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글이에요.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비움의_미학 #나승빈 #위기구품 #통유 #위기십결 #허즉통 #도덕경_36장
319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15일)
1.
오늘의 화두는 '통유(通幽)'이다. 두 진영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탄핵 찬성과 반대의 소실 점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초단위로 변하는 세상에서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우리 사회를 혼돈에 빠지고 있다. 그 해답을 찾다가 만난 단어가 "통유'이다. 바둑에서는 바둑의 진경(眞境)을 음미할 수 있는 그윽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이젠 사물과 현상의 본질에 접근했고 승부의 요체(요체)도 터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오늘 사진처럼,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거다.
2.
노자는<<도덕경>>제 48장에서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라는 말을 한다. '배움의 목표는 날마다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다. '도'의 목표는 날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도'에 힘쓰는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 여기서 '도'가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면, 나이 들면서 조금씩 버리고 덜어내는 것이 사람 답게 잘 사는 길이라는 말로 들린다. 그 '도'로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고 싶다. 그러면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을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학문'과 '도'는 차원이 다르다. '도'에 이르려면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야 한다. 얻으려면 주고, 가지려면 버리고, 이기려면 져주는 오묘한 역설의 세계, ‘통유’가 그 입구다. 주는 것까지는 잘 했는데, 내려놓지 않고 버티는 시간이 계속된다. 다들 주말을 빼앗겼다.
3.
기하학에 말하는 평행선의 정의에 따르면, 마주 달리는 두 직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그런데 평행선은 과연 만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하의 세계에서 평행선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회화 즉 그림의 세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평행선은 얼마든지 만난다. 이는 철도의 레일을 떠올려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평행으로 놓인 두 레일은 나란히 달리다가,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면서 결국에는 만나서 하나의 점이 된다. 평행선이 만나는 지점, 그곳을 회화에서는 '소실점(消失點)'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소실 점'은 평행선이 끝나는 종착역일까? 그렇지 않다. 평행선이 끝나는 곳, 즉 '소실 점'을 지나면서 부터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기하의 세계가 '로직(logic)의 세계'라면, 회화의 세계는 '매직(magic)의 세계'다. 논리를 초월하는 세계가 '소실 점'에서부터 시작된다. 평면에서는 마주 달리던 두 직선이 '소실 점'에서 만나 차원이 다른 입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실 점'은 끝 이자 시작이다. '소실 점'에 서면 이제까지 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심오한 신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통유(通幽)'의 세계다.
4,
바둑에서 '위기구품(圍棋九品)'의 6번째 품계인 ‘통유(通幽)’는 '바둑의 그윽한 경지를 안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와는 전혀 다른 깊고도 오묘한 승부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단계로, 비유하자면 '소실 점'을 지나는 것과 같다. 곧 배우고 쌓는 단계를 지나, 버리고 비우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는 것에 눈을 뜨게 된다. '정석을 알되 정석을 잊어라'는 바둑 격언처럼 프로 6단의 별칭인 '통유"에서 부터는 이제까지의 문법과는 정반대의 국면이 펼쳐진다. 채움을 지나서 비움의 세계로 들어가는 패러다임 대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바둑의 진경(眞境)이라 할 그 세계는 노력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써만 도달할 수 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더 높은 차원으로 비상하려면 지금까지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통유'에서부터는 실력이 날마다 꾸준히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껑충 도약한다. 바둑 품계인 "위기구품(圍棋九品)" 이야기는 블로그에 남긴다.
5.
내가 늘 주장하는 노자의 "허즉통"이다. 노자의 '허즉통(虛卽通)'은 그의 "무위자연(無爲自然)" 개념에서 얻은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살자는 것이다. 인생무상, 공수래 공수거이니 모든 것을 비우고 낮추며 섬기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보는 마음이다. 이루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렵고,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허즉통'이라고 한다. “좌정관천(坐井觀天)이란 말이 있다. 그 뜻은 '우물 속에서 하늘을 본다'는 거다. 그러면 하늘이 제대로 보이겠는가? 그런 사람은 나무를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바둑에서도 잔 수에만 밝지 대세에는 어둡다. 그러면 진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넘어 또 다른 사유(思惟)의 지평이 열리는 지점이 바로 '통유'인 것이다. '통유'에 이르면 이제까지 와는 차원이 또 다른 깊고 그윽한 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노자는 “배움이란 날마다 더하는 것이요, 도란 날마다 덜어내는 것(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고 했다. '통유'는 배움을 넘어 도의 경지로 들어가는 이정표 와도 같다. 배우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비우는 역설의 세계는 그윽한 '도(道)'의 경지와 이어져 있다. 예전에 바둑 황제로 군림했던 이창호 9단은 자서전을 펴내면서 <<부득탐승(不得貪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기려는 욕심을 버려라”는 뜻으로 ‘바둑십계명’이라는 '위기십결(圍棋十訣)' 중의 하나다. 이기고자 하면 이기려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는 바둑 뿐만이 아니라 모든 승부에서 통하는 심오한 이치이기도 하다. '통유'의 고수는 이기기 위해 이기려는 마음을 비운다. 그리고 얻기 위해 주고, 당기기 위해 늦추고, 이기기 위해 져 줄 줄을 안다. 줘야 취하고, 져야 이기는 승부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친 까닭이다. 노자 <<도덕경>> 제36장은 “장차 빼앗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주고, 장차 약하게 만들고자 하면 먼저 강하게 해주고, 장차 멸망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흥하게 해줘야 한다"고 가르친다. '통유'를 넘어 '입신'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터득해야 할 승부의 묘리이다. 일단 각자 자신의 생각을 비워야 한다. 그래야 일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거기서 삶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움의 미학/나승빈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을
채워갈 때가 아니라
비워갈 때이다.
사람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이건
다 비워 놓고
채우지 않을 때이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무엇이나
다 비워 놓고도
마음이 평화로울 때이다.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에만 남긴다. 내 블로그는 여럿이다. 네이버나 구글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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