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5일)
1
지난 주에 함께 <<주역>>을 읽는 도반이 부채를 선물했다. 오늘 사진이 그 거다. 그 부채 안에다 직접 써 준 글이 아주 마음에 든다. 이백의 유명한 시 <행로난(行路難)>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거라 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장풍파랑회유시(長風破浪會有時), 직괘운범제창해(直掛雲帆濟滄海)' 즉, '큰 바람이 물결을 헤치면, 구름 돛을 달고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리라'는 뜻이라 했다.
'장풍파랑(長風破浪)'은 '멀리 불어 가는 대풍을 타고 끝없는 바다 저쪽으로 배를 달린다'는 뜻으로, '대업(大業)을 이룬다'는 말이다. 구름 돛 달고서 푸른 바다 헤쳐갈 그날을 기다리며, 거센 바람 물결을 일으키라는 거다. 지난해 12.3 비상 계엄 이후 되는 일이 없던 차에, 날은 덥고 많은 관계가 차단된 어려운 상황인데, 이 부채를 들고 큰 바람(장풍)을 만들라는 위로로 받아들였다.
큰 뜻을 이룬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지배 당하지 않고 그 환경을 이겨내었던 공통점이 있다. 역사에 남을 명작을 만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명작은 평탄한 삶에서 나오기 어렵다. 시련이 크고 실패의 아픔을 겪을수록 더 크게 성장한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이 낳은 위대한 시인, 이백(李白)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살아서는 천재, 죽어서는 시선이 됐던 이백은 수많은 풍우한설(風雨寒雪)을 겪었던 지식인으로, 당대의 법칙에 지배 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의 법칙을 만들어 나갔던 인물이다.
"장풍파랑회유시(長風破浪會有時), 직괘운범제창해(直掛雲帆濟滄海)' 즉, '큰 바람이 물결을 헤치면, 구름 돛을 달고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리"는 이백의 험난한 삶을 한마디로 잘 표현해 주는 시구이다. 이백은 <행로난: 가는 길 어려워라>라는 시에서 황하를 건너려고 하자 얼음이 강을 가로막고 있었고, 산을 오르려고 하자 눈이 길을 막고 있는 것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한탄하였다. 하지만 <행로난>이 단순히 신세 한탄에 그쳤다면 지금까지 많은 중국인에게 사랑받는 명시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강태공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 낚시로 소일하다가 주 문왕에 발탁된 것이나, 명재상 이윤이 배를 타고 해에게 가는 꿈을 꾼 다음 탕왕에게 발탁된 것처럼 자신 역시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으로 확신했다. 그때 큰 바람을 타고 드넓은 바다를 건너겠다는 담대한 의지를 담았다.
<행로난>을 통해 볼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 먼저, 때를 기다릴 수 있는 혜안: "'큰 바람이 물결을 헤치면" 이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큰 바다로 나가고 싶은 꿈이 있다고 해도 무턱대고 나가서는 결코 뜻을 이루기 어렵다.
▪ 또 한 가지는 "구름 돛을 달고" 처럼,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가까운 바다로 가려면 특별한 어려움이 없겠지만, 먼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 거리만큼 오랜 준비를 해야 한다. 큰 돛을 달아 바람을 잘 맞도록 해야 하고, 의도치 않은 기상 악화에도 대비해야 하며, 오랜 시간 바다에 머물 충분한 식량과 식수도 확보해야 한다.
천양희 시인의 시로 더 용기를 얻는다.
마음의 경계/천양희
햇살이 수면에 어룽거린다
물방울 모였다 물거품 되고
물떼새들 갈대 숲에서 낄룩거린다
가슴 검은 물떼새!
