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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글을 잘 쓰는 데는 재능과 작문 기술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363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19일)

1
오늘부터 <인문 일지>를 다시 공유하기로 했다. AI 시대에 인문 운동가의 역할이 더 커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문적인 삶을 살려면, 우리는 하는 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을 더 내면 된다. 그러니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좌절하지 말고, 시간을 내어 바깥으로 나가는 걷다. 

삶에는 두 가지가 있다. 원하는 삶과 감수하는 삶. 한번 뿐인 인생을 그저 감수나 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갖고 걸으면서 숙고해라. 그러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탁월한 결과를 얻는 지혜도 그 결과를 얻는 데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다. 

글을 잘 쓰는 데는 재능과 작문 기술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충분히 시간을 들일 수 있다면 누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생각과 철학을 문장 들 속에 풀어 놓을 수 있다. 시간이야 말로 가장 창조적인 편집자이다. 탁월한 결과를 얻으려면 결과에 상관 없이 우리는 시간에 투자를 해야 한다. 간단한 지혜인데, 우리는 그걸 잘 잊는다. 그러면서 늘 초초해 하고 조급해 한다. 나는 그런 경우에 다음 기도를 바친다.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니버의 기도>이다. 이걸 한문으로 하면 다음과 같이 세 자로 요약할 수 있다. 정(靜), 용(勇), 지(智). 여기서 차분함은 '조급해 하지 않음'이다.

공자도 조급함을 경계했다. 성인은 하루 종일 움직여도 '무거움'으로 부터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리더는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다.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신중하고, 자중하는 길은 절제할 줄 아는 것이다. 절제는 할 수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을 때 참는 것이다. 고대에 군주가 궁궐 밖으로 행차를 할 때는 항상 군주가 탄 수레의 뒤에 '치중(輜重)'이라는 무거운 짐수레를 달고 다녔다고 한다. 군주는 항상 신중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근본이고 고요한 것은 조급한 것의 임금이다." "가벼우면 근본을 상실하고 조급하면 임금 자리를 잃는다." 자중한다는 것은 지구의 중력과 함께 하며, 우주의 진리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나는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또한 인문학이라고, 인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인문학은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 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한마디로 초조해 하지 않는 것이다. 속도와 효율성에 빠진 AI 시대에 인간이 버리지 말아야 할 휴먼 코드이다. 

2
올 해는 봄이 더디게 온다. 날씨가 좀 춥다. 그래 텃밭에 나가기 시작을 못하고 있다. 이번 주말부터는 나갈 생각이다. "흙"을 만나고 싶다.

흙/문정희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 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기온이 오르면 겨우내 쌓여 있던 눈과 얼음이 녹고, 하늘에서 내리던 눈도 비로 변해 스며든다. 이렇게 스며든 물은 흙 속에 남아 있던 한기를 몰아내며 땅에 온기가 들도록 한다. 이제부터는 새싹의 차례이다. 아래로는 뿌리를 뻗고 위로는 포슬포슬 부드러워진 흙을 밀어내며 기지개 켤 힘을 낸다. 우리가 마침내 흙을 뚫고 올라온 새싹의 정수리를 보게 되기까지, 땅속에선 봄의 일들이 부지런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해가 뜨기 전, 봄 날의 새벽에 밭에 나가면, 땅 속에서 얼었던 물기가 반짝이는 서리가 되어 새싹처럼 땅 위로 피어난다. 이게 봄 서리다. 흙은 늦가을 서리에 굳어지고, 봄 서리에 풀린다. 김훈은 "봄 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나는 물의 싹"이라고 말한다. (김훈, <<자전거 여행 1>>) 풀 싹들은 헐거워 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흙이 비켜준 자리를 따라서 풀이 올라온다. 이건 놀라운 생명의 힘이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 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경이(驚異)이다. 봄의 흙은 헐 겁다. 봄이 오면, 언 땅이 녹고, 햇볕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흙의 관능은 노곤 하게 풀리면서 열린다. 봄의 흙이 헐렁해 지는 과정은 아름답다. 초봄의 햇살은 흙 표면의 얼음을 겨우 녹이고 흙 속으로 스민다. 흙 속에서는,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개미 집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열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밤이 되면 다시 기온이 떨어져, 이 물기는 다시 언다. 그러나 겨울처럼 꽝꽝 얼어 붙지는 않는다. 다음날 아침에 햇살이 다시 내리쬐면, 구멍 속의 얼음이 다시 녹는다.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흙 속의 작은 구멍들이 조금씩 넓혀진다. 그 넓혀진 구멍들로 햇볕이 조금 더 깊게 스민다. 이런 식으로, 봄의 흙은 헐거워 지고, 헐거워 진 흙은 부풀어 오른다.

