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오늘 글입니다.

'참나'를 찾는 여행
가을 비가 하루 종일 내린다.
아무도 없는 와인 바 <뱅샾62>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폐북에 저장된 것들을 읽다가, 김보일 선생의 글을 만났다.
가을의 문턱에서/김보일
무엇에 지칠 만큼 지쳐보고서 입맛을 바꾸어야지.
무엇을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이거 저거 집적대는 것은
자연이 젓가락을 움직이는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초록이 지쳐 단풍든다는 말이 자연의 이치를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말은 아닐지.
영과후진, 물은 웅덩이를 다 채우고 흘러간다던가.
지칠 만큼 여름이었고, 벌레들은 제 목청을 다해 울었으니
이제 가을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가을일 것이다.
요 며칠동안 가을답지 않게 낮에 더웠는데, 자연이 밥 맛을 잃었던지 하루 종일 가을비를 뿌린다.
이 비 그치면 이젠 정말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가을'일 것이다.
가을은 풍요로운 가을걷이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하는 짧은 계절이다.
솔로몬의 계절/이영균
가을
황금 들녁, 천고 마비
풍요의 계절입니다.
아닙니다.
추풍낙엽, 스산한 산천
슬픔의 계절입니다.
그래요.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입니다.
미묘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무게를 달리합니다.
그리고 가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가 김현승의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이다. 그가 한 말에 마음이 간다. "사람은 여름과 겨울에 늙고, 봄과 가을에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봄에는 육체적으로, 가을에는 영혼이 성장한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가을의 기도/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시가 '팍팍' 떠오르고, 읽히는 가을 저녁이다.
에바 캐시디의 <Autumn Leaves(낙엽)>을 들으며, 감미로운 피노 누아르 품종의 와인을 마시며, 한 주간 고생한 나를 위로하며 기도하는 시간이다.
따뜻한 감성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 '참나' 속에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난 오늘 저녁 그것을 꺼내어 아름다운 저녁을 누릴 뿐이다.
이게 내가 찾는 '참나' 여행이다.
'참나'는 텅 비어있지만, 그 곳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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