그 이름만으로 눈시울 붉어져 물 속에 물구나무 선
나무들 물결 속에 제 속을 허문다
허물어야 할 것은 내 속의 강둑들 모래톱들 경계 없는 강
나는 좋다 흐르다 멈춘 강이 있다고는 하였으나
깊은 물소리 듣지 않는다면 누가
강물을 밀어 해안까지 가겠는가
강은 수심 깊어 물소리 숨기고
물고기들 잘 때에도 뜬눈으로 잔다
수심에 잠겨 눈감고도 잠 못 드는 사람들
생(生)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
그래서 우리가 물길 하나 가졌던가
물길은 물의 길일까 생각하듯 물살 내려갈 때
나도 몇 굽이 내려갔다
물소리 한꺼번에 져 내렸다
마음이 오래 강변에 서 있다
세찬 물결이 어깨를 툭 친다 나아가라고
내려가나 나아가는 물줄기들
시퍼런 것들의 저 서늘한 기운
오늘은 내가 붙잡고 가겠다
강 끝까지 해안까지 더 더 끝까지
2
"염병(染病)하네" 2017년 박근혜 국정농단 특검 때 수사팀장인 윤이 구치소 수감 중 특검 출석을 거부하던 최순실씨를 강제로 구인했던 사례가 있다. 당시 최씨가 끌려오면서 ‘여기는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특검 건물) 청소노동자가 ‘염병하네’라고 했었다. 그도 염병하고 있다.
‘염병(染病)’은 전염병과 같은 말이기도 하고, 전염병 가운데서도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표현이기도 하다. 전염병엔 콜레라·천연두 등도 있지만 장티푸스가 가장 무서운 병이기 때문에 염병이 특히 장티푸스를 가리키게 됐다고 한다. 조선 숙종실록 59권 숙종 43년(1717년) 4월 24일 기록에는 충청도 홍산(鴻山) 등 스물여섯 고을에서 염병을 앓는 자가 3400여 명이고 죽은 자가 1422명이라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예방과 치료제가 없었으므로 걸리면 사망에 이르기 십상인 무서운 질병이었다.
장티푸스, 즉 염병이 전염성이 강하고 치료가 어려웠던 병인 만큼 “염병하네”란 욕설 또한 독한 표현을 할 때 쓰이게 됐다. “염병을 떤다”는 말이 쓰이기도 하는데 엉뚱하거나 나쁜 짓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염병하네”와 비슷한 욕으로 “지랄하네”도 있다. ‘지랄’은 간질병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지랄 염병하고 있네”라고 한다면 더욱 심한 욕이 된다.
3
연일 '찜통 더위'라 외출하지 않고 <<주역>>을 계속 공부한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산풍 고> 괘 효사와 효상사를 읽는다.

'초육'의 효사는 "初六(초육)은 幹父之蠱(간부지고)니 有子(유자)면 考(고) 无咎(무구)하리니 厲(여)하야 終吉(종길)이리라" 이다. 번역하면, '초육은 아버지의 일을 주장하니, 자식이 있으면 죽은 아버지가 허물이 없을 것이니, 위태롭게 여겨야 마침내 길할 것이다'가 된다. TMI: :줄기 간·주장할 간, 考:죽은 아비 고, 厲:위태할 려.
'초육'은 양 자리에 음이 있고 응하는 육사도 같은 음이니, 사실 자식이 없는 상이다. 선대 아버지의 일을 맡아 일을 해야 하는데, 만일 자식이 있으면 아버지의 일을 잘 처리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죽은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 그러나 위(位)가 부당하고 중(中)도 얻지 못한 상황이니, 위태롭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해야 마침내 길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고'를 관장하는 것은 아들이 있어 망부(亡夫)의 허물을 없애는 것이다. 위태로우나 결국에는 길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과거의 외적 욕망을 힘써 바로 잡으라는 거다.
내괘 <손괘> 바람은 <건괘> 하늘의 '초효'가 변한 것이다. <건괘>에는 부친(乾爲父, 건위부), 나무 열매(乾爲木果, 건위목과)의 상이 있다. <건괘>가 <손괘>로 바뀐 것이다. 부친이 타락하고 열매가 부패한 형국이 된다. 하지만 '초효'만 음으로 변한 것이니, 그 상태가 아주 심각한 것은 아니다. 완전한 타락, 순전한 부패는 아는 것이다. 따라서 타락하고 부패한 부분을 바로잡고 도려내면 되는 것이다. "간(幹)"의 의미이다. 그리고 <건괘>의 맨 아래가 음으로 바뀐 <손괘>는 장녀를 뜻하기도 한다. <손괘>가 '초육'부터 '육사'까지 <감괘>인 물 안에 있으니 사리에 어두워 부친의 업(業)을 처리하기 어렵다. 외호괘 <진괘> 장남은 '구삼'부터 '상구'까지의 <리괘> 안에 있으니 어둠을 환히 밝혀 부친의 고(蠱)를 정확히 파악하고 살필 수 있다.
