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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 산책

산수 몽(蒙)괘 (1)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7월 27일)

이 번 주말에 읽을 <<주역>의 괘명은 <산수 몽(蒙)괘>이다. 이 괘는 <<주역>>의 제2괘인 <수뢰 둔괘>를 미러(mirror)이미지로 서로 뒤집은 것이다. 이를 <도전(倒轉) 괘>라고도 한다. <서괘전(序卦傳)>은 이렇게 말한다. "둔(屯)이라는 것은 물(物)이 생겨나는 것에 관한 괘의 모습이다. 사물이 생겨난 후에는 그 사물은 어둡고 어리다. 그래서 <몽괘>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몽은 갓 나온 어두운 존재라는 뜻이다. 즉 몽괘는 사물의 어린 모습이다. 어린 사물은 기르지 않을 수 없다(屯者, 物之始生也, 物生必蒙, 故受之以蒙, 蒙者, 蒙也, 物之穉也, 物穉, 不可不養也).

외괘(상괘)가 간산(艮山, ☶)이고,  내괘(하괘)가 감수(坎水, ☵)로 이루어진 괘의 명칭을 ‘몽(蒙)’이라 한다. '어릴 몽'자인 ‘몽’은 '어리석고 유치함'을 뜻하는데, 천지 기운의 교감으로 만물이 어렵게 나와서 어린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어린 아이를 잘 보살펴 기르듯이 초창기의 사업이 잘 이루어지도록 길러야 하고, 어리석음을 깨우치도록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인생도 부모로부터 태어나 오랜 동안 기름을 받게 되고,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육을 받게 된다. 또한 사회의 일도 어려운 초창기를 지나기 위해서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교육을 수행해야 한다. 외괘가 '산 ☶(간상련)'이고 내괘가 '물 ☵(감중련)'이니 안으로는 험한 상인 '물 ☵'이고 밖으로는 그쳐 있는 '산 ☶'이다. 따라서 조용히 능력이 양성될 때까지 교육을 받으며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으로 읽는다.

'몽(蒙)'은 '매(昧)'라는 글자와 같이 자주 쓰인다. "몽매하다"는 말이 그 예이다. 그 뜻은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이다. '몽의 일차적인 뜻은 '무지함(ignorance)'이 아니라, '어두움(darkness)'이다. 예를 들어 '계몽(啓蒙, enlightment)'이란 '어둠을 연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18세기를 우리는 '계몽주의'라 한다. 이 말은 이전의 어두운 시대를 열러 밝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18 세기를 '빛의 세기(siecle des lumieres)'라 했다. 이 말을 일본 사람들이 계몽주의로 번역하고,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계몽'은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가르친다는 이야기 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어둠을 연다'는 뜻으로 보는 게 옳다.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면 당연히 방안이 밝아질 것이다. 많은 사물이 더 잘 보일 것이다. 계몽은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두운 의식을 맑게 만드는 것이다. 어둡다고 악한 것은 아니다. 어두움은 그 나름대로 밝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깊이가 있다. 어두움과 밝음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상보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몽'은 또 '어린이(아이, 兒)'의 뜻도 있다. 이 '어린이'라는 말에 문제가 있다. 전통적으로 '어리다'라는 뜻은'어리석다' 뜻만 지녔는데, '어린이 날'의 제정을 주장했던 소파 방정환은 그러한 가치 개념을 배제하고 순결한 '어린이' 상을 만들었다. 어린이라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며, 어린이로 하여금 순결한 본성을 개성 있게 있는 그대로 발현하는 것이 "교육이다"라고 주장했다. 도올 김용옥 교수에 의하면, 이 교육 철학은 동학 사상의 '어린이중시 사상'에서 나왔다고 했다. 해월 최제우의 "경물타아(輕勿打兒)"가 그것이다. 이 말은 '경솔하게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는 뜻으로, 어린이를 하늘처럼 위하라는 의미의 천도교 경전의 말이다. 사람과 만물을 대함에 있어 주의할 점을 깨우치는 <待人接物(대인접물)>에 나오는 내용이다. 해월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이니 하늘처럼 섬기고(人是天 事人如天, 인시천 사인여천)",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이 강림하셨다고 말하라(道家人來 勿人來言 天主降臨爲言, 도가인래 물인래언 천주강림위언)고 가르쳤다. 특히 말미에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을 때리는 것(輕勿打兒 打兒卽打天矣, 물경타아 타아즉타천의)’이라고 강조했다.

죄악에 물들지 아니하고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마음은 어린 아이 때의 마음이다. 그래서 孟子(맹자)도 말했다. ‘대인이란 어린 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대인자 불실기적자지심자야). 많이 인용되는 영국 낭만파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시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과도 상통한다.

