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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

338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15일)

1
어제는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었다. 프랑스를 이해하려면, 프랑스 혁명 정신(자유, 평등, 박애)을 알아야 한다. 프랑스는 절대군주, 왕을 단두대로 목을 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 프랑스는 그들이 혁명 이후 극심한 혼란의 과정을 거쳐 위계에 의한 어떤 권위도 인정되지 않는, 오로지 시민들 간의 상호 존중에 근간한 관계의 틀을 재정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도 시민들의 일상생활에까지 이러한 관계의 재정립이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이러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 자신이 '위대한 개인', '위대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떤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황금률에 따라 서로 존중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프랑스 혁명 정신인중의 하나인, 자유(自由)를 축자적으로 말하면,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간섭 받거나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한다'는 의미로 알면 된다. 그래서 자유는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뜻의 자주(自主)나 “스스로 세운 규율에 따라 행한다”는 뜻의 자율(自律) 등과 늘 함께한다. 중요한 것은 자율이 “무율(無律)”, 곧 규율 없음을 뜻하지 않는 것처럼, 자주가 “나 자신의 주인이라고 하여 남을 부릴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자유 또한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는 절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음'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혼동한다. 자율이 '스스로 세운 규율을 자발적으로 지킴'인 것처럼, 자주가 타인도 그 자신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전제 아래 자신의 주인됨을 실현 함인 것처럼, 자유도 어디까지나 타인의 자유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의 자유다. 자기에게만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누구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어느 개인이나 한 집단에만 허용된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지만, 1차적으로는 신체적 억압이 제거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내가 스스로에게 이유가 되어 하는 언행은 거침이 없는 거다. 그러나 자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삶에서의 많은 문제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온다. 자기 인식이 우선이다. 자기 인식은 자신을 알려는 마음가짐이고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자신을 항상 응시하려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사제나 목사에게 달려가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고, 어떤 외부 권위에 의존하려 한다. 외부 권위는 명령하고 억압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지일 때가 많다. 우리 사회는 우연히 부여잡은 권위를 가지고 휘두르며 다른 이에게 명령하며 복종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혁은 한 번도 이념, 정책, 교리, 리더의 카리스마를 통해 성취된 적은 없다. 자유를 위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두어,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 대한 관찰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과 관계에서, 그들이 반응하는 자신을 응시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스스로 수정하려는 수고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를 꾸리고 사는 한, "자유는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다. 예컨대 자유는 그 소산(所産, 어떤 행위나 상황 따위에 의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이 냐에 따라 정당 화된다. 매우 중요한 언설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한다. '자유는 그 소산이 무엇이 냐에 따라 정당 화된다.' 자유의 결과가 일탈과 탈법이고, 그것의 소산이 자기만의 또는 자기와 연관된 이들만의 누림 이고 군림이라면 이는 어느 한 자락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등가의 가치를 가진다. 실질적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자유는 잡아 먹힐 자유와 잡아먹을 자유만 있을 뿐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프랑스 혁명에서 주장한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다. 물론 모두가 다 같이 평등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고장 난 저울 같은 사회는 기회부터 불평등하다. 그러면 결과가 절대 평등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평등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오늘 아침에 새롭게 얻은 성찰이다. 불평등 심화의 대안은 다수의 단결로 해결하는 거다. 소수 기득권 독점, 불균형과 불평등 심화로 사람들이 희망을 잃는 것을 바꿔야 한다. 힘은 기득권이 가지고 있지만 우리에겐 숫자가 있다. 다수의 중요성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우리 다수는 분열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다지고 작은 차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2
이런 무거운 생각을 하며 아침 산책을 하다가. 거리에서 치자 꽃을 만났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이 소환되었다. 오늘  <인문 일지>에서 다시 공유한다.  지자 향은 우리에게 잊고 지내던 어떤 기억을 쉽게 불러낸다. "사랑하는 일이야말로/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습니다/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습니다."


