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오늘 아침은 몇일 전부터 다루고 있는 '도가구계(道家九階)', 즉 도에 이르는 9 계단을 다시 소환한다. 글을 눈으로 읽음-구송함-글의 문맥을 잘 살펴봄-글에 숨은 내용을 잘 알아들음-일을 잘 실천함-즐겁게 노래를 잘함-그윽함-빔-시원'이다. 위에서 말하는 도에 이르는 아홉 단계는 글을 읽되(①부묵, 副墨)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②낙송, 洛誦),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 핀 다음(③첨명, 瞻明),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 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④섭허, 攝許),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⑤수역, 需役),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⑥오구, 於謳).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⑦현명, 玄冥), 조용하고 텅 빈 경지(⑧삼료, 參廖)를 체험한 다음 시원(始原)의 도(⑨의시, 疑始)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여섯 단계인 오구(於謳)에 대해 이야기 한다.
(1) 여기서 '구(謳)'는 '노래하다'란 뜻이다. 오구는 사람 이름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도(道)를 즐겨서 감탄하고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임희일(林希逸)은 “오구(於謳)는 말로 부족해서 길게 노래하는 것이고, 오(於)는 감탄하는 것이니 스스로 도를 얻은 것을 즐거워함을 말한 것이다"라 풀이했다.
나에게 노래, 음악은 쉴 곳 모르는 마음의 피신처이다. 언어로 사유하고 언어로 욕망하는 우리 인간에게 음악만큼 완벽한 피난처는 없다. 언어는 가끔 사심없이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욕망과 결핍을 자극하는 폭주장치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잠시 언어에서 탈출 시켜, 선율과 리듬이 인도하는 무한한 감성의 세계로 이끄는 음악이야 말로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명곡이 된다. 어떤 음악은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지나친 욕심이 씻겨 나가고, 오직 '사랑하는 존재'로서 내 삶을 가꿔가겠다는 든든한 결심이, 불안에 휩싸인 영혼을 달래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인문 정신을 고양시킨다. 인문 정신이란 명사적으로 세계를 보는 습관을 동사 화하는 것이다. 점점 굳어가면서 명사 화되어 가는 자신을 율동감이 있는 동사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음악같은 예술이 필요하다. 예술은 명사적으로 굳어진 나를 동사화하도록 자극시켜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문적 통찰이 도달해야 할 지점이 이런 예술의 경지이다. 미학적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학적 삶이란 말을 하다 보니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이 떠오른다. 덴마크 철학자인 그가 "가치가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셋으로 구분"했다는 주장이 기억났다 1843년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한 말이다. 이를 우리는 '인간의 실존 3단계'라고 한다.
▪ 심미적인 실존: 심미적인(감각적인) 인간의 목표는 탐미를 통한 자기-쾌락이다. 자신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인 쾌락과 만족 그리고 그 만족 속에서 안주하고 싶은 탐닉이 인생의 목표이다. 그래 탐닉 시켜줄 새로운 대상을 찾으러 끝없이 배회하는 철새이다. 심미적인 인간은 자신을 고상하게 만들어 삶을 승격시켜 준다고 설교하는 철학자의 말 밑에 앉아 감탄하고,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보고 감상하거나 구입하여 자신이 그 예술가가 된 것처럼 착각한다. 혹은 예술가, 철학자, 문필가들이 태어난 그들의 고향까지 찾아가, 그들의 삶을 감탄한다. 탐미적인 인간은 미(美)를 추구하지만, 정작 자신을 미로 만들지 못한다. 체화 되지 않은 지식은 표리부동하고 얄팍하다.
▪ 윤리적 실존: 윤리적인 인간은 인생의 행복을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공동체적 삶으로 자기-탈출을 시도한다. 자신이 행복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행복한 만큼, 자신에게 가까운 가족 그리고 친구, 더 나아가 같은 동네에 거주하는 주민의 안녕을 인생의 중요한 임무로 여긴다. 윤리적인 인간이나 도덕적인 인간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탈출하려는 무아(無我)를 연습하기 위해, 자신에게 쌓여 있는 이기심이란 적폐 제거를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자기-중심에서 탈출하여 우리-중심, 더 나아가 타인/생명 중심으로 삶의 전환은 일시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이, 그 자신의 본성과는 떨어질 수 없는 거룩한 습관이 될 때 가능하다. 윤리적 인간은 언제나 구별되고 그 자체로 향기와 빛을 내는 인간이다. 그러나 미적인 인간이나 윤리적 인간은 너무도 인간적인 몸부림이다. 그런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 다음 단계의 삶은 종교적 삶이다.
