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태초의_어둠 #이승하 #인간_평균 #걸견폐요 #어른다움 #체면 #도척지도 #겸양
318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9일)
1.
인간 평균을 깎아 먹는 개들이 판을 친다. 세상이 개판이다. "척구폐요(跖狗吠堯)"라는 말이 있다. 역사는 이 말을 "걸견폐요(桀犬吠堯)"로 바꾼다. 개들의 이야기이다. 인간 평균을 깎아 먹는 자들로부터 공동체의 수준을 지키려면, 인간 평균을 끌어올리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한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왕은 주색에 빠져 포악무도한 정치를 일삼다가 주(周)나라의 시조인 무왕(武王)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무왕은 문왕(文王)의 아들이다. 요순(堯舜)이 성군의 대명사라면, 주(紂)는 하나라의 걸(桀)과 함께 '걸주(桀紂)'라 하여 폭군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걸견폐요(桀犬吠堯)'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온다. 이 말은 '걸주같이 포악한 인간이 기르는 개가 요(堯)와 같은 성군(聖君)을 보고도 짖어댄다'는 뜻이다. 개는 주인만을 알아볼 뿐 그 밖의 사람에게는 사정을 두지 않는다는 거다. 나아가서 인간도 상대의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섬기는 주인에게만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목격된다. 진정한 '충(忠)'은 시대불문 필요한 덕목이다. '충(忠)'은 '가운데 중(中)'과 '마음(心)'으로 구성돼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행동지침이다. 주자는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것(盡己之謂忠)"이라고 풀이한다. '주인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갖고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주인에 대한 충성'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충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오늘 공유하는 이승하 시인은 "낮과 밤/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면/난 밤의 하수인"이라며 스스로 ‘어둠’의 편에 선다. 그리고 "별 한 개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두 눈 부릅뜨고/날 밝기를 기다리리’라고 다짐한다. 이렇게 캄캄한 어둠의 세계에서 그의 역할은 "감시하듯이, 아니, 망을 보듯이"라는 마지막 문장에 함축돼 있다. 나도 이 어두운 시국에서 감시하고 망을 본다. 그리고 오늘 아침 사진처럼, 잘렸어도 봄을 기다린다.
태초의 어둠/이승하
태초에는 모든 것이 어둠이었으리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생명이 있으라 하니 숨 쉬게 되었으리
우리는 모두 어둠으로부터 왔기에
잠을 잘 때는 눈 감는 거지
신이여
임종 이후에 내가 있게 될 세계가
어둠인지 밝음인지 가르쳐 주오
나 탄생 이전의 세계가
어둠이었는지 밝음이었는지 가르쳐 주오
낮과 밤
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시면
난 밤의 하수인
별 한 개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
두 눈 부릅뜨고
날 밝기를 기다리리
감시하듯이, 아니, 망을 보듯이
2.
'걸견폐요(桀犬吠堯)'는 <<사기(史記)>의 <회음후편(淮陰侯篇)>에 나오는 고사이다. 원래는 '도척(跖狗)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지는다(跖之犬吠堯, 척지견폐요)'였다 한다. 요(堯)는 '흙을 높이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兀) 만들었다는 데서, ‘높다’, 즉 ‘요임금’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진나라 말 때 괴통이라는 책사가 있었다. 어느 날 괴통은 한신을 찾아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 항우는 남쪽을 차지하고 있고, 유방은 서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세력은 서로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왕께서 누구와 연합하느냐에 따라 천하의 대세는 좌우 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항우가 망하면 대왕의 신변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동쪽을 대왕께서 차지하고 대세를 관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일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한신은 며칠을 두고 고심하다가 결국은 포기를 하고 말았다. 얼마 후 유방에 의해서 천하가 통일됐다. 그리고 한신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한신은 죽음 직전에 이르러 “나는 괴통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참으로 후회스럽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을 전해들은 유방은 괴통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괴통에게 물었다. “네가 한신에게 반역할 것을 권고한 것이 사실이냐?” “예 그렇습니다. 신이 반역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 말을 듣지 않아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유방은 그를 기름 가마에 삶아 죽이라고 명했다. 이때 괴통은 원통함을 하소연하며 말했다. “도척 같은 도둑놈의 개도 요임금을 보면 짖습니다(跖之狗吠堯, 척지구폐요). 요 임금이 어질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개는 원래 주인 이외의 사람을 보면 짖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개가 짖는다고 탓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한신만을 알고 있었을 뿐 폐하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신에게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이런 저를 삶아 죽인다면 세상 사람들은 폐하를 비웃을 것입니다.”
