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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상황은 통제할 수 없어도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327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19일)

1
우리는 모두 조각난 관점만 가지고 산다. 내가 전부 옳을 수 없고, 누군가 완전히 틀릴 수 없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 운동가는 사건에 대해 나의 반응을 대응으로 바꾸는 관점 디자이너이다. 생각을 바꿔 주고, 생각을 디자인해준다. 디자인은 개념과 실행 혹은 실천의 틈에서 자란다. 난 틈, 영어로 갭(gap)을 좋아한다. 거기서 소통이 시작되며, 그 틈을 채우려는 노력이 멋진 삶일 게다. 의지와 행동 사이에 ‘생각의 틈’이 있고, 개념과 제작 사이에 ‘디자인의 틈’이 있고, 꿈과 현실 사이에  ‘플랜의 틈 ’이 있다.  하늘에선 뚝 떨어진 현실이란 없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자에겐 ‘우연’이란 위안이 존재할 뿐이다. 틈은 헐거움이고, 낡음의 편안함, 헌 것의 소중함, 헐거워 짐의 평화가 된다. 

상황은 통제할 수 없어도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즉 대응할 수 있는 거다. 반응과 대응은 다르다. 반응은 본능적인 운동을 뜻하고, 대응은 의식적인 행동을 뜻한다. 반응은 주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상대방이나 상황에 내맡기는 수동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반면, 대응은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잘 대응하려면 관점 바꾸기 훈련이 필요하다.

2
언젠가 백영옥 소설가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아이스크림이 있다. 그 위에 토핑으로 딸기나 키위 같은 과일을 첨가하면 그 순간 아이스크림이 이전보다 건강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과일을 먹다가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리면 어쩐지 건강하지 않은 선택처럼 느껴진다. 단지 선택과 실행의 순서가 바뀌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산속 홀로 서 있는 웅장한 소나무를 볼 때, 화가와 목수의 시선이 다르다고 한다. 그림의 소재인 멋진 노송을 무참히 베는 목수가 화가의 눈에는 ‘악’이지만, 목수에겐 튼튼한 집의 기둥이 되는 것이 ‘선’이니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 말할 수 없다. 살다 보면 관점의 차이로 가까웠던 사이가 소원해지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정치, 경제, 젠더, 세대 그리고 ·환경 등 다양한 이유로 관점이 달라 심지어 서로를 증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익명성 뒤에 숨는 온라인과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SNS와 유튜브에서는 동종 교배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동종 교배가 위험한 건 필연적으로 열성 인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열성 인자가 지속되면 결국 그 종은 멸종에 이른다. 그래 SNS와 유튜브가 위험하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까지 장착되어 알고리즘이 폭력을 휘두른다.

우리는 이제 스마트폰과 SNS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정확히 말해, 알고리즘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짜 뉴스는 진짜 뉴스보다 6배 빨리 이동한다는 연구도 있다. 거짓이 진실보다 빠르게 퍼지는 것은 인류가 ‘혐오, 전쟁, 살인, 성범죄’ 같은 단어에 더 빨리 반응하기 때문이라 한다. 주식 폭등보다는 폭락이, 스타의 결혼보다 이혼 기사에 먼저 반응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선플 속에 단 하나 악플만 있어도 그것은 우리를 무너뜨린다. 불행히 인류에겐 선천적 ‘부정 편향’이 있다. 위대한 석학들은 이런 편향을 바로잡으려 수많은 시도를 했다. 다만 이 시도는 번번이 우리의 편향성을 증폭하는 다양한 알고리즘에 지고 있다. 그래 알고리즘이 폭력이라고 했다. 생존을 위해 위험을 알아차리고 피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 답고 행복하게 하는 건 폭력과 혐오가 아닌, 긍정과 공감임을 깨달어야 한다. 잡초는 제거하지 않으면 무성하게 자라 우리를 살리는 곡물을 결국 초토 화한다. 잡초는 물을 주지 않아도 쑥쑥 자란다. 폭력과 혐오 역시 그렇다. 공감이 힘든 건, 물을 주고 거름을 줘야 자라나기 때문이다. 