결론적으로 "몽"이라는 단어를 통해 보면, 어린이는 무식한 존재가 아니라, 어두운 존대이다. 아직 밝음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곧 읽게 될 "격몽(擊蒙)"이라는 말을 어린이를 무지하다고 무조건 때리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몽괘>를 읽다 보니, 이러한 어린이 예찬은 또 다시 우리 사회의 21세기 교육의 타락상을 초래했다. 어린이는 예찬의 대상의 아니라, 교육의 대상이다. 방임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법을 길러주는 교육의 대상이다. 그러니 진짜 교육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스스로 교육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교육은 자발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산수 몽괘>의 괘사와 효사를 읽어가며 살펴 볼 생각이다.

<산수몽 괘>의 괘의는 '바름을 기르기 위해 과감히 행하고 덕을 길러라'라는 "과행육덕(果行育德)"이다. 참고로 제1괘인 '중천 건괘'의 괘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이 말은 '천지의 운행이 쉬지 않는 것과 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중지 곤괘'의 괘의는 "후덕재물(厚德載物)"이다. 이는 '대지가 모든 만물을 싣고 있듯이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포용하라'는 말이다. 일상을 영위하며, 그때 그때 자신을 돌아보며, 하늘의 마음이 부족한가, 아니면 땅의 마음을 잃고 있는가, 이 괘의들을 갖고 나 자신에 질문해 보라 한다. 그리고 제3괘는 "창세경륜(創世經綸)"이다. 이 괘를 만나면, '우리는 천지가 열리니 만물을 창조하고 세상을 일으켜 천하를 다스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까지의 괘의를 정리해 본다.
- 자강불식(自强不息): 천지의 운행이 쉬지 않는 것과 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라.
- 후덕재물(厚德載物): 대지가 모든 만물을 싣고 있듯이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포용하라.
- 창세경륜(創世經綸): 우리는 천지가 열리니 만물을 창조하고 세상을 일으켜 천하를 다스리라.
- 과행육덕(果行育德): 바름을 기르기 위해 과감히 행하고 덕을 길러라.

괘사는 다음과 같다. "蒙(몽)은 亨(형)하니 匪我(비아) 求童蒙(구동몽)이라 童蒙(동몽)이 求我(구어)니 初筮(초서)어든 告(곡)하고 再三(제삼)이면 瀆(독)이라. 瀆則不告(독즉불곡)이니 利貞(이정)하니라"이다. 이 말은 '몽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어린 아이)을 구하지 않고 동몽이 나를 구하니, 처음 점치거든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하면 더럽힌다. 더럽히면 알려주지 못하니, 바르게 함이 이롭다.   筮:점칠 서  告:고할 고(고할 곡)   瀆:더럽힐 독

'몽(蒙)'은 어리고 유치한 단계이지만, 천지기운을 받아 어렵게 생(生)하여 일이 자라나고 상황이 전개되려는 조짐이기에 형통하다. 이러한 '몽'의 상황에서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세상살이를 하나하나 배워 나가듯이,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이 있어야 한다.  교육의 '도'는 세상 경륜을 익힌 자가 몽매한 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몽매한 자가 경륜을 익힌 스승을 찾아야 올바른 가르침이 베풀어진다. 오늘날 학생 제자가 올바른 스승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자처하는 자가 학생을 끌어 모으기 위해 영업하는 현실이 얼마나 교육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교육의 가르침(敎)과 배움(學)에 있어서는 스승과 제자 간에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교육의 도가 더럽혀진다. 어려운 상황에서 교육하는 것이니 바르게 해야 이롭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몽괘>는 '형(亨)의 덕성을 지니고 있다'에서 '형'은 어린 사물이 잘 자라도록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즉 건강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 다음 어린이를 가르치는 원칙은 이러하다는 거다. 선생인 내가 동몽(어린이)을 가르치겠다고 구하러 다니는 추태는 있을 수 없다(匪我求童蒙, 비아구동몽). 반드시 교육은 동몽 스스로 순결한 마음과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의 계발을 위하여 선생을 찾아야 한다(童蒙求我, 동몽구아). 그리고 동몽이 찾아와서 처음 한 번 진지하게 물음을 던졌을 때는(初筮, 초서) 나 또한 진지하게 답변해준다. 그러나 배우는 자가 같은 질문을 두세 번 던지거나 같은 주제에 간하여 점을 계속 친다면, 그것은 선생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또한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에는 성실성의 바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깨우침이 있을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 모독하는 자에게는 일체 가르침을 허락하지 말라고 한다(瀆則不告, 독즉불곡). 존재의 물음을 던진다는 것은 그 물음으로부터 항상 얻는 것이 있다(利貞, 이정). 도올 김용옥 교수는 "정(貞)"을 '바르게 함'보다 '점치다 아니 묻다'로 풀이를 한다.