4
‘고(考)’는 죽은 아버지를 의미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下 第二」에 다음의 글이 있다. "천자가 죽음을 붕(崩)이라 하고, 제후가 죽음을 훙(薨)이라 하고, 대부가 죽음을 졸(卒)이라 하고, 사(士)가 죽음을 불록(不祿)이라 하고, 서인이 죽음을 사(死)라고 한다. 사람이 죽어 상에 있을 때는 시(尸)라 하고, 관에 있을 때는 구(柩)라고 한다. 날짐승이 죽음을 강(降)이라 하고, 들짐승이 죽음을 지(漬)라 하고, 도적이 죽음을 병(兵)이라 한다. 제사를 지냄에 왕의 아버지를 황조고(皇祖考)라 하고, 왕의 어머니를 황조비(皇祖妣)라 하고, 아버지를 황고(皇考)라 하고, 어머니를 황비(皇妣)라 하고, 남편을 황벽(皇辟)이라 한다. 살아서는 부(父)라 하고, 모(母)라 하고, 처(妻)라 하며, 죽어서는 고(考)라 하고, 비(妣)라 하고, 빈(嬪)이라 한다. 오래 살다 죽음을 졸(卒)이라 하고, 단명함을 불록(不祿)이라 한다. (天子死曰崩이요 諸侯曰薨이요 大夫曰卒이요 士曰不祿이요 庶人曰死라 하니라. 在牀曰尸요 在棺曰柩라 하니라. 羽鳥曰降이요 四足曰漬이요 死寇曰兵이라 하니라. 祭에 王父曰皇祖考요 王母曰皇祖妣요 父曰皇考요 母曰皇妣요 夫曰皇辟이라 하니라. 生曰父요 曰母요 曰妻라 하며 死曰考요 曰妣요 曰嬪이라 하니라. 壽考曰卒이요 短折曰不祿이라 하니라.)
여기서 아버지는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조직의 전임자이기도 하다. 어느 조직이든 후임자가 있으면 전임자가 있는 법이다. 전임자의 유산은 후임자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청산되기 마련이다. 전임자의 업적에 대해서는 비록 폄훼하지 않더라도 굳이 부각시키지도 않으며,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후임자로서는 자신의 출발선을 정확히 그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계를 짓는다고 일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후임자의 임무는 전임자의 과오로 인해 파생된 문제들을 수습하고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 다음에 야 자신이 구상하는 일들을 펼쳐 나갈 수 있다. 예컨대 썩은 부위의 근원까지 찾아 도려낸 다음에 야 비로소 단단한 새살이 돋아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우리는 <산풍 고> 괘에 등장한 아버지, 어머니, 자식을 우리 자신으로 치환하여 인식할 수 있다. 과거의 관점에서 아버지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어머니는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욕망을 추구했던 과거의 자식이며, 어머니 마음속으로만 욕망을 품었던 과거의 자식이다. 자식은 곧 현재의 나이다. 이렇게 아버지, 어머니, 자식을 한 사람으로 바라볼 때 개인적 차원의 고(蠱)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효사를 다시 보면, '겉으로 드러내며 추구했던 욕망을 지금 바로잡는다면 지난 욕망도 허물없게 될 것이니 함께 노력하라는 뜻을 얻을 수 있다. 원문에서 "여(厲)"는 '쉬운 일이 아니니 위태롭게 여기며 조심조심할 것'을 경계하는 글자이므로. '함께 노력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누구나 욕망을 품고 산다. 욕망이 부질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미래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에게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망할 때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은 비로소 의미를 떼게 된다. 부질없는 욕망이었다고 판단 내릴 지라도 과거의 욕망을 지금 어찌할 수 없는 법이다. 오직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욕망으로 인해 전개되었던 일과 상황을 바로잡는 것뿐이다. 그것이 과거의 욕망을 바로잡는 일이다. 더는 과거의 욕망에 미래의 시간을 내주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변화하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하늘이 허락한 범주 내의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한 정직하고 성실한 노력이 변화하는 존재로 서의 우리의 삶을 이상적인 위치로 밀어 올려준다. 우리의 욕망은 바로 그 자리를 향하는 노력의 과정과 어울리는 것이어야 한다. 표류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삶은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는 온전한 인간이 선택하는 운명 활용 차원의 질문이 된다. 그러나 최진석 교수는 여러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사람으로 성장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본’이다." 그러면서 그는 늘 이렇게 주장했다. 누구나 기본만 갖추고 있으면, 세속적인 일에서나 영적인 일에서나 모든 일을 잘 이룰 수 있다. ‘기본’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기본’이 없이 하는 일은 어떤 것도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기본 가운데 기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바로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려는 문을 연다'는 뜻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근본 질문 옆에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몇 개의 질문들이 포진한다는 거다.