3
다름을 인정하지 않은 대가는 크다. 무엇보다 관점이 다르다는 게 곧 틀림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태평양도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동해이지만, 미국인의 관점에선 서해이다. 같은 바다를 두고도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부르지만, 바다의 본질은 결국 바다인 것이다. 이해를 뜻하는 영어의 Understand는 Under와 Stand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낮은 위치에 서 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신이 늘 우월하다는 자만심으로는 서로 갈등만 증폭되고 오해만 축적될 뿐이다. 머릿속의 오해가 가슴속의 이해로 가는 길은 이처럼 멀다. 우리는 화가인가, 목수인가. 삶의 현자는 아름다운 그림과 튼튼한 집 모두를 보는 사람일 것이다. 한 시간을 오도 가도 못한 채 카페에 갇혀 비를 보는 일은 분명 효율적 관점에서 낭비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떠도는 생각을 붙잡아 원고 쓸 아이디어를 얻었으니 내겐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똥은 방에 있으면 오물이지만, 밭에 있으면 훌륭한 거름이다. 인식의 틀부터 만들어 나를 가둬 두지 말고,  관점 바꾸기 연습을 해야 한다. 백영옥 소설가에게 잘 배웠다.

그래 나는 늘 경계에 서려고 한다. 경계에서 대립면의 긴장을 품고 사는 사람, '도(道)'를 아는 사람은 과감하지 않다. 예컨대, 광신(狂信)은 협소한 믿음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경계에서 떠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그 세계를 전부로 착각하고, 우리는 그 프레임에 갇혀 굳어버린다. 이 세계를 참과 거짓, 선과 악으로만 본다. 자신의 관점에서 맞는 것만 참이고 선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고 악이다. 이 관점이 바로 이념이고 신념이고 가치관이다. 반면, '도'를 아는 사람은 두 대립면의 경계에 선다.

보통 경계에 서 있으면 불안하다. 반면, 어떤 한 진영에 있으면 우리는 편안하다. 그 불안이 우리를 고도로 예민하게 유지해 주고, 그 예민성이 경계가 연속되는 흐름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감지 능력을 우리는 '통찰(insight)'이라고 부른다. 통찰력이란 "탁! 하면 아는 것"인데, 세계의 흐름을 단순히 이성적인 계산 능력으로만이 아니라, 감성이나 경험, 욕망이나 희망 등의 모든 인격적 동인들을 일순간에 발동시키는 능력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오는 고도의 불안을 감당하며 키워 낸 예민함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세계는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는 노자의 '도(道)', 즉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세계관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과감하지 않고, 진중하다. 그래서 진짜 진실이라는 확신은 그 확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과 함께 작동할 때 폭발적인 힘이 나온다.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세상 일을 선악(좋고 나쁨)으로 구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다. 중국의 한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도망갔다. 이에 이웃들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몇 달 후 도망친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다, 이때 이웃들은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낙마해 다리가 부러졌으나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는 내용이다. 새옹지마를 직역하면, '노인의 말'이다. 그 말(馬)때문에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눈 앞에 벌어지는 결과만을 가지고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이해득실만 따지며 보낼 수도 있다. 우리가 모든 게 엉망이라고 믿는 한 모든 건 계속해서 엉망일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는 순간 모든 게 변한다. "당나귀와 우물"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다. 농부가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다. 마침 당나귀는 늙었고 쓸모 없는 우물도 묻어 버리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우물을 파묻기 위해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 흙은 파 우물을 메워갔다. 당나귀는 더욱 더 울부짖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 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하여 우물 속으로 들여 다 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렇게 해서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하여 무사히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매장하기 위해 던진 비방과 모함과 굴욕의 흙이 오히려 자신을 살렸다. 남이 진흙을 던질 때 그것을 털어버리고 자신이 더 성장하고 높아 질 수 있는 영혼의 발판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어느 날 곤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을 맞이한다. 뒤집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에는 반대가 되는 거울 뒤쪽 같은 세상이 있다. 불행이 행이 되고, 행이 불행이 되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변화가 있다. 우물 속 같이 절망의 극한 속에서도 불행을 이용하여 행운으로 바꾸는 놀라운 역전의 기회가 있다. 우물에 빠진 당나귀처럼, 남들이 나를 해칠지라도 두려워 말 일이다.

