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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마스테: 당신의 내면에 있는 신성(神性)에 경배한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는 완주 쪽으로 가다가 대둔산 고개 너머에 자리한 <나마스테>란 카페에 다녀왔다. 영문을 모르고, 초대해 응했을 뿐이다. 나마스테는 인도나 네팔에서 하는 인사말인데, "당신의 내면에 있는 신성(神性)에 경배한다'는 뜻이라 한다. 이 카페의 주인이 네팔을 자주 다니는 산악인이었다. 그리고 마당에는 할리를 타는 동호인들이 가득했다. 그래 오늘 아침 시는 네팔을 생각하면서, 노향림 시인의 것을 택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사진은 네팔 화가가 그렸다는 카페의 그림 앞에서 찍은 것이다. 햇살을 받고 있는 히말라야의 높은 산 정상이 인상적이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회성 성공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성공'이다. 그러려면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스타일은 일하는 스타일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 뒷받침되는 라이프 스타일이 필요하다. 그런 카페 주인을 만났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지만, 첫인상이 그랬다.

내가 아는 어떤 한 분은 식사를 하기 전에 꼭 기도를 올린다. 왜냐하면 그가 정의한 성공은 '자연이 창조한 모든 존재의 신성한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존재에게서 신성(神性)을 본다는 것이다. 어제 그 카페에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와인 컨설턴트와 와인 파는 인문운동가로 내 밥 벌이를 하기 때문에 와인을 접할 기회가 아주 많다. 오늘부터는 나도 와인을 마시기 전에 기도를 할 예정이다. 빛으로 익은 포도가 만들어 낸 와인에게서 빛을 받을 때마다 이 빛이 우리를 평화로 이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도 인간은 모두 작은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인류 모두가 작은 신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날이 곧 세상에 평화가 찾아 드는 날일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모두 똑같으며, 우주라는 더 큰 존재의 일부이다. 언제부터 인가 우리는 자기 내면에 잠들어 있는 힘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래서 자신에게 필요한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힘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여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공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진정한 성공에는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건 자기 내면에 달렸다고 본다.

진정한 자신을 찾고 스스로를 신뢰하면, 우리는 답을 알게 된다. 마음이 머리보다 더 힘이 세다. 우리 대부분은 그 고유한 임무에 몰입하기 보다는, 타인이 좋아할 만한 일, 타인이 내게 하는 일을 훔쳐보며 따라한다. 우리는 초중고 심지어는 대학교육을 통해, 저마다의 소질을 탐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보다는, 자신이 우연히 접하게 된 일에 매달리며 소일한다. 그런 일엔 신명(神命)이 있을 리가 없다. 타인의 말이나 의견에 중요하며, 그것에 삶의 해답이 담겨져 있다고 세뇌 당해 왔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 다 보고, 내면의 소리를 들으러 하지 않는다. 독창성과 창의성의 시작은 자기관찰과 자기 존경과 자기 신뢰에 있다. 어제 그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문화저널 21> 편집위원인 서대인 시인이 오늘 아침 시를 소개하며 덧붙인 글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가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상대적 박탈감이나, 질투, 우울 감, 분노, 적개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오늘 아침 시처럼, 외부에서만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는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내부를 통찰하는 자세로 마음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길가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꽃만큼/자신의 키를 조금만 줄여 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던 콜롬비아의 사내는 끝내 네팔의 사내가 “기네스북”에 올랐을 때, “72세”나 된 네팔 사내가 오래 살기를 기도하기로 마음을 바꾸자, 그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서대인 시인은 ‘거지는 백만장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조금 더 구걸을 잘하는 다른 거지를 부러워한다'는 러셀(Russell)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야기/노향림

세상에서 가장 키가 작다는 사내,
콜롬비아 보고타에 사는 이 난쟁이는
일 미터도 안된 68.58센티의 키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어느 날 자신보다 더 작은 키 54.6센티가
네팔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 산다는
소식에 그는 크게 실망했다. 그러곤 날마다
길가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꽃만큼
자신의 키를 조금만 줄여 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나 네팔의 찬드라 바라두르 단기가
끝내 기네스북에 올랐을 때
그가 72세라는 걸 알았을 때
자기보다 더 오래 살도록 기도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노을 속에 선 채 목소리는 반디불이만 하고
말없음표인 양 키가 줄어졌다 해도 그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갑자기 하늘에서 뇌우가
어떤 목통보다 강하게 쩌렁쩌렁 노래했다.
그의 해맑은 기도 소리가
그렇게 나에게도 감청(監聽)되었다.