▪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초육"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幹父之蠱(간부지고)는 意承考也(의승고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아버지의 일을 주장함은 뜻이 죽은 아버지를 잇는 것이다.” TMI: 意:뜻 의, 承:이을 승. 아버지의 '고'를 관장하는 것은 의미 있게 망부를 계승하는 것이다.
여기서 "意承考也(의승고야)'는 단순히 죽은 아버지에 이어 가문을 잘 꾸려간다는 뜻에 머무르지 않고, 예전에 꿈꾸었던 바른 욕망을 가치있게 이어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승(承)"은 <손괘>의 상에서 나온 글자이다(巽爲繩直, 손위승직"). '초육'이 동하면, 지괘는 제26괘인 <산천 대축(山天 大畜)> 괘가 된다. 단절과 청산보다는 계승과 승화가 크게 쌓을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5
"구이"의 효사는 "九二(구이)는 幹母之蠱(간모지고)니 不可貞(불가정)이니라" 이다. 번역하면 '구이는 어머니의 일을 주장하니, 가히 곧게 하지만은 못한다' 가 된다. '구이' 음 자리에 양으로 있지만, 내괘에서 중도를 얻은 자리이다. '구이'가 음 자리에 있고 응하는 자리도 '육오'로 음(陰)이니, 어머니의 일을 맡아 주장한다고 하였다. 아버지의 일이나 어머니의 일이나 모두 선대(先代)의 일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일을 맡아 주장함에 있어서는 고집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선대의 일이 후대로 내려온 것이지만, 선대(先代) 때와 후대(後代) 때는 상황이 변해 있다. 중도(中道)로 그 상황을 잘 파악하여 융통성 있게 해결하라는 의미로 읽는다. 어머니의 "고"를 관장하는 것은 바르게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욕망의 실체를 지혜롭게 인식하라는 거다.
대상괘의 육효를 육진적으로 구분하면, '오효'는 부친, '이효'는 모친의 자리이다. 이를 적용하면 부친은 음으로 유약한 존재이고 타락한 상황이다. 반면에 모친은 양으로 지나치게 강해 기질이 남자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모친의 탓이라고 보기 어렵다. 부친이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괘가 제54괘인 <뇌택 귀매(雷澤 歸妹)> 괘이다. 이 괘의 '초구' 효사가 "初九(초구)는 歸妹以娣(귀매이제)니 跛能履(파능리)라. 征(정)이면 吉(길)하리라" 이다. 번역하면, '초구는 누이동생을 시집 보내는데 제첩(娣妾)으로 보내니, 절름발이가 능히 밟는다. 가면 길할 것이다'가 된다. <귀매괘>는 전체적인 양상이 부당한 상황이다. 시집가는 것으로 보자면 누이동생을 시집 보내는데 정실(正室)이 아닌 첩(妾)으로 보내는 것이다. 정식 신부(新婦)에 딸려 온 여자를 제질(娣姪)이라 하고, 첩을 제첩(娣妾)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마치 절름발이가 걷는 것처럼 부족한 듯하게 처신하면, 첩으로 시집가더라도 길하다. 즉 전체적으로 부당한 상황에서, '초구'는 '비록 바르지 못한 상황에 처하여 있더라도, 그 상황에서 잘 살아가려면 마치 절름발이처럼 부족한 듯 행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꾸준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부당한 상황에서도 잘 이어갈 수 있다는 거다. <산풍 고> 괘의 '구이'와 연결하여 이해하면,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처럼 약점이 있는 모친이 다른 남자의 집으로 가는 상이 되니, 다. 약점은 무능한 남편이 돈벌이를 못하고 있다는 것, 자식이 있다는 것,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현실적 처지에서 비롯된다. 자식이 이런 상황을 알았다고 해서 원칙을 내세워 모친을 비난할 수 없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면 그럴 수 없다. '역지사지'란 말 그대로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것'이다. 처지를 바꾸면 생각이 달라진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幹母之蠱(간모지고)는 得中道也(득중도야)라" 이다. '상전에 말하였다. 어머니의 일을 주장함은 중도를 얻었기 때문이다'라 말한다. 