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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도가 전수되는 9단계의 과정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0월 22일)

지난 10월 10일 이후 <<장자>>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 때, 나는 영녕(攖寧)"이라는 말에 주목을 했었다. '영녕'이라는 말은 '어지러움 속의 평온'으로 해석된다. '변화 속의 안정', 즉 변화가 있은 후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지러움(혼돈)이 지난 다음에는 온전한 이룸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를 '도'에 이른 길이라 말하고, 이 '도'를 따르는 길은 우선 '오상아(吾喪我, 내가 나를 장례 시킨다)'를 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의 작은 삶, 작은 나를 죽이는 것이 진정으로 죽지 않는 길이고, 우리의 작은 삶, 작은 나를 살리는 것이 사실은 참 삶을 사는 것이다. "죽기 전에 죽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나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는 말과 비슷하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그 한 생명으로 끝나고 말지만, 그것이 썩으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좀 어렵게 말하면, 우리는 자의식으로 가득한 현재의 '나'가 죽어 없어질 때 '우주적 의식'을 지닌 진정한 '나', '우주적 나'가 새로 탄생한다는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다음, 장자는 '도'의 전수 과정을 이야기 한다. 재미난 우화이다. "나는 부묵(副墨, 버금 먹)의 아들에게 들었고, 부묵의 아들은 낙송(洛誦, 읊는 이)의 손자에게 들었고, 낙송의 손자는 첨명(瞻明, 잘 보는 이)에게 들었고, 첨명은 섭허(攝許, 잘 듣는 이)에게 들었고, 섭허는 수역(需役, 일 잘하는 이)에게 들었고, 수역은 오구(於謳, 노래 잘하는 이)에게 들었고, 오구는 현명(玄冥, 그윽한 이), 현명은 삼료(參廖, 빈 이)에게 들었고, 삼료는 의시(疑始)에게 들었다."

다시 사람 이름들을 나열해 본다. "부묵-낙송-첨병-섭허-수역-오구-현명-삼료-시원"이다. 여기 나온 이름을 우리 말로 풀어 보면 이렇다. '글 씀-구송함-잘 살펴봄-잘 알아들음-일을 잘 실천함-노래를 잘함-그윽함-빔-시원'이다. 위에서 말하는 도에 이르는 아홉 단계는 글을 읽되(부묵)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낙송),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핀 다음(첨병),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섭허),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수역),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오구).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현명), 조용하고 텅 빈 경지를 체험한 다음 시원의 도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이야기이다.

이 도가 전수되는 9단계의 과정을 나누어서 몇일 동안 살펴본다. 그러니까 '도가구계(道家九階)'라고 말하는 각 단계에서 오래 머물어 본다. 오늘은 1단계 이야기를 해 본다. 그리고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도'의 9단계 이르면 이러한 "사소한 웃음"이 몸에 배일까 생각하며 공유한다.

사소한 웃음/문숙자

한동안 소식 끊겼던 사람에게서 카카오톡이 왔다
한겨울 느닷없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냐 묻는다
언젠가 마트에 가면 아이스크림은 꼭 사세요
하던 말이 생각났다

대답도 하기 전에
바닷가 풍경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물결치는 바다를 배달했으니
무엇을 줄 수 있냐고 묻는다

속이 깊은 바다와
걸음이 예쁜 구름이 하늘을 지나는 풍경을 전송하고
지구에서 가장 푸르게 출렁이는 것을 주었으니
그대는 내게 무엇을 더 주실 수 있는지요? 물었다

빙수가 먹고 싶은데 어떡하느냐 딴소리를 한다
기온이 뚝 떨어져 바닷물이 꽁꽁 얼면
짭쪼롬하고 달큼한 빙수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가 킥킥 웃는다
나도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동그랗게 웃었다

