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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안 하기'를 하면, 그 결과가 좋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24일)

오늘 아침은 <<구약성서>> "시편" 제 1편을 1을 공유한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한다." 이 말을 좀 쉽게 풀어 본다. 다음과 같은 사람은 매우 행복하다.
(1) 그는 범죄자들과 나쁜 일을 도모하는 일에 동참하여 걷지(walk) 않는 사람이다.
(2) 그는 죄인들이 가는 길에 서 있지(stand) 않는 사람이다.
(3) 그는 남을 중상모략 하는 자리에 있지(sit) 않는 사람이다.

이 세 가지는 '안 하기'이다. (1) 행복한 사람은 공동체를 음해하는 일을 도모하는 일에 참여하여, 그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범죄자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일에 걷는 일(walk), 즉 행동하지 않는다. (2) 행복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이 하는 삶의 스타일을 따라 그 안에 서 있지(stand) 않는 사람이다. (3)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중상모략 하고 시기하는 자리에 앉아 남을 헐뜯는데 앉아(sit)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여기서 앉아 있는 다는 건 자신의 몸에 베어,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는 수동적인 삶의 모습에 앉아 안주(安住)하는 사람이다. 탈영토화하여, 건너가기를 끊임 없이 시도하여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길 위에 서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매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묵상해야 한다. (1) 나는 오늘 내가 가야할 길을 잘 걷고 있는가? (2) 나는 오늘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과 함께 서있지 않는가? (3) 나는 오늘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자리에 앉아 안주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안 하기'를 위해서는, 내가 나도 모르게 하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제3자가 되어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살다 보면, '안 하기'가 '하기'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하기'는 거의 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기'는 대부분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안 하기'는 의도적이며, 의식적이다. 노자의 '무위(無爲)'가 소환된다. '무위'는 부자연스럽게 인위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거다. 그런데 '무위이불무위(無爲而不無爲)'라 했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면서 개인의 안빈낙도와 연결시킨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안 하기'를 하면, 그 결과가 좋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은 우주의 순환이나 사계절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또한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무위'는 오랜 연습과 훈련, 시행착오와 수정, 혹독한 자기 점검과 자기 변화를 거쳐 도달하게 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이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운 좋은 발견', '재수 좋게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세렌디피티'는 자신의 만의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에겐 그런 행운이 찾아 올 리가 없다.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그릇이 마련되지 않아, 금방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불행이다.

콩나물의 물음표/김승희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이 나온다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긴 기간 동안
밑 빠진 어둠으로 된 집, 짚을 깐 시루 안에서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에 대하여
보자기 아래 감추어진 콩의 얼굴에 대하여
수분을 함유한 고온 다습의 이마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의 금빛으로 터져 나오는 노오란 쇠갈고리 모양의
콩나물 새싹,
그 아름다운 금빛 첫 싹이 왜 물음표를 닮았는지에 대하여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위로 향하여
검은 보자기 천장을 조금 들어올려보는
그 천지개벽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운 기간 동안
꼭 감은 내 눈 속에 꼭 감은 네 눈 속에
쑥쑥 한시루의 음악의 보름달이 벅차게 빨리

검은 보자기 아래 - 우리는 그렇게 뜨거운 사이였다

우리가 말하는 창조가 '무위의 실천'이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으로 끌려간 한 유대인이 묵상 중에 우주창조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그것이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 무명의 히브리 작가는 ‘창조’라는 단어를 ‘바라’bara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유사한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아사’ 혹은 ‘야짜르’는 각각 ‘만들다’ 혹은 ‘형성 하다’이다. 이 두 단어는 이미 있는 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창작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바라’라는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덜어내다', '군더더기를 떼어 내다’이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성서의 첫 구절의 의미는 ‘시간과 공간이 등장하기 전에, 한 존재가 무질서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 쓸데없는 것들을 잘라 냈다’라는 의미다. 창조는 ‘안 하기’이다. 배철현 교수의 칼럼에서 배운 거다. 흥미롭다.

'안 하기'는 내 삶을 내가 주인으로 사는 법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주인의식'을 잃게 만드는 사례들은 이렇다. 오래간만에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좀 하려고 가방을 싸 들고 나섰는데, "부모님이 너 요즈음에 공부를 왜 그렇게 게을리 하는 거냐? 다른 데로 빠지지 말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 좀 해라!" 고 말씀 하시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날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당연히 도서관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오래간만에 집안 청소 좀 하려고 빗자루를 찾고 있는데 부인이 빗자루를 들고 나오면서, "청소 좀 하세요" 하며 빗자루를 건넨다.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날 것이다.

주인의식을 말소시켜주는 모든 이야기 속에는 공통의 전제가 들어 있다. 공부이든 청소이든 일을 시키는 사람은 어른이고 상대는 항상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아이이니 잘 감시하고 '신상필벌(信賞必罰)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주인의식은 어떤 과제를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려는 의지를 통해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인들은 아이들에게 칭찬을 하지 않는다. 같은 원리이다. 공정한 수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보상은 주인의식을 가장 확실하게 제거하는 방법이다. 실제 미국 회사에서는 전문경영자들이 회사의 주인인 대주주를 넘보지 않게 하기 위해 대주주가 모인 이사회에서 경영자들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의 인센티브를 약속하기도 한다. 경영자들을 돈의 노예로 만들어 돈 말고는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주인의식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신자유주의 경영방식이다. 경영자가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 주인임을 포기한 회사에서 종업원들이 먼저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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