우리가 주역을 읽는 이유는 공부하기 위해서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글을 공유한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이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이다." 공부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확보했다면, 우리는 모진의 고(蠱)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대신 중도(中道)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득(득)"은 '실(실)'의 반대 개념이니, '중도를 잃지 않는 것은'은 곧 '중도를 지키는 것'이 된다.
'구이'가 동하면, 지괘는 제52괘인 <중산 간(重山 艮) 괘가 된다. 모친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함부로 잘잘못을 규정하지 말며, 자식은 먼저 자신을 태산처럼 무겁게 수양해야 한다. 그럼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중산 간> 괘의 '육이' 효사는 "六二(육이)는 艮其腓(간기비)니 不拯其隨(부증기수)라. 其心不快(이심불쾌)로다' 이다. '육이는 그 장딴지에 그치니, 그 따름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 마음이 쾌하지 않도다'란 뜻이다. '육이'는 신체로 보면 장딴지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좌선(坐禪)에 들어가니, 초효에서 발꿈치에 그치고 이제 '구이'에서는 장딴지에 그치는 격이다. 장딴지에 그치고자 하나 발이 아프고, 발이 그치면 장딴지가 아프다. 발과 장딴지가 서로 따르는 바가 되어 발이 장딴지에게 원하고 장딴지가 발에게 원하는 바가 있으나, 물러나 듣지 못하고 서로 그 따름을 구원하지 못한다. 모두가 그쳐야 하기 때문이다. 발과 장딴지의 고통에 마음이 불쾌하다. 이 효사를 보면, 모친의 "고(蠱)"가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이'가 동하면, 내호괘가 <감괘> 물이 된다. <설괘전>에서 "坎爲月(감위월)-감괘는 달이 된다."고 했다. 해(日)를 부친으로 보면, 달(月)은 모친이 된다. '구이'가 동하면 호괘가 제40괘인 <뇌수 해(雷水 解)> 괘가 되니, 내과 <손괘>의 공손함으로 모친의 "고(고)"를 대한다면 모친도 본성을 되찾아 일이 완만하게 해결될 것임을 암시한다.
모친을 전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정이 유순하고 유약한 전임자의 속성이 나오니 그의 "고(고)에는 피동적으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무조건 곧이곧대로 처리하는 것보다는 중도적 관점에서 내막을 잘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욕망을 마음속 깊이 품었던 나 자신으로 모친을 치환해보면, "불가정(不可貞)"은 '곧게 마음먹는 것만으로는 내적으로 품었던 욕망을 바로 잡을 수 없다'와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실천의 중요성과 욕망의 강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불행이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고, 살고 싶었던 삶을 살고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행복하지 않음'의 감정이야 말로 정말 끔찍한 것이 아닐까? 완전함을 추구하는 대신 지혜로운 타협이 필요해 보인다. 타협의 대상이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어지는 <산풍 고> 괘의 효사는 내일로 넘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는 늘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 (4) | 2025.08.15 |
|---|---|
|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울 따름이다. (4) | 2025.08.15 |
| 수치스러운 독립기념관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12) | 2025.08.14 |
|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7) | 2025.08.14 |
| 사는 건 '균형 찾기"이다. (10) | 2025.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