, 무리를 지고, 잎 보다 먼저 핀다. 꽃이 피려면 오랜 기간 추위와 어둠을 견뎌야만 한다. 밤이 낮보다 길어야 하고, 추위가 물러가야 한다. 겨울이 춥다고, 어둠이 싫다고 방안에 들여놓은 꽃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한다. 봄 꽃은 작고 연약하며 향기가 강하고 무리 지어 피지만 잎이 없다. 이른 봄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꽃 망우리를 먼저 터트려야 하고, 잎이 나중에 나와야 한다. 하나를 얻으려고 하나를 버린다. 봄 꽃은 추위와 어둠의 결핍으로 작지만 강한 향기와 무리를 얻는다. 어쨌든 꽃은 그저 온도의 변화를 정직하게 따를 뿐이다. 쭉쭉 오르는 기온에 시간을 다퉈 숨 가쁘게 피었다 진다.
봄에는 참 여러 가지 꽃들이 핀다. 그러나 순서가 있다. 제일 먼저 봄을 기다리는 꽃은 동백꽃, 성급해서 눈 속에서 핀다. 그 다음은 버들 강아지-갯 버들 꽃, 다음은 산수유와 매화 그리고 목련이 이어진다. 병아리가 생각나는 개나리가 거리를 장식하는 동안, 명자나무 꽃, 산당화 그리고 진달래가 봄 산을 장식한다. 바닷가에서는 해당화가 명함을 돌린다. 다음은 벚꽃이 깊어 가는 봄을 알린다. 그 사이에 마을마다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이 이어진다. 3월엔 개나리와 진달래, 4월엔 목련과 벚꽃, 5월엔 라일락이 피면서, 적어도 매화와 산수유가 봄을 앞서 알리고, 그 끝자락에 철쭉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우리 동네 주막 공원에는 산수유 꽃이 활짝 피어 하늘이 노란 물이 들었다. 작가 조용호는 꽃 기행 산문 집 <<꽃에게 길을 묻다>>에서 “산수유 꽃은 두 번에 걸쳐 피어난다"고 했다. “처음에는 알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 겉 꽃잎이 먼저 피고, 겉 꽃이 열리면 다시 속 꽃잎이 별처럼 화사하게 터져 나온다.” 그러니 산수유 꽃은 자세히 들여다봐야 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한 해를 잘 보낸다는 것은 계절을 더 잘게 나누어 둔 절기가 '지금' 보여주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것이다. 네 번이 아니라 스물 네 번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는 일이다. "이래서 지금이 좋아", 할 때의 지금이 계속 갱신되는 일, 제철 풍경을 누리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고 틈틈이 행복해지는 일을 할 생각이다. 나는 이 봄을 좋아한다. 그 봄의 풍경과 꽃 이야기를 <인문 일지>에서 계속 공유할 생각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이문재 시인의 <봄날> 두 편이다.
봄날/이문재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 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 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봄날 2/이문재
봄이
새끼발가락 근처까지 왔다
내 안에 들어 있던
오랜 어린 날이
가만히 고개를 내민다
까치발을 하고 멀리 내다본다
봄날이 환하다
내 안에 들어 있던
오랜 죽음도 기지개를 켠다
내 안팎이
나의 태어남과 죽음이
지금 여기에서 만나고 있다
그리 낯설지 않다
봄날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흙냄새가 바람에
바람이 흙냄새에 얹혀진다
햇살이 봄날의 모든 곳으로
난반사한다 봄날의 모든 것이
햇볕을 반가워한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우리 우리들이다
새끼발가락이 간지러운 이른 봄날
나는 이렇게 우리다
우리들이 이렇게 커질 때가 있다
4
그리고 이 번 주부터는 주말 농장에 나갈 생각이다. 채소 밭을 갖고 흙을 가까이 하며, 살아 있는 생명을 가꾼다는 것은 좋은 삶의 경험이다. 자기가 뿌린 씨앗에서 싹이 트고, 떡잎이 나와 펼쳐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뿌듯해 진다. 그리고 낡고 닳아가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살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말에 나가 흙을 만나는 것은 잃어버린 신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삶의 해답을 찾고 싶은 것이다. "현대적 가난"(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한계점을 지니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 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주말농장 일을 배우면서 소비를 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 그리고 신체성을 회복해 차를 이용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다리의 힘을 기르고, '위험에 스스로 대처하는 능력'을 키운다.
<여우숲 생명학교> 김용규 교장은 삶에 필요한 단 두 가지의 능력, 더 나아가 온전한 삶을 사는 데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능력만 갖추면 족하다고 했다. 나도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 → 생존 능력
▪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 갈 힘" → 사랑 능력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란 '생존 능력'이다. 혼자 스스로 감당하는 거다. 남의 도움을 최소화 하는 일이 그 힘에서 나온다. 거기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 시키는데 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 인간은 무엇인 가를 욕망하고,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욕망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 시킬 수 없다.