이어지는 글은 배철현 선생의 <묵상>과 함께하는 오늘 아침의 사색이다. 화두는 앞에서 말했던 신성(神性), 우리의 육체와 호흡을 지배하는 영혼인 '헤게모니콘'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 II, 2』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존재한다'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신, 짧은 호흡 그리고 주도하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가 인간을 구성하는 세 요소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인간으로서 삶을 유지한다는 의미를 궁리했던 로마의 황제였다. 그는 이미 자신을 1인칭이자 3인칭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자신의 구성 요소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 가지로 정리한다.
• 육체를 지닌 존재
• 짧은 호흡
• 앞의 둘을 지배하는 영혼인 '헤게모니콘(hegeminikon)'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당신이 지금 죽는다고 생각해 보라. 육체는 피, 뼈, 신경들의 연락망, 동맥, 정맥이다. 짧은 호흡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람이다, 고르지 못하고 항상 들락거린다. 이제 세 번째가 남았다. 바로 '주도(主導)하는 마음' 이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인간을 육체(사르키아 혹은 소마), 정신(프쉬케) 그리고 영혼(푸뉴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영혼으로 알려진 푸뉴마의 원래 의미는 호흡으로 생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신적인 기운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단어를 성령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달리 아우렐리우스는 인간구성에서 육체를 그대로 사용하고, 정신과 영혼을 하나로 묶어 '짧은 호흡(프뉴마티콘)'으로 합쳤다. 그런 후, 인간의 육체와 정신-영혼을 지배하는 새로운 마음을 '헤게모니콘'이란 이름으로 설명하였다.

헤게모니콘 이야기를 좀 더 해본다.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는 '명령하고 주도하기에 알맞은'이란 뜻으로 소크라테스의 용어였다. 이 말은 군사용어이기도 했다. 이 말은 군대 사령관처럼,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헤게모니콘은 영혼의 일부로 오감의 지배를 받는 육체를 지배하는 인간만의 특별한 정신이다. 헤게모니콘은 자신의 몸과 정신 활동을 조정하는 중앙제어장치이다. 만일 주도심이 없다면, 인간은 육체를 자극하는 쾌락의 부하가 되고, 쾌락이 점점 커져 정신을 지배하여 이기심의 노예가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입은 말하기 전에 다물어야 하고, 눈은 보기 전에 감아야 한다. 말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눈을 뜬다고 본다면, 들려온다고 듣는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마음 속에 높다란 성벽인 내성(內城)을 건설하여, 성벽 위에서 자신을 항상 지켜보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모니터하는 주인을 그리스어로 헤게모니콘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나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자동적으로 제어하는 사령관이란 말이다. 그는 그것을 무절제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습관을 장악하는 마음으로, '지배적인 이성'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헤게모니콘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마음을 정의한다. 그 마음이 나를 인도하고 검토하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읽은 책들을 뛰어 넘어, 자신의 삶의 원칙을 헤게모니콘, 즉 주도심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토아철학자들은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발견하고 그것에 복종한다. 예를 들어 노예였다가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프로아이레시스'라 불렀다. 번역하자면, '의도적인 선택'이다.

아우렐리우스는 훌륭한 철학자나 그가 남긴 저서를 따라하기 보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 스스로 삶을 주도할 수 있는지 살피라고 충고한다. 그에겐 자신이 흠모하는 '그 자신'이 있다. 나는 어떤 가? 내 삶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고 싶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자발성으로 사는 일이다. 그래야 즐겁고 행복하다. 즐거움이란 내 마음이 공감을 경험한 후에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의 공간 안에서 일으키는 진동이다.

독서를 통해서 지향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즐거움을 거쳐서 자기가 재발견되고, 재발견된 자기가 쓰기로 확장 할 때 더 즐거움은 배가 된다. 그러면서 자기는 더 확장된다. 자기 스스로 운동, 즉 움직임을 화복하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게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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