4
오늘 공유하는 에릭 핸슨’의 시 <아닌 것>에는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말이 아프게 박힌 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지만 책을 쓰는 사람은 많아진 역설의 한가운데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대해 말할 때 종종 그것을 ‘마음의 근육'으로 비유하는데,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근육이 빠지는 것처럼 상상력도 빈곤해 진다. 불편하더라도 일단 길들여지면 익숙함이라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게 인간의 편향성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근육을 키우는 방법은 그러므로 계속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이다. 책을 사주고, 전시회와 음악회에 데려가고, 낯선 나라에서 색다른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다. 여행할 때 굳이 최단거리가 아닌 안 가본 길로 가보는 거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닌 여행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낯선 길, 헤맨 길, 되돌아간 길들은 상상력의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 길들은 가성비 관점에서는 ‘무용’의 세계지만, 상상력 관점에서는 ‘유용’한 것이다. 만약 우리 자신을 자신의 이름이나 나이, 몸무게, 키, 피부 색깔이 아니라 우리가 키우는 식물이나 방에 걸린 그림, 지금까지 읽은 책, 사람들을 위해 흘린 눈물로 정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내가 믿는 것들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가 꿈꾸는 것들의 총합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 속의 "아닌 것"으로 우리를 정의하지 말자는 시인의 상상력은 힘이 세다. 상상력은 공중에 떠다니는 허황된 생각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벼락처럼 깨닫게 하는 우주의 목소리다.


아닌 것/에릭 핸슨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와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의 웃음 속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당신이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당신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
당신이 여행한 장소들

당신이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5
세상과 맞서 싸우면 세상이 항상 이긴다. "세상이란 우연이 없어. 지금 내가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에 있는 거야"라 말하자마자 세상 일이 술술 풀려나가게 된다. 언젠가 내 노트에 적어두었던 글이다.

마음에 두지 말자
흐르는 것은 흘러가게 놓아두라
바람도 담아두면 나를 흔들 때가 있고
햇살도 담아두면 마음을 새카맣게 태울 때가 있지
아무리 영롱한 이슬도 마음에 담으면  눈물이 되고
아무리 예쁜 사람도 지나고 나면 상처가 되니
그냥 흘러가게 놓아 두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세상은 엉망 진창'이라고 보는 거다. 이런 생각은 자기 자신도 불행하게 만든다.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판단하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상황이 나아지도록 무언가를 하는 건 다른 종류의 문제이다. 어쨌든 고민만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 나아가 행동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살 만 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만물은 순리대로 흘러간다.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라기 전에, 자신이 속한 세상의 조그마한 부분부터 평화롭게 만들어 나가는 거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늘 걱정 거리를 찾는다. 걱정에도 계급이 있어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걱정한다. 예컨대, 집에 불이 나는 문제에 비하면 코 고는 남편은 괴로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조정해야 한다. 관점을 바꾸는 거다. 어떻게? 우리 머릿속에 있는 규칙이 스트레스를 만든다. 그러므로 규칙을 느슨하게 만들거나 다 버린다면 더 이상 세상이 우리의 규칙을 무시한다고 짜증 부릴 일이 없을 것이다. 화를 내지 않고 즐겁게 사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삶이 이래야 한다고, 또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법칙을 정하지 않는다면 더 즐겁게 살 수 있다. 걱정과 생각은 다르다. 생각은 인과관계를 따져 내일을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흔들의자 같아서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왜 생각을 조절하는 방법, 관점 바꾸기를 배워야 할까? 그 이유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환경, 날씨,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조정할 수 없다. 우리가 완전하게 조절할 수 있는 데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외부 상황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생각을 바꾸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 또한 생각이 바뀌면 감정 역시 달라진다.

생각을 바꾸어 마음의 평화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는 균형이고 평정심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마음을 편히 먹고 일상적인 습관을 형성하려는 태도에 달려 있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들은 무언가 다르다. 그들 각자는 매일 평정을 유지하는 훈련을 한다. 그건 안식처와 고요함을 찾아, 내면에 집중하는 거다. 그리고 무언가를 시작하기전에 세상에 맞서는 일부터 멈춰야 한다. 세상은 늘 무언가를 하라고 강요하고, 사람들을 밀어붙이며, 투쟁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버려 두어야 저절로 풀리는 일들도 있다. 다만 현재에 집중하는 거다.

현재를 사는 일은 줄타기와 같다. 줄에서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만, 연습하다 보면 더 오랜 시간 줄 위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현재에 전념하는 전략이, 서두르면서 살지 않는 거다. 그리고 모든 일에 필요한 만큼 시간을 들이는 거다. 필요한 일을 하는 동안 온 정신을 거기에 집중한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말이다. "필요한 만큼 시간이 걸리겠지. 서두르지 않겠어." 현재라는 줄 위에 오래 견딜수록 삶은 더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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