치자 꽃 설화/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3
나이가 들어가니 몸이 하나씩 말을 걸어온다. 이곳 저곳이 고쳐달라고 통증으로 호소한다. 그러나 정신은 더 명료 해졌다. 그래서 일상을 하루 하루 더 충만하게 살고 싶다. 그러려면, 다음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선 언제나 자신에게 친절하게 말하라. 세상에서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더 나아가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이도 똑같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친절하게 대한다. 그게 상대를 인간으로 대하는 길이다. 설령 인간 이하 같은 사람을 만나도, 그리고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거다. 그리고 자기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이는 솔직하게 나 뿐이다. 사람은 스스로 믿는 대로 되기 때문이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나이 들었다고 포기하지 말자.

이기심은 자립이나 자기신뢰와는 다르다. 이기심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기심은 타인에 의존한다. 타인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종속된 동물이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신뢰할 수 없다. 반면, 신뢰할 수 있는 자신은 누구의 훼방도 받지 않는 유일한 자신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발견된다. 그 사람은 자신이 캐낸 자기-자신이라는 보화를 소중히 여긴다. 그 보화는 자연스럽게 빛을 발해, 주위 사람들도 자신이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그런 점에서, 자기 신뢰는 자비의 기반이다.

진정한 자신을 찾고 스스로를 신뢰하면, 우리는 답을 알게 된다. 마음이 머리보다 더 힘이 세다. 우리 대부분은 그 고유한 임무에 몰입하기 보다는, 타인이 좋아할 만한 일, 타인이 내게 하는 일을 훔쳐보며 따라한다. 우리는 초중고 심지어는 대학 교육을 통해, 저 마다의 소질을 탐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보다는, 자신이 우연히 접하게 된 일에 매달리며 소일한다. 그런 일엔 신명(神命)이 있을 리가 없다. 타인의 말이나 의견에 중요하며, 그것에 삶의 해답이 담겨져 있다고 세뇌 당해 왔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 다 보고, 내면의 소리를 들으러 하지 않는다. 독창성과 창의성의 시작은 자기 관찰과 자기 존경과 자기 신뢰에 있다.

히브리 성서 <잠언> 3장 3절의 말을 늘 기억하자. "친절과 진실이 너를 떠나지 않게 하라. 친절과 진실을 목에 묶고 너의 심장의 서판에 새겨라". 친절은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라 한다. 역지사지 하는 마음에서 출발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나의 희로애락으로 공감하고 타인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실제로 애쓰는 행동이며, 타인의 정서를 진실로 기뻐하는 마음이다. 가장 대표적인 친절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진실은 히브리어로 에메스(emeth)이다. '에메스'는 '아멘'의 여성 명사형이다. 그리스도 인들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통해 기도를 끝 맺는다. '아멘'은 '믿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은 일회성 행위가 아니라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려는 삶의 태도이다. 진실이란 그런 믿음이다. 진실이란 자기 신뢰이며, 그 가치를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이다.

또한 나는 나를 믿고 나 스스로에게 친절하고 진실된 믿음을 가슴에 새길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구체적인 일상에서 실천할 다음의 내용을 소환한다. "누가 지혜로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누가 강한 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사람이다. 누구 부자인가? 자신의 몫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누가 존경 받을 만 한가? 자신의 동료들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탈무드>>, <선조들의 어록> 제4장 제1절) 가슴에 새긴 이 4가지를 최근에 잊고 살았다. 그래 나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 생각이 흩트려지었다. 다시 정돈하고, 스스로에게 친절하고자 다짐하는 아침이다.

4
나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 관계의 기술이 필요하다. '관계는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보다는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과 이어 나가야 한다'는 게 내 원칙이다.

