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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선한 인간이 이긴다는 것, 믿으라.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9일)

어제에 이어, 이어령 교수의 2022년 1월 1일자 김지수 기자의 인터뷰, "선한 인간이 이긴다는 것, 믿으라"에서 나의 눈길을 끈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본다. 그리고 이어서 작년 11월에 나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의 몇 가지 내용을 이어갈 생각이다. 이 책의 부제가 "삶과 죽음에 대한 빛나는 대화"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지수 기자는 책에서 죽음이란 어떤 상태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관찰하고 온몸으로 감각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어령 교수는 컵 하나를 가지고 보디(몸, 육체)와 마인드(마음) 그리고 스피릿(영혼)을 설명한다. 이해가 쉽다. 컵이 육체이다, 죽음은 이 컵이 깨지는 거다. 유리 그릇이 깨지고 도자기가 깨지듯이 내 몸이 깨지는 거다. 그러면 담겨 있던 내 욕망도 감정도 쏟아진다. 출세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돈 벌고 싶은 그 마음도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원래 컵 안에 있었던 공간이다. 그게 스피릿, 영성이다. 원래 컵은 비어 있다. 거기에 뜨거운 물, 차가운 물 담기는 거다. 말 배우기 전에, 세상의 욕망이 들어오기 전에, 세 살 핏덩이 속에 살아 숨 쉬던 생명, 어머니 자궁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의 허공, 그 공간은 우주의 빅뱅까지 닿아 있다. 사라지지 않는다. 나라는 컵 안에 존재했던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스피릿, 영성이다.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질서, 그래서 우리는 죽으면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라 했다.

이어령 교수는 컵(육체)가 깨지고, 그 안에 담긴 물(욕망 감정 등의 마인드)이 쏟아져도 컵이 생길 때 만들어진 원래의 빈 공간(영혼)은 우주에 닿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로 우리를 위로했다. 그러나 자주 '마인드를 비우고, 하늘의 별을 보라'고, '빈 찻잔 같은 몸으로 매일 새 빛을 받아 마시며 살라고, 비어 있는 중심인 배꼽(타인과의 연결 호스)과 카오스의 형상인 귀의 신비를 잊지 말라고 우리들 다독였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이 이어령 교수의 현재 상황을 잘 설명한다. "나는 늘 밤을 부엉이처럼 뜬 눈으로 지새워요. 이젠 어둠과 팔씨름을 해도 초저녁부터 져요. 빛나던 단추를 모두 뜯긴, 패전 장군의 군복 같은 수의를 입어야 지요.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처럼 얼어 죽어도 그 입술에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하시며, 우리들에게 지혜를 한 번 더 전달해 주심에 큰 감사를 드린다.

시대의 지혜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2022년 새해에 산소 같은 지혜를 불어 넣어 주신 것들 중 몇 개를 공유한다.

- 그는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매번 최상의 힘을 낸다고 했다.

- 그의 죽음은, 죽어도, 영성의 세계를 갖고 간다는 거다. 영성은 컵 안의 빈부분이다. 공간의 문제이다. 그래 생각을 비우기 위해 '멍 때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멍 때리기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판단 중지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니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자기 방어 기재로 쓰는 거다. 자기만의 진공 상태를 만드는 거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에, 노아의 방주처럼 진공의 배를 만드는 거다. 멍하다는 말은 외국어로 번역이 안된다.

- 말이 글보다 중요하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김소월)처럼, 감정도 말로 표현해야 감정으로 나오는 거다. '슬픔? 아 슬프구나' 처럼, 슬퍼서 슬픔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말을 하니까 슬퍼지는 거다. 인간은 말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말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말이 없는 거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어령 교수는 제도와 법률의 세계인 노모스(nomos, 법계), 물질과 자연의 세계인 피시스(physis, 자연계), 표현과 상징의 세계인 세미오시스(semiosis 기호 상징계)를 분리해서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법계의 진리는 오늘이라도 바뀔 수 있지만,  상징계와 자연계는 안 바뀐다. 예를 들어, 어제까지 '산'이었던 것이 '손'으로 못 바꾸고, 0도에서 물이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은 우리가 손을 댈 수 없다. 그래 글 쓰는 사람이 버틸 수 있다. 권력 가진 자들이 법은 지배해도 나의 언어는 못 건든다. 자연계, 법계, 상징계를 진선미의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순수이성이 진이고, 실천 이성이 선이고, 미가 판단 이성이다. 이 3 가지 범주를 섞지 말고 분별해서 사고하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서 좋으면 그게 진리이고, 자기를 객관화해서 옳으냐 그르냐를 생각하는 게 자신의 몫이다.

- 이어령 교수는 평생을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재미나게 살아 오셨다. 우리가 말하는 '자기 다움'은 나만의 물음표와 느낌표를 이어주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회의는 하나의 기쁨을 낳고, 또 하나의 기쁨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이렇게 순환한다. 그에 의하면, 깨달을 때의 환희를 '타우마제인'이라 한다. 그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을 향해 썼고, 자신이 발견한 타우마제인이 벅차서 쓴 거라 했다. 타우마제인이란 그리스어로 '경이로움', '놀라움'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대한 관찰과 숙고와 함께, 우리가 인간의 지성을 무엇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나도 매일 아침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를 쓰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독자가 같이 읽고 공감해주면 신이 난다. 우리는 '타우마제인'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그래 매일 글을 쓰며 발산하고, 그 발산한 만큼 수렴을 하고 싶게 만들어, 또 책을 읽고, 주변을 관찰하게 된다. 발산과 수렴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거다. 그래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래 오늘은 폴란드 시인인 비스와라 쉼보르스카의 <경이로움>이란 시를 공유하고, 동시에 이 시를 소개한 [먼. 산. 바. 라. 기.]님의 덧붙임도 같이 읽는다. "칸트는 말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움과 경외로 나를 떨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 그렇다. 우주 속 지구라는 별에 의식 있는 존재로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경이는 없다. 우주의 입자가 수 없는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현재 내 몸을 이루고 있다. 수 억도 열로 달구어지다가 차가운 암흑의 공간에서 헤매기도 했다. 어떤 인연이 이 꼴을 만든 것일까? 마음은 어떻게 작동되고,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꿈은 어디서 오는 걸까? 왜 나일까?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답이 없는 질문은 우리를 고개 숙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 시의 끝 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릉대는 성난 강아지'는 누구일까? 잔잔히 흐르던 물길이 돌부리를 만난 것 같다."

경이로움/비스와라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 두고 오직 이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가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행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 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
왜 하필 옆자리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릉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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