이를 위해, 소유를 최소화 하고, 자신을 자발적 가난 상태에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간절해야 우리는 마음을 먹고, 그 마음에서 욕망과 생각이 나온다. 욕망과 생각은 같이 가야 한다. 생각을 통해 나의 욕망을 의미가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쓸모 없음 마저도 쓸모가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이를 우리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 한다.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이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멋대로 들락날락하는 의식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힘이기 때문이다. 끊어야 할 것은 생각이 아니라, 멋대로 들락날락하는 의식의 습관이다. 이 멋대로 들락날락하는 의식을 자신의 의도와 목적과 방향에 맞춰 질서 잇게 통제할 수 있으면, 인간은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생각하는 거 쉽지 않다. 우리는 습관에 지배 받기 때문이다.
5
오늘은 사순 제4주간 금요일로 말씀은 <요한 7,1-2.10.25-30> "저분이 그리스도이신가"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코 멈추지 않으리>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빛이 보내시니
빛으로 걷는
빛의 길
결코 멈추지 않으리
가로막는 어둠을 뚫고
온 누리 빛인 그날을 향하여
선이 보내시니
선으로 걷는
선의 길
결코 멈추지 않으리
가로막는 악을 뚫고
온 누리 선인 그날을 향하여
참이 보내시니
참으로 걷는
참의 길
결코 멈추지 않으리
가로막는 거짓을 뚫고
온 누리 참인 그날을 향하여
믿음이 보내시니
믿음으로 걷는
믿음의 길
결코 멈추지 않으리
가로막는 불신을 뚫고
온 누리 믿음인 그날을 향하여
희망이 보내시니
희망으로 걷는
희망의 길
결코 멈추지 않으리
가로막는 절망을 뚫고
온 누리 희망인 그날을 향하여
사랑이 보내시니
사랑으로 걷는
사랑의 길
결코 멈추지 않으리
가로막는 미움을 뚫고
온 누리 사랑인 그날을 향하여
평화가 보내시니
평화로 걷는
평화의 길
결코 멈추지 않으리
가로막는 폭력을 뚫고
온 누리 평화인 그날을 향하여
살림이 보내시니
살림으로 걷는
살림의 길
결코 멈추지 않으리
가로막는 죽임을 뚫고
온 누리 살림인 그날을 향하여
6
나의 논리가 멈추는 그곳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신비는 비로소 시작됩니다.
2026/3/20/사순 제4주간 금요일/춘분⠀
요한 복음 7장 1-2.10.25-30절: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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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리와 하느님의 신비
하루 살이는 내일을 이야기하는 매미의 말을 믿지 못하고, 매미는 겨울을 이야기하는 참새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세상을 전부로 여기기에 내일과 겨울에 관한 이야기를 거짓말로 치부해 버립니다. 오늘 복음 속 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 배경만 보고 그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지상의 논리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시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다면 감히 그분을 죽이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얕은 이해를 훨씬 넘어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만 우리의 논리 안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여 판단하려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나의 논리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대한 신비와 섭리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유다인들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작은 논리와 생각을 허물고 하느님의 신비에 우리 자신을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제주교구)/생활성서 2026년 3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3월 20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이준 신부님
사순 제4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서글픈 인간의 본성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빛을 시기하는 어둠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보통 착하고 의로운 사람을 보면 박수를 칠 것 같지만, 때로는 그 사람의 의로움이 나의 부끄러움을 들춰내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미워하거나 거부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는 악인들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파헤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지혜 2,12.15)
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말로 남을 가르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주변에 도전이 됩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싶은 이들에게 정직한 사람의 존재는 일종의 심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주위에 누군가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며 '혼자만 그렇게 잘났냐' 하고 냉소적인 마음을 품은 적은 있나요? 그 마음은 사실 내 안의 어둠이 빛을 거부하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예수님의 고향, 가족, 신분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익숙함과 편견이 정작 예수님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위험한 것이 바로 "내가 다 안다"는 생각입니다. 성경도 다 알고, 전례도 다 알고, 하느님은 이런 분이라고 규정짓는 순간, 하느님은 우리 마음 안에서 활동하실 틈을 잃어버리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만나야 할 신비이십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지만 아무도 그분께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 7,30). 세상의 악이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결국 역사의 주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다가 오해를 받고 고통을 겪을 때, '하느님은 왜 가만히 계시는가?' 하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결코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완벽한 사랑의 기적을 이루실 당신의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로 바뀐 것처럼, 우리의 인내와 시련도 하느님의 때가 되면 구원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육식을 피하는 금요일입니다. 이 희생은 단순히 음식을 가리는 행위가 아니라, 내 안의 거부감과 판단을 내려놓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옳은 소리'나 '바른 사람'을 만난다면 피하지 말고 조용히 묵상해 봅시다. '주님, 저는 왜 저 사람이 불편하게 느껴질까요? 제 안에 고쳐야 할 교만이 있기 때문일까요?', '주님, 제가 주님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제 방식대로 주님을 가두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빛 앞에 정직하게 설 때, 세상이 놓은 올가미는 풀리고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 7,28).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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