▪ 종교적 실존: 종교적 인간은 미적 인간이나 윤리적 인간에 대한 극복이며 초월이다. 여기서 종교라는 말은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이끌어주는 통로서의 체계이다. 종교적 인간은 자기-초월을 추구하며,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는 인간이다. 예를 들어, 우리 인간은 나비가 자신이 고치에 있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새가 자신이 알에서 지내던 시간에 대한 추억이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자신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 준, 어머니 뱃속 10개월을 모른다. 나는 전적으로 내 힘으로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어머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힘으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탐미적이며 정신적인 쾌락과 보람으로부터 도약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 포기가 희생(犧牲)이다. 이 희생은 자신하고는 상관 없지만, 자신의 생명을 헌신할 정도로 거룩한 가치를, 자신의 삶을 통해 창조하려는 용기이다. 이 용기가 종교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순교(殉敎)이다. 희생을 프랑스어로 la sacrifice라한다. 접두어 sacre가 거룩을 의미한다. 순간을 사는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을 때, 비로소 거룩하고 온전한 개인이 된다.
너무 멀리 왔다. 여기서 오늘의 시를 한 편 읽고, 서사의 힘을 위해 신화 속에 나오는 음악 이야기를 한다. 오늘 사진 동네 공원에서 찍은 것이다. 억새가 오후의 빛을 받으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음악/이경임
세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은
망가진 것들에게서 나오네
몸 속에 구멍 뚫린 피리나
철사줄로 꽁꽁 묶인 첼로나, 하프나
속에 바람만 잔뜩 든 북이나
비비 꼬인 호론이나
잎새도, 뿌리도 잘린 채
분칠, 먹칠한 토막뼈투성이 피아노
실은 모두 망가진 것들이네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견고하단 말인가?
음악, 노래하면, 우리는 바로 오르페우스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오르페우스(Orpheus)의 죽음을 넘나드는 사랑 스토리에서 음악의 힘이 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아폴론과 아홉 명의 무사이 여신중의 한 명인 칼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태양신이면서 음악의 신이기도 한 아버지 아폴론으로부터 리라 악기 연주 재능을, 어머니에게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선물 받았다. 무사이 여신은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딸들로 예술을 담당했던 9명의 여신을 말한다. 영어식 표현은 ‘뮤즈’이다. 그들 중 칼리오페는 서정시를 담당했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 인간들은 물론 동물, 식물, 심지어 생명이 없는 바위조차도 음악에 취해 기뻐하며 화답하였다. 인간들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잊어버리곤 했다. 이런 오르페우스는 숲의 요정 에우리디케(Eurydike)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한참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때, 에우리디케는 들판으로 나들이 나갔다가 양치기 아리스타이오스(Aristaios)*와 마주쳤다. 그는 에우리디케의 미모에 반해 처녀인 줄 알고 덤벼들었다. 겁에 질린 에우리디케는 그를 피해 달아나다가 그만 풀밭에 숨어 있던 독사에 물려 즉사하고 말았다.
TMI: 꿀벌치기 아리스타이오스는 올림포스 최고의 가수인 오르페우스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죽게 만든 자이다. 그가 뒤를 쫓으면서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녀가 독사에 물리지 않았을 것이고,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에우리디케가 죽자, 아리스타이오스의 꿀벌도 모조리 죽었다. 꿀벌이 아리스타이오스 대신 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강의 요정 퀴레네에게 가서 그 이유를 묻는다. 퀴레네의 대답은 지혜로운 바다의 딸림 신 네레우스를 찾아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네레우스가 아무리 둔갑을 하더라도 아리스타이오스가 사슬로 묶고 버티자, 그는 해답을 주었다. 에우리디케의 혼령에 속죄하는 제사를 지내라는 것이었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이 제사를 지낸 뒤 꿀벌 한 무리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은 중요하다.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절망했다. 그는 음악으로 슬픔을 달래 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서럽게 울기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저승 세계로 가서 사랑하는 아내를 되 찾아오기로 결심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수소문한 끝에 저승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도 알아냈다. 사실 살아 있는 몸으로 저승 세계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산천초목까지 감동시키는 오르페우스의 음악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음악의 힘은 세다. 그가 저승 세계의 스틱스 강에 도착하자, 뱃사공 카론이 그를 가로막았다. 산 사람은 절대 저승 세계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리라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사정했다. 그러자 카론은 마법에 걸린 듯 군말 없이 그를 강 저편으로 건네 주었다. 이번에는 머리가 셋 달린 개인 케르베로스가 나타나 그를 제지했다. 오르페우스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케르베로스를 감동시켜 허락을 얻어냈다. 마침내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 서자 오르페우스는 자신이 저승 세계에 온 사연을 다시 리라를 연주하며 구슬프게 노래했다.
“언젠가는 누구든지 올 수밖에 없는 저승 세계를 다스리는 신들 이여! 저의 애달픈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제가 이곳에 온 것은 타르타로스(저승 세계의 무한 지옥)의 비밀을 캐기 위해서도 아니요, 입구를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와 힘을 겨루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저는 독사에게 물려 신혼에 죽은 사랑하는 아내를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저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승이건 저승이건 간에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승의 왕 이여! 제발 에우리디케의 생명을 다시 이어주십시오. 제발 그녀를 저에게 돌려주십시오.”
