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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1741.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9월 5일)

 

소설가 백영옥에 의하면, 강연장에서 많이 나오는 질문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과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라 했다.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는 것은 아마도 우리들 인생의 많은 일이 기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내 부모가 겪었고, 내 자녀들도 비슷한 어려움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직장에 나가는 외벌이 남자들은 스스로 돈 버는 기계인가 한탄하고, 육아에 지친 전업주부들은 나 자신을 잃었다고 고백한다. 역할에 대한 강박이 클수록 책임감이 강한데, 역할에 충실 하려하다 보니 너무 지쳐 도망가고 싶어 지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가 백영옥의 주장이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내, 남편, 며느리, 딸, 부모로 그리고 사회가 부여하는 역할로 사느라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잊었다 말하는 사람이 유독 많은 건 ‘우리’라는 주어를 ‘우리’만큼 많이 쓰는 민족이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리 아이, 우리 남편, 우리나라, 우리 때는... 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문장은 이런 한국적 심리가 반영된 언어 습관이다. 1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역할이 바뀌는 과정에 놓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할은 시간에 따라서 바뀐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자식 역할이 끝나고, 젊은 부모였던 자신이 노부모가 되는 것처럼 계속 순환된다. 아역으로 시작한 배우가 청춘의 역할을 거쳐, 중년의 어머니에서 노년의 할머니 역으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매 순간 역할이 바뀔 뿐,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다. 중요한 점은 바뀐 역할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바뀐 상황과 역할에 적응하지 못해 자기 연민에 빠지고 원망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 탓’은 일시적으로 기분을 낫게 만들지만, 더 크게 돌아오는 부메랑이 되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건 퇴직이나 자녀의 독립으로 역할을 잃어버리면 오롯이 나만 남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길을 잃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이를 ' 둥지 증후군'이나 '은퇴 후 우울'이라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조화다. 가끔 풍경을 반영하는 창을 통해서 타인을 보고, 때때로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이 인생의 균형감을 키워준다. 균형감, 이게 오늘 아침의 화두이다.

 

컴퓨터와 인공지능이 결합하면서 이젠 초연결시대 그리고 초지능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다. 그래 지금 시대에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기계와 다른 인간의 자질을 즉흥성, 창의성 그리고 우아함으로 본다. 그런데 이젠 기계도 이를 따라온다. 위 세 가지를 흔히 영혼이란 한다. 기계도 그 혼을 갖게 될까? 미래사회에서는 인간과 기계가 함께 일하고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보완하여 집단지성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다고 본다. 최근 알파고와 바둑 커뮤니티 사이의 관계가 좋다는 것을 보면.

 

알파고는 바둑에서 우리를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나이트클럽에 가거나 선거 출마에 관심을 가지려면 여전히 수많은 기술적 약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알파고와 비슷한 것이 가석방을 결정하고, 보석금을 정하고, 비행기를 운행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날은 그리 멀지 않다. 우리가 집단 지성의 일부인 것처럼, 기계들이 우리 네트워크와 사회의 일부로 계속 통합된다면, 우리 지성의 연장선상이 되어 지성을 확대시켜 줄 것이다.

 

일부는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너무 훌륭해 져 많은 사람들이 실업 상태에 놓일 거라고 생각한다. 단기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생산성의 증가로 보편적인 기초 수입이 생겨서, 기계 때문에 해고된 사람들을 지원할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본수당이라는 개념이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부분은 일자리가 우리에게 존엄성과 사회적 지위와 체계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단순히 소득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학문적 혹은 창의적 활동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즐기고 무엇을 만들지 더 걱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과 기계가 어떻게 함께 일할지에 대해서도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우리와 함께 사는 인공지능이 심지어 진화를 하면서도 우리의 가치를 공유하고 우리의 윤리를 반영한다고 느낄 수 있을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앞으로, 점점 낯선 것이 '새로운 기본(new normal)' 것이다. 예컨대, 초지능 기계와 공학적으로 설계된 신체, 소름 끼칠 정도로 감정을 조절할 있는 알고리즘, 10 마다 직업을 바꿔야 필요성 등이다. 게다가 막대한 양의 정보는 홍수처럼 밀려드는데, 도무지 그것들을 흡수하고 분석할 방법이 부족하다. 이런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강한 정신적 탄력성과 풍부한 감정의 균형감이다. 이런 가운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명상을 하며 나를 관찰하는 명상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면서, 유발 하라리는 우리에게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국민적  갈등을 자신의 이익의 동력으로 삼는 우리 정치인들은 "사람 안에 개가 들어 있어" "개소리" 하느라 바쁘다. 답답하다.