인간관계에서 스크래치가 안 생기려면 꼭 필요한 것이 존중이다. 존중은 상대를 나와 똑같은 인격체로 인정하고 대접하는 행위이다. 똑같은 인격체로 대접한다는 것은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나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값비싼 그릇처럼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에 흠집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실 고슴도치는 우화에서 와는 달리 가까운 상대에겐 절대 가시를 세우지 않는다. 가족, 친구에게는 가시를 등에 붙이고 있다가 깜짝 놀라거나 위협을 느낄 때에만 가시를 세운다고 한다. 사람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쉽게 화를 내거나 가시 돋친 말을 남발한다. 심지어 상대의 생각을 평가하고 바꾸려 시도한다. 상대의 동의 없이 상대를 바꾸려는 행위는 존중이 아니라 인격 침해일 뿐이다. 사람의 감정은 쉽게 상처를 입는다. 함부로 다루면 주방의 그릇처럼 스크래치가 생겨 못 쓰는 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그러니 귀중품 상자에 스티커를 붙이듯 이런 경고 문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취급 주의! 절대 던지지 마세요.

오바마 여사의 다음 말을 자주 기억한다. 그녀는 “상대에게 화가 난 상황에서도 ‘나는 지금 당신과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지만 여전히 당신을 존중한다’ ‘당신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당신은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멋있는 사람, 신사(紳士 단순히 말쑥한 차림세에 교양미,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춘 사람)의 조건은 자기 통제력, 정직성, 공정성, 원칙 준수, 유연성, 균형성 등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다. 

그리고 자신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일상에서 구현하는 것들은 좀 나열해 본다.
▪ 남과 비교하기를 멈춘다. 모두 다 일장일단이 있다.
▪ 외모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 당신의 인격으로 대항하라. 인성(人性)이 중요하다.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 수록 당신의 인성은 더욱 더 강하게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다.
▪ 타인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 필요한 말 이상으로 하지 않는다.
▪ 무시 당하면 즉시 상대방에 즉각 대응한다.

5
성당 주보(2025년 7월 6일자 <대전주보>, 건양대 이충무 교수)에서 얼룩말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얼룩말 줄무늬를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데, 얼룩말의 바탕 색에 대한 질문을 했던 적은 없었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줄무늬인지, 흰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인지,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그 글에 의하면, 검은색 바탕에 흰색 줄무늬가 맞는 거라는 과학적 입증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피부 색을 중심으로 바탕 색 기준을 판별하는 경향이 있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흑인은 검은색 바탕에 흰색 줄무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백인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에서 얻을 교훈이 하나 있다. 사람은 역시 자기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중심으로 놓고 다른 것들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적 성향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익숙함으로 오해를 만드는 과정이 생각보다 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오해의 결과는 심각하지만, 오해의 형성 과정은 의외로 평화롭다. 어떤 사실을 오해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려 한다면, 일단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경계하는 태도부터 갖추어 야 할 것이라는 교훈을 얼룩말 줄무늬로부터 얻게 된다.

얼룩말 줄무늬로부터 얻는 또 다른 교훈은 극과 극이 조화를 이룰 때의 경이로움이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얼룩말 줄무늬에는 놀라운 신비가 숨어있다. 아프리카의 혹독한 햇살을 이겨내는 얼룩말만의 생존 비법은 흑백의 줄무늬에서 비롯되는 ‘냉각 효과'라는 연구 결과가 얼마 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빛을 반사하는 흰색과 흡수하는 흑색의 온도 차로 두 줄 사이의 공기 흐름에 차이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공기가 빠르게 순환돼 마치 에어컨을 켠 것처럼 피부 온도가 내려간다는 것이다. 극과 극의 색이라 할 수 있는 검은색과 흰색이 상호 조화를 이루게 되면 이렇게 유익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 진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극과 극은 서로 ‘충돌’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자기 색만 고집하는 것이 살 길이라 생각하며 끝도 없이 한쪽을 거부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극과 극은 싸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라고 있는 선물임을 한 마리의 우아한 얼룩말을 통해 깨달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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