달빛으로 푸른빛이 도는 이마가 시릴 때까지
우리는 킥킥거리다 헤어졌다
무거운 두뇌가 갑자기 가벼워졌다

부묵(먹)-글, 문자 단계 이야기를 확장해 본다. 우리 인간이 도(道)를 들을 수 있는 최초의 창구는 역시 '글'이다. 물론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과 같이 도(道)가 문자에 갇혀 있을 수는 없고, 또 문자 자체를 진리 자체라고 오해하면 큰 일이지만, 문자가 우리에게 도를 터득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의미에서 결코 문자를 무시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손가락을 달로 오해하면 곤란하지만, 손가락이 우리에게 달을 보게 해 주는 한,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불립문자를 말한다. 불립문자의 상태란 무엇인가? 등불 없이 자신의 마음만을 의지해 혼자 가야 한다. 물소의 뿔처럼. 왜냐하면 등불은 밝음과 어둠을 구분하지만, 꺼지는 순간 구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등불은 앞서 깨달았던 사람들의 가르침, 그러니까 <<금강경>>같은 경전들을 상징한다. 경전 속에 있는 글이나 문자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등불이 비추는 특정한 부분에 연연해서 등불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을 한다. “문자를 통한 지적인 이해를 표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말이나 글에 얽매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자는 자신의 문자가 아니라 타인의 문자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침묵하라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말이나 글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노예의 삶이지 주인의 삶이 아닌 것이다. 불립문자의 핵심은 남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하는 것, 그러니까 잃어버린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의 마음에 의지한 채 사자처럼 홀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글이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앵무새처럼 흉내 내는 타인의 말이나 글이 아니라, 자신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나 글을 쓰는 것이다.

장자도 진실은 '전해줄 수 없는 것' 에 있다고 본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거기서 모든 색깔과 음성이 출현한다. 색깔과 음성 너머의 바로 그곳을 각자의 내면에 현현(顯現)되도록 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현현 되면 마치 비밀의 방 열쇠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강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전해줄 수 없는 것' 을 가진 사람의 밑에서, 그 사람이 적절한 태도로 남긴 결과들을 받아먹고 그것들을 숙지하려 노력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바로 자유가 아니라 종속이라는 거다. 그  '전해줄 수 없는 것' 을 나름대로 갖는 것이 독립이다. 독립이나 자유로 이끌 수 있는 비밀은, 장자가 말하는, 환공이 읽는 책 속에 있거나, 그 책을 쓴 사람의 말 속에 있지 않고 윤편의 '손'에 있다고 했다..  

장자는 다음 우화 한 토막으로 설명한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사랑채 쯤 되는 곳의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이 그 아래 마당에서 수레바퀴를 만들다가 연장을 내려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은 어떤 말들을 엮은 것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들이지.' 윤편이 그 말을 받아 다시 물었다. '그 성인은 아직 살아 있습니까?' 환공이 답했다. '이미 죽었지.' 윤편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군요.' 환공이 화가 나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나 깎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제대로 설명하면 괜찮지만, 설명을 못하면 죽을 줄 알아라.' 윤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보건대, 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않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헐겁 지도 않고, 빡빡 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에서 이루어지고, 거기에 마음이 응하는 것이지, 입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습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알려줄 수도 없고, 제 자식 역시도 저로부터 그 비결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이라는 이 나이 돼서도 제가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 사람도 전해줄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따라 죽어버렸습니다. 그런 즉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이 옛 사람의 찌꺼기일 뿐인 것입니다.'"  

말이나 글을 배운 것으로는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다. '모험'이나 '도전'만이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글'이나 '말'은 전수할 수 있어도, '모험'이나 '도전'은 전수할 수 없다.  '모험'과 '도전'은 오직 한 사람의 고유한 욕망으로만 세상에 드러나지, 전수하고 못하고의 차원에 있지 않다. 글이나 책 너머의 비밀스런 곳에 있다.  윤편의 '손'은 전달되지 못한다. 아들도 그 '손' 그대로 전수받지 못한다. 결국 신비스런 그곳,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은 그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얼마나 안타깝고 쓸쓸한 일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 쓸쓸함의 그늘 아래서만 자유와 독립이 고개를 든다. 그 쓸쓸함의 그늘 아래서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을 모험과 도전으로 실현해 내는 일이 사는 맛 아니겠는가. 내가 나로 사는 일 말이다. 그래서 내가 또 하나의 윤편이 되거나 윤편의 대행자가 되지 않고, 내 안에서 윤편을 실현해버린다. 윤편의 내가 아니라, 나의 윤편으로 재편하는 일, 이것이 바로 자유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자유의 결과를 주우러 다니는 일을 멈춰야 한다. 내가 자유여야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할 내 안의 신비처를 지키다 보면, 천천히 내 손이 윤편의 손을 넘어선다. 내 손, 내 손에 집중하라. 윤편도 찌꺼기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이 도(道)를 들을 수 있는 최초의 창구는 역시 '글'이다. 글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야기는 일요일에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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