3.
유방은 괴통의 말을 듣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살려 주었다. 이 때부터 '척구폐요'가 '걸견폐요'가 된다. 이 말은 ‘개는 주인만을 섬긴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교훈을 준다.
▪ 개가 오로지 주인만 알아보듯, 사람들이 양심의 판단에 따르기 보다는 맹목적으로 윗사람에게 충성함을 한탄하는 말로 읽는다. 악한 자와 한패가 되어 어진 이를 미워하거나 또는 선악을 불문하고 각기 그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거다. 개는 그냥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에 충성하지 그 사람의 인성과 인품을 보고 충성하지 않는다는 거다. 자신의 주군을 잘 못 만나 결과적으로 개가 된 인물들이 역사 속에 많다. 조심하여야 한다. 까닥 잘못하면 바로 개새끼가 될 수 있다.
▪ 요즘은 여러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낯선 사람을 보고 짖기보다는 여기저기 꼬리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특히 정치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적과 동지가 수시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선거철만 되면 철새 정치인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은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때문에 허상과 미몽에 사로잡혀 철새가 돼서는 안 된다. 세상이 각박해 질수록 우리 모두는 마음의 중심을 잡고 의리와 정도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걸견폐요'의 교훈일 수도 있다.
3.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병패들, 즉 탐욕과 이기주의, 과잉 히스테리, 갈등과 긴장들의 원인은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탓이다. 미숙한 인격체들이 만드는 사악함은 부의 양극화, 약자에 대한 자별, 공정성과 정의의 실종, 동물 학대와 생명 경시, 살인과 폭력으로 드러나고,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를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쩨쩨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남의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관심이 없고, 매사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어른 품격이 없다. 어른이란 소란과 허장성세로 갈팡질팡 하거나 말초 감각에 휘둘리고, 욕구와 충동에 따라서는 안 된다. '어른 다움'이란 절제와 포용, 관대함, 높은 자존감과 윤리 의식을 두루 갖춘 인격과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 타인을 향한 사리와 분별이 깊고, 앎과 행동이 하나이며, 연륜과 나이에 맞는 교양과 예의로 품격을 드러내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미래 세대에게 삶의 푯대가 될 수 있는 어른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결국 어른의 품격이란,
▪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닌 주변과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
▪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중한 자신을 케어 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 타인을 배려하는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품격은 곧 진정한 ‘자기 다움’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체면(體面)'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말 그대로 하면, '체면(體面)'은 '남을 대하는 관계에서, 자기의 입장이나 지위로 보아 지켜야 한다고 생각되는 위신. 체모. 면목. 모양새', 또는 ‘남을 대하는 도리’를 말한다. 이 사전적인 뜻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체면이 깎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등 부정적인 용례가 대부분이다. “체면이 서다”는 말도 겨우 낭패를 면했다는 수세적인 긍정에 불과하다. 체면이 서도록 일부러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체면치레’ 역시 기분 좋게 쓰는 말은 아니다. 실속도 없이 체면만 차리는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악습으로 지목돼 왔다. 나의 내면을 성찰하기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므로 체면에 매여 행동하는 게 바람직할 리 없다. 주로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속성이 크다는 점도 문제다. 다만 대개 그렇듯 급격한 변화는 부작용을 낳기 쉽다. 체면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명분보다 실리를 좇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이름’을 중시하는 삶이 지니는 가치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고 있다. 요즈음 보이는 일부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그것들을 본다.
5.
체면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처럼 버리던 시대, 사대부로서 궁형의 치욕을 안고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마천이 죽음을 피하고 궁형을 택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름’ 때문이었다. 사마천으로서는 죽음 자체보다 더 두려운 것이 명분 없는 죽음이었다. 투항한 장수를 위해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죽는다면, 절의를 위한 죽음으로 인정 되기는 커녕 그저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 없어지듯 아무런 이름도 없이 허망하게 죽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명한 시간을 사마천은 이름을 남기는 일에 바쳤다.
백이 숙제처럼 훌륭한 이들은 비참하게 죽어가고 도척같은 천하의 악인은 승승장구 천수를 누리는 부조리를 해결하는 길 역시 이름에 있었다.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음으로써 안연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렇게 잊히고 말 이름들에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겠다는 다짐이 <<사기>>의 완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와 함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 본인의 이름도 지금까지 남았다. 나의 이름이 어떻게 남을 까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삶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체면'을 넘어 ‘이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에만 남긴다. 내 블로그는 여럿이다. 네이버나 구글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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