 

 

개의 정치적 입장/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나에게 <페이스북> '학교'이다. 세상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몇몇 분의 담벼락은 나를 되돌아 보게 하는 거울이다. 오랜만에 윤정구 교수의 담벼락을 방문했다.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감옥은 자신이 세워 자신을 가둔 감옥이다." 주변에 있는 여러 친구들을 보면 이념의 감옥에서 감옥살이를 자초하고 있다. 갇힌 사람이 자신임을 알지 못해 철창 사람들이 갇혔다고 믿는다. 경계병을 자청해 남들을 비난하고 자신을 변론한다. 그러면서 개거품을 문다. 탈주(脫走), 건너가기를 막는 일에 스스로가 앞장 선다.

 

불교 용어인 근기(根機)라는 개념을 나는 좋아한다. '근기'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끈기’라는 말도 바로 이 근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 근기에는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氣) 그리고 하근기(下根機)가 있다. 상근기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 킨다면, 하근기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근기, 상근기로 올라갈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기의 고비이다.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기로 가고 심지어 하근기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기 사람들을 나는 '병자'라고 본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주변에서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기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중근기일수록 하지 못한다.

 

불교 이야기를 한다. 절에서 가끔씩 듣는 “성불(成佛) 하세요!”라는 말은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이다. 이 정신은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서 가장 이롭게 된 상태는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즉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다 성불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안아트만)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별도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려는 소망을 현실화하려고 끈덕지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기가 탁월한 상근기(上根機)이다.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용기가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험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주인공이 되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 이야말로 정말 상근기 정도가 아니라 최상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거사(居士)'라고 한다. 비록 스님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스님보다 치열하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어제 그런 사람, '거사' 만났다. 그의 별명은 '//'라고 했다. 얼굴이 웃는 얼굴로 얼굴 근육이 재배치되어 있었다. 24시간을 없고 아프신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신다고 했다. 어머니의 모습도 깊게 가슴에 박혔다. 어린이 모습이었다. "//' 번째 '' 하늘의 ''자라 했다. 하늘의 소리를, 하늘의 냄새를, 하늘의 길을 믿고 따르며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번째 '' 웃은 거라 헸다. 어머니가 나를 키우는 스승이라 생각하고, 그런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니 어찌 감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웃지 않을 없다고 했다.  사실 세상 모든 일에 감사하면, 웃음은 저절로 나온다. 마지막 '' 생각, 그리고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는 하나라는 의미의 '' 했다. 초상권이 문제인 알지만, 분의 모습을 몰래 사진 찍었다. 용서를 빈다.

 

그분들은, 임제 선사가 말씀 하신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가르침대로 살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말은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다”는 뜻이다. 진정한 주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곳이 주인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든지 자신이 주인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절에 들어가지 않아도 일상의 삶 속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생각을 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자이다.

 

근기(根氣) '근본이 되는 힘'이다. 근기가 두텁지 못한 사람, 중근기 사람들은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과실 수확에만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다. 끝내 그런 이들은 결과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하며, 도량이 넓은 척할 뿐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중근기의 병자를 대량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살았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 정보 기술의 극대화로 하근기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 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자기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무슨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하기 싫다고 괴로워하지 말고 스스로 그 상황의 주인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런 일은 '어디서나 어떠한 경우에도 얽매이지 않아 주체적이고 자유 자재함'으로 설명된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것이 자유와 행복의 길이다.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일을 대하고 처리해 나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행복이다. 자유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 해야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수처작주'의 마음을 가지려면, 비교 분별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비우고, 그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된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니, 집착을 버리고 유연해지는 것이 '수처작주'의 시작이다. 마음을 비우고(분별심과 집착), 삶을 놀이로 만들면, 자유롭고, 즐겁고 행복해진다. 그때부터 '수처작주'의 삶이 시작된다.

 

단비가 단 것은 잠시 스쳐 지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오래 잡고 있으면 괴로움이다. 지금 길이 없다면 고요히 앉아 자신을 보라. 모든 길은 자신을 통한다. 그 길이 '수처작주'의 삶이다. 시적으로 표현하면, "바람에게 길을 물으니 네 멋대로 가"(허허당 스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자기 삶에 확신을 잦지 못하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기에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내면의 복잡성에 얽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있는 그 곳이 진리의 세계'이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 거다. 주인이 되지 못할 자리에는 안 가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다. "네 삶의 주인이 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가기 싫은 데는 안 가는 거다. 네 멋대로 하는 것이다. "누가 나를 구제해주길, 위로해주길, 이끌어주길 바라지 마라. 그대는 이미 스스로 일어날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허허당) 그러니 '수처작주'를 실천하면, 우리는 모두 삶의 주인공이 되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오늘 아침 사진의 오리도 그렇다. '개소리' '직업' 정치인들이 하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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