이 괘사를 풀이한 단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彖曰(단왈) 蒙(몽)은 山下有險(산하유험)하고 險而止(험이지) 蒙(몽)이라. 蒙亨(몽형)은 以亨行(이형행)이니 時中也(시중야)오. 匪我求童蒙童蒙求我(비아구동몽동몽구아)는 志應也(지응야)오. 初筮告(초서곡)은 以剛中也(이강중야)오. 再三瀆瀆則不告(재삼독독즉불곡)은 瀆蒙也(독몽야)일새니 蒙以養正(몽이양정)이 聖功也(성공야)라.' 해석하면, '단전에 말하였다. "몽은 산 아래에 험함이 있고, 험해서 그침이 몽이다. ‘몽이 형통한 것’은 형통함으로써 행하니 때로 가운데 함이요, ‘내가 동몽을 구하지 않고 동몽이 나를 구하는 것’은 뜻이 응함이요, ‘처음 점해서 알리는 것’은 강하고 가운데 함이요, ‘두 번 세 번 하면 더럽혀서 더럽히면 알려주지 못하는 것’은 '몽'을 더럽히기 때문이니, '몽'으로써 바른 것을 기름이 성스러운 공이다.”

몽은 산 아래에 험함이 있는 상이니, 험해서 그쳐 있는 것이다. 즉 <둔괘>에서 어린 생명이 나오고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으나, 어린 생명이 자라나고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높은 산도 있고 험한 물도 있다. 그러니 '몽'의 정황에서는 그때그때에 절도 있게 중도를 지켜 나가야 형통하다. 교육은 형이상적(形而上的)인 학문과 형이하적(形而下的)인 세상사를 적절하게 조화하는 중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군자의 도는 ‘중용(中庸)’에 있다.

《중용(中庸)》 제2장의 다음 글을 음미해 보자. 중니(孔子의 字)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한다. 군자의 중용은 군자이면서 때로 중을 하는 것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이면서 거리낌(기탄)이 없는 것이다.”(仲尼曰 君子는 中庸이오 小人은 反中庸이니라. 君子之中庸也는 君子而時中이오 小人之(反)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니라.)

그리고  가르침을 구하는 자와 가르치는 자는 뜻이 잘 응해야 하고 서로의 의지가 강하게 부합되어야 할 것이니, 이러한 뜻이 부합되어 바름을 길러 나간다면 성인(聖人)으로서의 공력이 있는 것이다.

<대상전>은 다음과 같다. "象曰(상왈) 山下出泉(산하출천)이 蒙(몽)이니 君子(군자) 以(이)하야 果行(과행)하며 育德(육덕)하나니라. 이는 "상전에 말하였다. 산 아래에 샘이 나는 것이 몽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과감히 행하며 덕을 기른다"는 거다. 몽은 산 아래에 샘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으니, 군자는 이러한 기운의 양상을 보고 과감하게 행동하고 덕을 길라 나가야 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모두가 의심과 주저함을 버리고 과단성 있게 행해야 하며, 또한 세상을 포용하며 경륜해 나갈 수 있는 덕을 길러야 한다. <대상전>에서는 산(艮, 간상련, ☶)아래에 있는 감괘(坎, 감중련, ☵)를 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샘(泉)"이라는 말을 쓴다. 높은 산 아래 깊은 계곡에서 홀로 솟아나는 맑은 올달샘의 이미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몽'은 이런 올담샘의 청정한 모습의 어린 아이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샘물은 계곡의 시냇물을 거치고 강물로 흘러 결국 넓은 바다로 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여기서 "군자이과행육덕(君子以果行育德)"이라는 말이 나온다. 옹달샘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많은 모험을 해야 한다. 거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과단성 있게 행동해야 하고, 그러한 행동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덕(德)을 길러야 한다. 그 "육덕(育德)"이 교육이다.

다음은 가르침을 전하고 배움을 구하는 교육의 도를 나타내는 <몽괘> 여섯 효의 효사와 소상전을 살펴볼 차례인데, 내일로 넘긴다. 오늘은 <몽괘>를 읽으며, 언젠가 읽었던 한강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내 안의 어린아이에게 말한다. "괜찮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소개된 적 있던 파블로 네루다의 싯귀도 기억난다.  그의 시집<<질문의 책>>에서 발췌한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아직 내 속에 있을까/아니면 사라졌을까?" 말이다.

괜찮아/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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