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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꽃은 화려하지만 금세 시들어버리고 열매는 투박해 보이지만 알차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9월 23일)

오늘부터 디어 노자 <<도덕경>> 제38장으로 <덕경(德經)>을 읽기 시작한다. 지난 번 읽은 제37장은 다음과 문장으로 끝났다. "化而欲作(화이욕작)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인위적으로 뭘 도모하려는 욕심이 생기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이를 진압한다. 無名之樸(무명지박)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不欲以靜(불욕이정)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이름 없는 통나무로 욕심을 없애니, 욕심이 없으면 고요하게 되고, 천하는 저절로 제 자리를 잡는다."

"화이욕작(化而欲作)"이란 말이 인상적이다. "자화(自化, 스스로 교화된다)"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치솟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라는 것을 노자는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인간 생명의 근원이며, 그 것이 있기 때문에 질서(cosmos)와 무질(chaos)와 조화의 통합적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거다. 그냥 "무위(無爲)"의 치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다.

도올 김용옥에 의하면, 생생불이(生生不已, 끊임없이 태어난다)의 생화과정(生化過程) 중에서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인류가 고안한 것이 하나는 법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타율적 규제이고, 후자는 자율적 절제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 두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양자를 초월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명지박"이다. 그러니까 문명 그 자체를 소박한 통나무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이 네비게이션으로 일상을 꾸려가면, '무욕(無欲)'과 '불욕(不欲)'의 세계로 나아가고, 그러면 고요하게 되고 '허(虛)'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내 삶에 적용하고 싶다. 그 키워드가 '박(樸, 소박)'과 '정(靜, 고요)'이다.

일반적으로는 "무명지박"을 역사의 방향으로 읽으면, 백성들은 '무욕'하게 되고, 통치자들도 '불욕'하게 된다. '무욕'의 주체는 백성이고, '불욕'의 주체는 성인(통치자)이다. 통치자가 '불욕'하여 고요하게 되면, '무위'를 실천하고 '허(비움)'을 극대화 시키면, 천하는 안정도리 것으로 읽는다. 노자 <<도덕경>>의 <도경, 도올의 표현에 따르면 "길의 성경")>은 끝난다.

오늘부터는 <<도덕경>> 후반부를 읽기 시작한다. 이 장부터는 '덕에 대한 총론'이다. 제1장부터 제37장까지 도(道)를 중점적으로 다룬 노자는 제38장부터는 덕(德)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오늘부터 읽을 제38장에서는 '덕'을 "상덕(上德)"과 "하덕(下德)"으로 구분하고 있다. 왕필은 '덕'을 '얻음(得)'이라고 했다. 항상 얻을 뿐 잃어버림이 없고 이로울 뿐 해가 없기 때문에 '덕'이라고 한다. 덕은 도에 의해 얻어진, 도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자 도의 작용이다. '덕'이란 도가 현실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윤리적 양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위'라는 도의 핵심 원리가 '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무위(의도나 억지가 없는) 덕은 상덕이고 유위(의도나 억지가 있는) 덕은 "하덕"이다. 도가 인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듯이, 상덕도 그러한 욕망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내로라’하는 사람은 덕이 없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인, 의, 예도 "하덕"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는 유위한 도덕률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소매를 끌어당기면서 예를 차리려는 사람은 상대에게 심리적 부담을 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을 써서라도 지키게 한다. 따라서 그것은 "상덕"의 범주에 들 수 없다.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는 것도 노자가 볼 때는 "상덕"이 아니다. 하나 뿐인 목숨인데 그것을 바치겠다고 나서는 것은 진실 되지 못하고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 자연스럽게 행해지면 굳이 그것을 대신할 윤리적 기준이 없어도 된다. '도'가 없으므로 그를 대신할 모사(模寫)로서 '덕'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덕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가 현실세계에서 철인에 의해 적용, 실행되는 이데아의 모조품이다. 이후 문장에서 순차적으로 배열된 '인, 의, 예'도 같은 구조로 설명된다. '인(사랑)'은 덕의 모사이고, '의(정의)'는 '인'의 모사이고, '예(예절)'는 '의'는 모사이다. '덕'이 온전하면 '인'이 나타날 필요가 없고, '인'이 온전하면 '의'가 나타날 필요가 없고, '의'가 온전하면 '예'가 나타날 필요가 없다. 계란껍질을 뚫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충'과 '신'은 예라는 껍질을 뚫고 나온다. '예'에서 '충'과 '신'이 탄생되면 세상은 '충'과 '불충', '신'과 '불신'으로 나뉘게 되고 그때부터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예'를 '충'과 '신'의 얄팍한 껍질이고 혼란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충은 신하가 임금에 대한 섬김이고, 신은 임금이 신하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를 강조하는 때는 이미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돈독하지 못하다는 거다.