3
매일 '삶의 기술(l'ars vitae)'을 다시 성찰 한다. 행복한 삶은 일상에 기쁨을 잘 배치하는 데서 출발한다. 나는 '배치 또 배열'이라는 말을 일상의 문법으로 삼고 산다. 삶의 기술(l'ars vitae, the art of life)은 선택과 배치를 통해 예술적으로 다듬고, 그 일상이 습관이 되어 자연스럽게 만드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는 과거의 선택이 쌓인 결과이다. 현재 네 모습이 부족한 이유는 냉정하지만 과거의 내가 부족한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 바뀐다고 현재가 달라지지 않는다. 대신 미래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미래를 바꾸려면 지금부터 바꿔야 한다. 단순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에게 지금 더 많이 투자할수록, 더 많이 잘 선택하고, 그걸 아름답게 배치하고 습관이 되도록 실행할수록 현재의 나는 힘이 더 모아지고, 풍요롭고 강력한 삶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예술’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아르스(ars, 그리스어 테크네, 기술)’의 의미가 ‘우주의 질서에 알맞게 만물(萬物)을 정렬시키다'이다. 이 정렬 시키는 일이 '배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을 지배하며, 몇 가지 삶의 규칙을 가지고 '지금-여기'의 삶을 정돈하는 사람은 모두 예술가이다. 그냥 충동적으로, 감각적으로 살면서 무질서한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는 시간 있다고 TV만 보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 '저 너머'를 꿈꾼다. 생존만을 위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 정렬, 다시 말하면 배열 혹은 배치를 우리는 문법이라고 한다. 이 문법을 그리스어는 '그라마(gramma)'라 한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카드모스(Cadmos)라는 페니키아인이 그리스에 최초로 알파벳을 전달했다고 기록한다. 그는 이 페니키아 문자를 ‘그라마티케 테크네(grammatike tekhne)'라고 표현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글자를 배치하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그람마’란 단순히 단어들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그 단어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기술이다. 그런 배치에는 순서가 있고 강조를 위한 침묵의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람마'란 최적의 배열이다. 그래야 그 문장이 감동적이며 아름답다. 

고대 그리스에서 새로운 언어의 체계를 ‘그람마(gramma)’ 라고 불렀고, 그걸 동양에서는 '문법'이라고 한다. '문법'은 어떤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 오랜 기간 동안 갈고 닦은 원칙이다. 문법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 언어만의 내공이며 무늬다. 단어들은 문법을 통해 언어로 완성되어 우리에게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전달한다. 나는 내 삶의 문법이 있는가? 그리고 ‘아르테스(artes)’는 ‘최선, 예술, 기술’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르스(ars)'의 복수형이다. ‘아르스’는 하찮아서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솜씨 있게 엮어내는 기술이다. 마치 그 솜씨가 어머니가 담근 김장 김치 맛처럼, '아르스'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경험이 만들어준 최적화된 간결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실패라는 경험들이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합할 때, 슬그머니 나오는 감동이다. L'ars viate를 우리는 '삶의 예술'이라 말하지만, 더 쉽게 와 닿는 해석은 "삶의 문법"이다. 특히 최근에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노년은 수렴하고 비우는 시기라는 생각이다. 그런 문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 문법을 아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4
인문 활동 중에 중요한 것이 시대를 읽는 거다. 요즈음 트랜드로 "1.5 가구"라는 말이 있다. 최근 혼자이면서도, 혼자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늘고 있다. '우리'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이들은 자신만의 공간, 시간, 가치관을 철저히 지키며, 완전한 자율을 지향한다. 하지만 극심한 고물가로 혼자만의 생활을 지키며 버거워지고, 고독과 불안도 밀려온다. 혼자이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은 그 지점을 비집고 새로운 가구 형태가 발아하고 있다. 개인의 자율적 삶 (1)을 기반으로, 경제적, 심리적, 육체적 부담을 덜기 위해 유연한 연결감(0.5)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트랜드 코리아 2026>>은 이러한 가구 형태를 '1.5가구'라 명명한다. (1)은 침해 불가한 자율성을, (0.5)는 선택적 연결감을 지칭한다. (1.5)는 (1)보다는 크고, 2보다는 작은 수이다. 단순한 1인 가구를 넘어서면서도, 그렇다고 다인 가구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새로운 가구의 모습이다.

