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오늘 글이에요.

사진 하나, 시 하나
헌 집/김윤배
바람이 혼자 산다
바람처럼 드나드는 그녀는 발소리도 말소리도 없다
바람을 먹고 사는 바람꽃이 찾아오는 날은
그녀를 떠나 있던 물 긷는 소리도 오고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온다
헌 집은 소리들, 미세한 소리들로 차고 기운다
후박나무 그림자가 더욱 길어지고
그녀는 후박나무 아래서
바람을 더듬는다 바람의 여린 뼈가 만져진다
그녀는 주름투성이의 입술을 문다
후박나무 잎새들이 검게 변한다
헌 집이 조금씩 산기슭으로 옮겨간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7)
"헌 집은 늙은 개 한 마리와 바람과 후박나무 그림자와 함께 산다. 헌 집에는 없는 게 많다. 눈이 침침하니 보이는 게 적고, 귀가 어두우니 화날 일이 없다. 이가 빠졌으니 먹을 게 적고, 발음이 부정확하니 말이 없다. 얼굴이 주저앉으니 만날 사람이 적고, 다리가 풀렸으니 나갈 일이 없다. 그러니 문 여닫는 소리, 발소리, 말소리 따위도 없다. 집 나간 식솔인 듯 '바람꽃'이 찾아오는 날이면 그제야 물 긷는 소리,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사부작거릴 뿐. 헌 집은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소멸에의 기다림이다. 지난 한 해 386명의 노인이 고독사했다. 독거노인 수가 125만명을 넘었다. 헌 집이 조금씩 산기슭으로 옮겨간다. 양지바른 산기슭에는 새집이 기다리고 있다." (정끝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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