'인', '의', '예'는 대립적 사고에 기초한 도덕률이다. 이러한 도덕률은 수학공식을 적용하듯이 세상을 딱딱 구분 지어 식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사람과 사물의 겉모양만 보고 미리 예단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에 대한 통합적 인식을 방해하는 편견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전식자(前識者)"는 그런 의미로 쓰였다. 왕필은 "전식자라고 하는 것은 먼저 안다고 까부는 자들인데, 하덕의 패거리들"이라 주석을 달았다. 도올은 이들이 "시사프로에 나와서 혹세무민하는 자들, 예언적 통찰을 가지고 있다고 뻥치는 자들"이라 했다. 이들이 세상을 망치는 자들이다. 그래 노자가 "도의 허왕된 꽃이요, 모든 어리석음의 사단"이라 말하는 것 같다.

나무에서 꽃은 먼저 피고 열매는 나중에 맺는다. 꽃은 사물의 겉모습이고 열매는 사물의 속이다. 꽃은 화려하지만 금세 시들어버리고 열매는 투박해 보이지만 알차다.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두터움은 나중에 맺는 열매에 있으며 미리 피는 꽃은 그러한 본질인식을 방해하는 "전식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전식자"는 도의 화려함이고 어리석음의 시작이라고 했으며, 대장부(성인)는 '꽃의 화려함(겉모습)을 버리고 열매의 두터움(내실)을 취한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주역>>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씨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는다)"을 소환하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이 "석과불식"이기 때문이다. '석과'는 가지 끝에 남아 있는 최후의 ‘씨 과실’이다. 석과를 먹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엽락(葉落), 체로(體露), 분본(糞本)이 필요하다.
1. ‘엽락(葉落)’은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거품과 환상을 걷어내는 일이다. 거품과 환상은 우리를 한없이 목마르게 한다. 진실을 외면하게 하고 스스로를 욕망의 노예로 만든다. (…)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소유는 끝이 없을 뿐 아니라 좋은 사람,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도 못 된다. 먼저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하는 엽락의 엄중함이 이와 같다. 좀 가지를 치고, 이 시절의 나무처럼 상황을 정리한다.
2. ‘체로(體露)’는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나무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다. 고 신영복 교수는 뼈대란 사회나 우리 자신을 지탱하는 기둥이라 했다. 이를테면 자주(自主), 자립(自立), 자부(自負)이다. 자주는 우리의 삶에 대한 주체적 결정권의 문제이다. 자립은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 놓고 있는가를 직시하는 것이다. 자부는 우리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성찰과 자부심을 안겨주는 것인가를 직시하는 것이다. 엽락과 체로의 교훈은 한마디로 환상과 거품에 가려져 있는 삶의 근본을 마주하는 것이다. 포획되고 길들여진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과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는 일이다. 엽락과 체로에서 나무는 자기 삶의 순서에서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겨울에 부족한 햇살과 수분 그리고 영양분을 가지와 줄기에 집중하여 간결한 알맞음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체로는 마침내 생을 헐벗은 가슴으로 존재를 우주 허공에 내던지는 멋진 포즈가 된다.
3. ‘분본(糞本)’은 나무의 뿌리(本)를 거름(糞)하는 일이다. 엽락(葉落)과 체로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분본이다. 무엇이 본(本)이며, 무엇이 뿌리인가에 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 놀랍게도 뿌리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다. 분본(糞本)은 뿌리(本)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뿌리가 접히지 않고 바르게 펴질 때 나무가 잘 자라고 아름답게 꽃피듯이 사람이 억압되지 않을 때 우람한 나무처럼 사회는 그 역량이 극대화되고 사람들은 아름답게 꽃핀다.

글이 길어졌다. <<도덕경>> 제38장의 정밀 독해는 다음으로 미룬다. 그래 오늘도 "시를 읽는다."

시를 읽는다 / 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 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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