1.5 가구는 지원 의존형, 독립 지향형, 시설 활용형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각기 세부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초솔로사회의 고독을 해결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실용적인 진화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1,5 가구'의 특성을 공유한다. 이 초솔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섬이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 1.5 가구는 바로 이 고립과 부담의 시대에, 우리 개개인이 고안해 낸 가장 실용적인 '전략적 연합'이다. '우리는 모두 섬'이라는 고독한 현실을 인정하되, 그 섬들을 잇는 작고 유연한 다리를 만들어 서로 연결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혼자 살고 싶어 한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혼자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문은 닫고 싶지만, 관계까지 닫고 싶지는 않다. 내 방은 필요하지만, 내 곁의 사람까지 사라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바로 이 미묘한 감각을 설명하는 말이 ‘1.5 가구’다. 최근 이 표현은 독립은 유지하되 느슨한 연결은 놓지 않으려는 생활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1인 가구처럼 자율성을 중시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타인과 공간·시간·정서를 부분적으로 나누는 삶의 형태이다. 이 말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새로운 주거 유행을 말해서 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또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는 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간섭은 싫어한다. 그러나 고립도 견디기 어렵다. 자유를 원한다. 하지만 완전한 단절은 원하지 않는다. 1.5인 가구는 결국 숫자가 아니라, 현대인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때 가족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단위였다. 식사는 같이 하고, 거실은 공유하고, 생활 리듬도 어느 정도 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함께 살아도 각자의 시간이 따로 있고, 각자의 방이 있고, 각자의 화면이 있다. 같이 있지만 따로 사는 감각. 이것이 오늘의 가족이고, 오늘의 관계다.
• 첫 번째 사례는 부모와 성인 자녀의 동거다. 한 집에 살지만 삶은 거의 분리되어 있다. 냉장고는 함께 쓰지만 식사는 각자 해결한다. 서로의 귀가 시간도 자세히 묻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불화로 보였을 이 풍경은 이제 새로운 공존의 방식이 되고 있다. 가족이지만 지나치게 침범하지 않는 거리. 가깝지만 숨 쉴 틈은 남겨 두는 관계다.
• 두 번째는 친구나 동료와의 느슨한 동거다. 완전한 룸메이트처럼 모든 생활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공간은 나누되, 감정까지 억지로 섞지는 않는다. 각자 방에서 각자의 하루를 살다가, 필요할 때만 안부를 묻고 도움을 주고받는다. 외로움의 비용은 덜고, 간섭의 피로도 줄이는 방식이다.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연결된 채 각자 사는 것에 가깝다.
• 세 번째는 혼자 살지만 생활은 연결된 사람들이다. 집은 따로 있지만 주말마다 함께 밥을 먹고, 반려 동물을 함께 돌보고, 필요할 때는 서로의 집으로 건너간다. 법적 가족도 아니고 전통적 동거도 아니다. 그러나 정서적 안전망은 분명히 존재한다. 외로운 시대에 사람들은 이제 한 지붕 아래의 가족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작은 연대를 만들고 있다.

이 변화는 차갑게 만 볼 일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1.5인 가구는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성숙한 관계의 형식일 수 있다. 서로를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돌볼 수 있다는 가능성, 같이 살지 않아도 서로의 삶에 책임을 느낄 수 있다는 발견, 관계는 밀착 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때로는 적당한 거리 덕분에 더 오래 지속된다. 물론 여기에는 씁쓸한 그림자도 있다. 높은 집값, 불안한 일자리, 늦어지는 결혼, 개인화된 삶의 리듬이 이런 형태를 밀어 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1.5인 가구는 자유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방어 술이기도 하다. 원해서 선택한 삶이기도 하고, 어쩌면 버티기 위해 발명한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말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혼자를 원하는가, 아니면 상처 받지 않을 만큼만 연결되길 원하는가. 어쩌면 오늘의 사람들은 관계를 버린 것이 아니라, 관계의 무게를 다시 조정하고 있는지 모른다. 완전한 고립도, 완전한 결합도 아닌 그 사이. 1.5라는 숫자는 애매해 보이지만, 실은 지금 우리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숫자인지도 모른다. 삶은 점점 혼자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인간의 마음 만은 끝내 0.5 만큼의 온기를 남겨 두려 하기 때문이다.