오르페우스의 훌륭한 연주와 애절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자, 타르타로스에서 벌을 받고 있던 죄인들도 감동을 받았다.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탄탈로스(Tantalos)-그는 신들을 시험해 볼 목적으로 아들의 고기를 요리한 음식을 대접한 죄를 지어,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굽히면 그만큼 수면이 낮아지는 저승의 연못에 갇혀 영원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물을 마시려는 행동을 멈추었으며, 익시온(Ixion)-그는 헤라를 넘본 죄로 영원히 멈추지 않는 불 수레에 묶여 있다-의 불 수레도 멈추었다. 다나오스(Danaos)-이들은 신혼 첫날 밤 남편들을 살해한 죄로 밑 빠진 항아리에 끊임없이 물을 붓고 있다-의 딸들은 항아리에 물을 쏟아 붓는 일을 멈추었으며, 시시포스(Sisyphos)-그는 신들을 기만하여 죽음을 모면하려 한 죄로 온종일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힘들여 끌어 올리는 노역에 처해진다. 그런데 바위가 꼭대기에 이르게 되면 다시 굴러 떨어져 제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의 노역은 끝없이 되풀이 된다-도 굴리던 바위를 멈추고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또한 무한한 감동을 받고, 오르페우스의 청을 들어 주기로 했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하나 있었다. 에우리디케가 뒤따라가게 할 텐데. 그녀가 저승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오르페우스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오르페우스가 앞장서고, 에우리디케가 그 뒤를 따르는 저승 세계의 탈출이 시작되었다. 한참을 앞장서 가던 오르페우스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데스가 ‘뻥’을 친 것은 아닐까? 이 저승 세계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가! 게다가 아내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에우리디케는 저승에 있는 동안은 아직 혼령이어서 중량감이 없으니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 턱이 없었던 오르페우스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는 갈수록 아내와 자신 사이의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저승 세계의 출구까지 왔을 때, 그의 인내력은 바닥이 났다. 그가 막 출구의 문턱에 발을 딛는 순간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를 따라오던 아내 에우리디케는 비명을 지르며 애처로운 눈빛을 남기며, 다시 저승 세계로 끌려 들어갔다. 오르페우스가 사라져가는 아내를 잡으려고 안타까이 팔을 내밀었으나 캄캄한 허공만 잡힐 따름이었다.
시각을 잠재우는 것은 청각이다. 소리를 잘 들으려면 눈을 감아야 잘 들린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음악의 힘을 과시하던 또 다른 하나가 헤르메스이다. 흥미로운 서사이니 좀 길더라도 공유할 가치가 있다. 이 이야기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질투 서사에 나온다. 제목은 '암소가 된 이오'이다.
이오는 헤라를 섬기는 하녀 신이었다. 제우스는 이오에게 빠져들어 그녀를 유혹하였다. 헤라의 눈을 가리기 위해 제우스는 구름으로 변신했으나, 헤라의 감시를 피하기 어려웠다. 헤라에게 바람 피운 것을 들킨 제우스는 얼른 이오를 하얀 암소로 변신시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제우스의 거짓을 간파한 헤라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그 암소를 선물로 달라고 한다. 헤라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의심을 받을 것이므로, 제우스는 암소로 변한 자신의 연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헤라는 아르고스라는 눈이 100개나 달린 괴물에게 암소를 감시하도록 했다. 이 괴물은 잠든 동안에도 몇 개의 눈을 뜨고 있어 감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암소가 된 이오는 꼼짝 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우스는 이오를 구출하기 위해 심부름꾼 헤르메스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특기인 갈대피리를 연주하여 아르고스를 잠들게 했다. 그리고 드디어 100개의 눈이 모두 감겼을 때 재빠르게 아르고스의 목을 베고 이오를 구출했다. 이때 죽은 아르고스의 눈 100개가 헤라의 공작 새 날개의 장식이 된다. 청각이 시각을 재운 거다.
헤라의 박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헤라는 아직 암소로 변심 된 채 있던 이오에게 쇠파리를 보냈다. 쇠파리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반은 미치다시피 한 이오는 여러 나라를 도망 다니다, 마침내 바다 건너 이집트에 당도했다.
지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암소가 된 이오가 지나간 바다는 이오의 이름을 따서 ‘이오니아 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오는 보스포루스(Bosporous) 해협을 건넜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가르는 좁은 해협 보스포루스는 ‘암소의 나루’라는 뜻이다. 이오는 이집트 땅에서 겨우 쇠파리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제우스를 만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뒤 나일 강 근처에서 에파포스를 낳을 수 있었다. 그 후 이오는 이집트의 왕 텔레노고스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며, 죽은 뒤에는 이집트 최고의 여신인 이시스로 널리 추앙되었다. 한편 아들 에파포스는 왕위를 이어받아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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