5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로 말씀은 <마태오 1,16.18-21.24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나에게서 당신께로>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0ㄱ.24)

나에게는
그것이 믿음이기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
그것이 참으로 믿음인지
믿음께서 말씀하시니
믿음께 기꺼이 들음으로써
나에게서 믿음께로
오롯하게 나아갑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희망이기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
그것이 참으로 희망인지
희망께서 말씀하시니
희망께 기꺼이 들음으로써
나에게서 희망께로
오롯하게 나아갑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사랑이기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
그것이 참으로 사랑인지
사랑께서 말씀하시니
사랑께 기꺼이 들음으로써
나에게서 사랑께로
오롯하게 나아갑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의로움이기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
그것이 참으로 의로움인지
의로움께서 말씀하시니
의로움께 기꺼이 들음으로써
나에게서 의로움께로
오롯하게 나아갑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살림이기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
그것이 참으로 살림인지
살림께서 말씀하시니
살림께 기꺼이 들음으로써
나에게서 살림께로
오롯하게 나아갑니다

하느님과 예수를 받아들이는 일은 다음 다섯 가지를 마음에 장착하는 일이다. 믿음, 희만, 사랑, 의로움 그리고 살림이다. 동아시아 철학으로 말하면, "인-의-예-지-신"이다. 사랑, 정의, 예절, 지혜 그리고 믿음'이다.

6
요셉의 침묵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이를 따르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
2026/3/19/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마태오 복음 1장 16.18-21.24ㄱ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명령에 앞서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갖게 될 두려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다음의 세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약혼한 여인이 다른 이의 아이를 가지면 간음으로 간주하여 돌로 쳐 죽도록 하는 것이 율법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타인의 죄를 묵인하거나 공범이 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배신감을 딛고 사랑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오해 속에서 요셉은 인간적인 상처를 받았을 터인데, 이를 뒤로하고 아내와 아기를 조건 없이 수용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메시아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경외의 두려움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커다란 구원 사건에 동참하기에는 자신이 초라하고 자격이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떤 두려움을 느꼈건 간에 요셉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논리로 답을 찾으려 골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천사가 명령한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이렇듯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상황이 완벽히 이해되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지금’ 사랑의 일을 시작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제주교구)/생활성서 2026년 3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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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6년 3월 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자 예수님의 양부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사순 시기의 보라색 제대보가 잠시 흰색으로 바뀌고, 우리는 "대영광송"을 노래하며 교회의 수호자이신 요셉 성인의 덕행을 기립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요셉 성인은 단 한 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인의 침묵은 그 어떤 웅변보다 강력한 신앙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혼인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졌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율법대로라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조용히 파혼하려 했지만, 꿈속에서 하느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요셉은 자신의 상식, 체면, 분노를 모두 내려놓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아무런 질문도, 토씨 하나도 달지 않고 즉시 행동에 옮깁니다. 진정한 믿음은 나의 계획이 무너진 자리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 4,18). 이 말은 요셉 성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을 때, 헤로데의 칼날을 피해 앞이 보이지 않는 여정을 떠날 때, 요셉은 오직 하느님의 약속 하나만을 붙들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막과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 요셉 성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상황이 나아져서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성실하시기에 희망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셉 성인은 평생을 예수님과 마리아의 그림자로 사셨습니다.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성가정의 보호자로서 묵묵히 목수 일을 하며 가정을 지켰고,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 되어 빛나고 싶어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요셉 성인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거룩한 조연’들에 의해 지탱됩니다. 내가 드러나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요셉 성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전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의 의로움이 혹시 타인을 찌르는 비수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의 뜻이 내 계획과 다를 때, 나는 기꺼이 '예'라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많은 말을 쏟아내기보다, 요셉 성인처럼 ‘침묵 속의 실천’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억울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화려한 자리보다는 누군가를 지켜주는 든든한 그림자가 되어주는 삶 말입니다. 

오늘 하루, 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 성인께 우리 가족을 보살펴 주시기를, 특별히 가장(家長)들과 노동자들에게 요셉 성인의 강인한 믿음을 나누어 주시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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